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소동파와 왕안석 시구 중 ‘심안시귀처(心安是歸處)’의 서로 다른 의미

초약미

【정견망】

왕안석은 일찍이 가우 3년에 유명한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인종 황제에게 시무를 논해 올리는 글》를 썼다. 비록 송 인종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당시의 황자 조욱(趙頊), 즉 훗날의 송 신종의 주의를 끌었다.

《송사》 기록에 따르면, 조욱은 독서를 좋아하고 “잔치하며 즐기거나 무례하고 태만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거처는 유생처럼 검소했다”라고 한다. 또한 “궁실을 꾸미지 않고 유람을 일삼지 않으며 정사를 갈고 닦아”, 송조(宋朝)의 누적된 가난하고 약한 상황을 절실히 바꿔보려 했다. 그가 해박한 지식과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꾸려는 굳건한 뜻을 가진 왕안석을 주목했을 때, 자신을 보좌해 변법을 도모할 치세의 능신(能臣)을 찾았다고 느꼈다.

희녕(熙寧) 7년(1074년), 끊이지 않는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걸식하자 정협(鄭俠)이 유민도(流民圖 떠도는 백성들의 그림)를 올렸다. 자성(慈聖), 선인(宣仁) 두 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신종에게 “왕안석이 천하를 어지럽혔다”고 말했다. 이에 신종은 왕안석의 재상직을 면직했으나, 이듬해 2월에 다시 재상으로 복직시켰다. 복직한 왕안석은 더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변법파 내부의 분열마저 심각해 신법을 계속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송 신종의 신뢰 또한 예전 같지 않았다. 1076년 왕안석은 여러 차례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10월, 왕안석은 재상직을 물러나 강녕의 반산원(半山園)으로 은퇴했다. 그가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쓴 시가 바로 《매화》다.

담 모퉁이 매화 몇 가지(墻角數枝梅)
추위 뚫고 홀로 피었네(淩寒獨自開)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아노니(遙知不是雪)
그윽한 향기 풍겨오기 때문이라네(為有暗香來)

문학 작품에서 매화는 매서운 바람과 눈 속에도 서리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질을 지녀 특유의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고결한 품행과 오설능상(傲雪淩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매화의 자태와 운치의 아름다움은 소홀히 다뤄지기도 했다. 고인(古人)이 매화를 읊은 시 중 상당히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왕안석 이전 시기 서호 고산에 은거했던 북송의 은일 시인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林逋, 967년~1028년)의 시다.

그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중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에 가로비치고,
그윽한 향기 달빛 황혼에 떠다니네
(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명구는 매화를 읊은 절창으로 찬사받는다.

하지만 왕안석의 이 매화는 다르다. 그는 임포의 시구를 교묘히 빌려와, 담 모퉁이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피어 멀리까지 그윽한 향기를 발산하는 매화를 눈처럼 하얗게 묘사했다. 눈으로 옥처럼 깨끗한 매화를 비유하고, ‘암향(暗香 그윽한 향)’으로 매화가 눈보다 나음을 짚어냈다. 매화의 맑고 그윽하며 홀로 풍기는 향기는 바로 왕안석 내면의 고고함에 대한 가장 진실한 묘사다. 매화를 사람에 비유해 추위 속에 홀로 피어난 것은 고귀한 품격을 비유한 것이고, 사람을 침잠시키는 그윽한 향기는 그의 넘치는 재기(才氣)를 상징한다. 비록 그가 추진한 변법이 성공하진 못했으나, 그의 내면에는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의 주장이 지극히 옳으며 자신의 견식은 시대를 앞서갔으나 다만 이해받고 수용되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왕안석의 이 시부터 시작해서 매화의 인문적 이미지에 이렇게 맑고 그윽하며 홀로 향기로운 고고함의 성분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매화의 맑고 우아하며 가냘프고 요염한 아름다움을 거의 가릴 정도였으며, 그윽한 향기와 홀로 풍기는 아름다움이란 함의가 맑은 향기가 멀리 퍼지는 함의를 넘어섰다. 이 짧은 시는 의미가 심원하면서도 문구는 매우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겉보기에는 조금도 조탁한 흔적이 없는 듯하나, 실제로는 장인 정신이 독특하여 하나의 경계와 심미 격식을 조탁해 냈다.

왕안석이 시를 쓰는 실력이 이미 노화순청(爐火純青)의 지경에 이르렀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후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만들어낸 매화 감상의 운치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구양수(歐陽修)가 왕안석을 두고

“한림의 풍월이 삼천 수요,
이부(吏部)의 문장이 이백 년이라.
늙어가며 마음이 여전함을 스스로 가련히 여기노니,
훗날 누가 있어 그대와 앞다투겠는가”라고 찬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왕안석의 또 다른 시 《북피행화(北陂杏花)》 역시 강녕으로 은퇴한 뒤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한 못의 봄물이 꽃을 휘감고 돌고(一陂春水繞花身)
꽃 그림자 요염하여 제각기 봄을 차지했네(花影妖饒各占春)
설령 봄바람에 불려 눈처럼 떨어진다 해도(縱被春風吹作雪)
남쪽 길가에서 먼지 되어 짓밟히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絕勝南陌碾成塵)

시에서 북피(北陂)의 살구꽃이 남맥(南陌)의 살구꽃보다 낫다고 말한다. 시중의 ‘남맥’은 ‘북피’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공간적인 비유를 포함한다. 맑고 그윽한 ‘북피’는 속세의 시끄러움에서 멀어진 은일의 처소이고, ‘남맥’은 바로 사람들이 북적이는 명리의 마당이다. 북피의 살구꽃은 설령 봄바람에 떨어질지언정 맑은 물결 속에서 고결함을 유지할 수 있으나, 남맥의 살구꽃은 길바닥에 떨어져 수레바퀴에 짓밟혀 먼지가 되고 만다.

왕안석의 시구 속에서 그 고결하고 그윽한 향기를 지닌 ‘나’가 언뜻언뜻 보이는데, 비록 외진 ‘담모퉁이’나 청유한 ‘북피’에 있을지라도 때때로 ‘그윽한 향기 풍겨오네(暗香來)’라는 방식으로 남맥 묘당(廟堂)의 ‘풍진(風塵)’을 걱정하고 있다. 마치 몸은 세상 밖에 있으나 마음은 속세에 매여 있는 상태와 같다. 싯구로 빚어낸 이러한 고결한 품격의 의상(意象)은 ‘심안시귀처(心安是歸處)’와 같은 자성(自性)의 소탈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 소동파가 원풍 5년(1082년), 즉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황주에 유배된 뒤 세 번째 봄에 쓴 《정풍파(定風波)》를 감상해보자.

숲을 뚫고 잎을 때리는 빗소리 듣지 마오(莫聽穿林打葉聲)
읊조리고 휘파람 불며 천천히 걷는 게 어떠리(何妨吟嘯且徐行)
대지팡이 짚신이 말 타는 것보다 가벼우니(竹杖芒鞋輕勝馬)
두려울 게 무언가(誰怕)
도롱이 입고 비바람 속에 한평생 사는 것도 괜찮으리(一蓑煙雨任平生)

차가운 봄바람이 술기운을 깨우니(料峭春風吹酒醒)
약간 춥지만(微冷)
산머리 지는 햇살이 오히려 나를 맞이하네(山頭斜照卻相迎)
지나온 소슬한 곳 돌아보니(回首向來蕭瑟處)
돌아가리라(歸去)
비바람도 없고 갬도 없노라(也無風雨也無晴)

여기서 말하는 ‘오대(烏臺)’는 《한서·주박전(朱博傳)》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때 어사부 관리들의 숙소 백여 구역의 우물물이 모두 말랐고, 또 그 부중에 잣나무가 늘어서 있어 늘 수천 마리의 들까마귀가 그 위에 깃들었다가 아침에 가고 저녁에 오니 이를 조석오(朝夕烏)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은 이후 어사대를 오대(烏臺)라 불렀다. 이 사건의 발기자들이 모두 어사대의 언관들이었고 시로 인해 화를 입었기에 ‘오대시안’이라 한다.

발단은 소동파가 호주 지주로 전임된 뒤 쓴 《호주사상표(湖州謝上表)》 중 “어리석어 시세를 알지 못하니 새로 진출한 이들을 따라가기 어렵고, 늙어 일을 만들지 않으니 혹 백성들을 기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권력을 쥔 ‘신당(新黨)’을 노하게 한 데 있었다. 그리하여 글귀를 뜯어 맞추고 네 가지 큰 죄명을 얽어 소동파를 죽이려 했다. 후에 태황태후 조씨 등이 구명에 나섰고, 왕안석 역시 신종에게 상소를 올려 “어찌 성세(盛世)에 재주 있는 선비를 죽이려 하십니까?”라고 함으로써 소동파는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첫 구절의 ‘듣지마오(莫聽)’라는 두 글자는 당시 비의 세력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비에 젖는 것을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빗소리조차 듣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니, 이는 비바람의 침해에 흔들리지 않는 담담함과 여유를 보여준다. 여기서 ‘비바람’은 자연히 소동파의 인생사 속 창상과 기구함을 상징한다.

‘두려울게 무언가(誰怕)’ 두 글자가 단독으로 구절을 이룬 것은 사패(詞牌)의 규정이기도 하지만, “한평생 안개비 속에서(一蓑煙雨)” 살아가는 인생이라 한들 어떠하랴 하는 호기를 자연스럽게 토로한 것이다. 도롱이를 입고 비바람 속에서 평생을 보내도 태연자약하겠다는 뜻이다. 하궐(下闕 하연)의 경계는 다시 한번 승화되어 미래의 ‘지는 햇살이 맞이하리라’는 믿음을 보여주며, 비바람의 쓸쓸함이나 개인 하늘의 햇살에 대해서도 마음에는 똑같이 파문이 일지 않고 음양의 변화를 영접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진정으로 “이 마음 편안한 곳이 나의 고향이라(此心安處是吾鄉)”는 광달한 초탈함과 인생을 요달한 경계를 체현하고 있다.

원풍 7년(1084년), 소동파는 조정으로부터 황주에서 여주 단련부사로 전임되었다. 그해 가을, 여주로 부임하는 길에 그는 특별히 강녕으로 가서 왕안석을 방문했다. 소동파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안석은 나귀를 타고 강가까지 마중을 나갔다. 소동파는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황급히 배에서 내려 예를 갖췄다.

“제가 어찌 감히 평복으로 정승을 뵙겠습니까!”

왕안석은 손을 맞잡고 웃으며 답했다.

“예법이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겠소!”

그해 왕안석은 63세였고 소동파는 47세였다. 문단의 두 대가가 종산을 거닐며 시와 술로 화답하며 즐거워했으니, 그 얼마나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소동파의 화답시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나귀 타고 아스라이 황량한 언덕으로 들어가니,
병들기 전 선생의 모습이 생각나네.
내게 작은 집 한 채 구해 보라 권하시니,
공을 따름이 이미 십 년이나 늦었음을 깨닫네”(《차형공운사절(其三)》).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 후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왕안석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인류 사회 역사의 발전 속 한 인물로서, 혹은 이 역사라는 큰 연극(大劇) 속의 한 배역으로서, 북송이라는 이 연극의 줄거리에는 반드시 이러한 역할의 등장이 필요했다. 왕안석은 마침 그러한 본색 배우로 선택된 것이며, 그의 어떤 특질들은 특정 시간대에 등장해 일정한 역사적 작용을 담당하고 퇴장하기에 적합하도록 대본에 미리 짜여 있었던 것이다.

당조의 이순풍이 편찬한 《추배도(推背圖)》 제19상은 왕안석의 등장을 예시했는데, 참(讖)에 이르기를 “백만 웅사(雄師), 머리 위에 돌 하나(一石)”라고 했다. 역사의 발전이 이 단계에 이르러 《추배도》 제21상에 나오는 북송의 멸망,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포로가 되고, 그리고 남쪽으로 천도하기 위한 복선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궁중이 텅 비고,
눈이 석 자나 쌓이니,
슬프다 원수여,
남원북철(南轅北轍)이로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여 송 신종처럼 야심만만하고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황제가 나타났고, 원풍 제도 개혁 이후에는 스스로 전면에 나섰다. 재상의 역할을 약시키고 손에 천하의 재물을 쥐었으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마지막에 서하에 군사를 일으켰으나 역시 참패하고 말았다.

왕안석 개인의 품격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편협하고 자부심 강한 ‘요상공(拗相公)’의 모습이다. 북송의 문장가 황정견(黃庭堅)은 왕안석에 대해 “내가 일찍이 그의 풍도를 익히 관찰해보니, 참으로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재물과 여색에 빠지지 않았으니, 한 시대의 위인이다”라고 평가했다.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 신법을 추진하느라 반대파를 지방으로 내보냈으나 사사로이 보복하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소동파를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그의 인품의 고하를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서거한 뒤 소동파가 초안을 잡은 《왕안석을 태부에 추증하라는 제서(王安石贈太傅制)》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짐이 옛 초창기를 살펴보니 천의(天意)를 밝히 보았노라. 장차 비상한 큰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희세의 이인(異人)이 태어나는 법이다. 그로 하여금 이름은 한 시대에 높고 학문은 천 년을 관통하게 하였다. 지혜는 도를 달성하기에 족하고 변재는 말을 행하기에 족하였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만물을 장식하기에 족하였고, 탁월하고 뛰어난 행실은 사방을 감화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리하여 가히 일 년 사이에 천하의 풍속을 대대적으로 변화시켰노라.”

매우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으니, 천의가 그러하여 ‘비상한 큰일’을 위해 ‘희세의 이인’이 나타나야 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인’이란 범상치 않은 사람, 기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 나아가 괴짜를 의미한다.

왕안석의 편집됨은 그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공명에 급급하여 덕을 중시하고 도를 중시하는 길을 걷지 않았으며, 중정(中正)과 중화(中和)라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전통 가치에서 벗어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사회 도덕의 하락을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가 두 번째 재상이 되었을 때 조정의 혼란상에 직면해 자신도 무력함을 느꼈던 것이다. 왕안석은 마지막 시절에 불교의 이치를 깨우치고 불경에 주석을 달기 시작했으며, 반산원을 내놓아 사찰로 만들고 송 신종에게 이름을 내려달라 청하여 친필로 쓴 ‘보녕선원(報寧禪院)’이란 현판을 받았다.

반면 소동파는 ‘구당(舊黨)’도 아니었고 ‘신당’도 아니었다. 구당이 집권했을 때도 다른 목소리를 냈기에 여전히 유배를 당했다. “그대 평생의 공업을 묻노니, 황주, 혜주, 담주(儋州)로다.” 다시 돌아와서 소동파가 강녕으로 왕안석을 방문하기 전, 여산을 유람하며 쓴 칠언절구 《제서림벽(題西林壁)》을 감상해보자.

가로로 보면 산맥이요 옆으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嶺側成峰)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저마다 다르네(遠近高低各不同)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不識廬山真面目)
다만 내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只緣身在此山中)

이것은 사실 철리시(哲理詩)로, 여산의 형상을 빌려 통속적인 언어로 매우 깊은 인생의 철리를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다. 여산 속에 있으면 시야가 반드시 여산의 봉우리와 구름안개에 국한되기에,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와 골짜기가 반드시 여산 본래의 참모습은 아니다. 산을 유람하며 보는 것이 그러하듯, 세상사의 변천도 그러하다.

인생에 남긴 발자취가 그러하고 한 왕조의 흥망성쇠 또한 그러하다. 고금에 이를 꿰뚫어 본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속세란 본래 반리(反理)가 주도하며 날로 하락하는 과정이니, 올바른 이치(正理)를 견지하고 풍조에 휩쓸리지 않는 맑고 당당한 자는 필연적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려(逆旅)’ 속의 ‘행인(行人)’이며, 종종 비바람을 맞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연마 속에 처하게 마련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