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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보를 모두 누린 후의 돈오(頓悟) – 장대의 《도암몽억서》 해독

청풍(淸風)

【정견망】

장대(張岱, 1597년~1689년)는 자가 종자(宗子), 호는 도암(陶庵), 도암노인(陶庵老人) 등이며, 만년(晩年)에는 육휴거사(六休居士)라 불렸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사람으로, 명청(明清) 교체기의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다.

그는 원래 부귀한 집안의 자제였지만, 명조(明朝)가 멸망한 후 하루아침에 집안이 망하고 가족을 잃어 거의 굶주림에 허덕였다. 여러 차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결국 견뎌내고 많은 글을 썼다. 이 글들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는데, 이 문집은 명나라 말기 사회의 온갖 모습을 그린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산수 유람, 아름다운 정원 풍경, 희곡과 기예, 차를 마시고 눈을 감상하는 등 세속 생활을 담고 있으며, 절반이 넘는 글이 민속 축제, 수공업자 등 도시 서민 생활을 소재로 한다. 담백한 필치로 명조 말기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암몽억서(陶庵夢憶序)》는 바로 이 문집의 서문이다.

명청 시기 사회적으로 수련 분위기가 농후했고, 장대 역시 근기가 아주 좋았다. 이 글은 그가 누릴 복을 다 누린 후 얻은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인생의 무상함, 인생이 꿈과 같음, 그리고 명예와 이익이란 사람이 반본귀진(返本歸真)을 막는 속박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대가 누린 복분(福分)은 상당했다. 덕분에 그는 젊은 시절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고, 다른 비슷한 사람들과 달리 문학, 금석학, 서화 등 예술 분야에서 매우 높은 조예를 가졌는데, 사실 이 역시 덕(德)이 발현되는 한 가지 형식이었다. 하지만 속인의 복분은 언젠가 끝이 있는 법이라, 후에 가난하고 곤궁해졌다. 다행히 장대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이로 인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역사상 그처럼 부귀에서 추락한 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것은 사실 신(神)의 자비이자 의도적인 배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덕이 전부 속인의 복보로 바뀌는 것을 막고, 일부를 남겨 그가 수련하게 하여 마침내 깨닫게 한 것이다. 그럼 한 단락씩 살펴본다.

“도암(陶庵)은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파산해 돌아갈 곳이 없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에 들어가 거친 야인(野人)이 되었다. 예전 친구들이 나를 보면 마치 독약이나 맹수처럼 여겨 놀라 숨이 막혀 감히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자만시(自挽詩)》를 지으면서 매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석궤서(石匱書)》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인간 세상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쌀독은 자주 바닥나 불을 지펴 밥을 할 수 없었다. 비로소 수양산의 두 노인(백이, 숙제)이 곧장 굶어 죽으면서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후세 사람이 과장하고 꾸민 말임을 알았다.”

장대는 부귀한 신분에서 추락했다. 만약 다른 사람 같았다면 아마 우울해하고 기력을 잃어 심지어 죽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대는 곤궁했지만, 자신의 사명(使命)을 깨닫고 신(神)이 자신에게 배치하신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는 사마천(司馬遷), 문천상(文天祥) 등이 여러 번 자살하려 했지만 결국 견뎌낸 것과 매우 비슷하다. 물론 구체적인 상황과 이유는 다르다.

“굶주림 속에서도 붓을 들어 글 쓰는 것을 좋아하노라. 지난날 왕(王)씨나 사(謝)씨 같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꽤 호화롭게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니, 오늘날 이러한 과보(果報)를 받는구나.

삿갓으로 머리를 가리는 것은 예전의 비단 모자에 대한 보응이요, 삼태기로 발꿈치를 감는 것은 예전의 호사스러운 신발에 대한 보응이로다. 누더기 옷은 예전의 귀한 갖옷에 대한 보응이요, 모시 옷은 예전의 얇은 비단 옷에 대한 보응이로다. 콩잎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예전의 고기반찬에 대한 보응이요, 거친 쌀밥은 예전의 맛있는 밥에 대한 보응이로다. 거친 깔개는 예전의 비단 이부자리에 대한 보응이요, 돌멩이 베개는 예전의 부드러운 베개에 대한 보응이로다. 새끼줄로 문을 대신하는 것은 예전의 튼튼한 대문에 대한 보응이요, 깨진 항아리로 창문을 대신하는 것은 예전의 시원하고 밝은 창문에 대한 보응이로다. 매캐한 연기는 예전의 눈을 즐겁게 하던 향기로운 경치에 대한 보응이요, 구린내는 예전의 향긋한 냄새에 대한 보응이로다. 맨발로 길을 걷는 것은 예전의 가마 탄 것에 대한 보응이요, 자루를 어깨에 메는 것은 예전의 시종을 거느리던 것에 대한 보응이로다. 이렇듯 갖가지 죄목이 지금 겪는 온갖 과보 속에서 드러나는구나.”

이 단락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다. 그는 복을 누리는 것과 고난을 겪는 것이 대응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것들을 쓸 때 마음가짐이 매우 편안했음을 알 수 있으며, 조금의 분노나 불평도 없다. 이는 그가 얻음과 잃음에 대해 아주 평온하게 대처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수련하는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으며, 예전에 관직에 있었던 도연명(陶淵明)이 은거한 후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니, 유유히 남산이 보인다”를 썼을 때의 마음가짐과 일맥상통한다.

“닭이 베개 위에서 울 무렵, 밤기운이 바야흐로 돌아오네. 내 평생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번화하고 화려했던 모든 것이 눈앞을 스치듯 덧없이 사라져, 오십 년 세월이 모두 한바탕 꿈이 되었구나. 지금이야말로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의 순간이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 ‘남가일몽(南柯一夢)’의 때이니, 이를 어찌 감내하며 살아야 할까? 멀리 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대로 즉시 기록하여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나하나 참회하노라. 연대순으로 하지 않았으니, 이는 보통의 연대기가 아니요. 항목별로 나누지 않았으니, 이는 보통의 유서(類書)가 아니로다. 이따금 한 대목을 집어 읽으면, 마치 옛길을 거니는 듯하고, 옛 친구를 만나는 듯하여, 변해버린 성곽과 사람들 속에서 도리어 스스로 기뻐하게 되네. 진실로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딱 맞도다.

옛날 서릉(西陵) 땅에 술을 짊어지고 가던 짐꾼이 있었는데, 발을 헛디뎌 술독을 깨뜨렸네. 갚을 길이 없어 망연자실 앉아서 생각하기를, ‘이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지. 또 어떤 가난한 선비는 향시(鄕試)에 합격하고서 한창 녹명연(鹿鳴宴)에 참석하려 할 때, 황홀하여 아직 실감이 나지 않자 스스로 팔뚝을 꼬집으며 말하기를, ‘혹시 꿈이 아닌가?’ 하였네. 모두 한바탕 꿈일 뿐인데, 오직 그 꿈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또 오직 그 꿈일까 두려워하니, 어리석은 사람임에는 매한가지로다.”

그는 속인 중의 모든 부귀나 영화는 오래가지 않으며, 사람의 이 일생(一生)이란 마치 꿈과 같아 진정한 자신이 작용하는 시간은 매우 적고, 모두 후천적인 관념과 집착에 제어되어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수련하여 진정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것만이 사람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이다. 수련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이것은 기본적으로 돈오(頓悟)에 속하며, 단번에 깨달은 것이다.

“이제 나는 이 긴 인생의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거늘, 여전히 부질없는 글쓰기(조충, 雕蟲)에 힘쓰고 있으니, 이 또한 또 한 번의 헛된 잠꼬대(몽예, 夢囈)로구나. 생각건대 총명한 재주를 가진 문인들은 명예를 구하는 마음(명심, 名心)을 떨쳐내기가 이리도 어려운가 보다. 마치 ‘한단지몽(邯鄲之夢)’에서 꿈을 깨고 새벽 종소리를 들은 노생(盧生)이, 모든 부귀영화가 허망함을 알면서도 오히려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두 대가의 글씨체를 본떠 자신의 상소문을 후세에 전하려 했던 것과 같으니 말이다. 이는 대저 그들의 명예를 향한 근본(명근, 名根)이 불가의 사리(舍利)처럼 굳건하여, 세상을 모두 태워버리는 맹렬한 겁화(劫火)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구나.”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고, 써야 할 글이 있음을 알았으며,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곤궁하고 처지가 어려워 이익도 없고 정(情)도 없어지자, 정말로 이익과 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는 아직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이 하나의 큰 집착이며, 한순간에 완전히 내려놓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수련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점을 깨닫고 매우 편안하게 적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매우 소중한 것이며, 이는 그의 수련이 사실 이미 상당히 괜찮았음을 설명한다.

장대는 아흔 살이 넘게 살았으며, 쉰 살에 몰락한 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사십여 년 동안 시종일관 낙관적이고 마음이 넓었다. 그의 법호인 육휴거사(六休居士)를 통해 그가 불문(佛門)에서 수련하여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문파를 수련했는지, 스승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고, 사실 또 중요하지도 않다.

장대는 대근기(大根器)의 인물이다. 바로 그러했기에 그가 쓴 글이 풍부하고 빼어나며, 자못 영험한 기운과 생명력이 있어,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