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견망】
《사기·소진열전》, 《전국책》 등의 기록에 따르면, 소진(蘇秦)은 동주(東周) 낙양 사람(?~기원전 284년)으로 귀곡(鬼谷)선생을 사사했다. 그는 일생 동안 기복이 심했고 인간세상의 인심이 차고 따뜻함을 두루 맛보았으며, 전국시대 종횡가(縱橫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때 6국 합종(合縱)의 ‘종약장(縱約長)’을 맡아 6국 재상의 인(印)을 찼으며, 때문에 진(秦)나라가 15년 동안 감히 함곡관 동쪽으로 나와 다른 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이후 합종이 해체되자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소진이 연 문공의 부인과 사통하여 주살될까 두려워하자, 왕에게 유세해 제나라에 반간(反間)으로 가서 제나라를 어지럽혔다(《사기·연소공세가》).” 즉 내부에서 제나라를 화란에 빠뜨린 것이다.
나중에 제나라 대부와 총애를 다투다 자객에게 찔렸다. 자객을 잡기 위해 소진은 죽기 전 제나라 왕에게 계책을 올려, 자신이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어지럽힌 죄를 지었다며 거열형(車裂刑)에 처해 자객이 나타나도록 유인하라고 했다. 제나라 왕이 그 말대로 하자 과연 자객을 잡을 수 있었다.
소진에 대한 후세 평가는 분분하며 큰 논란이 존재한다. 이는 인생의 성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그리고 사람이 어떤 인생 준칙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기준에 따라 측정하면 자연히 서로 다른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서한(西漢) 후기 유향(劉向)은 《전국책서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리하여 소진, 장의, 공손연, 진진, 소대, 소려의 무리가 생겨나 합종과 연횡, 짧고 긴 설을 내세우며 좌우로 기울게 했다. 소진은 합종을 꾀하고 장의는 연횡을 꾀했는데, 연횡하면 진나라가 황제가 되고 합종하면 초나라가 왕이 되니, 그들이 머무는 나라는 무거워지고 떠나는 나라는 가벼워졌다.”
이 평가는 사실 전국시대 열강의 각축 상황에서 종횡가의 대표 인물인 소진과 장의의 역할을 인정한 것으로 열국이 그들을 중히 여겼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종(縱)’이란 합종의 약칭으로, 삼진(三晉 한, 조, 위)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연나라, 남으로는 초나라를 연결해 남북의 종선(縱線)을 형성해 당시 가장 강력했던 진(秦)나라와 제(齊)나라에 대항한 것이다. 반대로 ‘횡(橫)’이란 연횡의 약칭으로, 5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한 후 제나라 국력이 크게 쇠퇴하자 진나라를 중심으로 산동의 어느 한 나라와 연합해 동서의 횡선(橫線)을 형성함으로써 산동 6국을 분화시키고 나아가 천하를 병탄하려 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한, 위, 조 세 가문이 진(晉)나라를 분할한 사건을 표지로 기원전 403년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확정했다. 주나라의 예법이 무너지고 군웅이 다투던 시기였다. 특히 전국 후기 “인재를 얻는 자는 강해지고, 인재를 잃는 자는 망한다(《사기·골계열전》)”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종횡가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생겨나 거대한 사회적 집단을 형성했다.
“위로는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방백(方伯)이 없어, 힘과 공으로 강함을 다투니 이기는 자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사기와 거짓이 함께 일어났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도덕이 있더라도 계책을 베풀 수 없었고, 강함을 설정한 자는 지형의 험난함과 견고함에 의지했다. 서로 볼모를 교환하고 굳게 맹세하며 나라를 지켰다. 그러므로 맹자나 순경 같은 유술(儒術)의 선비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유세와 권모를 일삼는 무리들이 세속에서 귀하게 여겨졌다(《전국책서록》).”
즉 난세라는 큰 흐름 속에서 도덕을 갖춘 유생보다는 유세와 권모를 부리는 자들이 열국의 중시를 받았다는 뜻이다.
북송 소옹(邵雍)은 《전국음(戰國吟)》에서 이렇게 읊었다.
칠 시절에 전쟁을 숭상해,
위세와 강함, 지모와 속임수가 한꺼번에 행해졌네.
염파와 백기는 군사를 잘 썼고,
소진과 장의는 종횡에 능했다네
七國之時尚戰爭,
威強智詐一齊行。
廉頗白起善用兵,
蘇秦張儀善縱橫。
《문심조룡·논설》에서는 소진에 대해 “세 치 혀가 백만 대군보다 강했다”고 평가했다.
1973년 호남성 장사 마왕퇴 3호 묘에서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를 포함한 대량의 백서(帛書)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전국시대 종횡가의 유세 활동을 기록한 문헌이다. 총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1장은 현재의 《전국책》, 《사기》와 대략 일치하며 나머지 16장은 다른 고적에서 볼 수 없는 전국 후기의 사건들을 기록한 소실되었던 문헌이다. 이 책의 기록을 통해 사학계는 마침내 《사기》가 소진의 활동 연대를 약 30년 정도 앞당겨 기록했음을 확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진은 장의 이후인 기원전 310년부터 기원전 284년 사이에 활약했다. 장의와 동시대의 종횡가 인물은 공손연(公孫衍)과 진진(陳軫)이다. 전국 말기 종횡술을 공부하던 호사가들이 소진의 합종과 장의의 연횡에 관한 글 10여 편을 지었는데, 문체가 매우 유려하고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어 수많은 독자를 미혹시켰다. 즉 우리가 오늘날 보는 《사기》와 《전국책》의 일부 장절은 진실한 사실(史實)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진의 유세 과정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전국책·진일·소진시장연횡》에 따르면, 소진은 처음에 연횡의 방법으로 진 혜왕을 설득해 제후를 병탄하고 천하를 통일하려 했다. 비록 10여 차례나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의 건의는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이때 그의 검은 담비 가죽옷은 해졌고 백 근의 금화도 다 써버려 생활비조차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진나라를 떠나 낙양으로 돌아갔다. 짚신을 신고 책을 등에 진 채 보따리를 메고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초췌했고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집에 돌아왔으나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형수는 밥을 지어주지 않았으며 부모조차 그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깊이 탄식하며 “아내는 나를 남편으로 여기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여기지 않으며 부모는 나를 아들로 여기지 않으니 이는 모두 나 소진의 죄로다”라고 했다. 그날 밤 소진은 수십 개의 책 상자 속에서 《태공음부(太公陰符)》라는 책 한 권을 찾아냈다. 그는 책상에 엎드려 밤낮으로 책략을 연구하고 반복해서 추측하며 연습했다. 여기서 “현량자고(懸梁刺股, 대들보에 머리카락을 매달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다)”라는 성어가 탄생했다. ‘자고(刺股)’는 바로 소진의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독서하다 지쳐 꾸벅꾸벅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선혈이 발등까지 흐르게 했다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군주를 설득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금옥과 비단을 내놓게 하고 경상의 높은 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1년이 지나 마침내 이치를 꿰뚫자 그는 “이제 정말로 당세의 군왕들을 설득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사기》와 《전국책》에 기술된 소진이 합종을 위해 각 제후국을 유세한 순서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사기》의 묘사에 따르면 소진은 먼저 국력이 비교적 약한 연나라로 가서 1년여 만에 연 문후를 만났다. 그는 연 문후에게 진언하며 먼저 연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진술했다. 진나라는 수천 리 밖에 있고 남쪽의 조나라는 전투력이 강해 진나라와 다섯 번 싸워 세 번 이겼음을 강조했다. 그런 다음 안위의 핵심 요소를 분석했다.
“연나라가 적의 침범을 받지 않는 까닭은 조나라가 연나라 남쪽의 병풍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컨대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친하게 지내시어(합종), 천하가 하나가 된다면 연나라는 반드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에 연 문후는 즉시 합종 방략에 동의했다.
이에 연 문후는 소진에게 수레와 말, 재물을 지원해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게 했다. 당시 조나라는 사방 2천 리의 땅에 수십만 정병, 수천 대의 전차, 수만 마리의 군마를 보유했으며 군량은 10년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산동 제국 중 조나라만큼 강대한 나라는 없었다.
소진은 조숙후(趙肅侯)에게 “삼가 군주를 위해 계책을 세우건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일이 없게 함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은 방교(邦交 외교)를 선택함에 달려 있으니, 방교가 적절하면 백성이 편안하고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이 끝내 안정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소진이 제후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음을 알 수 있는데, 즉 약한 연나라는 늘 위태로움을 걱정하고 강한 조나라는 안락함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이어 어느 쪽과 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는 제나라와 진나라가 백성을 불안하게 하는 두 강적임을 지적하며, 만약 그중 한 강적과 연합한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를 약화하는 데 도움을 주어 결국 조나라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육국이 합종하여 공동으로 진나라에 저항한다면 진나라는 결코 감히 함곡관을 나와 산동 육국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패왕의 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원대한 비전에 조왕이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에 수레 100대, 황금 1000일(鎰), 백벽(白璧 흰 옥) 100쌍, 비단 1000필을 내주어 각 제후국과 동맹을 맺게 했다.
소진은 한선왕(韓宣王)을 만나 먼저 한나라의 강궁과 병사들의 용맹함을 칭찬했다.
“천하의 강궁은 모두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계자노(谿子弩) 같은 것은 사거리가 600보 이상입니다. 만약 서쪽으로 진나라에 투항해 신하를 자처하며 나라를 모욕하고 천하의 비웃음을 산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또한 속담을 빌려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고 형용했다. 치욕을 자극제로 삼은 이 격장법(激將法)에 한 선왕은 발끈하여 칼을 어루만지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는 나라를 소진에게 기탁했다.
소진은 또 위양왕(魏襄王)을 격려했다.
“신이 듣기에 월왕 구천은 흩어진 병사 3천으로 간수에서 부차를 사로잡았고, 주 무왕은 군사 3천과 전차 300승으로 목야의 들판에서 주왕(紂王)을 베었습니다. 어찌 병사가 많아서였겠습니까! 참으로 그 위엄을 떨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에 굴복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간사한 무리라고 일침을 가하며 《주서(周書)》를 인용했다. “끊이지 않고 계속 번져나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터럭만큼 작을 때 베지 않으면 나중에는 도끼를 써야 하리라.” 위 양왕에게 미연에 방지해야 함을 훈계하며 연횡의 움직임을 싹부터 잘라버릴 것을 권했다.
위 양왕은 마음으로 복종하며 “공경히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소진은 이어 동쪽으로 가서 서쪽의 한, 위 두 나라가 ‘순망치한(唇亡齒寒)’의 관계임을 들어 제 선왕을 설득했다. “진나라가 비록 제나라 경내로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도 늘 배후의 근심이 있으니, 한나라와 위나라가 뒤에서 습격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 선왕 역시 소진에게 나라를 의탁했다.
마지막으로 소진은 서남쪽으로 가서 초 위왕을 유세했다.
“초나라의 강대함과 왕의 현명함이라면 천하에 당해낼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합종이 성공하면 초나라가 왕이 될 것이요, 연횡이 성공하면 진나라가 황제가 될 것입니다.” 즉 합종하면 패업을 이루어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영토와 미인을 얻을 것이나, 연횡하면 땅을 떼어주며 진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잠자리에서도 베개가 불안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않았던” 초 위왕은 기꺼이 “삼가 사직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육국 합종이 성공했다. 소진은 종약장이 되어 육국의 재상을 겸임하게 되었다.
소진의 합종 성공은 그가 《태공음부(太公陰符)》의 모략을 고생스럽게 읽은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태공음부》는 어떤 책인가?
청의 심흠한(沈欽韓)은 《전국책》에서 “소진이 《태공음부》의 모략을 얻었다”라고 했고, 《사기》에서는 “주서(周書) 《음부》”라고 했는데, 대개 이는 《한지(漢志)》의 《태공모(太公謀)》 81편일 것이다. ‘주서’라고 한 것은 주나라 때 사관이 기록했기 때문이며 이는 《육도(六韜)》를 주사(周史)라 칭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책이 《태공음부경(太公陰符經)》이며 당나라 이후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400여 자로 구성된 이 책은 음양오행을 이론의 근거로 삼으며 첫머리에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행함을 집행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했다.
《전국책·위책(魏策)일》에서 인용한 《주서》에는 “장차 상대를 패하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도와주어야 하고, 장차 상대를 취하려 하면 반드시 잠시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것이 《노자》 제36장의 구절과 유사함을 발견했다.
“장차 그것을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동안은 그것을 펴주어야 한다. 장차 그것을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동안은 그것을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장차 그것을 폐하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동안은 그것을 흥하게 해주어야 한다. 장차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반드시 잠시 동안은 그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컬어 미명(微明)이라고 한다.”
한비(韓非)는 《도덕경》을 가장 먼저 해석한 사람인데, 권모가였던 그는 권술(權術)의 각도에서 노자를 곡해했다. 그는 《한비자·유로(喻老)》에서 《노자》 제36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패한 후 오나라로 가서 천한 일을 하면서도 오나라가 북상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부추겨 오나라의 힘을 약화했다는 것이다. 또한 면지 맹회에서 강함을 뽐내며 장기간 전쟁을 일으켜 국력이 쇠퇴하게 했기에 결국 태호 지역에서 월나라에 제압당했다는 식이다.
이를 통해 고대 성현들이 남긴 책에서 말하는 바는 모두 세간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이지 후세가 이해하는 권모나 계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진이 그 속에서 밤낮으로 추측해낸 것은 바로 권모술수였다. 똑같은 책이라도 덕(德) 이상의 경계에서는 본연으로 돌아가는 도(道)를 깨달을 수 있지만, 덕 이하의 층차에서는 권모술수로 해석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덕을 지키고 덕을 등지는 심술(心術)의 차이다. 결국 이는 서로 다른 인생의 길로 이끌게 된다. 소진의 결말은 바로 이러한 선택에 대한 주석이 된다.
사마천은 《사기·소진열전》의 결말에서 총평의 형식으로 세인들에게 알렸다.
“소진은 여염집에서 일어나 6국의 합종을 이끌어냈으니 그 지혜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내가 그의 행적을 열거하고 그 순서를 정한 것은 홀로 악평만을 뒤집어쓰게 하지 않으려 함이다.”
왕안석 또한 《소진》이라는 시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미 제 몸을 권세에 죽이기로 작정했으니,
나쁜 이름이 마멸되기까지 몇 해나 걸리겠는가.
그대의 혼백이 천 년 후에 생각건대,
처음에 밭 두 이랑 없었음을 후회하리라.
已分將身死勢權
惡名磨滅幾何年
想君魂魄千秋後
卻悔初無二頃田
한 무제 이후 유가 사상은 점차 중국 문화의 주류가 되었고, 유가의 중용과 오상(五常)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중심이 되었다.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교묘하고 민첩한 언변과 권모술수를 부리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종횡가들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람은 천지 사이에 서서 어떤 인생 준칙을 지녀야 하는가? 소동파는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서 사람 됨됨이의 호연지기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맹자는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라고 했다. 이 기(氣)는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반드시 형체에 의지해 서지 않고, 힘에 기대어 행하지 않으며, 삶을 기다려 존재하지 않고, 죽음을 따라 망하지 않는 것이다.
“끝없는 낙엽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 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오네.”
“이런 사람이 없다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5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