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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소 전기】 육랑의 칼 자국

앙악

【정견망】

양육랑. (천외객/정견망)

양연소(楊延昭)는 《송사(宋史)》에 기록된 북송의 항요(抗遼) 명장으로, 20여 년간 변방을 수비해 요나라 사람(거란인)들이 매우 두려워했다. 요나라 사람들은 그를 육랑 성수(六郎星宿, 장수의 별)가 그들의 극성(剋星)이라고 여겼고, 양연소의 지혜와 용맹이 마치 육랑성이 하계에 내려온 것 같다고 하여 그를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다. 양연소와 천파부(天波府) 양가장(楊家將)이 나라를 지키고 일가 전체가 충의를 지킨 이야기는 원나라 때부터 희곡, 소설, 평서 등 다양한 버전으로 널리 유포되어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양연소 전기】 시리즈에서 필자는 향촌 민간에 구전되는 일화만을 발췌하여 정리하고 요약하여, 독자들과 양육랑의 천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영웅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양연소가 삼관(三關)에 위엄을 떨친 이야기는 현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삼관이란 주로 현재 하북(河北)성에서 산서(山西)성 일대에 위치한 고양관(高陽關), 와교관(瓦橋關), 익진관(益津關)을 말한다. 그러나 이 지역들 외에도 전설에 따르면, 그가 요나라 군대와 싸운 곳이 한때 유연(幽燕) 지역까지 멀리 뻗어 있었으며, 그와 양가장의 장수와 병사들이 그곳에도 많은 감동적인 전설을 남겼다. 그중 녹피관(鹿皮關) 장성 근처의 산 절벽에 깊은 칼자국 하나가 남겨져 있는데,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양육랑의 칼 자국(刀印)에 대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북송과 남송을 넘나들며 《수호전(水滸傳)》의 양지(楊志)와 악가군(岳家軍)의 맹장 양재흥(楊再興)에게까지 이어진다….

육랑의 칼 자국

요나라가 중원을 여러 차례 침범했을 때, 요나라 대장 한창(韓昌)은 양연소와 여러 번 대결했지만 모두 패배하여, 요나라 군대는 양연소의 위명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장성은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어 양연소가 모두 돌볼 수 없었고, 때로는 계략을 사용하여 요나라 군대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해야 했다.

한번은 한창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침범하면서 험한 요새 하나를 골라 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했다. 양연소가 이 정보를 듣고, 먼저 녹피관(鹿皮關)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으며, 이곳에는 소수의 병사만 남겨두었다.

그는 주둔 병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한창의 대군이 오는 것을 보거든, 최대한 숨어 있도록 해라. 염려 마라, 그는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군사들은 원수의 말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후 양연소는 허리에 찬 보도(寶刀)를 뽑아 힘껏 내리쳤고, 관문 옆 산 절벽에 깊은 칼자국을 남기고 칼을 절벽에 꽂아둔 채 떠났다.

이어서 양연소는 군대를 이끌고 백마관(白馬關)으로 갔고, 자신의 전마(戰馬)를 이곳에 풀어 놓았다. 그 후 주력 부대를 이끌고 고북구(古北口)에 매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창이 정말 군대를 이끌고 녹피관에 도착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관문을 보고는 “아! 이 칼은 바로 양육랑의 칼이 아닌가!” 하고 외쳤다. 그는 양연소가 여기에 매복해 있을까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백마관으로 향했다.

결국 백마관에 도착해서는, 또 양연소가 평소 작전 시 타던 백마의 모습이 보이자, 양연소가 반드시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고북구로 향했다.


양육랑. (천외객/정견망)

요나라 군대가 고북구에 도착했을 때, 성벽에 양가 장수들의 깃발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창은 생각했다. 이 길을 따라오면서 보도(寶刀), 말, 깃발을 발견하니 정말 헷갈리는구나! 양육랑은 필경 평범한 인간인데, 어떻게 여러 곳에 분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양연소가 한 관문만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니, 분명 이곳에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에 한창은 전원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대군이 성문 앞에 막 돌격했을 때, 양연소가 군사들을 이끌고 옆의 샛길에서 쳐들어왔고, 요나라 군대는 성 안팎의 송나라 군대에 협공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이 싸움은 하늘과 땅이 뒤집힐 듯 치열했고, 전장은 흙먼지로 뒤덮였으며,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창과 요나라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잔병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후, 양연소는 다시 녹피관으로 돌아가 자신의 칼을 회수했다. 군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원수의 신묘한 계책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천 년이 지난 후, 녹피관은 전란을 겪으며 성벽과 요새가 많이 파손되었지만, 현지인들에 따르면 양연소가 그 당시에 남긴 칼 자국은 여전히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보도(寶刀)의 신기한 내력

민간에 전해지는 양가 후손들의 기억에 따르면, 양연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보도는 양종보(楊宗保), 목계영(穆桂英), 양문광(楊文廣)의 손을 거쳐 북송 말년에 이르러 후손인 양지(楊志)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때 양가(楊家) 후손들은 대부분 태항산에 은거하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지는 어려서부터 선조들이 나라에 충성한 일화를 귀로 들었고, 가문의 무예를 익혀 군대에 투신해 큰일을 이루고 싶었다.

‘청면수(青面獸)’ 양지 삽화,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國芳) 그림. (공유 영역)

양지는 역사상 실존 인물이며, 그의 이야기는 소설 《수호전(水滸傳)》에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호전》에 얼마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시간과 후대의 검증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책에 나오는 양지가 칼을 파는 대목이다.

양지는 화석강(花石綱) 운반에 실패해 직위가 박탈된 후 가진 돈이 없어 막다른 길에 몰렸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손에 남은 유일한 보물인 보도를 팔기로 했다. 그는 보도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거리에서 은 삼천 냥을 불렀다. 당시 7품 현령(縣令)의 월급이 약 50냥이었으니, 보도의 가격은 지방관 5년 연봉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건달인 우이(牛二)와 시비가 붙었고, 싸움 도중 양지는 실수로 우이를 살해한다.

살인 사건을 저지른 후, 양지는 자진해 관아에 자수했다. 살해당한 우이가 그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었기 때문에 형량이 감경되어 북경(北京)으로 충군(充軍, 군역에 복무)되는 처벌을 받았고, 그의 칼은 몰수되었다.

결과적으로 각종 우여곡절 끝에 양지는 어쩔 수 없이 도적떼에 합류하여, 결국 양산ᄇᆞᆨ에서 송강(宋江) 등과 함께 조정의 초안(招安, 귀순)을 받아들였다. 조정에 투신한 후, 양지는 송강을 따라 남쪽과 북쪽으로 정벌에 나서 요나라 정벌에서 공을 세웠고, 왕경(王慶), 전호(田虎) 등의 도적떼를 잇달아 평정했다. 전장(戰場)에서 영웅적인 활약 덕분에 관에서는 그의 보도를 돌려주었다. 원래는 군대를 따라 남정(南征)에 나서 방랍(方臘)을 토벌해야 했지만, 양지는 이때 중병에 걸려 임종 직전 조카인 양재흥(楊再興)에게 보도를 넘기고 병사했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들어서는 혼란 시기에, 곳곳에서 전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을 때, 보도를 지닌 양재흥 역시 한때 길을 잃고 도적떼인 조성(曹成)의 휘하에 투신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악비(岳飛)의 감화를 받아 악가군(岳家軍)에 투신해 맹장이 되었다. 양재흥은 보도와 가전(家傳) 무예를 바탕으로 악비를 따라 도처로 정벌에 나서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고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금나라에 군대에 맞선 악가군의 놀라운 기개 (왕쌍관 제공)

소흥 10년(서기 1140년) 악비는 10만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4차 북벌을 감행했다. 언성(郾城) 대첩 후, 양재흥은 300명의 경기병을 이끌고 언성 북쪽 소상교(小商橋)에서 금나라 주력군 10여 만 명과 맞닥뜨렸다. 이 전투에서 양재흥은 보도를 휘두르며 군웅과 맞서 싸워 적군 2천여 명을 살해한 후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그리고 양연소가 한때 몸에 지녔던 이 칼 역시 양재흥의 전사와 함께 행방이 묘연해졌다.

양가 보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양재흥은 비록 죽었지만 자신을 알아준 악비의 은혜에 보답했으며, 숙부인 양지(楊志)가 전쟁터에서 나라에 보답하려 했던 염원을 풀었고, 조상인 양연소와 양가장 장수들의 충의(忠義)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참고 사료:
《수호전》 명나라 시내암(施耐庵) 원작, 뮤톈화(繆天華) (교주) 삼민서국 2020년 11월 출판
《양가장(목계영) 전설》 가오쉐쑹(高雪松) 정리 북경 미술 촬영 출판사 2015년 출판
《양가장 외전》 허베이 소년 아동 출판사 1986년 출판 자오윈옌(趙雲雁) 수집 정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22/11/23/n1387146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