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4: 출신을 따지지 않고 재능만으로 천거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 시대는 인재가 구름처럼 모이고, 세상을 다스릴 능력있는 신하들이 떼를 지어 나오던 황금시대였다. 한무제의 곁을 둘러싼 역사적 명신과 전설적 인물들은 문장으로는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고, 무장로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있었으며, 유사(儒士)로는 동중서와 공손홍, 법률에는 조우(趙禹)와 장탕(張湯), 재정에는 상홍양(桑弘羊), 음률에는 이연년(李延年), 사절로는 장건(張騫)과 소무(蘇武), 탁고(托孤 후계자를 부탁) 대신으로는 곽광(霍光)과 금일제(金日䃅) 등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이 신하들은 어떤 이는 특정한 재능을 갖추었고, 어떤 이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며 품격이 고결했으니, 그들이 한무제 주위에 모여 모두 걸출한 공헌을 했다.
반고는 『한서』에서 한무제를 위해 쓴 찬어(贊語)에서 “드디어 해내(海內)에 묻고 그 빼어난 인재들을 천거하여 그들과 함께 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한무제는 어진 이를 구함에 목마른 듯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 오직 재능만으로 인재를 뽑아 불후의 공업을 세웠다. 한무제는 사람을 알아보고 쓰는 면에서 흉금이 넓고 독보적인 혜안을 갖추었기에, 인재의 왕성함이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의 다른 시기를 훨씬 초과했다. 반고는 이 때문에 “한이 인재를 얻음이 이때에 이르러 성대해졌다”라는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
역대 왕조마다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夏), 상(商), 서주(西周) 시기에는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 벼슬과 봉록을 세습)’를 실행했고, 전국시대에는 ‘군공작(軍功爵 군공으로 작위를 주는 것) 제도’와 ‘양사(養士)’가 나타났으며, 진대(秦代)에는 주로 ‘벽전(辟田 농지 개척)’과 군공(軍功)을 관직 선발의 근거로 삼았고 또한 천거 제도도 나타났다.
지난 편에서 우리는 한무제가 태학을 일으키고 박사와 제자를 두어 경학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관리선발 제도를 만들어 국가를 위해 덕과 재능을 겸비한 우수한 관원들을 대거 양성했음을 알았다. 한무제는 유학을 존숭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의 인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진 이를 구함에 목말라했다. 그의 곁에 있던 명신들 중 경학(經學) 출신의 유생은 일부에 불과했다. 한초와 비교하여 한무제는 ‘찰거제(察舉制)’를 위주로 한 다양한 관리 선발 제도를 확립하여, 국내에서 대규모로 어진 이와 선비를 초빙해 그가 전무후무한 한무성세(漢武盛世)를 개창하는 것을 보좌하도록 보장했다.
한초의 관리 선발
한초(漢初)에는 여러 제도가 초창기여서 관원의 임용 제도 또한 완비되지 못했다. 비록 한초의 풍운아들이 많이 나타났으나, 장상(將相)과 공경(公卿)들은 부유하거나 귀하거나 친족이 아니면 안 되었기에, 보통 사람들 특히 가난한 집안의 학자들은 묘당(廟堂 조정)에 발을 들이기 매우 어려웠다. 한무제 이전 관리 선발 제도는 주로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귀족제다. 대다수 조대의 건국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는 것이기에 공에 따라 상을 논하며 후(侯)나 왕(王)에 봉해지는 자가 매우 많았다. 예컨대 한초에 한고조에 의해 열후(列侯)로 봉해진 사람이 백여 명에 달했다. 당시 조정의 공경과 지방 장관은 거의 모두 열후 이하의 군공 귀족 중에서 선임되었다. 고조부터 경제까지 한초 12명의 승상이 있었는데 모두 열후 집단에서 나왔고, 15명의 어사대부도 절대다수가 열후 출신이었다.
둘째는 임자제(任子制)다. 『한관의(漢官儀)』 기록에 따르면, 관원의 봉록이 2천 석 이상이고 임기가 만 3년인 자는 그 자제 중 한 명을 임명하여 낭관으로 봉할 수 있었다.
셋째는 자선제(資選制)다. 즉, 일정한 재력이 있는 평민 백성은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일반적인 표준은 “재산이 많으면 낭(郎)이 되고, 적으면 리(吏)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한문제 때는 자선의 재산 표준이 가산 10만으로 중산층 가문에 해당했다. 장석지(張釋之)는 일찍이 5백만 가산을 빌려 상시랑(常侍郎)이 되었고 결국 정위(廷尉)까지 올랐다. 경제 말년에 이르러 자산 표준은 4만으로 내려갔다.
이 외에도 한초의 역대 황제들은 현사(賢士)를 매우 존중했다. 한고조는 구현조(求賢詔 어진 이를 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제후국 및 각 군현 내에서 널리 어진 이와 선비를 모집했다. 지방 장관이 인재를 발견하면 직접 권면하고 격려하여 그들을 승상에게 천거했고, 공거(公車 나라에서 운영하는 수레)로 정중히 경사로 보내 조정의 등용을 기다리게 했다. 이러한 모집 방식은 훗날 찰거제와 징소제(征召制 인재를 직접 부르는 제도)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재 모집은 한초에 제도와 규모를 형성하지 못했다. 한무제 이전까지 한 조정은 단 두 차례의 인재 초빙과 두 차례의 효렴(孝廉) 천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초빙된 인재 역시 매우 제한적이었고, 수많은 인재가 민간에 묻힌 채 진정한 명군(明君)이 그들을 발굴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동중서는 『천인삼책』에서 한초 선관 제도의 폐단을 촌철살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관리와 군수들은 대개 낭중(郎中) 출신이고, 낭중은 또 고관의 자제 중에서 선임되는데, 부귀한 신분만 믿고 있어 현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관리의 공로를 심사할 때는 관직이 적합한지를 보았지 벼슬을 오래했는지 여부는 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시간이 오래되면 관리는 임기에 따라 승진하고, 청렴한 자와 뻔뻔한 이가 섞이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지 않으니, 진정한 현재(賢才)들이 배척당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동중서는 개선책도 제시했다. 각 제후, 군수 혹은 기타 고관들이 매년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관리와 백성 중 현재 두 명을 추천하여 궁정에서 직무를 맡기게 하고, 만약 천거된 사람이 정말로 현능하면 천거한 관원을 포상하고 그렇지 않으면 징계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제후와 고관들이 전심으로 어진 인재를 찾아 나설 것이며, 천하의 덕과 재능이 있는 자들이 모두 황제를 위해 쓰일 수 있다고 믿었다.
한무제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을 지녀 즉위 후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성취하고자 했으니, 수많은 동량 인재들의 보좌가 절실했다. 이에 동중서의 건의는 그의 마음과 매우 부합했다. 그렇다면 한무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더 나은 관리 선발 방식을 채택해 천하의 엘리트들을 끌어모았을까?
오직 재능만으로 천거(唯才是舉)
알다시피 ‘찰거제’는 한나라의 가장 전형적인 관리 선발 제도로, 아래에서 위로 추천하고 인재를 평가하는 관리 선발제도다. 이 제도는 바로 한무제 시기에 정식으로 확립되고 완비되었다. 한문제 때부터 그는 “현량방정(賢良方正)하고 직언으로 극간(極諫)할 수 있는 자를 추천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대책(對策)’ 즉 시험 절차를 정했다. 즉 추천된 자가 시험을 거친 후 정부가 재능에 따라 등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추천된 사람들은 대부분 추천자의 친척이나 친구였기에 현재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들은 후 찰거의 범위와 강도를 높여, 이것이 중국 역사상 과거제 이전의 가장 주요한 인재 선발 방식이 되게 했다.
원광 원년(기원전134년) 겨울, 한무제는 즉시 조서를 내려 지방 군국에서 효(孝)와 렴(廉)을 각각 한 명씩 추천하게 했다. 이른바 ‘효’는 효자를 가리키고 ‘렴’은 청렴한 관리를 가리키는데, 그들은 모두 지방에서 품덕이 우수해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무제가 찰거 범위를 확대한 조치는 일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자기 자제들이 순조롭게 관직에 나가기 어려울까 봐 걱정했고, 이에 일부 지방에서는 “재야에 버려진 인재가 없다(野無遺賢)”는 보고를 올렸다.
한무제는 화가 났지만 이 관원들을 벌하지 않고 대신 조서 한 통을 초안하여 천하에 찰거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대신들에게 토론하게 했다. 그는 조서에서 “짐이 군국에 효자와 청렴한 관리를 추천하라 명한 것은 본보기를 세워 성인(聖人)의 사업을 계승하기 위함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자가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 어떤 군현은 현인을 단 한 명도 추천해 올리지 않았다. 예로부터 인재를 추천한 자는 큰 상을 받았고 인재를 억누른 자는 벌을 받았다. 이제 2천 석 관원, 예관(禮官), 박사들은 현재를 천거하지 않은 죄명을 논의하라”고 했다.
찰거를 담당한 관원들은 신속히 논의 결과를 보고했다. “효자를 천거하지 않는 것은 조서를 받들지 않는 것이니 대불경죄로 다스려야 하며, 청렴한 관리를 천거하지 않는 것은 직무에 태만한 것이니 즉시 면직시켜야 합니다.” 한무제는 이를 전국에 공포했다. 조서가 내려진 후 각지 관원들은 더 이상 태만하지 못하고 앞다투어 현재를 천거했다. 수많은 천거된 현덕(賢德)한 이들이 시험을 통과하여 조정에 들어왔다.
『통전(通典)』의 기록에 따르면,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 한무제는 다시 선발 규칙을 세분화하는 조서를 내렸다. 군국의 인구가 20만 명이면 매년 한 명을 추천하고, 40만 명이면 두 명을 추천하는 식이다. 동시에 찰거의 4대 과목을 정했는데, 한문제 때의 효렴(孝廉)과 현량(賢良) 두 과목보다 훨씬 완비된 것이었다.
“첫째는 덕행이 고결하고 지조와 절개가 맑고 깨끗한 자,
둘째는 학문에 통달하고 수행이 깊어 경전이 박사에 합당한 자,
셋째는 법령에 밝고 익숙해 의문을 결단하기에 충분하고 문건을 살펴 문책할 수 있어 관직이 어사(감찰관)에 합당한 자,
넷째는 강인하고 지략이 많아 일을 당해 미혹되지 않으며 간사함을 비추기에 충분하고 결단력이 용맹하여 재능이 삼보(三輔 수도 인근 지방관)의 수령에 합당한 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4과 표준에 따라 분류했을 때 ‘덕(德)’을 위주로 하는 것에 효렴, 효렴방정(孝廉方正), 지효(至孝), 돈후(敦厚)과가 있었고, ‘경학’을 위주로 하는 명경과(明經科 여기서 경은 오직 유가 경전만을 뜻함), ‘문법’을 위주로 하는 명법과(明法科 율령에 밝은 인재 선발), ‘재능’을 위주로 하는 것에는 용맹하여 병법을 알거나 음양과 재이(災異)를 아는 유도(有道) 등의 과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과목은 덕행을 우선으로 했으며 학문상으로는 유학을 위주로 했다. 이것이 바로 한무제가 동중서의 ‘존유술’을 추진하기 시작한 구체적인 체현이었다.
원봉 5년(전106년), 한무제 초기 문무(文武) 명신들이 대부분 은퇴하거나 사망하여 조정에 인재가 절실해지자, 한무제는 ‘무재이등(茂才異等)’ 과를 증설하는 조서를 내렸다. 즉 오직 재능만으로 뽑는 것이며, 특히 장상을 맡거나 외국에 사절로 나갈 수 있는 특수한 인재를 구한 것이다.
한무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덕과 재능이 있는 사람을 최대한 선발했다. 후대 제왕들이 끊임없이 완비함에 따라 한대의 찰거제는 추천 시기에 따라 찰거하는 과를 나눴다. 즉 매년 정기적으로 선발하는 상과(常科) 즉 세과(歲科)와 특정한 시기에만 선발하는 특과(特科)로 나뉜다. 상과에는 효렴, 무재(茂才 수재), 찰렴(察廉), 광록사행(光祿四行) 등이 있었는데 이중 효렴과가 가장 중요했다. 특과 또한 상견특과(常見特科)와 일반특과(一般特科)로 나눴는데 현량방정이 가장 중요했다.
찰거제는 한무제가 휘황찬란한 제업(帝業)을 열고 강력한 기초를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1,300년 동안 실행되어 중국 고대의 중요한 관리 선발 제도가 되었다.

한무제 시기에는 재능 있는 관리나 백성이 조정에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서술하여 직접 글을 올릴 수 있었는데, 이를 북궐상서(北闕上書) 또는 공거상서(公車上書)라 불렀다. 그림은 원대 조옹(趙雍)의 《선현도권(先賢圖卷)》 일부다. (공유 영역)
벼슬길을 넓히다
찰거제와 태학의 인재 양성 제도 외에도 한무제는 인재를 최대한 선발하기 위해 더 유연한 관리 선발 방식을 취했다. 조정이 낮은 자세로 두터운 예물을 갖추어 직접 초빙하는 것은 물론, 재능 있는 자가 직접 자신을 추천하여 황제와 대화하는 것도 허용했다. 개명하고 다양한 선관 제도는 한무제의 곁에 진정한 실력을 갖춘 수많은 명신이 모이게 했으니, 한무제 시대야말로 “재야에 버려진 인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수 6년, 한무제는 박사관(博士官) 6명을 선발하여 각지로 보내 천하의 현능한 은사들을 찾아 황제에게 추천하게 했고, 이로써 ‘징소제’를 한나라의 큰 관리 선발 제도로 정식 확립했다. 징소란 천자가 덕망이 높고 학식이 깊으며 재능이 있으나 관직에 나가길 꺼리는 사람에 대해 예관을 보내 정중한 예절로 맞이하고 조정의 관리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청하는 것이다. 응한 자는 천자가 직접 알현하고 시험 없이 바로 관직을 수여했다. 징소도 명확한 초빙 대상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일반 징소와 개별 징소로 나뉘었다.
징소제는 한무제 즉위 초부터 실행되었는데, 그는 안거포륜(安車蒲輪 바퀴를 부들로 감싼 편안히 앉는 수레)와 비단과 옥을 더해 성대한 예우로 매승(枚乘)과 노 땅의 신공(申公)을 모셔와 어진 이를 예우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춘 전형이 되었다. 원광 5년(기원전 117년) 한무제는 다시 징소령을 내렸다. 관리든 백성이든 정무에 밝고 학식과 재간이 있으면 상경하는 관원의 인도를 받아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고, 여정 중의 음식도 정부가 제공했다.
삼국 시기의 조조가 『시경』의 “푸른 그대의 옷깃, 아련한 나의 마음”을 빌려 현재에 대한 존중과 갈구를 표현했듯이, 한무제의 인재 초빙 성의 또한 이 조서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또 다른 방식은 재능 있는 관리나 백성이 상서를 올려 자천(自薦)하며 조정에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서술하는 것으로 ‘북궐상서’라 불렸다. 조정의 궁전 북쪽 문루에서 상서를 받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자천하는 사람은 ‘공거령(公車令)’이라는 기구에서 접대하고 관리했으므로 이 방식은 ‘공거상서’라고도 불렸다. 상서하여 일을 논한 자가 정말로 재능이 있으면 역시 중용되었으며 출신을 묻지 않았다. 한무제는 북궐상서를 매우 중시하여 항상 직접 읽고 인재를 선발했다.
서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동방삭(東方朔), 주매신(朱買臣), 주부언(主父偃) 등의 명신들이 바로 이 방식으로 선발되었다. 예컨대 동방삭은 성격이 해학적이고 언사가 민첩하며 지혜롭기로 유명했는데, 그가 처음 한무제에게 올린 상서는 무려 3천 개의 죽간을 사용해 두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웠고 한무제가 두 달을 꼬박 들여서야 다 읽었다고 한다. 황제가 그토록 긴 시간을 들여 읽게 한 동방삭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주매신은 젊은 시절 영락한 서생으로 40대까지 나무를 해다 팔며 살았고, 조정에 상서를 올렸으나 한참 소식이 없다가 다행히 중대부(中大夫)로 있던 같은 고향 사람 엄조(嚴助)의 추천을 받아 한무제를 배알했다. 주매신이 춘추와 초사를 강의하자 한무제는 감탄하며 그를 중대부로 봉했고, 훗날 동월국 평정의 계책을 낸 공으로 태수에 봉했다.
주부언 또한 상서를 올린 당일 부름을 받아 낭중이 되었고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훗날 한무제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국에 ‘추은령(推恩令 제후의 땅을 여러 자제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을 선포하여 제후국을 약화시킨 중대한 건의가 바로 주부언에게서 나왔다.

위자부(衛子夫)는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천거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수려한 머릿결을 통해 한무제의 총애를 얻었다. 그림은 명(明) 구주(仇珠)의 《여악도축(女樂圖軸)》 국부. (공유 영역)
한 가지 틀에 얽매이지 않다
위의 여러 방식을 통해 한무제는 천하의 수많은 현능한 인재를 모았다. 또한 영웅은 출신을 묻지 않는 법이니, 한무제의 인재 기용은 한 가지 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천하의 현재를 모두 내가 쓴다는 넓은 기상을 보여주었다. 제1편에서 언급했듯이 무릉의 두 산 모양 배장묘의 주인공인 위청과 곽거병은 출신이 비천했으나 무공이 아주 높고 군사적 재능이 출중했다. 그들은 외척임에도 한무제의 신뢰와 중용을 받아 흉노를 평정한 불후의 군공을 세우며 서한의 명장이 되었다.
『사기』에 따르면, 위청의 어머니 위온(衛媼)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노비였으며 1남 3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 딸인 위자부가 바로 유명한 한무제의 두 번째 황후다. 위온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위청을 낳았다. 위청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비참해서 친부의 집에서 자라며 오랫동안 학대를 받았다. 장성한 후 위청은 평양공주의 기노(騎奴 말을 타는 노비)가 되었다. 한번은 위청이 사람들을 따라 감천궁에 갔는데, 한 죄수가 그의 관상을 보고 “귀인의 관상이니 관직이 봉후(封侯)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위청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노비의 자식으로 매질이나 면하면 다행인데 어찌 공을 세워 후가 되는 것을 논한단 말이오?”라고 했다.
건원(建元) 2년(기원전139년), 18세의 소년 천자 한무제는 패상(霸上)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에 평양공주를 방문했다. ‘금옥장교’의 주인공 진황후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기에 평양공주는 고모인 관도공주를 본받아 남동생인 무제에게 미녀를 추천했다. 위자부는 감동적인 노래 실력과 아름다운 머릿결로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궁으로 들어갔다. 누나 위자부의 지위가 변함에 따라 위청도 건장궁에서 직무를 맡게 되었다. 약 1년 후 위자부가 임신하여 총애가 더욱 깊어지자, 진황후의 어머니 관도공주는 위청에게 화풀이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다행히 위청의 친구 공손오가 먼저 그를 구해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위청은 화가 복이 되어 이 일이 한무제를 놀라게 했고 그의 부름을 받았다. 한무제는 그의 재능을 중히 여겨 건장궁감, 시중, 태중대부로 삼았고 이때부터 위청이 비로소 귀해지기 시작했다.
원광 6년(전129년)부터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흉노를 정벌했고,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승리하며 서한의 북방 강역을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품행이 단정하고 인재를 존중하며 자신의 사람을 기르지 않았기에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지고 관직이 대사마 대장군에 이르러 조정 내에서 정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위청이 병으로 죽은 후 ‘렬(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이는 “무력으로 공을 세우고 덕을 지켜 업을 존중했다”는 뜻이다. 그의 묘는 혁혁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음산(陰山)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평생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끝까지 잘 마쳤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극진한 영예를 얻었다.
한편, 곽거병은 위자부 언니의 사생아로 말하자면 위청의 외조카이다. 특이한 신분 때문에 곽거병은 어린 나이부터 기사와 검술 등 무예를 배웠고, 17세에 한무제로부터 표요교위(驃姚校尉)로 봉해져 두 차례 위청을 따라 막남(漠南) 깊숙이 들어가 흉노를 공격했다. 두 차례 출정 모두 군 중에서 용맹함이 으뜸이었기에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2년 후 곽거병은 표기장군의 신분으로 계속해서 흉노를 토벌하여 한무제가 하서(河西) 지역을 통제하도록 도왔고 서역으로 가는 길을 닦는 기초를 마련했다. 흉노인들은 이 때문에 민요 한 구절을 남겼다. “우리의 기련산을 잃으니 가축이 번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연지산을 잃으니 여인들의 얼굴빛이 사라졌구나!” 그는 외삼촌 위청과 함께 대사마에 가봉되었으나 이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무덤은 기련산 모양으로 만들어져 제릉에 배장되었으니 그가 흉노를 평정한 기이한 공적을 드높였다.
곽거병과 위청 두 사람 외에도 한무제 곁에는 수많은 전설적인 인재들이 있었다. 예컨대 고명대신 금일제는 흉노 포로였고, 경제 전문가 상홍양은 당시 차별받던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무제의 인재 사랑과 아낌 덕분에 국가의 굳건한 대신이자 휘황찬란한 성세를 창조하는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5/n11433372.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