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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영웅 – 주유 (8): 웅대한 담략을 지닌 천고의 영웅

이익운

【정견망】

주유. (천외객 / 에포크타임스 합성도)

주유는 시종일관 손권을 보필해 ‘남면하여 패권을 잡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조조의 수십만 대군 앞에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주유는 여러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대항하는 중책을 도맡았다.

적벽 대전 후 조조가 북으로 돌아가자 유비는 표문을 올려 유기를 형주목(荊州牧)으로 삼자 무릉, 영릉, 계양, 장사 4군이 귀순했다. 얼마 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형주목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던 유비는 정식으로 형주 남부의 4군을 차지하게 되었고, 손권은 서주와 형주 8군 중 하나인 남군(南郡)을 얻어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손권은 이 전투를 통해 풋내기를 벗어나 독립적인 군주로 거듭났으며 천하 삼분의 형세가 확립되었다. 그해 손권은 27세, 유비는 48세, 조조는 53세였다.

인재를 알아본 주유, 방통을 임용

적벽 대전 후 주유는 남군을 굳게 지키며 북으로 조조를 막고 남으로 유비를 견제하여 손오의 강산을 수호했다. 이 기간에 주유는 방통(龐統)에게 남군의 정무를 맡기고 자신은 정사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방통은 누구인가? 그는 녹문선인(鹿門仙人)이라 불린 방덕(龐德)의 조카다. 《후한서》 <일민전(逸民傳)>에 따르면 방덕은 세속을 벗어난 기인(奇人)으로 사람들이 방덕공(龐德公)이라 존칭했다. 아내와 서로 공경하며 농사와 독서로 소박하게 살았고 성내에는 발길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부가 녹문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 돌아오지 않으니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젊은 제갈량도 방덕공과 친분이 깊어 방문할 때마다 침상 아래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제갈량의 누나가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龐山民)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두 집안은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莊畫傳)》 속 방덕공 상. (공유 영역)

당시 형주에는 유명한 은사 사마휘(司馬徽)가 있었는데 학문이 깊고 인물 감식안이 뛰어나 ‘수경(水鏡)선생’이라 불렸다. 사마휘는 방덕공보다 열 살 적었으나 형제처럼 지냈다.

방통은 어릴 때 투박하고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 방덕공 외에는 아무도 그의 재능을 몰랐다. 20세에 사마휘를 찾아갔을 때 사마휘가 뽕잎을 따고 있었는데, 방통이 나무 아래 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긴 대화 후 사마휘는 방통을 형남 선비 중 으뜸이며 ‘성덕(盛德)’이 있는 인물이라 극찬했다. 이때부터 방통의 이름이 알려졌고, 방덕공은 제갈량을 ‘와룡’, 방통을 ‘봉추’라 부르며 그들의 재주를 신뢰했다.

인재를 알아본 주유는 30세의 방통을 중용하고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웅지는 충만했으나 중병으로 눕다

유비가 차지한 영토가 급속히 넓어지자 손권은 누이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굳히려 했다. 노숙은 정략결혼이 조조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으나 주유의 생각은 달랐다.

김협중 채색 《삼국연의》 제54회 삽화, 오국태가 불사(佛寺)에서 사위를 보다. (공유 영역)

건안 15년, 유비가 손권을 만나 남군 남안의 땅을 빌려달라고 청하러 오자 주유가 손권에게 간했다.

“유비는 효웅(梟雄)의 기상이 있고 관우, 장비라는 맹장을 거느렸으니 절대 남의 밑에 오래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유비를 동오에 머물게 하여 화려한 궁궐과 미녀, 보물로 환락에 빠지게 하고 관우와 장비를 떼어놓은 뒤 저 같은 장수가 그들을 친다면 대사가 결정될 것입니다. 지금 땅을 떼어주어 대업을 돕고 세 사람을 뭉치게 하면 장차 용이 구름과 비를 만난 듯 연못 속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1]!”

그러나 손권은 북방의 조조가 더 큰 위협이라 보고 영웅들과 결탁해야 한다며 주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어 주유는 조조가 패배하여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유장을 치고 익주(촉)를 얻은 뒤 한중의 장로를 병합하자고 제안했다. 그곳에 장수를 두어 지키고 서북의 마초와 결맹한 뒤, 주유가 다시 강동으로 돌아와 형주에서 북진하여 조조를 협공하면 북방을 얻을 수 있다는 대담한 전략이었다.

손권은 이 창의적인 전략을 지지했고 유비에게 형주 길을 빌려달라고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의 꾀가 하늘의 뜻을 당할 수 없었는지, 주유가 실행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중병에 걸려 누웠다.

임종 유언, 국사를 걱정하다

병상에서 주유는 손권에게 짧은 글을 남겼다.

“천하가 어지러워 밤낮으로 근심했으니 주공(主公)께서는 멀리 내다보고 미리 대비하시어 단 열매를 맺으십시오.”

“지금 조조와 적대하고 유비가 공안에 있어 경계가 가까우며 민심이 완전히 귀순하지 않았으니 좋은 장수를 보내 다스려야 합니다. 노숙의 지혜와 모략이 중책을 맡기에 충분하니 그를 제 후임으로 삼아주십시오. 저는 죽음이 머지않았으니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칩니다.”

편지는 간결했으나 여전히 국사를 걱정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과 의견이 달랐던 노숙을 후임으로 추천한 것은 친구에 대한 신뢰와 나라를 향한 충심, 그리고 바다 같은 도량을 보여준다. 인생의 마지막에 문구(問愧: 부끄러움이 없음)의 경지였다.

손권, 소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다

주유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직접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

“공근은 왕을 보좌할 인재인데 이토록 일찍 가버리니 내가 이제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라며 통곡했다.

손권은 주유의 남겨진 자녀들을 정성껏 돌봤다. 주유의 장남 주순은 손권의 딸 손노반 옹주와 혼인해 기도위가 되었고, 차남 주윤도 종실의 딸과 혼인하여 도위와 도향후가 되었다. 주유의 장녀는 태자 손등에게 시집갔다.

손권은 친족들과 주유 가문을 혼인으로 맺어 은혜를 갚았으며 나중에도 “내가 공근을 생각함에 어찌 멈춤이 있겠는가!”라며 끝없는 그리움을 표했다.

웅대한 담략(膽略), 천고의 영웅

적벽 대전 당시 유비는 주유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문무와 지략을 겸비한 만인의 영웅이며 기량(器量 그릇)이 넓고 크다”라고 극찬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 셈이다.

손오의 개국 원로로서 주유는 손책과 뜻을 같이하여 20세에 강동을 평정했다. 손책 사후 10여 년간 소주 손권을 받들어 ‘남면하여 패권을 잡는’ 목표로 나아갔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조조 대군에 맞서는 중책을 맡았다. 적은 수의 군사로 대군을 상대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었으니, 훗날 제갈근과 보즐(步騭)이 그의 충용을 기리며 “몸소 화살과 돌을 맞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임무를 다했다”라고 상소한 것이 이해가 간다.

청나라 왕무횡(王懋竑)은 “만약 주유가 병사하지 않고 촉한(蜀漢)을 취했다면 유비는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과연 천하가 삼분된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삼국 영웅들의 쟁패하고 영역을 확대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천고 영웅들이 호탕한 기개로 펼쳐보인 의용(義勇)과 기지(奇智)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벽 대전으로 손오는 솥발처럼 설 수 있었고, 주유는 한 차례 전투로 강산을 확정했고, 유장(儒將)의 고결한 풍모와 웅대한 담략(膽略), 그리고 충용(忠勇)과 넓은 흉금은 세기의 대전인 적벽의 전설과 함께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주석

[1] 《삼국지》 <주유전>

[2] 《강표전》: 정보가 나이가 많음을 내세워 주유를 업신여겼으나 주유는 끝내 따지지 않았다. 정보가 나중에 탄복하여 “주공근과 사귀는 것은 술에 취하는 것 같다”라고 했다.

(끝)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24/12/12/n1438979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