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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영웅 – 주유(周瑜) (3): 검무에 담긴 영웅의 의지 강남을 달리다

이익운(李翼雲)

【정견망】

주유 (천외객 / 에포크타임스 합성도)

오랫동안 주유는 공명에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숙부 주상의 곁에서 잡일을 돕는 것을 즐기는 듯했고, 유일하게 해야 할 정사는 손책을 도와 강동을 정벌하는 것뿐인 듯했다.

주유가 손책을 도와 강동을 정벌하며 세운 뛰어난 전공은 마침내 원술의 눈에 띄었다. 원술은 주유를 장수로 임용하려 했다. 주유는 원술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직접 거절하기 어려워 스스로 남방의 먼 거소(居巢) 현장을 자청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배처럼 거소에 머무는 동안 주유는 평생의 중요한 지우인 노숙(魯肅)을 만났다.

노숙

노숙은 자가 자경(子敬)이며 임회(臨淮) 동성(東城)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체격이 당당하고 용모가 기이했으며 두뇌가 명석해 독특한 계책을 잘 내놓았다.

노숙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고 적선하기를 좋아했다. 천하가 혼란할 때 노씨 집안은 가산을 아낌없이 내어 가난한 이들을 도왔기에 향리의 사랑을 받았다. 집안의 귀한 손자였던 노숙은 총애를 받으며 검술과 기사를 배우고 향리의 소년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훈련시켰으니 마치 사병 집단과 같았다. 고향 노인들은 “노씨 집에 저런 광망(狂妄)한 손자가 나왔으니 집안 망할 징조다”라고 수군거렸다.

거소 현장 주유는 노숙의 명성을 듣고 하루는 군사 백 명을 데리고 방문해 식량을 원조해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곡간이 두 개 있었는데 각각 3,000곡(斛)의 곡식이 들어 있었다. 노숙은 그 자리에서 곡간 하나를 가리키며 통째로 주유에게 기부했다. 노숙의 호쾌한 정에 주유는 깊이 감동했고 두 사람은 이때부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원술이 노숙의 사적을 듣고 그를 동성 현장에 임명했으나, 노숙이 보기에 원술은 정사에 법도가 없어 대업을 함께할 인물이 아니었다. 이에 노숙은 가족과 소년 협객 백 명을 데리고 거소의 주유에게 의탁했다.

건안 3년(서기 198년), 조조가 손책을 토역(討逆)장군으로 표하고 오후(吳侯)에 봉했다. 또한 손책의 가족과 혼인을 맺으니 이는 손씨 가문이 남방의 중요한 세력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해, 때가 무르익었다. 주유는 노숙을 데리고 거소에서 강을 건너 손책에게 달려갔다. 주유와 손책은 2년여 만에 기쁘게 재회했다.

손책 또한 노숙을 보고 범상치 않은 기재임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강북에서 노숙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와 노숙은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고향 동성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러야 했다.

강동을 휩쓸다

주유가 남쪽으로 오자 손책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급히 주유를 위해 집을 짓고 헤아릴 수 없는 재물을 주었으며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유를 맞이했다.

연회석상에서 손책은 모두에게 소개했다.

“공근은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나와는 어릴 때부터 사귀어 골육과 다름없네. 예전에 단양에서 군사와 식량 배를 이끌고 와 대사를 도왔으니 공로를 논하자면 이 정도 선물로는 주유의 큰 은혜에 보답하기 부족하네![2]”

손책은 주유를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에 임명했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모두 24세였다.

이어 손책과 주유는 힘을 합쳐 환성(皖城)을 함락시키고 현지의 절세미녀 자매인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를 각각 아내로 맞이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졌다. 손책과 주유는 동서지간이 되어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오군여(吳君如) 《고금백미도(古今百美圖)》 속 이교(二喬). (공공 영역)

이어 손책은 주유와 손잡고 부친의 원수인 황조를 공격했다. 비록 황조를 잡지는 못했으나 적병 수만 명을 소멸시키고 예장(豫章), 여릉(廬陵) 두 군을 평정하니 남방이 진동했다. 주유는 이때부터 요지인 파구(巴丘)를 지키게 되었다.

하루 만에 세워진 다리

주유는 손책을 도와 강동을 누비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한번은 명을 받들어 강을 따라 건업(建業 지금의 남경) 일대로 내려가는데 강물이 길을 가로막았다. 물은 깊고 물살은 센데 작은 다리 하나 없어 인마(人馬)가 건너질 못했다.

주유가 지방관을 불러 “어찌 다리가 없느냐?”라고 묻자 지방관은 말을 더듬으며 답하지 못했다. 주유는 불쾌해하며 “이곳은 강을 방어하는 요지인데 어찌 다리가 없느냐?”라고 꾸짖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당장 지어라! 하루 안에 다리를 완성하라!”라고 명했다.

모두 듣고 깜짝 놀랐다.

“하루 만에 어떻게 다리를 놓는단 말인가?”

주유가 직접 지휘하여 주변의 폐기된 돌다리를 헐어 재료를 운반해 새 다리를 만드니 하루도 안 되어 다리가 완성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주유가 세운 이 다리를 ‘주랑교(周郞橋)’라 불렀으며 지금도 다리 위에는 주유의 말이 밟은 선명한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다[3].

주유의 검무, 그 속에 담긴 뜻

북방의 조조는 인재에 목말라했다. 주유가 젊고 재능이 있으며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말재주가 뛰어나고 주유와 친구였던 장간(蔣幹)을 보내 주유를 회유하려 했다.

장간이 찾아오자 주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익(子翼 장간의 자), 그대는 고생하며 강을 건너 조씨의 유세객이 되려 왔는가?”

장간이 얼른 대답했다.

“그대와 고향 친구로서 오랫동안 보지 못해 멀리서 그대의 위업을 듣고 풍채를 보러 왔거늘 유세객이라 하시니 어찌 나를 의심하는가?”

“자익, 나의 곡조 감상 능력이 고대의 악사 기(夔)나 광(曠)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대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그 속뜻을 알기에 충분하오.” 주유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주유는 장간을 연회에 초대했다. 연회 도중 흥이 난 주유가 일어나 칼을 휘두르며 <장부처세가(丈夫處世歌)>를 불렀다.

대장부 세상에 처함에, 공명을 세우리라.
공명을 세웠으면, 왕업을 이루리라.
왕업이 이뤄지면 사해가 맑아지고
사해가 맑아지면 천하가 태평하리.
천하가 태평하면, 나 장차 취하리라.
나 장차 취하리니 서리 칼날 춤추리

大丈夫處世兮,立功名,
功名既立兮,王業成。
王業成兮,四海清,
四海清兮,天下太平。
天下太平兮,吾將醉,
吾將醉兮,舞霜鋒 [1].

웅장한 곡조는 주유의 호탕한 기개를 그대로 드러냈고 검무의 늠름한 모습과 어우러졌다. 주유는 절묘한 예술적 풍모로 사해를 맑게 하고 천하를 평정하려는 영웅의 뜻을 펼쳐보였다.

검무를 마친 주유가 장간에게 말했다. “내 마침 기밀한 일이 있으니 그대는 잠시 머무시오. 일이 끝나면 다시 사람을 보내 부르겠소.”

사흘 후 주유는 장간을 불러 군영을 구경시켰다. 시종을 시켜 의복과 보물을 보여주며 장간에게 설명했다.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마음이 통하는 주공(主公)을 만났으니 겉으로는 군신 관계이나 속으로는 형제의 은정과 같소. 주공께서는 나의 의견과 계책을 들어주시고 고락을 함께하시니, 설령 소진, 장의가 살아나고 역이기가 다시 온다 해도 나의 선택을 칭찬할 것이오. 나의 견고한 정의를 어찌 그대 같은 젊은이가 움직일 수 있겠는가?”

장간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간 장간은 조조에게 이번 여정을 보고하며 주유가 환대하고 검무를 보여주었으며 손책과의 긴밀한 정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장간은 “주공근(周公謹)과 손백부(孫伯符) 사이는 말로 이간질할 수 없습니다”라고 탄식했다.

중원의 인사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주유의 아량(雅量)에 감탄했다. 옛 친구의 부탁을 이토록 우아하고 완벽하게 거절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4].

손책과 신선 우길

그러나 손책과 주유가 함께 번창하며 날아오른 날들은 길지 않았다.

건안 5년, 원소와 조조의 군마가 관도에서 대치했다. 북방의 통일을 결정지을 긴장된 상황이었다. 손책은 큰 뜻을 품고 부친처럼 한실(漢室)을 위해 업적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손책은 양측이 교전하는 틈을 타 몰래 허도(許都)를 습격해 헌제를 영접하려 계획했다.

손책은 평소 혼자 말을 타고 사냥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산길을 가는데 옛 원수들의 매복에 걸려 자객의 습격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여러 자료에 따르면 손책의 죽음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김협중 채색화 《삼국연의》 제29회 삽화, 소패왕(小霸王 손책)이 노하여 우길을 베다. (공유 영역)

순제(順帝) 연간에 낭야 사람 궁숭(宮崇)이 순제를 알현하고 신서 《태평청령도(太平青領道)》를 바치며 상사(上師) 우길(于吉)이 곡양(曲陽)에서 얻은 것이라고 주장했다[5]. 50여 년 후, 100세의 도인 우길이 강동에 나타나 도를 전하며 정사(精舍)를 짓고 부적으로 병을 고치니 현지에 신도가 많았다[6].

당시 손책은 강을 건너 출병하려 했으나 가뭄이 심했다. 손책은 사람들이 우길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 우길을 잡아 뙤약볕 아래 묶어두고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비가 오면 용서하되 효과가 없으면 처형하겠다고 명했다.

잠시 후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더니 정오 무렵 과연 폭우가 쏟아져 개울물이 넘쳤다. 장수들은 기뻐하며 우길이 사면될 줄 알고 축하하러 갔으나 손책은 고집스럽게 우길을 처형했다. 장수들의 아녀자들이 손태부인에게 간청했고 태부인도 “우 선생님은 군을 도와 복을 빌고 장수들을 치료했으니 죽이지 마라”라고 타일렀다.

이번에 손책은 어머니의 권유를 무시하고 우길을 죽였다. 장수들은 슬퍼하며 몰래 시신을 거두었다. 그날 밤 구름이 우길의 시신을 덮더니 이튿날 아침 시신이 간 곳 없이 사라졌다[7].

얼마 후 손책이 사슴을 사냥하러 나갔는데 준마가 너무 빨라 시종들을 멀리 떼어놓았다. 이때 원수의 매복을 만나 화살이 뺨에 꽂힌 채 영루로 돌아왔다. 의사는 석 달만 잘 요양하면 낫는다고 했다. 그러나 손책이 홀로 앉아 있으면 자꾸 우길의 환영이 나타났다.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우길이 보였으나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손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울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 상처가 터져 결국 숨을 거두었다[8].

(계속)

주석

[1] 나관중 원본 《삼국연의》

[2] 《강표전》: 손책이 주유에게 집을 지어주고 선물함이 비할 데 없었다. 손책이 영을 내리기를 “주공근은 뛰어난 인재이며 나와는 어릴 때부터 골육의 정이 있다. 단양에서 배와 식량을 내어 대사를 도왔으니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부족하다”라고 했다.

[3] 강녕구 비물질문화유산 목록

[4] 《삼국지》 <오서 주유전> 배송지 주석 《강표전》: 애초에 조공이 주유의 재능을 듣고 장간을 보냈다. 장간은 변재로 유명했으나 베옷에 갈건을 쓰고 사적으로 방문한 척했다. 주유가 마중하며 “유세객으로 왔는가?” 묻자 장간은 “풍채를 보러 왔거늘 유세객이라 하는가?”라고 답했다. 주유는 “내 음악에 밝으니 그대 곡조의 뜻을 아오.”라며 연회를 열었다. 사흘 후 군영을 보여주며 “장부가 지우인 주공을 만나 군신의 의와 골육의 은정을 맺었으니 누가 나를 움직이겠소?”라 했다. 장간은 웃을 뿐 답하지 못했다. 돌아가 주유의 아량이 높으니 말로 이간할 수 없다 했다.

[5] 《강표전》: 도사 우길이 오회에 머물며 부적으로 병을 고치니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손책이 장수들과 모일 때 우길이 지나가니 장수들의 삼분의 이가 내려가 절했다. 손책이 노하여 그를 잡았다. 어머니가 살려달라 했으나 손책은 “요망한 자가 민심을 홀린다”며 처형했다.

[6] 《지림》: 순제 때 궁숭이 <태평청령도> 백여 권을 올렸다. 건안 5년 당시 우길은 백 세에 가까웠다. 예법에 노인에게는 형을 가하지 않는 법인데 손책은 가혹한 형을 가했다.

[7] 《수신기》: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려 할 때 우길이 동행했다. 가뭄에 손책이 군사를 재촉하는데 장졸들이 우길에게 가 있자 노하여 그를 묶고 기우제를 시켰다. 정오에 비가 쏟아졌으나 손책은 결국 그를 죽였다. 장수들이 시신을 거두었으나 다음 날 사라졌다.

[8] 《오력》: 손책의 상처가 깊어 의사가 백일 동안 움직이지 마라 했다. 손책이 거울을 보고 “이 얼굴로 공업을 세우겠는가”라며 책상을 치니 상처가 터져 죽었다. 《수신기》에는 손책이 죽인 우길의 환영이 거울에 나타나 소리를 지르다 상처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24/11/13/n1437030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