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6: 책략으로 흉노와 대전(大戰)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연호는 서한(西漢)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나타났으며, 연호는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이다. 이전의 제왕은 재위 년수만 있었고 연호는 없었다. (요우쯔/에포크타임스)
원광(元光) 4년(기원전 129년)부터 군비를 닦아온 한무제는 흉노와 장기적인 군사적 대결을 시작하여 용성, 안문, 오르도스, 막남(漠南) 등지에서 격렬한 전쟁을 펼쳤다. 그중 비천한 출신인 위청은 불세출의 군사적 재능과 고결하고 청렴한 품성으로 전쟁마다 으뜸가는 공을 세워, 흉노에게 일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大漢)의 국위를 떨쳐 나라 안팎을 열광시켰다.
위청은 탁월한 군공으로 장군과 제후(侯)의 반열에 올라 무제 치세의 명실상부한 제일 명장이 되었다. 이때 또 한 명의 눈부신 장성(將星)이 혜성처럼 등장했으니, 바로 위청의 외조카 곽거병이다. 두 대장이 손을 맞잡자 한의 군대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 되어 대 사막을 누비며 연전연승했다. 두 사람은 한무제를 보좌해 수십 년간 변방을 위협하던 최대의 환란을 해결했으며, 한무제 일생 중 가장 현격한 무공을 성취했다.
두 차례의 정양(定壤) 출격
한무제 즉위 이래 한·흉 사이에 네 차례 교전이 있었는데, 위청의 용병이 뛰어난 덕에 한군이 전승을 거두자 흉노는 더 이상 한을 얕보지 못했다. 그러나 패배에 불복한 이치사 선우는 얼마 후 다시 1만여 기병을 보내 대군(代郡)을 침범하고 도위(都尉) 주영(朱英)을 살해하며 천여 명을 약탈해 갔다.
원삭(元朔) 6년(기원전123년) 봄, 한무제는 새로 대장군이 된 위청에게 공손오, 이광 등 여섯 장수와 10여 만 기병을 이끌고 정양에서 출격해 흉노를 치게 했다. 이 전투에서 위청 등은 수천 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정양 일대에서 군을 정비했다.
그해 가을, 위청은 다시 정양에서 출격해 음산을 넘어 흉노 1만여 명을 사살했다.
두 차례 정양 전투에서 한군(漢軍)은 총 1만 9천 기를 섬멸했다. 이 전역에서 한군은 이전의 임시 편제 방식에서 벗어나 중, 좌, 우, 전, 후군을 세우고 위청이 통일 지휘하며 강노군을 직접 장악함으로써 협동 작전 능력을 높였다. 이는 한무제의 용병 이래 군대 편제가 가장 치밀했던 사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두 번째 전역에서 한의 두 번째 명장인 17세의 곽거병(霍去病)이 처음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800기만 이끌고 수백 리를 추격해 흉노 2천여 명을 베고, 선우의 조부 격인 자약후산(藉若侯產)을 죽였으며 선우의 숙부인 나고(羅姑)와 흉노의 상국(相國)이나 당호(當戶 흉노의 관직) 등 고위 관료들을 포로로 잡아 무사히 귀환했다. 한무제는 그의 공이 전 군에서 으뜸이라 하여 ‘관군후(冠軍侯)’에 봉했다.
곽거병의 행보는 위청과 비슷하게 첫 등장부터 이름을 떨쳤다. 그는 강인한 성격에 지용(智勇)을 겸비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무제를 따랐다. 한무제는 그가 비범한 장수의 재목임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표요교위(驃姚校尉)에 임명해 출전시켰다. 과연 곽거병은 청출어람의 기세로 위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수가 되었다.
둘째는 기원전 138년 서역으로 떠났던 사절 장건(張騫)이 10여 년 만에 나타나 한군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지형과 수초(水草)에 밝았던 덕분에 한군은 사막 깊숙이 들어가서도 굶주림과 갈증을 면했다. 그는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흉노에 10년간 억류되었다가 대월지(大月氏)에 도착했고, 천신만고 끝에 기원전 126년 한조로 탈출해 돌아와 곧바로 흉노 정벌에 참여했다. 장건은 그 공으로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상술한다.
한무제(漢武帝)는 군대를 파견하여 정양(定襄)을 두 차례 공략함으로써 대 흉노 작전의 전과를 확대했으며, 흉노 주력을 잠시 막북 일대로 퇴각시켜 한의 국경에서 멀어지게 했다. 이는 한무제가 다음 단계인 하서(河西) 전투를 전개하고 승리를 거두는 데 필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하서 전투
하서(河西)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도 불리며, 황하 서쪽에 위치하여 얻은 이름이다. 서한(西漢) 시대에는 지금의 감숙성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등지를 가리켰으며, 내지에서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로서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가졌다. 당시 하서주랑은 흉노가 통제하고 있었으며 한의 측면을 위협하고 있었다.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열고 서역 각국과의 연락을 강화하며 서부 지역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무제는 하서 전투를 전개하며 다시 한번 뛰어난 전투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원수(元狩) 원년(기원전 122년), 1만여 명의 흉노병이 다시 몰려와 상곡(上谷)에서 수백 명을 살해했다. 이듬해 봄, 한무제는 반격전을 조직하고 겨우 20세인 곽거병(霍去病)을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하여 하서로 출정시켜 흉노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했다. 표기장군은 대장군(大將軍)과 품계가 대등했기에 이러한 임명은 많은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빈 일부 장군들은 그를 고립된 군대로 깊숙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한무제는 흉노를 상대하려면 기이한 장수와 기이한 병법을 써야 한다고 여겼다.
곽거병은 과연 한무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곽거병은 정예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농서(隴西, 지금의 감숙 임조臨洮)를 출발하여 언지산(焉支山, 지금의 감숙 산단 대황산)을 넘어 하서주랑의 흉노를 공격했다. 그는 기습 공격 전법을 채택하여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영지 1천여 리를 깊숙이 파고들어 6일간 대전을 벌였다. 이어 그는 고란산(皋蘭山) 아래에서 흉노인들과 격전을 벌여 연전연승하며 적 9천여 명을 섬멸하고 절란왕(折蘭王)과 노후왕(盧侯王)을 참살했으며, 혼야왕(渾邪王)의 태자와 상국(相國), 도위(都尉) 등 여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심지어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금인(金人)까지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이번 전투는 흉노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무제 역시 매우 기뻐하며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금인을 감천궁(甘泉宮)에 모시고 곽거병에게 큰 상을 내렸다. 한무제는 또한 이 용맹한 소년 장군을 위해 저택을 지어주려 했으나 곽거병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는데 어찌 집을 돌보겠습니까?”
곽거병은 평소 말수가 적었으나 이 말은 기개가 구름을 찔러 나라를 위해 집을 잊는 애국의 명언으로 천고에 전해지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한무제는 흉노인을 하서주랑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양면 작전 책략을 채택했다. 곽거병이 다시 한군 주력을 이끌고 출격하여 서부전선에서 전장을 개척하고, 동부 전선의 군대는 주력을 지원하기 위해 장건(張騫)과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에서 길을 나누어 출발하여 좌현왕(左賢王)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전황은 순조롭지 못했는데, 이광의 4천 선봉대가 4만 적군에게 포위되어 사상자가 절반을 넘었고 서부 전선의 공손오(公孫敖)는 기일을 어겼다.
다행히 곽거병이 직접 이끄는 기병의 승전보가 잇따랐다. 그의 군대는 서북에서 동남으로 출격해 1천여 킬로미터를 종심 타격하며 흉노 휴도왕과 혼야왕의 영지를 공격했다. 기련산(祁連山) 아래에서 곽거병은 하서 흉노 주력과 결전을 벌여 3만여 명을 살상하고 흉노 대왕 등 70여 명을 생포했으며, 상국과 도위가 2천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나중에 흉노 혼야왕이 투항을 거부하는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 부중(部眾)을 거느리고 한에 항복했다. 한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항복한 흉노 혼야왕 부대에 대해 개명(開明)한 군주 한무제는 너그럽게 위무하고 예우를 갖추었다. 그는 혼야왕을 만호후(萬戶侯)에 봉했는데 이는 한대 후작 중 최고 등급으로 위청(衛青) 및 곽거병과 같은 항렬이었으며, 다른 소왕(小王)들을 열후(列侯)로 봉하고 수백만 전의 재물을 하사했다.
하서 전투의 승리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그들은 한무제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눈과 사람을 쓰는 담력에 잇달아 찬탄했다. 젊은 곽거병 역시 위청과 똑같은 영예를 얻었다. 하서 전투로 흉노는 서부 전장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병력의 10분의 3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가 떨어져 오랫동안 회복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한조의 통치가 하서 지역까지 뻗어 나갔고, 한조의 강역(疆域)도 하서주랑 전체와 황수(湟水) 유역, 즉 지금의 청해호 동쪽 및 기련산 동북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한조는 차례로 주천, 무위, 장액, 돈황, 금성 등 다섯 개 군(郡)을 설치했다. 한무제는 또한 이전에 투항한 4만 명의 흉노인을 이들 다섯 군(五郡)에 안치하고 그들의 생활 습속과 사회 제도를 존중하여 큰 독립성을 유지하게 했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오속국(五屬國)이라 부른다. 원래 황수 유역에 모여 살던 강인(羌人)들은 더 서쪽 지역으로 쫓겨났고 그들과 흉노의 연락은 끊어졌다. 중원에서 서역으로 향하는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며, 한무제는 흉노의 오른팔을 자른다는 전략적 목표를 실현하여 장차 더 큰 규모의 흉노 반격을 전개할 가능성을 마련했다.
막북 전투
하서 전투와 혼야왕의 투항으로 흉노는 이미 한조 서부 변경을 침범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오른팔은 잘렸어도 왕정(王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수 3년(기원전 120년), 흉노는 다시 수만의 병마를 집결시켜 빈번하게 동부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백성과 재산을 약탈했다. 한무제는 서부의 병마를 대거 동부로 이동시켜 흉노 주력에 대응하게 했으며 그들과 결사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1년여의 준비를 거쳐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행군 거리가 가장 길고 휘황찬란한 대규모 섬멸식 원정인 막북(漠北) 전투를 발동했다. 위청과 곽거병은 당연히 군대를 통솔할 적임자였으며 노장 이광(李廣)도 그중에 있었다. 위청은 군대를 이끌고 흉노 좌현왕(左賢王)에 맞섰고, 곽거병은 흉노 선우(單于)를 직접 공격했다. 이번 전역에는 총 10만 기병과 수십만 보병 및 운송병이 동원되었다. 위청과 곽거병은 각기 5만 기병을 거느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대막(大漠)으로 깊숙이 들어갔으며, 곽거병은 2천여 리를 더 들어가 낭거서산(狼居胥山, 지금의 몽골 울란바토르 부근)까지 이르렀다. 예상과 달랐던 점은 위청이 마주친 대상이 흉노 선우였고, 곽거병이 마주친 대상은 흉노 좌현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곽거병이 정양에서 출발했을 때 포획한 흉노 포로로부터 이치사(伊稚斜) 선우가 이미 동쪽으로 갔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한무제는 곽거병에게 대군(代郡)에서 출발하게 하고 위청은 정양에서 출발하게 하여 막북에서 합류해 선우를 합동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위청은 군대를 이끌고 사막 속을 천 리나 질주하여 선우의 군대와 만나 격전을 벌였다. 노련하고 기지 넘치는 위청은 유인책을 사용하여 선우의 주력 1만 9천 기를 섬멸했으며, 선우는 수백 명의 친위병 보호를 받으며 도주했다. 위청은 다시 경기병에게 명하여 200여 리를 필사적으로 추격하게 했으나 이치사 선우는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다.
곽거병 쪽은 사막으로 2천여 리를 깊숙이 들어가 좌현왕의 주력을 소탕하고 흉노 한왕(韓王), 장군, 상국 등 8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젊은 장군은 승리 후 낭거서산 주봉에 높은 대를 쌓고 돌에 공적을 새겼으며, 성대한 열병식을 거행하여 한조의 위엄을 과시했다. 막북 대전은 휘황찬란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한군 자체의 손실도 막대했다. 1만여 명의 병사가 전장에서 전사하고 10만여 필의 말을 잃었으며, 명장 이광은 길을 잃어 약속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하자 관리의 심문을 받기 원치 않아 분개하며 자결했다. 그는 평생 후(侯)에 봉해지겠다는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광난봉(李廣難封)’이라는 유감을 남겼다.
하지만 막북 전투의 승리는 한나라에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강력하고 흉맹하여 몇 번이나 한 제국을 위협했던 흉노 제국이 완전히 궤멸되어 흉노인들은 먼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후 상당 기간 ‘막남무왕정(漠南無王庭)’, 즉 선우든 흉노의 다른 왕이든 대막 이남에 정권을 세우지 못했다. 한조를 백 년간 위협하던 변방의 우환이 기본적으로 해결된 것이며, 이러한 결과는 한무제의 웅심(雄心)과 담력, 기백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한무제는 계속해서 흉노를 타격하고자 병마를 모집하며 준비했다. 안타깝게도 기원전 117년, 일대(一代) 명장 곽거병이 겨우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무제는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린 것 외에도 변경 오군의 철갑병을 동원해 장안에서 무릉(茂陵) 동쪽 곽거병의 묘까지 줄을 서게 했다. 또한 곽거병의 무덤을 기련산 모양으로 만들게 하여 흉노를 물리친 그의 기공(奇功 기이한 공적)을 기렸다.
10년 후 위청도 세상을 떠났다. 한무제는 무릉 동북쪽에 음산(陰山) 형상의 무덤을 만들어 위청을 장사 지내게 했다. 그 후 한무제는 그들처럼 걸출한 장수를 다시는 찾지 못했고 흉노에 대한 심층적인 섬멸전도 더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막북 전투 이후 흉노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한조는 강역이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더욱 통일되어 장성 안팎에 말과 소가 뛰놀고 가축이 들판에 가득한 평화로운 풍경을 회복했다.
이 몇 차례의 흉노 출정 대전은 위청과 곽거병 두 대장군이 장졸들을 거느리고 용맹하게 싸운 장거일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지휘한 한무제의 역할 또한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선 한무제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눈이 있어 신인을 과감하게 중용했다. 또한 한무제 본인 역시 군사 가로서 전술적 기회의 포착, 장수 파견 및 전략 수립을 직접 결정했다. 정사에는 한무제가 곽거병을 아껴 손무와 오기의 병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곽거병이 “계책이 어떠한가를 보아야지 고대 병법을 배우는 데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모략이지 고대 병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무제 스스로 병법에 정통했기에 곽거병을 남다르게 보고 중점적으로 양성할 수 있었으며 작전의 관건적인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소무목양(蘇武牧羊)
원수 5년(기원전 118년)부터 한조와 흉노는 화친과 휴전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치사 선우가 먼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한나라의 일부 대신들은 흉노를 완전히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신을 보내 선우를 설득하게 했다. 선우는 이 말을 듣고 당연히 분노하여 한 사신을 구류했고, 한조 역시 흉노 사절을 구류하니 양측의 인원수가 비슷해졌다. 이 기간에 흉노가 소규모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으나 큰 영향은 없었으며, 한무제는 곽거병의 죽음과 서남쪽 변경을 평정하는 일로 바빠 흉노와 전쟁을 지속하지 않았기에 한나라와 흉노의 접경 지대는 한동안 평온을 유지했다.
4년 후 새로운 선우 오유(烏維)가 즉위하며 새로운 화친 협상이 시작되었다. 한무제는 흉노에 신하가 될 것을 명확히 요구했고 선우는 크게 노했으나 감히 군대를 내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화친 관계를 유지했다. 화친 협상은 근 20년간 대치 상태에 있었으며 사신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중에 구류되는 일도 빈번했다.
태초 4년(기원전 101년) 겨울 저제후(且鞮侯) 선우가 즉위하여 한조에 먼저 호의를 보이며 “한조의 천자(한무제)는 나보다 어른이다.”라고 말하고는 흉노에 구류되어 투항하지 않았던 한조 사신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긴장되었던 외교 관계가 갑자기 완화되자 한무제도 기뻐하며 천한 원년(기원전 100년)에 한조에 머물던 흉노 사신들을 돌려보냈고 선우의 선의에 답하고자 풍성한 선물도 보냈다.
이번 사신을 돌려보내는 외교 활동은 아마도 한조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례일 것이다. 소무(蘇武)가 19년 동안 양을 치면서도 의리를 지켜 한조를 저버리지 않은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이때 발생했다. 당시 사절단은 백 명에 달했으며 중랑장 소무를 필두로 부사 장승(張勝), 상혜(常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무를 마친 후 소무 등은 본래 귀국할 수 있었으나 흉노 내부에서 갑자기 모반과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부사 장승이 배후에서 이 계획을 지원한 것이 드러나 소무까지 연루되었다. 소무는 자결하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선우는 이 소식을 듣고 한 사신을 투항시키려 했으나 소무는 “절개를 굽혀 명을 욕되게 한다면 비록 살아남더라도 무슨 면목으로 한에 돌아가겠는가!”라고 말하며 다시 칼을 뽑아 스스로 자결하려 했다. 본래 숨이 끊어졌으나 다시 살아났다. 선우는 소무의 기개와 절의에 감탄해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문안하며 더욱 그를 투항시키고 싶어 했다. 투항을 권하러 온 자는 위율(衛律)이라는 자였는데 소무 앞에서 주모자를 죽이고 검을 들어 위협하며 “부사가 죄가 있으니 주관자도 연좌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소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조목조목 따졌다.
“나는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의 친속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연좌하는가?”
위율은 소무를 겁줄 수 없자 이익으로 유혹하며 말했다.
“내가 투항한 후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당신도 투항하면 나와 같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몸을 헛되이 들풀의 거름으로 만들 뿐이오. 오늘 투항하면 우리는 형제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나를 보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오!”
소무는 위율을 크게 꾸짖었다.
“그대는 한(漢)의 신하로서 은의(恩義)를 저버리고 천자와 부모를 배반하여 투항한 포로가 되었거늘 내가 그대를 무엇하러 보겠는가?”
그는 또한 위율의 행위가 한과 흉노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남월과 대완국 왕이 한조의 사신을 죽였다가 멸망당했음을 상기시키며 오늘 소무가 투항하지 않아 죽게 된다면 흉노 역시 멸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위율은 부귀와 위협으로도 소무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선우는 소무를 북해(北海)로 보내 양을 치게 했는데, 전부 숫양뿐이었으며 양 떼가 새끼를 낳아야만 귀국할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그를 흉노에서 늙어 죽게 하려는 의도였다.
소무는 북해에 도착해 먹을 것이 없자 들쥐가 숨겨놓은 열매를 캐 먹었다. 그는 매일 한 사신의 부절(符節)을 들고 양을 쳤으며 거의 한순간도 부절을 손에서 놓지 않아 부절에 달린 털이 다 빠졌지만 버리지 않았다. 한무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무는 귀국하지 못했다. 한무제의 붕어 소식을 들었을 때 소무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남쪽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한무제를 배례하기를 수개월 동안 지속했다.
기원전 81년이 되어서야 소무는 우여곡절 끝에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사신으로 떠난 지 무려 19년이 지난 뒤였다. 소무는 흉노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한을 배반하지 않았기에 귀국하자마자 덕망 높은 대신이 되어 평생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소무가 억류된 뒤 한과 흉노 관계는 다시 긴장되었고 한무제도 선후로 네 차례 전쟁을 발동했으나 전황이 순조롭지 못했다. 원기가 크게 상한 흉노 역시 변경을 크게 침범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흉노 정벌의 중책은 후대 황제들에게 남겨졌다. 그러나 한무제와 위청, 곽거병 두 장군이 흉노 정벌에서 세운 비범한 공적은 한조의 그 어떤 황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중국 전쟁사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0/n1144498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