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운(李翼雲)
【정견망】
주유 (천외객 / 에포크타임스 합성)
생명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필연’이 있는 듯하다.
손견은 오랫동안 중원에서 전쟁을 치렀고, 나중에는 원술의 지시로 강회(江淮) 일대를 분주히 다녔다. 이에 손견의 14세 장남 손책(孫策)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강남 부춘(富春)에서 강북 수춘(壽春)으로 이사했는데, 지리적으로 아버지와 연락하기 더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서성(舒城)의 소년 명사 주유(周瑜)는 이웃 수춘에 소년 영웅이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1]. 어머니께 지극히 효도하고 현지 호걸들에게 추대받는다는 말을 듣고 주유는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명문가 귀공자
주유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노강(盧江) 서성의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 두 형제 및 증조부가 모두 한나라 삼공(三公) 지위에 올랐으며 가풍이 충정(忠貞)하고 정직하며 박학(博學)하고 전아(典雅)했다. 또한 대대로 나라를 위해 인재를 추천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주씨 가문은 대대로 유명 인사와 지위가 높은 권세가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주씨 가문이 쇠락한 것은 동탁의 난 때였다. 당시 수도인 낙양이 대란에 휩싸이자 주유의 사촌 형 주휘(周暉)가 대사농(大司農)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 주충(周忠)을 고향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동탁의 반감을 사서 군사를 보내 주휘를 살해했다. 주충은 슬픔 속에서도 분노를 억누르며 헌제를 호위해 장안까지 갔고, 수년 후 헌제를 따라 낙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주씨 가문은 여전히 강회(江淮) 일대에서 세력이 막강했다. 늘 많은 빈객과 교유했으며 출입할 때 따르는 마차가 백 대에 이를 정도였다.

오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우물가로 와서 시녀를 보내 손책에게 어머니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다고 전했다. 손책은 놀라 달려와 어머니를 위로했다. (즈칭 / 에포크타임스)
청나라 판 《삼국연의》 속 주유 화상. (공유 영역)
주유의 등장은 화려하고 눈부셨다. ‘유(瑜)’는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인데, 소년 주유는 그 이름처럼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풍채가 당당해 사람들은 그를 ‘미주랑(美周郞 멋진 주씨 가문 아들이란 뜻)’이라 불렀다. 또한 주유의 성품은 도량이 넓고 문무를 겸비했다. 시서(詩書)를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음률(音律)에 정통해 재능이 넘치는 인중룡봉(人中龍鳳)의 기상이 있었다.
특히 주유의 음악 감상 능력은 대단히 높았는데, 사서에 특별히 흥미로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주유가 연회에 참석해 술이 세 차례 돌았을 때, 즉 동석한 빈객들과 술잔을 세 번씩 주고받아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음에도 연주자가 음(音)을 틀리면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민간에는 “곡을 틀리게 연주하니 주랑이 돌아보네(曲有誤, 周郞顧)”라는 노래가 퍼졌다.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라도 주랑이 한번 보기만 하면 연주자가 어디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생사를 함께한 죽마고우
그해 소년 주유는 수춘으로 손책을 방문했다. 두 소년 영웅은 첫 만남에 구면인 듯 의기투합했다. 알고 보니 주유와 손책은 동갑이었는데, 주유의 생일이 손책보다 겨우 한 달 늦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마음이 통해 기묘한 인연을 맺었다.
얼마 후 전란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자 주유는 손책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서성으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주유는 흔쾌히 자신의 큰 저택을 내주어 손책과 그 가족이 살게 했다. 주유는 손가 저택의 거실에서 정식으로 손태부인을 양어머니로 모셨고, 손책과 형제의 의를 맺어 화복을 함께하기로 맹세하니 이는 금석도 끊을 만큼 단단한 생사지교(生死之交)였다[2].
손책 또한 주유 덕분에 현지의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강회 지역 사람들이 명성을 듣고 모여들어 큰 인망을 얻었다.
초평 2년(서기 191년), 손견은 명을 받들어 남방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러 갔으나 산림 오솔길을 가볍게 지나다 유표의 대장 황조(黃祖)가 매복시킨 군사들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손책은 17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웅지를 품고 강을 건너다
부친을 상실한 고통은 소년 손책을 하룻밤 사이에 성장시켰다. 손책은 지우인 주유와 슬프게 작별하고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 남쪽으로 돌아가 장사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공업(功業)을 세우고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그는 외삼촌 오경(吳景)을 찾아가고 또 아버지의 옛 상관이었던 원술(袁術)에게 의탁하려 했다. 오경 또한 원술의 부하로 당시 단양태수로 있었다. 길을 떠나기 전 손책은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장굉(張紘)을 방문했다[3].
장굉은 누구인가? 그는 남방 양주(揚州) 광릉(廣陵) 사람으로 젊어서 태학에 들어가 서울에서 유학하며 당대 명사들을 사사하여 학문이 깊었으나 조정의 벼슬을 거절하고 남쪽으로 피난 와 있었다. 손책은 장굉을 매우 존경하여 자주 가르침을 구했다.
손책이 장굉에게 자신의 뜻을 말했다.
“지금 한 황실이 쇠락하고 천하가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제각기 사리사욕을 채울 뿐 조정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원씨와 함께 동탁을 격파했으나 불행히 공업을 이루지 못하고 황조에게 해를 입으셨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고 무지하나 마음속에 작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양주로 가서 원술에게 아버지의 남은 병사를 구하고 단양의 외삼촌을 도와 흩어진 병력을 모으려 합니다. 그 후 동쪽으로 오회(吳會) 지역을 점령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조정의 외원(外援 바깥 지원세력)이 되고자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처음 장굉은 자신의 식견이 얕고 상중이라 돕기 어렵다고 사양했으나 손책은 간곡히 청했다. “선생의 명성은 멀리까지 퍼져 있습니다. 평소 선생의 덕을 태산처럼 우러러보았기에 오늘 가르침을 청하러 왔는데 어찌 말씀을 아끼십니까? 장차 저의 작은 뜻이 이루어져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면 이는 선생의 공로일 것이며 제 진심 어린 희망입니다!”
말을 마치며 손책은 눈물을 흘렸다.
손책의 효심과 정성에 장굉은 깊이 감동했다. 이에 장굉이 말했다.
“당신의 계획이 매우 좋습니다. 단양에 가서 남방의 병력을 정돈하고 형주와 양주를 취한다면 자연히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강 연안을 차지하면 반드시 위덕(威德)을 떨쳐 한실을 돕고 춘추시대 제환공, 진문공과 같은 공업(功業)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공업이 이루어지면 저 또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돕겠습니다.”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그럼 약속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장굉에게 부탁했다.
손책, 원술에게 의탁하다
손책이 원술의 휘하에 도착했을 때 외삼촌 오경은 이미 역양(歷陽)으로 파견되어 난을 평정하고 있었다. 손책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원술의 찬사를 받았는데 원술은 “나에게 손랑(孫郞) 같은 아들이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원술은 도량이 좁아 손책에게 중책을 맡기겠다고 두 번이나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 손책은 낙심하지 않고 원술을 설득해 역양의 외삼촌을 도와 양주를 점령하고 있던 유요(劉繇)를 치러 가게 해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원술도 동의하며 손견의 옛 부하 천여 명을 돌려주어 길을 떠나게 했다.
두 영웅이 나란히 강동을 휩쓸다
흥평 2년(서기 195년), 20세의 손책은 천여 명의 병사와 수십 필의 말, 수백 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출발했다. 길에서 병마를 모집하여 역양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오륙천 명의 인마를 확보했다.
그러나 역양의 전황은 복잡했다. 손책은 형제 같은 주유를 떠올렸다. 주유의 숙부 주상(周尙)은 당시 단양태수였는데 단양은 가까운 곳에 있었고 마침 주유가 숙부를 뵙고 있었다. 손책은 주유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편지를 받은 주유는 즉시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배에 식량과 무기를 가득 실어 밤을 새워 역양으로 달려갔다.
손책은 주유가 온 것을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주유의 손을 잡았다. “자네가 왔으니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네!”[4]
손책과 주유는 나란히 작전하며 호흡이 척척 맞았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가는 곳마다 거침이 없었다. 번개 같은 속도로 1년도 안 되어 유요, 착융(笮融), 설례(薛禮) 등 강력한 군벌들을 대파하고 신속하게 강동 승리의 첫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이 강동을 정벌할 때 군기를 엄정히 세워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손책은 선포했다.
“항복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한 사람이 군대에 오면 온 가족의 요역을 면해주고, 원치 않는 자는 강요하지 않겠다.”
이 고시가 나가자 사방에서 자원자가 몰려들어 열흘 만에 2만여 명과 천여 필의 말을 얻으니 기세가 강동을 진동시켰다.
주유의 숙부 주상(周尚)은 원술의 부하였기에 주유가 강동에 남아 손책을 돕는 것이 원술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에 손책이 주유에게 말했다. “나머지 오군을 취하는 것은 이 병력으로 충분하니 자네는 먼저 단양을 지키러 가게.” 주유는 단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원술이 자신의 동생 원윤(袁胤)을 보내 주상 대신 단양태수로 삼자 주유와 숙부는 수춘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건안 원년(서기 196년), 정세에 큰 변화가 생겼다. 북방에서는 조조가 헌제를 영접했고 남방에서는 손책이 회계를 무난히 함락시켜 스스로 태수가 되니 동남방에서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현덕한 손태부인(孫太夫人)
손씨 가문의 빠른 성장에 어머니 손태부인은 중요한 기둥이었다. 손태부인은 예의에 밝아 남편 손견이 전장을 누비다 전사했음에도 시종일관 자식을 훌륭히 가르친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손씨 형제들은 어머니께 효도하며 그 가르침을 명심하여 어기지 않았다.
손책이 오정현(烏程縣)을 공격할 때 추타(鄒他), 전동(錢銅), 왕성(王晟) 등이 각기 만여 명을 모아 대항했는데 손책이 이들을 격파하고 옥에 가두었다. 손태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손책에게 말했다.
“왕성은 네 아버지의 친구이며 옛날에 나를 직접 소개받기도 했다. 이제 그의 동료들은 죽고 늙은 선생만 남았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손책은 그 말을 듣고 왕성을 풀어주었다.
한번은 손책의 참모 위등(魏騰)이 손책의 뜻을 거슬러 꾸짖음을 듣고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신하들이 걱정했으나 구할 방도가 없었다. 손태부인은 큰 우물가에 기대어 손책에게 말했다.
“네가 강남을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진 하사(下士)를 예우하고 타인의 허물을 포용하며 공을 표창해야 한다. 위등은 공적으로 잘못이 없는데 그를 죽인다면 훗날 사람들이 모두 배반할 것이다. 장차 네가 고립무원이 되는 것을 보느니 내가 먼저 이 우물에 빠져 죽겠다!”
손책이 크게 놀라 즉시 위등을 풀어주었다[5].

오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우물가로 와서 시녀를 보내 손책에게 어머니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다고 전했다. 손책은 놀라 달려와 어머니를 위로했다. (즈칭 / 에포크타임스)
건안 2년(서기 197년), 원술이 수춘에서 황제를 칭하자 손책은 편지를 보내 나라를 훔친 원술을 꾸짖고 절교하며 정식으로 원술 군단에서 탈퇴했다.
(계속)
주석
[1] 《삼국지》 <손책전>: 용모가 아름답고 농담을 즐기며 성격이 활달하여 인재를 잘 등용했다.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그를 보면 마음을 다해 죽기로 힘썼다.
[2] 《강표전》: 손견이 주준(朱儁)의 추천으로 좌군(佐軍)이 되었을 때 가족을 수춘에 두었다. 손책의 나이 10여 세에 이미 명사들과 교유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주유라는 자가 손책과 동갑인데 역시 영달하고 일찍 성숙했다. 손책의 명성을 듣고 서성에서 찾아와 친분을 맺으니 의리가 금석도 끊을 정도였다. 주유가 손책에게 서성으로 이사하기를 권하니 손책이 따랐다.
[3] 《삼국지》 <손책전> 인용 《오력》: 애초에 손책이 강도에 있을 때 장굉이 모친상을 당했다. 손책이 자주 방문해 시무를 물었다.
“지금 한 왕실이 쇠락하고 천하가 어지러워 영웅호걸들이 사리사욕을 챙깁니다. 선군께서는 원씨와 함께 동탁을 격파했으나 공업을 이루지 못하고 황조에게 해를 입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나 뜻이 있어 원술에게 군사를 얻어 단양의 외삼촌에게 가려 합니다. 장차 오회를 점령하고 원수를 갚아 조정의 외번이 되려 하는데 어떠합니까?”
장굉이 답하기를 “재주가 없고 상중이라 도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손책이 “선생의 명성이 자자하여 가르침을 얻으려 왔는데 어찌 사양하십니까? 원수를 갚는다면 선생의 공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장굉이 손책의 충성심과 기개에 감동하여 답하기를 “옛날 주나라가 쇠퇴할 때 제, 진이 일어났습니다. 장군이 선후의 자취를 이어 명성을 떨치니 단양에서 군사를 거두면 형, 양을 하나로 할 수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장강을 근거로 한실을 도우면 제환공, 진문공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손책이 “선생과 뜻이 같으니 이제 떠납니다. 노모와 어린 동생들을 선생께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4] 《태평어람》 인용 장발의 《오록》: 손책이 역양에서 주유를 부르는 편지를 보냈다. 주유가 500명의 군사와 배, 식량, 무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달려가니 손책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의 손을 잡고 “자네가 왔으니 이제 되었다”라고 했다.
[5] 《삼국지》 <오서 비빈전> 인용 《회계전록》: 손책의 공조 위등이 뜻을 거슬러 죽게 되었을 때 신하들이 구할 길이 없었다. 부인이 우물에 기대어 손책에게 말했다. “네가 이제 강남을 만들고 있는데 현사를 예우해야 한다. 위등은 공적으로 규정을 다했는데 네가 오늘 그를 죽이면 내일 사람들이 배반할 것이다. 화가 미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우물에 들겠다.” 손책이 놀라 위등을 풀어주었다. 부인의 지략은 대개 이와 같았다.
깐징월드 【유유천고사(悠悠千古事)】 채널에서 전재
[https://www.ganjingworld.com/zh-TW/channel/1g2kugphn3g4oCdixIFpH5YAj1kq0c]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24/11/12/n1436925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