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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42): 천정(天庭)의 3대 반골

요연(了緣)

【정견망】

주지하다시피 천정(天庭 천상 조정)에는 3대 반골이 있다. 오공은 당연히 하나이고, 뼈를 깎아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살을 베어 어머니께 돌려드린 나타(哪吒)가 하나이며, 산을 쪼개어 어머니를 구한 이랑신(二郎神)이 마지막 하나다.

이번 편에서는 천정 3대 반골의 존재 의미를 전문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우선 그들이 무엇에 반대(反)했는지 알아야 한다. 오공은 하늘이 내고 땅이 기른 생명이라 제멋대로였고, 재주가 커지자 남의 신하가 될 마음이 사라져 용궁(龍宮)을 털고 생사부(生死簿)를 고쳤다. 하늘 조정에 초빙된 후에도 맡겨진 직무에 불만을 품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며 천정에 반기를 들어 천궁을 소란케 했으니, 가히 ‘조반(造反 반란) 제1호 원숭이’라 할 만하다.

본래 미후왕은 천궁을 뒤흔들 재주가 있었다. 그런 그가 천궁에 와서 마음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말을 기르는 직책을 맡았는데, 처음에는 모든 게 신기해서 흥이 났지만 금세 흥이 깨지고 말았다. 이상과 현실이 하늘과 땅 차이임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은 승천하여 구름 위에 올라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전히 진흙탕 속에 있었으니 그 심리적 낙담이 얼마나 컸겠는가. 조반이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해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니, 마음을 다스리기는커녕 도리어 분노만 산 셈이다.

다시 초빙되어 맡은 일이 반도원(蟠桃園)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쥐에게 쌀 창고를 맡긴 격이다. 원숭이를 너무 몰랐다. 원숭이에게 반도원은 사방이 유혹인데 어찌 안 따먹고 배기겠는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관리(管理) 방면에 누락이 있다는 뜻이다. 직원에게 일을 맡길 때는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피하게 해야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다. 그런데 빈자리가 있다고 아무나 꽂아 넣고, 특기나 취향은커녕 리스크 관리조차 하지 않았으니 너무나 성의 없이 원숭이를 기만한 것이다. 인사 문제에서 지도층이 원숭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능력을 무시했기에, 위치와 능력의 불일치가 발생했고 이것이 오공이 가장 억울해했던 핵심이다.

상사가 그저 세상 모든 상사가 범하는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 속뜻은 ‘네가 뇌물을 준 것도 아닌데 네 이상이 뭔 상관이냐’는 것이다. 오늘날 중공(中共) 사당(邪黨) 체제 내에서 최대의 생산력이 ‘관계(關係 인맥)’임을 모르는가. 인맥이 있으면 어느 자리에 가든 유능한 사람이 되고, 인맥이 없으면 어디서나 찬밥 신세인 무능한 존재가 된다. 체제 내의 인맥이 창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패, 탐욕, 사음(邪淫), 범죄, 그리고 한계 없는 타락과 끝없이 팽창하는 사람마음(人心)의 악념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인위적인 난맥상은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관리치고 탐관오리 아닌 자가 없는’ 부패를 낳았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공산 사령을 믿어서 생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무도 이 창호지를 뚫으려 하지 않는다. 진상이 그토록 보기 싫은가. 잠시 안일이라는 가짜 형상을 위해 모두가 잠든 척 자신을 마비시키고 있다. 대도태(大淘汰)가 눈앞에 있는데 잠든 척하는 것 또한 악(惡)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의 선(善)이 내일의 재앙을 막을 수 있고, 오늘의 악(惡)은 내일의 비극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삼계(三界)는 우주의 감옥이자 또한 생명 윤회의 종착역이다. 이곳에 떨어진 생명에게 유일한 희망은 정법(正法)을 수련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는 것이다. 바로 이 우주 종착역의 마변(魔變)이 우주의 원천을 오염시켰기에 비로소 정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종착역에서 원천까지 철저히 바로잡아야 하며, 낡은 규칙을 타파하고 ‘사(私)’를 제거하여 신우주의 아름다움을 개창해야 한다. 파괴하지 않으면 세울 수 없으니, 이때 비로소 반골(反骨)이 있어야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이할 용기가 생긴다. 그러므로 천정에는 반골이 필요하다. 한바탕 소동을 피우지 않으면 어떻게 폐단을 드러내겠는가. 감히 구우주의 하늘을 뚫어버려야 문제가 격화되고 비로소 해결책이 나오는 법이다. 오직 사람마음을 바로잡아야 정의와 선량함이 인성(人性)의 주도가 되어 신우주의 표준으로 바로잡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멸(滅)’로 향하게 되어, 마지막엔 정말 찌꺼기조차 남지 않게 된다.

우주의 규칙이 사람마음을 제약하지 못할 때 인간 세상에는 ‘군마가 난무(群魔亂舞)하는’ 말세의 현상이 나타난다. 삼계의 법칙에 빈틈이 생겨 하계(下界)의 마성을 누르지 못하고 상계로 반사되면, 법칙의 집행자인 각로(各路)의 신선들도 허점투성이가 된다. 인간 세상에서 닦아 올라온 원숭이 하나 단속하지 못해 말 한마디 안 듣는다고 조반이 일어나지 않는가. 게다가 조반이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되어, 원숭이가 팔을 흔들자 온갖 요왕(妖王)들이 호응하고 기세가 등등하여 위로 치고 올라왔다. 당황한 천정이 거의 절반의 신선을 동원해 무력 진압에 나섰으나 번번이 패배하여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랑신(二郎神)을 청하고서야 비로소 막상막하의 형국이 되었다. 역시 반골은 반골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이랑신은 오공의 재주와 그가 변신한 가짜 형상을 꿰뚫어 보았고, 제때 수를 읽어 오공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여기에 태상노군의 기습적인 지원까지 더해져 마침내 원숭이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랑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바로 산을 쪼개어 어머니를 구한 벽산구모(劈山救母) 본래 주인공이다.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련등(寶蓮燈)’이니 뭐니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념과 취향으로 신선을 마음대로 짜 맞춘 것이며, 명리와 관심을 끌어 사욕을 채우려 한 짓이다. 윤리 도덕이 타락한 사람의 머리로 신선이 어떠할지 상상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자 범죄다.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하여 득보다 실이 크니, 함부로 이야기를 지어내기 전에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라도 했는가? 이는 마치 오줌으로 진흙 장난을 치는 격이다. 스스로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만물을 오염시키려 하니, 남의 결백을 더럽히면 자신이 깨끗해 보일 줄 아는 모양이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어리석음이자 우물 안 개구리의 유치함이다.

이랑신은 비록 인간과 신의 혼혈이나 힘이 무궁무진했으며, 그 역시 비주류의 방식으로 도를 닦은 신선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불분명하고 어머니는 갇혀 있었기에 태생이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차별받았고 신분을 인정받지 못했다. 다행히 고인(高人)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갖췄고, 강권에 굴하지 않고 산을 쪼개어 어머니를 구했다. 그따위 예교(禮教)에 반항한들 어떠하랴. 실력으로 말하고 천정의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기에 마땅한 존중을 얻어낸 것이다. 천정의 가장 큰 특기는 싸워 이기지 못하면 초빙(招安)하는 것인데, 초빙되어도 그는 명령은 듣되 알현은 거부하며 반골 기질을 유지했다. 기저에 닿으면 은밀히 반항할지언정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마음 상태가 좋아 일을 만들지도 않지만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옳은 것은 듣되 틀린 것은 피해 갔다. 정(情)에 호소하는 카드는 거절했고, 도가 지나치면 언제든 반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이를 ‘편향을 바로잡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나타(哪吒)를 보자. 그는 영주자(靈珠子)의 전생으로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으며 재주와 법기를 타고났으나 성격이 다소 반항적이었다. 용궁의 삼태자를 죽여 작은 일을 저지르자 큰일이 닥쳤다. 대군이 압도해 오는데 친아버지는 감싸주기는커녕 효도(孝道)를 빌미로 그를 핍박해 항복하게 했다. 본인이 먼저 사고를 친 것이라 해도, 생사 앞에서 가족에게 버림받은 처지가 되었으니 인성(人性)이란 이토록 시험을 견디기 힘든 법이다. 누구라도 절망과 비통함을 느꼈을 것이다. 혈육 지간이자 예교의 관점에서도 ‘자식의 잘못은 아버지의 가르침 부족(子不教父之過)’이거늘, 아버지는 책임지기는커녕 즉시 자식 탓을 하며 아들을 내주어 재앙을 막고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며 자신만 홀가분해지려 했다. 책임감 없는 아버지에게 무슨 친정이 있겠는가. 양심도 없는 자가 어떻게 신선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타가 부활한 후 가장 먼저 아버지를 죽여 한을 풀려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타가 비록 반항적이긴 했지만 뼛속의 선량함은 오히려 줄곧 남아 있었다. 마난이 닥쳤을 때 강권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불효의 이름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고한 백성이 자신 때문에 연루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죽음을 선택했다. 목숨으로 목숨을 갚아 인과를 끝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냥 죽지는 않았다. 모든 인연의 끈을 끊기 위해 뼈를 깎아 아버지께, 살을 베어 어머니께 돌려드렸다. 친인(親人)이라는 존재가 서로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차라리 인연을 끊는 게 낫다. 본래 냉담했던 인연이 효(孝)라는 글자를 담보로 자신을 쥐고 흔들려 하니 차라리 버리는 편이 낫다. 빚이 없어야 몸이 가벼운 법, 그는 부권(父權)에 반항한 것이다. 효(孝)라는 글자 하나가 눌러오면 만능의 살상 무기가 되어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으라 하면 죽어야 한다’는 식이 된다. 예부터 어리석은 효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무책임한 부모의 죄악을 정당화했는가.

‘세상에 그른 부모는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다. 아이를 낳은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악인이라고 아이를 못 낳는가? 또한 선과 악은 일념 사이에 달려 있어, 오늘의 선인이 내일은 마변(魔變)하여 나라와 백성을 망칠 수도 있다. 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악행을 돕게 하면서 거역하지 말라는 것은 억지 논리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으나 맹종하거나 어리석게 효도해서는 안 되며, 시비곡직을 가려야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어야지, 막무가내인 부모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방치하거나 시장을 열어줘서는 안 된다. 차라리 멀리할지언정 공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흐리멍덩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제멋대로 굴 수 있는 밑천이 된다. 통제당하기를 자초해 놓고 누굴 원망하겠는가? 주관이 없다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예부터 대를 이을 대 잇는 것은 악(惡)의 연장이 아니라 선(善)의 연장이다. 자식을 오냐오냐 기르는 것이 자식을 망치는 길임을 알면서, 부모가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는 자식 또한 악과(惡果)를 책임져야 한다. 효라는 글자가 자식을 옭아매는 도구가 되고 부모는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혼이 인생 최대의 응보라면 자식은 부모의 현세보(現世報)다. 악인이 자식을 낳지 않으면 어떻게 응보를 받겠는가. 젊을 때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마음대로 살다가, 늙어서 자식의 보살핌이 필요할 때 응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성현(聖賢)이 아닌데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성현조차 자신이 완벽하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그저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었다고 성인보다 더 성스러워져서 자식 앞에서 잘못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자식이 잘못을 말하면 불효요 대역죄라니, 이게 무슨 논리인가. 전통문화 속의 ‘부자자효(父慈子孝 아버지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성스러움)’가 변질되어, 부모가 짐승 같을지라도 조금도 거역해선 안 되며 살인방화를 시켜도 따라야 한다는 식은 왜곡된 것이다. 좋은 전통 미덕이 효라는 이름 아래 국가 법치 위에 군림하고, 옛 부모들이 악행을 저질러도 율법이 관여하지 못해 자식을 사유 재산처럼 부리고 매매하며 인생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무책임한 부모들이 만들어낸 변태적인 질서다. 늙어서 덕이 없으면 도적이라 했다. 부모로서의 덕행은 내팽개치고 자식에게만 무조건적인 효도를 요구하며 다음 세대를 망치는 자들은 부모이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을 내뱉는 자들의 속셈은 가증스럽다.

모든 일은 극단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극단은 미친 짓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구우주의 폐단이다. 편향을 바로잡을 기제가 없기에 사람마음이 비뚤어지면 우주 법칙도 비뚤어지고, 오류가 생겨도 수정할 기제가 없어 계속 빗나가다가 결국 예악(禮樂)이 붕괴된다. 사람마음이 마변하여 괴멸(壞滅)로 치달아 생명의 한 시기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파괴하고 새로 만들 때 ‘위사(爲私)’의 기제를 바꾸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반복될 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찌 변화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구우주의 특성은 ‘사(私)’다. 고급 생명이 태어날 때 아무리 아름답고 무결했어도 이 ‘사’의 기제 속에서는 갈수록 비뚤어져 층층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저층으로 갈수록 이기적이며 문화를 변이시키고 인성을 왜곡하여 말세의 형상을 드러낸다. 다행히 중국 전통문화는 5천 년을 이어오며 반신(半神)의 문화로 인심을 도덕으로 제약하고 하늘을 경외하며 덕을 중시해 왔다. 정통 문화야말로 사회 발전의 주류다.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대다수 사람의 선념(善念) 덕분이다. 부자자효(父慈子孝)가 가문의 번창을 유지하듯, 선량함만이 인생의 정향(正向) 발전이자 사회의 선순환을 만든다.

왜 션윈(神韻)의 사명이 전통문화의 회복인가? 신이 사람에게 전하신 문화는 도덕을 기초로 하며, 우주 에너지 법칙과 공명하는 정향(正向) 순환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따라 이어진다면 생명의 향방은 타락이 아닌 승화로 나아간다. 순진(純眞), 순선(純善), 순미(純美)가 인류 삶의 일상이 되고 도덕 수양이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면 도덕이 타락하고 말세의 형상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생명의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났는가? 구우주의 ‘사(私)’에서 파생된 ‘정(情)’이 신전 정통 문화를 인간 세상의 반리(反理)로 변이시켰고, 이로 인해 인류의 사욕과 탐욕, 끝없는 요구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수련인에게 모든 집착은 ‘정(情)’에서 기인한다. 당신이 걸어온 길을 복기해 보라. 모든 마찰과 번거로움, 마난의 뿌리는 결국 ‘정’이 건드린 것이다. 도태된 이들 역시 100% 정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왜 일체 중생을 마음속에 담으라고 거듭 강조하는가? ‘정(情)’이라는 글자 하나가 사람의 눈을 가려 중생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마음 쓰는 것, 집착하는 그것이 바로 해당 층차의 경계다. 내려놓지 못하는 그 사람, 그 일들, 이른바 이익들은 모두 당신의 눈을 가려 중생을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마음의 집착만 보게 한다. 우주의 변두리[邊界]를 돌파하지 못하면 승화할 수 없다.

천정의 3대 반골을 다시 세밀히 들여다보라. 어느 하나 정(情)에서 시작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다만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가 다를 뿐이다. 서로 공감하지 못해 충돌이 생겼고 결국 하늘에 반기를 들었다. 세 주인공은 각자 배경이 있고 조반할 능력도 있었다. 그들은 정에 반항했지만, 정작 정 속에서 반항했다.

가만히 음미해 보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 속에서 건곤을 희롱할 뿐이네(情中舞乾坤)”(《홍음》 <회고>)가 아닌가!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휘저어도 정을 벗어날 수 없다. 정 속에 담겨 정을 반대하는 것으로는 사람을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정을 뛰어넘어 사람마음의 집착을 모두 버려야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慈悲(츠뻬이)임”(《전법륜》)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다.

중생을 가리던 가림막이 사라져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중생이 된다. 눈에, 마음에, 머릿속에 온통 중생뿐일 때 당신은 비로소 자비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자비에서 우러나온 생각은 모두 정념(正念)이며, 정념에서 나온 언행은 모두 정행(正行)이다. 정념정행 속의 사람이 바로 신(神)의 길을 걷는 수련인이다. 당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정신(正神)의 에너지를 움직이고 신의 책임을 이행하며 우주 에너지를 당신 마음대로 쓰게 되기 때문이다. 육신은 점차 고에너지 물질로 대체되어 인간 세상에서 걸어다니는 소우주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껍데기가 얼마나 더 유지되겠는가? 법정인간(法正人間)이 멀었겠는가?

대다수 제자는 수련이 언제 끝날지가 사부님께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수련이 끝나는 시간은 수련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추월을 시도해 미리 원만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이 원만하면 나는 한 사람을 받아 보낼 것이다.(圓滿一個, 我接送一個)”(《정진요지》 <무엇이 개오인가>)라고 말씀하셨다.

즉 꼭 마지막에 다 함께 원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때 닦인 사람은 언제든 원만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해내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연된다고 불평하지 마라. 당신이 앞당길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개인 능력의 문제이지 사부님의 문제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정체(整體)를 보신다. 정체가 표준에 도달해야 수련이 끝난다. 우리는 개인의 원만뿐만 아니라 중생 구도의 책임도 있음을 잊지 마라. 만약 구도한 수량이 사명에서 약속한 바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면 사부님께 시간을 더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기다릴 수 없다면 스스로 추월하여 미리 경지에 도달하라.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조차 못하고 핑계만 대며 원망한다면 정체가 결속될 때 당신의 몫이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을 지체하는 요소 중에는 당신의 몫도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무슨 원만을 말하는가. 그 어떤 사람마음이든 다 누락이다!

그러므로 3대 반골의 경험은 수련인에게 ‘정(情)’을 제거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사람마음의 집착은 곧 우리가 돌파해야 할 우주의 변두리다. 조금 떼어내면 한 층의 하늘을 돌파하는 것이요, 아까워서 쥐고 있으면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이다. 마난이 첩첩하다고 하지만 실은 사람마음이 첩첩한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마(魔)가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마가 멸한다(心生種種魔生, 心滅種種魔滅). 수련할 때 자신에게는 반드시 독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손을 써야 할 때는 주저 없이 사람마음의 집착을 도려내야 하며 모호하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또한 정을 제거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쓴 글을 보면 알겠지만, 겸손을 떨지 않고 말해서 이 정도 수준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을 제거한 효과가 상당히 좋다는 뜻이다. 과정이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결과가 좋으니 그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이 모두 가치가 있다. 하물며 이것은 내가 자원한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정을 끊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맞춤형 ‘정 제거 가족단’이 꾸려져 있었다. 한쪽은 때리고 한쪽은 맞으며 서로를 괴롭히는 양측 모두 자원했거나 계약을 맺은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미리 좀 알려주자면, 내가 태어나기 전 내 가족들은 각 세력에 의해 정교하게 선발된 이들이었다. 출처는 각기 다르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과 내가 모두 ‘살연(殺緣)’으로 맺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 속에서 서로 죽고 죽이며 누가 더 많이 죽였는지조차 모를 만큼 깊은 살연이었다.

금생에 가족으로 전생했지만, 그들은 나의 정을 제거하러 온 사명을 띤 가족들이다. 목적은 하나다. 내 곁에서 온갖 역할을 맡아 360도 빈틈없이 내 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강력한 정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내 삶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며 사흘도 편할 날이 없었다. 과정은 생략하고 효과만 보자면, 그들의 사명은 아주 훌륭히 완수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를 냉담하고 소원하게 단련시켜 주변 사람들을 거의 무시하게 만들었고, 이 진세(塵世)에서 유일한 바람이 ‘청정(淸淨)’이 되게 했다. 그 청정심이 나의 수련을 성취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성취시켜 줄 수가 없었다. 매일 내가 법을 읽는 소리를 듣고 연공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법을 읽는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고 괴로워하며, 연공 음악을 들으면 졸음이 쏟아지고 내 침대에서 쉬면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해서 아무도 내 삶을 주관하지 못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라 그들은 내 수련의 가장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잘 알았기에 어릴 때도 나를 쥐락펴락하지 못했는데 커서는 더더욱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매를 맞으면서도 조잘조잘 말대답하며 이치를 따지니,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공산당, 너는 공산당이야! 입이 쇠고 이빨이 강철이냐? 때려도 항복을 안 해!”

엄마는 항일 드라마에 세뇌되어 나를 다스리지 못하자,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드라마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나를 공산당이라고 욕한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그냥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모욕적이다. 날조된 사당(邪黨) 홍마(紅魔)를 비유해 나를 모욕하다니. 나는 주관이 뚜렷했던 것이지 사악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래서 박해가 시작되고 내가 밖으로 나가 법을 실증하다가 몇 번 잡혀가 박해를 받으니 가족들은 큰 압박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타격을 받았다. 생사의 선택 앞에서 가족들은 사악에 협조해 나의 법 실증을 방해하지 않았고 도리어 내 편에 서 주었다.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중립을 지키며 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 않았으니, 당시의 폭력적인 탄압 상황에서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이것도 내 성격 덕분이다. 어릴 때도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커서 내가 하려는 일을 누가 막겠는가. 가족들도 내가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굳이 악역을 자처하며 헛수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사악에 타협하지 않아 박해를 받은 것이니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러니 정을 끊는 데 도움을 주면서도 수련은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사명을 잘 완수한 셈이다.

보답으로 나는 그들이 득법하여 수련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지붕 아래 살며 한솥밥을 먹으면서 법을 듣고도 득법하지 못하니 내 마음도 참 답답하다. 내 가족조차 득법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감도 느끼지만, 집이란 본래 이치를 따지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달변가라 해도 상대가 제대로 대화하려 하지 않으니 소통이 안 되었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아마 때가 되지 않았거나 인연이 나에게 있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계약할 때 ‘득법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 정을 그토록 확실히 제거했겠는가.

어떤 이유든 그들의 사명은 완성했다. 내 사명은 중생 구도다. 낡은 모든 것은 타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정법이란 바로 모든 바르지 못한 요소를 바로잡는 것 아닌가? 희망은 모든 중생에게 열려 있다. 나는 모든 중생이 구도받기를 희망한다. 비록 이것이 쌍방의 선택이라 해도, 나는 중생을 위해 왔으니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희망은 충분히 주어졌고 기회도 언젠가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다.

서약을 맺을 당시 구세력의 장난이 섞여 있고 많은 마난이 강요될 것을 알았지만, 정을 끊는 것은 정법 완수를 위한 나의 제1 보장(保障)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차라리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정면 돌파하는 게 낫다. 모든 음모를 밝은 곳에 드러내어 어둠 속에서 해코지하는 것을 막고, 일찌감치 정을 떼어 제1 보장을 탄탄히 하고자 했다. 명리정구(名利情仇)에서 일찍 벗어나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오도록 도와준다면, 훗날 법을 얻었을 때 물 만난 고기처럼 사명을 완수하는 게 훨씬 수월할 테니 얼마나 큰 이득인가 싶어 계약에 동의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나 많기에, 장차 짊어질 사명이 클수록 감내해야 할 능력도 커야 했다. 그러니 정을 제거하는 정도 역시 모호해서는 안 되었다. 아주 작은 차이로도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법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 나는 자신에게 냉혹해져야 했다. 장차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세(下世)의 첫 칼날을 자신에게 겨눠야 했던 것이다.

속인 시절에 일찌감치 모든 정연(情緣)을 끊고 업력을 소멸하여 얽매임이 없어야만, 법을 얻은 후 가벼운 몸으로 필요한 순간 모든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다. 구세력은 내가 계약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정을 제거해 준다는 핑계로 ‘정겁(情劫)’을 강요하며 저질 드라마 같은 일들로 나를 불쾌하게 하려 했다. 나는 단호히 반대하고 계약을 거부했다. 업력이 있다면 회피하지 않겠다, 원수를 친인으로 대하는 것도 받아들이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하지만 업을 갚는 방법은 많고 정을 떼는 길도 여러 가지다. 내가 굳이 최악의 선택지를 골라 정욕과 색욕의 더러운 구덩이에서 내 근기를 오염시킬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이런 악의(惡意)는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빚을 갚을 순 있어도 ‘연애 뇌(戀愛腦)’는 사절이며 정겁(情怯)은 단호히 거부했다.

나는 인간 세상에 조사정법(助師正法)하러 왔는데 여전히 목적이 명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법과 무관한 일은 다 무시해도 상관없다. 온유향(溫柔鄉)에 빠져 머리를 망치러 온 게 아닌데 왜 정욕을 방종해 자신을 더럽히겠는가. 온유향을 버리고 깨끗한 몸으로 수련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수련에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것이며 가장 차(差)한 것은 고르지 않을 것이다. 구세력은 내게 어쩔 도리가 없자 포기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겁 계약을 만들어냈다. 가소로운 일이다. 마음이 움직여야 겁(劫)이 되는 법,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몽환이고 물거품일 뿐이다. 내 마음이 요지부동인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쳐봐야 눈길 한 번 줄 가치도 없다.

나는 이미 사부님과 서약을 했으니 속세에서 일생은 오직 사명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외의 것은 무시해도 좋다. 반석 같은 마음이 있다면 어디든 못 가겠는가. 홍진 속의 연마에서 마음이 움직이면 겁이 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몽환이자 물거품일 뿐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心不動) 모든 번뇌와 험난함을 피할 수 있다. 정념정행을 유지하기만 하면 이른바 마난이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무형에서 소멸할 수 있다.

물론 나의 배짱은 사부님에게서 내원한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많다. 우주 대법을 주시지 않았는가! 경서를 펼치기만 하면 전 우주와 연결되고, 마음이 고요해져 주파수만 맞으면 우주 에너지와 공명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의 근기(根基)도 있다. 나의 주원신·부원신은 모두 사부님께서 직접 고르신 것이며 원신의 그 조합은 매우 강력하다. 핵심은 근원이 바르니 문제없고 우주에 박힌 뿌리도 단단하다. 이것을 두고 사부님이 편애하신다거나 누구는 많이 주고 누구는 적게 주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뿌리는 우주에 박혀 있고,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안배하신 길은 모두 정법필성(正法必成)의 길이며 주신 것은 모두 최상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감당 능력과 근기가 다른 것뿐이다. 수련의 길은 어찌 천만 갈래뿐이겠는가마는, 사부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은 모두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길이며, 진수(眞修)하기만 하면 모두 원만(圓滿)할 수 있다. 사부님의 안배에는 문제가 없으며, 모든 제자에게 정법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맞춤형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당신이 미혹의 장애를 깨뜨리고 수련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실 뿐이다.

문제는 당신이 그것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어야 할 것은 이미 다 주셨으니, 얼마나 받아낼 수 있는가는 온전히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며, “스승은 문으로 인도하지만,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다”라는 말처럼 남을 원망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수련은 쌍방향의 동행이다. 뿌리는 이미 신우주(新宇宙)에 내려 주셨고 길도 다 닦아 놓으셨으니, 당신이 수련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시는데, 당신은 여전히 그곳에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뭇 신(神)들이 얼마나 애가 타겠는가!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서 발로 두어 번 차주고 싶을 지경이다. 때려도 가지 않고 끌면 오히려 뒤로 물러나니, 인간 세상의 그 사소한 일들이 그렇게도 미혹되는가? 마음을 닦고 욕망을 끊는 것이 정녕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인간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미련을 두며 놓지 못하는가?

심지어 사부님께서는 속인들조차 당신의 신체 안에 거두어 구도 받을 기회를 충분히 주셨다. 그렇다, 사부님께서는 그토록 자비로우셔서 단 한 사람도 낙오시키지 않으려 하신다. 도태될 것이 뻔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감당하시는데, 나는 가끔 사부님이 안쓰러울 정도다. 어떤 이들은 그토록 큰 은혜를 입고도 배은망덕하게 제자를 박해하고 또 구도받지 못하니 참으로 헛수고다.

요컨대 여전히 어떤 사람과 일들이 내 감정을 건드리고, 분별심(分别心)이 생기면 곧 저항이 발생하니 자비심이 부족한 탓이라 부끄럽다! 앞으로 더 닦아야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