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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재대략(雄才大略), 천고일제 한무제전 (7)

【한무제전】 7: 군위를 널리 떨쳐 실크로드 수호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이천여 년 전 대한(大漢) 왕조의 서북방, 타클라마칸 대사막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신비롭고 화려한 지대가 있었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이역(異域) 고대 국가들이 있었는데, 장건(張騫)이라는 한의 사신이 온갖 고생 끝에 발견했다. 이때부터 이 국가들은 서역(西域)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동방에 대한이라는 풍요롭고 광활한 천조상국(天朝上國)과 영명하고 무용이 뛰어난 황제인 한무제(漢武帝)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역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이 길은 후세 사람들에게 ‘실크로드’라 불렸으며, 이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나아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였다. 이 길은 멀고도 오래되어 수십 개 국가를 가로지르며 역사상 천여 년 동안 광채를 발했다. 상인과 사절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분주하고 번화했으며, 중국의 비단, 자기, 문화를 더욱 먼 곳으로 전달하여 서양에 동방의 탁월하고 휘휘한 문명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특산물도 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전해져 중원 문명을 풍요롭게 했다.

이 모든 번영을 일군 이는 바로 한무제다. 그는 대일통(大一統) 왕조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하는 동시에 사방의 오랑캐를 위엄으로 굴복시키고 서방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다.

돈황(敦煌) 벽화: 실크로드 위의 상단(공유 영역)

처음 서역으로 나가다

한조(漢朝)의 서역이란 주로 오늘날의 신강(新疆) 지역을 가리킨다. 《한서‧서역전(漢書‧西域傳)》에는 “서역은 효무제(孝武帝) 때 처음 통하게 되었는데, 본래 36개국이었으나 그 후 조금씩 나뉘어 50여 개국이 되었다. 모두 흉노의 서쪽, 오손(烏孫)의 남쪽에 있다. 남북에 큰 산이 있고 중앙에 강이 흐르며, 동서로 6천여 리, 남북으로 천여 리에 달한다. 동쪽으로는 한과 접하며 옥문(玉門), 양관(陽關)으로 막혀 있고, 서쪽으로는 총령(蔥嶺 파미르 고원)에 가로막혀 있다.”라고 했다. 옥문, 양관에서 총령에 이르는 구간은 곧 파미르 고원과 곤륜(崑崙) 산맥 일대를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무제는 즉위 초기에 장건을 처음으로 서역에 파견했다. 이는 변경을 자주 침범하는 흉노에 공동으로 맞서기 위해, 역시 흉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대월지(大月氏)국과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첫 번째 사행은 매우 위험했다.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년), 장건과 당읍부(堂邑父)는 정성껏 선발한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농서(隴西)에서 출발해 곧바로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진입했다. 뜻밖에도 도중에 흉노 기병을 만나 장건 일행은 포로가 되어 선우(單于)의 왕정으로 보내졌다. 장건은 흉노 땅에 10년 동안 억류되었으며 그곳에서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았다.

이 10년 동안 장건은 자신이 짊어진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장건 일행은 흉노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흉노를 탈출해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천산(天山) 남쪽 기슭의 차사(車師)를 거쳐 언기(焉耆), 구자(龜茲)를 지나 총령을 넘었다. 그리고 대완(大宛, 현재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분지), 강거(康居, 현재 카자흐스탄 발하시 호수와 아랄해 사이), 대하(大夏,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도착했으며 마침내 대월지에 이르렀다. 이때 대월지 사람들은 이미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흉노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장건은 대월지에서 1년 넘게 머물렀으나 성과가 없자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할 때 장건은 흉노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해 남쪽 길을 택했으나, 또다시 흉노에게 잡혀 1년 넘게 억류되었다. 흉노 내란을 틈타 장건은 다시 처자식과 당읍부를 데리고 한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전체 사행 과정은 앞뒤로 13년이 걸렸으며, 당시 100여 명의 사절단 중 장건과 당읍부 두 사람만이 살아 돌아왔다. 한무제는 장건의 공훈을 가상히 여겨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봉했고, 이후 박망후(博望侯)에 봉했다.

장건은 비록 사행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대완, 강거, 대월지, 대하 등을 유람하며 서역의 지리, 물산, 풍속 습관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들 국가에서 포도, 알팔파(콩의 일종), 석류, 참깨, 마늘, 작두콩, 오이, 사자, 코뿔소, 한혈마(汗血馬) 등이 생산된다는 사실 등이다. 이는 한조가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를 개척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한무제가 이후 서역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무제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황을 물었을 때, 장건은 흉노의 세력이 강성하여 서역의 많은 나라가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굴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손국과 흉노 사이의 갈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며, 오손왕을 불러 동쪽의 돈황 일대로 돌아오게 하여 한나라와 함께 흉노에 맞서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것이 바로 흉노의 오른팔을 끊는다는 전략이다.

동시에 장건은 서역 각국과 우호적인 왕래를 강화하고, 선물을 증정하거나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그들이 한 천자를 배알하러 오게 하자고 건의했다. 만약 정말로 그들의 지지를 얻고 도의로써 그들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만 리의 국토를 넓히고 풍속이 다른 인민을 불러들여 한나라 천자의 위세와 은덕이 사해 안팎에 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무제는 이를 매우 옳게 여겨 모두 채택했다.

원수(元狩) 4년(기원전 119년), 한군(漢軍)이 다시 흉노를 크게 격파하고 하서주랑을 장악하자, 한무제는 두 번째로 장건을 서역에 파견했다.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북쪽 벽의 장건 서역 사행도. (공유 영역)

장건의 ‘개척’

두 번째 서역 사행에서 장건이 이끄는 사절단 규모는 더욱 방대해져 300명으로 구성되었고, 1인당 말 두 필을 갖추었으며 소와 양 만 마리와 만금의 가치가 있는 비단과 재물을 가져갔다. 사절단의 첫 목적지는 오손국이었으며 오손왕 곤막(昆莫)의 공경스러운 접대를 받았다. 장건은 곤막에게 사행의 취지를 설명하며 오손이 한나라와 협력하여 함께 흉노에 맞서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오손 내부가 셋으로 분열되어 곤막이 전국을 통제하지 못했기에 장건에게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비록 오손을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설득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곤막은 장건 일행을 매우 우호적으로 대했다.

장건은 다시 부사(副使)들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대완, 강거, 대월지, 대하, 안식(安息, 현재 이란 일대), 신독(身毒, 현재 인도), 엄채(奄蔡, 아랄해와 카스피해 사이), 조지(條支, 안식의 속국), 이헌(犁軒, 대진에 부속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의 국가로 나누어 보냈으며, 자신은 오손에 남아 소식을 기다렸다. 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안식국에서는 한조 사신이 2만 명의 성대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원정(元鼎) 2년(기원전 115년), 장건이 한으로 돌아가자 오손 국왕은 또 길 안내인과 통역관을 보내 한 사신을 호송하게 했다. 또한 사자를 파견해 장건을 따라 장안(長安)으로 가서 한무제에게 답례하게 했으며, 겸사겸사 그들이 한조의 상황을 살피고 한조의 풍모를 이해하게 했다. 이것은 역사서에 기록된 서역인이 처음으로 중원에 온 경험이다. 한무제는 오손이 사자를 보낸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들을 열정적으로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한지(漢地)의 풍광을 곳곳마다 구경하게 했다. 오손의 사자들은 한조(漢朝)의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구가 많고 재물이 넉넉한 것을 보고 돌아가 국왕에게 보고했으며, 이후 오손은 한조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장건은 사행의 공로로 대행관(大行官)에 봉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당시에 대하 등 여러 나라에 보냈던 사신들도 잇따라 각국의 사절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서역 각국은 이때부터 한조와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류는 장건이 처음 길을 연 것이었기에, 이후 서역 각국으로 가는 한 사신들은 모두 박망후(博望侯)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외국에 믿음을 주었고, 외국 또한 이로 인해 한 사신을 신뢰하게 되었다.

《사기‧대완열전(大宛列傳)》에서는 장건의 서역 사행을 길을 ‘착공(鑿空)’ 여행이라 칭했는데, 이는 처음으로 길을 개척했다는 뜻이다. 장건 이후 한동안 한조는 매년 끊임없이 사신이 서역 각국으로 향했으며, 많을 때는 10여 개 팀, 적을 때도 5~6개 팀에 달했다. 각 사절단은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100여 명이었으며 휴대품은 대체로 박망후가 가져갔던 것과 같았다. 먼 곳은 사절단이 돌아오는 데 8~9년이 걸렸고, 가까운 곳도 돌아오는 데 몇 년이 소요되었다.

외국 사신의 경우 안식, 오손 등에서 온 이들 외에도 대완 서쪽의 소국인 환잠(驩潛), 대익(大益), 대완 동쪽의 차사, 우심(扜深), 소해(蘇薤) 등 여러 나라가 한 사신을 따라와 공물을 바치고 한무제를 알현했다. 장안성에는 형형색색의 서역인들이 나타나 그야말로 국제적인 대도시가 되었다.

장건과 한조 사신들의 방문 덕분에 한조와 서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교통이 이때부터 열렸고 외래문화의 수입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도 이때부터 열렸다. 서역 각국이 한조의 부유함과 한 천자의 기개에 감탄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이국의 물산이 대한 왕조로 쏟아져 들어왔다. 예를 들어 신독에서 온 코끼리와 공작, 안식국에서 온 타조와 사자 등이며, 서역에서 생산된 포도, 석류, 무화과 등 과일과 비파 같은 악기 또한 한조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다.

하지만 흉노는 여전히 서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며 한나라 사신과 왕래하는 객상들을 자주 침범하고 괴롭혔다. 서역 여러 나라 또한 흉노의 무력에 겁을 먹고 흉노의 조력자가 되기도 했다. 서역에서 흉노의 힘을 약화시키고 서역 제국과 연합하여 흉노에 대항하며 실크로드의 소통을 보장하기 위해, 한무제는 서역 국가들에 대해 화친과 전쟁을 병행하고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푸는 전략을 취했다.

한대(漢代)의 오손국과 주변 국가들. (공유 영역)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어

한무제의 서역 전략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친한(親漢) 성향의 국가와는 ‘화친’하고, 흉노(匈奴)에 의지해 한을 위협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군사적 토벌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오손국이 한나라와 가까이 지내려 하자 흉노의 불만을 샀고, 흉노는 오손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원봉(元封) 6년(기원전 105년), 오손 국왕 곤막은 좋은 말 천 필을 폐백으로 삼아 한에 화친을 요청하며, 한조 제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한조와 형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무제는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 공주를 오손으로 보내 화친하게 하고 풍성한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흉노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공주 한 명을 시집보내니, 세군 공주는 우부인(右夫人)으로 봉해졌다. 세군 공주는 오손에 도착한 후 자주 재물과 비단 등을 국왕 곁의 귀족들에게 하사하며 한조와 오손 사이의 관계를 유지했다.

세군 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한무제는 다시 초왕(楚王) 유무의 손녀 해우(解憂) 공주를 새로운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해우 공주는 시종일관 한무제가 부여한 화친 사명을 받들었으며, 그녀에게는 풍료(馮嫽)라는 시종이 있었는데 시문과 사리에 밝은 여관(女官)이었다. 공주의 사절로서 그녀는 자주 한조의 부절을 들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상을 내렸으므로 깊은 존경과 신뢰를 얻어 풍부인(馮夫人)이라 불렸다. 그녀들의 이러한 행보는 한조와 오손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오손국은 나중에 한조가 흉노를 타격하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한선제(漢宣帝) 때 오손은 군사 5만 명을 출병시켜 한군이 흉노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이 모든 것은 한무제의 원대한 식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서역 각국 중에는 한나라와 친한 나라도 있었고 배반하는 나라도 있었다. 한 사신이 서역으로 출사할 때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에서 출발하면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거쳐 가는 첫 번째 역이 각각 누란(樓蘭)과 차사국(車師國)이었다. 누란은 오늘날 신강 나포박(羅布泊) 일대에 위치했고, 차사는 오늘날 신강 투르판 일대에 있었다. 한조와 서역 사신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두 나라는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게 되었고, 흉노에 투항해 고의로 한 사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령 음식을 제공하지 않거나 병사를 보내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았으며 심지어 살인하고 물건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또한 한 사신의 행방을 흉노인에게 누설해 많은 사신이 흉노병에게 살해당하게 했다.

한(漢) 사신의 생명 안전을 보호하고 실크로드의 소통을 유지하기 위해 한무제는 군사적 위엄을 멀리 떨치기로 결정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그는 장군 조파노(趙破奴)를 파견해 수만 명의 한군을 이끌고 서역을 치게 했다. 흉노인들은 소문을 듣고 일찍 병사를 철수시켰다. 조파노는 먼저 700명의 가벼운 기병으로 누란을 기습해 누란왕을 생포했고, 이어 대군을 지휘해 신속하게 차사 왕성을 함락시켰다. 한군의 승리는 오손, 대완 등 주변 국가들을 진동시켰다.

격파된 차사 사람들은 투르판 분지로 옮겨가 흉노에 의지하며 보그다산(博格多山) 남북으로 흩어졌다. 누란은 각각 왕자 한 명씩을 한과 흉노에 보내 대한(大漢)과 흉노 사이에서 엄격히 중립을 지킬 것을 표명했다. 차사를 멸하고 누란을 패배시킨 후, 한무제는 주천(酒泉)에서 옥문관 일대에 이르기까지 정(亭)과 장(障) 등 변방 요새를 구축해 서부 도로의 안전을 보장했다.

당대 한간(韓幹)의 《목마도(牧馬圖)》. (공유 영역)

대완 정벌

한무제가 처음 서역에 위엄을 떨친 것은 크게 성공했고, 조파노는 그 공으로 착야후(浞野侯)에 봉해졌다. 누란과 차사를 멸한 지 4년 후인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 한무제는 다시 서역으로 출병했는데 목표는 대완국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대완이라는 곳은 장건이 대월지를 찾을 때 발견한 곳으로 한에서 약 1만 리 떨어져 있으며,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해당한다. 대완 국왕은 본래 한조에 재물이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한과 소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가, 장건을 만나자 매우 기뻐하며 그가 월지국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었다.

장건은 귀국 후 한무제에게 대완의 풍속은 한곳에 정착해 살며 백성들이 밭을 갈아 벼와 밀을 심는다고 보고했다. 그곳은 또한 포도주가 생산되며 그 지역의 준마는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데, 전설에 따르면 조상이 천마(天馬)의 자식이라고 했다. 한무제는 기병을 상당히 중시했기에 자연히 양마(良馬 우수한 말)도 상당히 중시했는데, 대완에 한혈마(汗血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동경하게 되었다.

이후 대완에 가는 한 사신이 점점 많아졌고 한혈마에 관한 소식도 끊이지 않았는데, 대완 사람들이 보마(寶馬)를 이사성(貳師城)에 숨겨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한무제는 사신을 보내 천금(千金)과 금으로 만든 말을 가지고 가서 대완의 보마와 바꾸게 했다. 그러나 대완 국왕과 대신들은 한과 멀리 떨어져 있어 한군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사신의 요구를 매우 거만하게 거절했다. 사신은 분노해 금마(金馬)를 부수며 불만을 표시했고, 대완의 귀족들은 인접 국가를 부추겨 병사를 보내 한 사신을 습격해 죽였다.

한무제는 소식을 듣고 매우 진노해 수만 대군을 소집해 대완을 서정(西征)하도록 명령했는데, 통솔자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로 바로 그 경국지색인 이부인(李夫人)의 남동생이었다. 이번 출정의 목적이 이사성의 보마를 얻는 것이었기에 이광리는 이사장군으로 봉해졌다. 이번 원정은 길이 멀고 이광리의 용병술이 평범해 출정하자마자 곤경에 처했다. 연도(沿道)의 작은 나라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군량미를 공급하려 하지 않자, 한군은 성을 공격해 보급하는 방법을 취하며 전쟁과 행군을 병행했다. 대완국의 부속 국가인 욱성국(鬱成國)의 성 아래에 도착했을 때 수만 명의 군사는 겨우 수천 명만 남았고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교전하자마자 참패했다.

이듬해 이광리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돈황으로 후퇴했는데 이때 남은 인원은 2천여 명뿐이었다. 이광리는 하는 수 없이 글을 올려 군사를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한무제는 크게 노해 사신을 보내 “누구든 관(關)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고 경고했다. 이광리는 관 밖에서 주둔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한무제가 대완과의 전쟁으로 답답해하고 있을 때, 일찍이 서역에 위엄을 떨쳤던 영웅 조파노 장군이 흉노와의 작전에서 전군이 전멸하고 조파노는 포로가 되었다. 이에 대신들이 잇달아 간언하며 무제가 대완에 대한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한의 가장 큰 적수인 흉노를 상대하는 데 전력을 다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무제는 한군이 대완이라는 작은 나라조차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서역에서 한의 위신을 잃게 될 것이며, 서역의 준마를 얻어 한군의 실력을 강화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더 대규모의 원정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장하기 위해 한무제는 새로운 서정 전에 기병 6만 명, 소 10만 두, 말 3만여 필 및 수만 마리의 나귀와 낙타를 징집했으며, 이외에도 군량과 풀을 운송하는 치중 부대와 대완국 도성의 수원(水源)을 파괴하기 위한 공병 부대를 조직했다. 동시에 주천과 장액(張掖) 일대에 18만 대군을 배치해 언제든 지원할 준비를 했다.

태초 4년(기원전 101년), 이광리는 다시 중책을 맡아 이 기세 당당한 대군을 이끌고 대완국을 원정했다. 연도의 서역 각국은 대부분 한군의 기세에 눌려 다투어 성문을 열고 술과 음식을 바치며 한군을 위로했다. 오직 윤대국(輪台國)만이 마중 나오려 하지 않자 행군 도중 한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렇게 서정군은 거침없이 직진해 대완 성 아래에 다다랐다. 이광리는 먼저 공병 부대를 보내 대완 도성 내의 수원을 끊고, 다시 대완 도성의 외성을 파괴해 대완의 맹장 전미(煎靡)를 생포했다. 한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 아래 대완국은 항복했고 국왕은 살해되었다.

대완 사람들은 한혈마를 풀어놓아 한나라 군대가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이광리는 수십 필의 상등마와 3천 필의 중등마를 골랐으며, 친한(親漢)파인 매채(昧蔡)를 대완 국왕으로 새로 세우고 귀국했는데, 귀국 도중 욱성국을 멸했다. 이 전쟁은 세계 군사 역사에서 공전의 대담한 행군으로 찬사받으며 서역을 통제하고 흉노를 타격하는 데 있어 의의가 중대했다. 이후 서역 각국은 철저히 한에 복속되었고 자제들을 장안(長安)에 보내 볼모로 삼음으로써 한조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한무제는 한혈보마를 얻은 후 《서극천마지가(西極天馬之歌)》를 지었다.

천마가 서쪽 끝에서 왔으니,
만 리 길 거쳐 덕 있는 이에게 귀의하도다.
신령한 위엄 받들어 외국을 굴복시키고,
유사를 건너니 사방 오랑캐가 복종하네.

天馬來兮從西極
經萬裏兮歸有德
承靈威兮降外國
涉流沙兮四夷服

천마가 한에 들어온 것은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한 것을 상징하며, 이 시는 한무제의 뜻을 이룬 유쾌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후 한은 10여 차례 대완 서쪽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완을 토벌한 위무와 공덕을 알리고 살피게 했으며 기이한 물건을 구했다.

한무제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서역 각국에 은혜와 위엄을 나란히 베푼 것은 한편으로 흉노가 한에 주는 위협을 감소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조 서북 변경의 영토를 확장해 천산남로(天山南路)를 통제했으며 강역이 총령(蔥嶺) 지역까지 발전하게 했다. 이는 한조와 서역 및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교류를 소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명 교류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2/n1144829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