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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재대략(雄才大略), 천고일제 한무제전 (3)

【한무제전】 3: 유학을 숭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백가를 불러들여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두태황태후가 살아있을 때는 황로학(黃老學)을 숭상하며 신정(新政)을 저지했다. 갓 즉위한 한무제는 효도를 다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치적 조치를 잠시 미루고, 가슴속에 품은 제국의 청사진을 감춘 채 몇 년간 도광양회(韜光養晦)하며 한가한 황제 노릇을 했다. 이 기간에 한무제는 겉으로는 산수에 취해 사냥을 즐기고, 상림원(上林苑)을 확장하며 문인들과 시부를 읊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결코 국가 대사를 잊지 않았다.

건원(建元) 5년(기원전 136년), 두태황태후가 갑자기 위독해져 정사를 돌볼 겨를이 없게 되자, 한무제는 박사관을 회복시키고 이전에 파면했던 유생들을 다시 불러들이며 유학 존숭의 서막을 다시 열었다. 이듬해(기원전 135년) 두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무제는 더 이상의 거리낌이나 장애 없이 대안 왕조를 강성(强盛)하게 이끄는 길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무제가 다시 조정을 장악한 이듬해, 그는 대신들을 소집해 국가 방침을 논의했다. 『천인삼책』을 지어 한무제와 뜻이 깊게 통했던 동중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동중서는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파출백가, 독존유술(제자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학만을 존숭함)’을 제안하며, “태학을 설립하고 명사(明師 밝은 스승)을 두어” 국가 인재를 양성할 것을 건의했다. 장애물이 사라진 대일통의 갈망자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정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董仲舒在《天人三策》中,提出“兴太学、置明师”的建议,明师即古代的博士官。图为元赵雍的《先贤图卷》局部。(公有领域)

동중서는 《천임삼책(天人三策)》에서 태학을 설립하고 명사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명사란 고대 박사관을 말한다. 사진은 원대 조옹(趙雍)의 《선현도권(先賢圖卷)》 중 일부분. (공유영역)

오경박사(五經博士)

유가 문화는 도덕 교화를 매우 중시하여 이를 천하를 다스리는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교화의 작용을 실현하려면 완비된 교육 제도가 필수적이었다. 동중서는 『천인삼책』에서 학교를 일으키고 교사를 증설해 인재를 양성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림에 교화를 큰 업무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선비를 기르는 일 중 큰 것은 태학보다 큰 것이 없으니, 태학은 현사(賢士)들의 관문이며 교화(敎化)의 본원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태학을 일으키고, 명사(明師)를 두어 천하의 선비를 기르고, 자주 시험하여 그 재능을 다하게 하시어 영준한 인재를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중서가 말하는 ‘명사(明師)’는 경전에 밝은 스승, 즉 조정의 박사관(博士官)을 의미한다. 태학과 박사는 고대부터 이미 존재했다. 태학의 ‘태(太)’는 ‘제일’을 뜻하며, 중국인은 높고 크고 지극하고 최고인 것에 태양, 태공(太空), 태자(太子)와 같이 ‘태’ 자를 붙였다. 즉 태학은 천자가 관장하는 중앙 대학인 최고 학부를 뜻한다.

상고(上古) 시대에 이미 고등 학부(學府)가 있었는데, 동중서는 “오제(五帝) 시대에는 대학을 성균(成均)이라 불렀다”라고 했다. 하·상·주 삼대의 대학 명칭은 각기 달랐으며, 서주 시대에 ‘태학’ 혹은 ‘대학’이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당시의 태학은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라 제사, 연회, 무사 선발, 작전 계획 논의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서야 태학은 오로지 경전을 전수하는 중앙 관학(官學)이 되었다.

고대의 박사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박사라는 명칭은 전국시대에 시작되어 제자를 가르치는 직능을 가졌다. 진시황 시기에는 박사가 70명에 달했는데 유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파나 시부, 방술(方術), 복서(卜筮)에 능한 이들도 포함되었다. 진조(秦朝)의 박사는 제례를 관장하는 태상(太常)에 예속되어 교육보다는 고금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조정 고문의 역할을 했다.

한은 진의 제도를 이어받아 제자백가마다 모두 박사가 있었다. 서기전 136년, 한무제는 『역(易)』과 『예(禮)』 두 경전에 박사를 증설하여, 문제·경제 때 세워진 『서(書)』, 『시(詩)』, 『춘추(春秋)』 박사와 합쳐 ‘오경박사’를 두었다. 이 오경은 오늘날 ‘사서오경’의 오경이며 모두 유가 경전이다. 당시 한무제의 이 조치는 두태황태후의 반대를 사지 않았는데, 태황태후가 병중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한무제가 단지 박사 기구를 보완했을 뿐 신정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중서의 건의는 박사와 태학 제도를 결합해 경술(經術)로 인재를 만드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경박사는 한초의 박사관과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박사가 태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전국시대의 독립성을 회복하고 학술성이 강해졌다.

둘째, 박사가 다시 제자를 가르치는 직능을 얻어 최고 학부의 학관인 ‘천하종사(天下宗師)’가 되었다.

셋째, 가장 큰 변화로 ‘독존유술(獨尊儒術)’이 국가 제도가 되었다. 즉 유학자 외에 다른 학파는 박사가 될 기회를 잃었다. 또한 유학자라 하더라도 오경의 범주 내에 있어야만 박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진정한 함의였다.

한무제의 ‘독존유술’은 주로 ‘공양춘추학(公羊春秋學)’을 추앙했다. 이는 『공양전』으로 『춘추』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공양춘추학이 강조하는 존왕(尊王), 중앙의 최고 권위 수호, 대일통 등의 ‘춘추대의(春秋大義)’가 한무제의 웅대한 포부와 깊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태학은 국가를 위해 우수한 유가 학자와 관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무제의 통일 대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청대 원요(袁耀)가 그린 《한궁추월입축(漢宮秋月立軸)》의 부분도이다. (공유 영역)

태학의 완비

건원 6년(기원전135년) 두태황태후가 서거하자 한무제의 외삼촌 전분(田蚡)이 복귀해 승상을 맡았다. 이듬해인 원광(元光) 원년(전134년), 한무제는 다시 현량방정(賢良方正)한 유생들을 불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 1등을 차지한 이는 60대의 노유생 공손홍(公孫弘)이었다. 그는 동중서와 마찬가지로 공양춘추를 연구한 대유(大儒)였다. 공손홍은 40세에 비로소 『춘추』를 공부하기 시작해 60세에 현량으로 추대된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

원광 원년 대책에서 한무제가 천인(天人)의 도(道)를 묻자, 공손홍은 천자가 몸소 바르게 서서 백성에게 신의(信義)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의 절검,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낮춤,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 8가지 치국안민책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에는 유가의 인의와 덕정(德政)뿐만 아니라 법가의 능력 위주 임용과 분명한 상벌 등이 섞여 있었고, 이는 한무제의 치국 이념과 일치했다.

처음에 관리들은 공손홍의 글을 하등으로 분류했으나, 한무제가 보고 1등으로 발탁했다. 이후 공손홍은 박사를 거쳐 좌내사(左內史), 어사대부, 승상에 올랐으며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지는 등 문신의 영수로서 승승장구했다.

공손홍의 주요 공헌은 한무제의 ‘유술 존중’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데 있다. 원삭(元朔) 5년(기원전124년), 한무제는 학문을 부흥하라는 조서를 내려 “듣기로 백성을 예(禮)로써 인도하고 악(樂)으로써 교화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예가 무너지고 악이 어지러워졌으니 짐은 이를 매우 민망하게 여기노라. 그러므로 천하의 널리 듣고 아는 선비들을 상세히 불러 모아 모두 조정에 추천하게 하였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학문을 권장하게 하고, 널리 들은 바를 강론하고 의논하며, 빠진 것을 찾아내고 예를 일으켜 천하의 앞선 본보기로 삼게 하라. 태상은 박사 제자를 두는 일을 논의하여 향당(鄕黨)의 교화를 숭상하고 현능(賢能)한 인재들을 격려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 조서에서는 예악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태상에게 박사 제자를 두는 일을 상의하게 했다. 이에 승상 공손홍이 태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조치를 마련했다.

1. ‘삼대(三代)의 도’를 따라 천하 ‘교화’를 위해 중앙의 관학을 먼저 정비하고 지방으로 확대한다.

2. 박사관에게 정식 제자 50명을 둔다. 18세 이상 중 용모가 단정한 자를 선발하며 이들에게는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준다.

3. ‘제자처럼 수업을 듣는다’고 불리는 청강생 제도를 두었다. 군국과 현(縣), 도(道), 읍(邑)에서 학문을 좋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엄숙히 지키고 향리에서 순응하여 행동에 어긋남이 없는 우수한 청년들을 추천한다. 이들은 군수나 국상(國相)의 심사를 거쳐 사실임이 확인되면 태상에게 보고되어 청강생이 되었고 청강생은 정해진 인원 제한이 없다.

4. 정기적인 고시 및 임용 제도를 마련했다. 1년이 지나면 시험을 치르도록 규정해, 만약 한 가지 이상의 경전에 능통하면 문학장고(文學掌故) 결원을 보충하게 하고, 성적이 특히 우수한 자는 낭중(郎中)으로 삼는다. 재능이 낮거나 한 가지 경전도 통달하지 못한 자는 퇴학시킨다.

한무제는 공손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사(京師)에 태학(太學)을 설치하고, 학문이 가장 깊은 홍유(鴻儒) 5명을 선발해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삼았으며, 가장 우수한 청년 50명을 선발해 박사제자(博士弟子, 태학생)로 삼았다. 학생의 학습 과목은 오경(五經)이었으며, 시험을 통해 그중 일예(一藝)에 통달한 자에게는 하급 자문 관직을 수여하고, 우수한 자는 황제의 시종인 낭중으로 충원했으며, 더욱 뛰어난 자는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건원(建元) 연간에 태학을 일으키고 오경박사를 둔 것부터 원광(元光) 연간의 박사제자 제도에 이르기까지 태학 제도는 완비되기에 이르렀다.

태학을 일으킨 것과 상응하여 지방과 군국(郡國)에도 잇달아 학교를 개설하고 학관(學官)을 두었으며 학관제자(學官弟子)를 배치했다. 《한서‧순리전(循吏傳)》에서는 “무제 때에 이르러 천하의 군국으로 하여금 모두 학교관(學校官)을 세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무제가 전국 범위에서 유가 교육을 보급한 것은 유학의 진흥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사(博士)는 조정의 관리였기에 박사제자 중 우수한 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경학(經學)은 정치 및 벼슬길과 긴밀한 연락을 갖게 되었다. 한대(漢代) 조정에는 많은 명신(名臣)이 경학 대가이거나 박사제자였다. 《한서‧유림전(儒林傳)》에서 말한 “공경대부와 선비, 관리들이 문채가 뛰어난 문학 선비였다”는 성황이 나타났다. 이렇게 학문이 우수하면 벼슬을 하는 제도는 천하의 독서인(讀書人)들이 경학 연구에 매진하게 했고, 이를 관리로 임용되는 통로로 삼게 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공손홍은 개인의 만년에 재상에 오르고 후(侯)에 봉해진 필생의 경험을 통해 동시대 문사(文士)들의 경학 학습 기풍을 이끌었다. 《한서‧유림전》에서는 “공순홍이 《춘추》를 잘해 승상이 되고 후에 봉해지니, 천하의 학사들이 바람을 따르듯 휩쓸렸다”라고 하였다.

경제 발전과 국력이 성장함에 따라 서한(西漢) 태학의 규모는 끊임없이 확대되어 박사제자가 서한 시기에 많게는 천 명에 달했고, 동한(東漢) 말년에는 3만 명까지 증가했다. 태학은 국가를 위해 우수한 유가 학자와 관리를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무제의 통일 대업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태학을 일으키고 오경박사와 박사제자를 두는 등의 정치적 조치를 통해 한무제는 유학이 황로학(黃老之學)을 대체하고 중화 왕조의 정통 통치 사상이 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유학의 이러한 주류 지위는 청조(淸朝)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백가를 모두 불러들이다

한무제가 실시한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은 문화적인 전제(專制)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학설을 배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가를 멸절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파출백가”는 단지 제자백가를 학관(學官)에서 물러나게 한 것뿐이었다. 유학을 관방 학문으로 확립한다는 전제 아래 한무제는 문화, 학술, 사상 영역에서 “백 가지 학문을 모두 불러들인다(悉延百端之學)”는 전략을 실행했다. 그의 시정 사상에는 왕도(王道), 즉 유가뿐만 아니라 패도(霸道)인 법가, 도가, 음양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유가 학설 자체는 포용성이 강한 사상으로, 오경 중 《역경》은 도가와 음양가의 경전이기도 하며 《서경(書經)》은 하, 상, 주 삼대의 행정 법전이었다.

《사기‧귀책열전(龜策列傳)》에서는 “금상(한무제)이 즉위하여 예능(藝能)의 길을 넓게 열고 백단의 학문을 모두 불러들이니, 한 가지 기예에 통한 선비들이 모두 스스로 힘을 다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한무제는 즉위 후 학관에 유가만을 쓴 것 외에 다른 방면에서는 널리 예능의 길을 열고 백가의 학문을 전면적으로 초빙했으며, 특정 기능에 정통한 인재를 불러들여 각자의 장점에 따라 적재적소에 임용했다.

어떤 이는 곁에서 모시며 군신의 두터운 뜻을 다했고, 어떤 이는 공경의 자리에 올라 평생의 문무 재능을 펼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전조(前朝)의 황로학을 받들던 노신 급암(汲黯)은 무제 시기에도 여전히 중용되어 형양령, 중대부, 태수, 도위를 역임했다. 유명한 혹리(酷吏) 장탕(張湯)은 법가(法家)의 대표로 법 적용은 엄격했으나 관직 생활이 청렴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고 태중대부, 정위(廷尉), 어사대부(御史大夫 부승상)를 지냈다. 주부언(主父偃)은 종횡술에 능했는데 상소를 올려 일을 논한 것이 감식안에 들어 평민 신분으로 낭중에 봉해졌고, 1년 내에 네 차례나 파격 승진하여 관직이 중대부(中大夫)에 이르렀다. 민간에서도 한무제는 각 유파의 활동을 동일하게 허용했다.

한무제는 확실히 유가 학설을 중시했음에도 한 유파에만 얽매이지 않고 통일 대업을 위해 여러 학설 중 유용한 부분을 취해 사용했다.

项羽入驻咸阳后,火烧咸阳宫和秦始皇陵,造成了对中国文化的巨大破坏。图为清袁江的《阿房宫图屏》局部。(公有领域)

항우가 함양에 입성한 후 함양궁과 진시황릉을 불태웠는데, 이는 중국 문화에 막대한 파괴를 가져왔다. 그림은 청대 원강(袁江)이 그린 《아방궁도병(阿房宮圖屛)》의 일부분이다. (공유 영역)

산실된 문장을 수집

유교를 존숭하든 백가를 불러들이든 이는 모두 문화 학술에 대한 한무제의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전국의 문화 학술 활동은 유교 존숭으로 인해 쇠락하기는커녕 더욱 번영했다. 한무제가 문화에 기여한 또 다른 큰 공헌은 대규모로 전대(前代)의 전적과 문장을 수집하여 이를 한조(漢朝)의 주요 문화 사업으로 삼은 것이다.

초한전쟁 시기 항우가 진의 도읍인 함양(咸陽)에 입성한 후 함양궁과 진시황릉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 대화재는 중국 문화에 거대한 파괴를 가져왔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고생스럽게 구축한 모든 기록물과 선진(先秦) 이래의 수많은 문화 전적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초나라 사람의 한 차례 횃불에 가련하게도 초토가 되었다”는 말처럼 진나라 이전의 화하(華夏) 전적은 거의 모두 불타버렸다.

한 초기 조정은 유서(遺書)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한서‧예문지》에 “편적(篇籍)을 크게 거두고 책을 바치는 길을 넓게 열었다”라고 기록되었으나, 전문 관리와 구체적인 조치가 부족하여 수집 성과는 현저하지 않았다.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도 사회에는 여전히 “책은 빠지고 죽간은 벗겨졌으며 예는 무너지고 악은 망가진” 문제가 존재했고, 한무제 역시 이를 두고 “짐이 매우 가엽게 여긴다”라며 탄식했다.

한무제는 한 초 유서 수집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삭(元朔) 5년 내린 조서에서 경전 문헌 수집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학문을 권장하게 하고, 널리 듣고 의논하여 일실된 것을 찾아 예를 일으킴으로써 천하의 앞장이 되게 하라.” (《한서‧무제기》) 여기서 “거유(舉遺)”는 바로 고대의 흩어진 글을 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한무제는 일련의 조치를 전개했다. “이에 장서(藏書)의 책략을 세우고 책을 베껴 쓰는 관리(寫書之官)를 두었으며, 제자백가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부(秘府)에 채웠다.” (《한서‧예문지》)

그는 전문 기구와 관리를 설립하고 고서를 필사할 죽간을 만들었으며, 수집된 제자백가의 학설, 예악 경적, 시사가부(詩詞歌賦) 등 천하의 문장을 모두 국가 도서관에 소장하게 했다. 《수서‧경적지》에는 한무제가 승상, 태사령, 태상, 박사관에게 천하의 서적을 찾을 책임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앙에서 실전된 경전을 강력히 구하자 지방 군국에서도 이를 다투어 본받았다. 비교적 유명한 인물로는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을 꼽을 수 있는데, 《한서‧경십삼왕전(景十三王傳)》에 따르면 헌왕은 “백성으로부터 좋은 책을 얻으면 반드시 잘 베껴서 돌려주고 진본은 남겨두었으며, 금과 비단을 더해 하사하여 사람들을 불러모았다”라고 한다. 백성들이 진귀한 서적을 바치면 헌왕은 사람을 시켜 부본을 복사하고 진본을 보존했으며 책을 바친 사람에게 두둑한 상을 내렸다. 이에 당시 학자들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헌왕에게 모여들어 조상이 남긴 장서를 바쳤으며, 헌왕 한 사람의 장서량이 조정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또한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는 공자의 옛집을 허물어 자신의 궁전을 확장하려다가 벽 속에서 《상서(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등 수십 편의 고적을 뜻밖에도 발견했다. 공자 집 벽 속에서 나온 이 고서들은 한 조정의 장서와 비교했을 때 《예기》는 39편, 《상서》는 16편이나 더 많았으며 고전(古篆)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통칭 “고문경(古文經)”이라 불렸다. 오경박사들이 사용하던 경서는 한나라 예서(隸書)로 쓰여 세상에서 “금문경(今文經)”이라 불렸다. 고문경은 결국 모두 한무제에게 진상되어 조정의 장서를 풍부하게 했으며, 경학 영역에서의 금고문(今古文) 논쟁도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대 유서를 찾는 행동은 한무제에 의해 강력히 주도되어 대한(大漢) 왕조를 관통하는 문화적 풍조가 되었다. 방대한 고문헌이 발굴, 정리, 소장되어 인간 세상에 다시 나타남으로써 한대의 경학, 사학, 문학, 예술 등 각 문화 영역의 흥성함에 중요한 추진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서한의 역사학자 사마천(司馬遷) 부자는 바로 풍부한 고문헌의 도움을 받아 “천인(天人)의 경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한” 거작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유서 수집의 또 다른 큰 문화적 공헌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7/29/n1141756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