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관직은 있으되 직무가 없어 한가로이 거처하고,
이곳저곳 구경하며 자재함을 누리네.
할 일 없이 노닐다 시비(是非)를 만드니,
닥쳐온 화는 모두 유혹에서 비롯된 것이라네.
有官無職逍遙居
東遊西逛享自在
無事閑遊生是非
禍來全由誘惑生
본래 평온하게 날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어느덧 운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을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원숭이가 그저 누워서 게으름을 피우려 해도 운명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누군가 상소를 올리자 옥제(玉帝)가 일을 맡겼는데, 하필이면 반도원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전공’에 딱 들어맞는 배치였다. 원숭이가 반도원 근처에 살며 매일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면서도 사악한 마음을 내지 않았거늘, 옥황상제가 그를 유혹의 중심지로 밀어 넣은 셈이다. 원숭이가 복숭아를 보고 어찌 음식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과일은 인간에게는 부식이지만 원숭이에게는 주식이다. 먹이사슬상의 미식(美食)을 눈앞에 둔 것이다. 식량 창고를 맡겼으니 편하게 훔쳐 먹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통치자가 이 점을 몰랐을까? 혹은 원숭이의 정력(定力)을 시험하려 했던 것일까? 유혹 앞에 놓인 순진한 원숭이는 언제나 후과를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 식욕이란 이토록 시험을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원숭이는 기쁜 마음으로 반도원에 들어갔다. 나무마다 꽃이 만발하고 가지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요지(瑤池)의 서왕모가 재배한 것이니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토지신을 불러 물어보니, 3,000년 만에 익는 것은 사람이 먹으면 신선이 되어 몸이 가벼워지고, 6,000년 만에 익는 것은 사람이 먹으면 안개처럼 날아올라 장생불사한다고 한다. 9,000년 만에 익는 것은 사람이 먹으면 천지와 수명을 같이하고 일월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한다.
보라, 이 유혹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이 정도면 수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복숭아 하나만 훔쳐 먹으면 천지와 공존하며 81난(難)을 다 건너뛰고 그 자리에서 신선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수련의 지름길이 아닌가. 이 유혹이 당신에게 닥친다면 당신은 막아낼 수 있겠는가?
식욕을 소홀히 보지 마라. 욕망(欲)은 본래 뿌리가 같으며 모두 마성(魔性)의 현현이다. 다만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고 사람에게 주는 체험이 천차만별이라 좋고 나쁨을 분별하기 어려울 뿐이다. 수련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색욕(色慾)이라 사악한 생각이 올라오면 즉시 청리(淸理)할 줄 안다. 하지만 식욕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형편이 허락하는 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배부르고 따뜻해지면 음욕을 생각한다(溫飽思淫欲)”는 말이 있고, “음식과 색은 사람의 본성이다(食色性也)”라는 말이 욕망을 방종하는 변질된 핑계로 쓰임을 잊지 마라.
인과의 관점에서 보면 음식물 또한 육도윤회 속에 있다. 식물이나 축생으로 전생한 업력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한 것은 형벌이자 빚을 갚는 과정이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기에 태어나면 먹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의지하는 식물의 종류들은 사실 원수든 친구든 채권자들이 전생한 결과다. 미혹 속에 있는 사람은 이를 모르며, 알아도 믿지 않고, 믿어도 입맛의 유혹을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니 이 세상에 오자마자 업을 짓는 일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음식을 취하는 것과 식욕을 채우기 위해 무분별하게 살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생존을 위해서는 채식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다. 선념(善念)을 품고 채권자들에게 생존의 공간을 더 많이 내어주는 것 또한 원한을 선해(善解)하는 한 방식이다. 누군가를 먹으면 공업(共業)이 생긴다. 상대의 신체가 내 배 속으로 들어왔으니 영양을 섭취함과 동시에 업력 또한 흡수되는 것이 공평하다. 이는 생령을 내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나, 상대는 자원한 것이 아니라 도륙당한 살기(戾氣)를 품고 복수의 기회를 엿보며 빚을 받으려 대기하게 된다.
“전생에 그가 내게 빚진 것이니 내가 먹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말하지 마라. 그렇다면 왜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해지는가? 이번 생의 가해자는 전생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전생에 죽임을 당해 이번 생에 목숨을 찾으러 오는 것이 모두 인과응보 속에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맞는 것 같지만, 목숨을 앗아 복수를 하고 빚을 받아 정산했을지라도 그 결과로 사형을 당해 또 하나의 목숨이 희생되니, 이 굴레가 언제 끝나겠는가. 정말 끝이 없다. 우주의 이치는 ‘선(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마음이 선을 향해야만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악을 향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며 도태의 대상이다. 말법말세(末法末世)가 바로 그렇게 온 것이다.
전생 전의 맹파탕(孟婆湯)은 우리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모든 전생의 기억과 은원정구(恩怨情仇)를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다. 빚을 받으러 온 자를 만나면 내면의 선량함을 유지하여 원한을 풀어야지 맺어서는 안 된다. 빚을 갚으러 온 자를 만나면 탐욕을 다스려 탐내지 않는 것 또한 일종의 선량함이다. 과하게 취하지 마라. 인생은 쉽지 않으니 타인을 놓아주는 것이 곧 자신을 놓아주는 길이다. 손해 보고 이득 보는 것을 눈앞의 일로만 보지 마라. 빚 독촉을 포기하면 타인은 복보(福報)로 되돌려줄 것이며, 얼마 남지 않은 덕(德)이 당신에게 보충될 것이다. 복분이 쌓이면 천명을 어기고 운명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람은 좌절이나 타격을 겪을 때면 늘 시간이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함정과 지뢰를 피하고, 다시는 속거나 상처받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전생의 기억을 잃은 것 자체가 이미 다시 시작한 상태다. 다만 업력에 이끌려 미혹이 너무 깊기에 꿰뚫어 보지 못하고 피하지 못하며,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뿐이다. 미혹되지 않는다면 어찌 전생에 당신을 죽인 사람과 사랑에 빠지겠는가. 이번 생에 당신에게 온갖 정성을 다한다 해도 전생에 당신을 죽일 때는 손속에 자비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일수록 전생에 당신에게 빚진 것이 많다. 이번 생에 그 요구가 지나치면 서로 사랑하다가도 서로 죽이는(相愛相殺) 관계로 변해 증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오직 선량해야 한다. 오직 ‘선(善)’만이 악연을 풀 수 있다. 내면의 선량함이 없다면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숙명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神)은 삼계를 만들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 전생하기 전 맹파탕을 마셔 기억을 지운 것은, 사람이 채권자를 대할 때 다시 선택하게 하려는 의도다. 원한을 내려놓고 선해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나고 업력을 지우며, 인과응보를 뛰어넘어 본심(本心)을 비추고 생명의 경지를 높일 수 있다. 삼계의 유일한 장점은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선을 향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만약 사람의 몸을 얻고도 신의 형상을 빌려 악을 행한다면, 설령 그것이 채권자(債主)에게 목숨을 되찾는 일이라 할지라도 신에 대한 범죄다. 신이 사람에게 윤회의 기회를 준 것은 사람마음이 선을 향하고 악념(惡念)을 제거하여 생명의 경지를 높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람이 수련하여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삼계가 존재하는 의미이자 인생의 의미인 반본귀진(返本歸眞)이다. 사람의 선량한 본성으로 돌아가야만 신과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는 법률이 있고 도덕의 제약이 있다. 전생의 은원(恩怨)이야 어찌됐든 금생의 행위만을 보며,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면 대가를 치르고 법의 제재를 받게 한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분명 더 나은 선택, 생명이 본진(本真)으로 회복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악을 행하니 좋은 가죽(인피)을 허비한 셈이다. 특히 대법(大法)이 널리 전해지는 때에 태어나 정법(正法)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럼에도 진언(眞言)을 듣지 않고 불법(佛法)을 외면하며 참된 신을 믿지 않는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기심에 눈이 멀어 영혼과 육신의 요구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양심을 저버리고 악한 마음을 내어 업력에 끌려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니 대도태(大淘汰)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얻고도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면 거두어가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다스리지 못하면 하늘이 다스린다. 태어나기 위해 줄 선 생명은 차고 넘친다.
이것은 자비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주 특성인 진·선·인(眞·善·忍)이 자동으로 생명의 거취를 선별하는 것이다. 말세의 도태와 지구의 갱신이 이루어질 때, 신우주의 에너지가 침투해 오면 우주 법칙과 상반되는 패괴(敗壞)된 물질은 순식간에 해체된다. 만약 사람의 사상이 지옥 이하에 머물러 있고 업력이 몸에 가득하여 가장 낮은 급의 에너지를 띠고 있다면, 강력한 정(正)의 에너지는 패괴된 물질을 순식간에 해체할 것이며 육신은 가루조차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내면이 선량하여 우주 에너지와 주파수가 맞아야만 동화될 수 있다. 악을 행하는 자는 패괴된 물질과 주파수가 같기에 함께 도태된다. 결국 악을 짓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베푸는 최대의 선행이다.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손해와 이득을 따지고 있는가? 무형(無形)이 유형(有形)을 결정함을 잊지 마라. 유형적인 것은 육신이요 무형적인 것은 영혼이다. 육신의 욕망으로 영혼을 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자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스스로를 구하는 길은 어둠 속을 계속 걷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교정하며, 자신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다. 구세력(舊勢力)이 바로 그렇게 왔다. 말세의 도태를 알면서도 누락을 고치려 하지 않고, 사심(私心)을 품은 채 신우주로 들어가려 하니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정법(正法)하기 때문인데, 바로잡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잡는 것은 바로 법을 빗나간 그 낡은 일체이다. 과거의 바르지 못했던 것, 그것들이 이미 세력을 형성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었는데, 이런 것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부면(負面)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미국서부법회설법》)
내가 이해하기로, 구세력이 바로 구우주를 성주괴멸로 이끄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면서도 이 화근을 품은 채 신우주로 들어가려 하니, 이것이 정법의 유래이며 정법이 바로잡는 것이 바로 이 이기적인 것들이다. 문제는 우리 정법제자들 또한 구우주의 생명이라는 점이다. 이 화근이 되는 생명의 요소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기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련의 법보가 ‘안으로 찾는 것(向內找)’이다. 법(法)으로 내면을 비추어 이러한 결점을 찾아내고 모든 낡은 기제를 바꾸어,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이 원숭이도 속세의 습성을 면치 못했다. 비록 육신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라 태생부터 기점이 높았지만 이 세상의 물질을 먹고 생존하며 영성(靈性)이 오염되었고, 멋대로 거만해져 위사(爲私)의 마성을 촉발했다. 반도원에 들어서자마자 군침을 흘리며 독차지하려 했다. 좋은 것을 누가 싫어하겠는가만, 문제는 그것이 당신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단지 당신의 욕구가 크고 때마침 관리직을 맡았을 뿐이다. 원숭이는 나무마다 반도가 익어가는 것을 보며 유혹을 참지 못하고 다른 신선들을 따돌린 채 몰래 따 먹었다. 그러고는 만족감에 젖어 이 복숭아들이 마치 자신의 미각(味覺) 세포를 위해 자라난 것이라 여겼다. 이 복숭아들이 서왕모의 사유 재산임을 알면서도 점유욕이 생겨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장기적으로 훔쳐 먹을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가 닥쳤다. 서왕모가 연회를 베풀고 보각 요지를 개방해 반도성회(蟠桃盛會)를 준비하며 칠선녀에게 복숭아를 따오라고 명했다. 반도원에 들어온 선녀들은 큰 복숭아가 거의 남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잘 익은 것은 이미 원숭이가 다 훔쳐 먹은 뒤였다. 간신히 반쯤 익은 복숭아 하나를 발견해 가지를 잡아당기자, 배불리 먹고 잠들어 있던 원숭이가 깨어났다. 훔쳐 먹은 사실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펼쳐질 차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