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견망】
1. 악비와 무한의 역사적 연연
중원을 멀리 바라보니
거친 안개 밖으로 수많은 성곽이 보이네.
생각해보면 그 옛날 꽃이 가리고 버드나무가 보호하던
화려한 배와 용의 누각이었지.
만세산(萬歲山) 앞에는 보석과 비취가 둘러싸였고
봉호전(蓬壺殿) 안에서는 생황 노래가 울려 퍼졌네.
이제는 철기군이 도성 근처에 가득하고 풍진이 험악하구나.
遙望中原,荒煙外,許多城郭;
想當年,花遮柳護,鳳船龍閣。
萬歲山前珠翠繞,蓬壺殿裏笙歌作。
到而今,鐵騎滿郊畿,風塵惡。
군대는 어디에 있는가, 칼날에 피를 묻히고 있고
백성은 어디에 있는가, 구렁텅이를 메우고 있네.
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같건만 수천 마을이 쓸쓸해진 것을 탄식하노라.
어느 날에야 군사를 요청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채찍을 휘둘러 곧장 낙양을 수복할까.
돌아온 뒤에 다시 한양(漢陽) 유람을 이어가며 황학(黃鶴)을 타리라.
兵安在,膏鋒鍔;民安在,填溝壑。
歎江山如故,千村寥落。
何日請纓提銳旅?一鞭直指清河洛。
卻歸來再續漢陽遊,騎黃鶴。”
북송 말기 북방 여진족 귀족 정권인 금나라가 중원 지역을 향해 대규모 약탈 전쟁을 일으켰다. 북송 정권은 멸망했고 새로 세워진 남송 정권은 투항파 진회(秦檜) 등이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적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쳤으며 금나라 군대는 기세를 몰아 대거 남하했다.
악비(岳飛)는 애국 열정으로 가득 차 금나라에 맞서는 행렬에 투신했다. 악가군(岳家軍)은 군기가 엄명하고 용맹하게 잘 싸워 넓은 실지(失地)를 회복했다.
소흥(紹興) 4년 3월 13일(서기 1134년) 구강에 주둔하던 악비는 호북과 하남 6군을 수복하라는 명을 받았고 5월 5일 영주(郢州, 종상鍾祥)를 공략해 취했으며 이후 연달아 양양부, 수주(隨州), 등주(鄧州), 당주(唐州), 신양(信陽)군을 함락시키고 7월에 무창(武昌)으로 회군했다. 악비는 이 공로로 청원군(清遠軍) 절도사, 호북로 형양담주(荊襄潭州) 제치사(制置使)에 임명되어 악주(鄂州, 지금의 무창)에 주둔했으며 곧이어 ‘무창현 개국자(武昌縣開國子)’로 봉해졌다.
악비는 악주에서 긴박하게 북벌 준비를 하던 중 우연히 반나절의 틈을 얻어 황학루에 올랐다. 금나라 사람이 통치하는 북방을 멀리 바라보며 비장한 마음으로 이 《만강홍(滿江紅)·등황학루유감(登黃鶴樓有感)》을 지었다. 이듬해 악비는 형호남북양양부로(荊湖南北襄陽府路) 제치사로 전임되어 ‘무창군 개국후(武昌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천고에 전해지며 인구에 회자되는 이 송사는 무한에 대한 그의 그리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시 한양 유람을 이어가며 황학을 타겠다는 소망은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그의 정신은 영원히 무한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남송과 그 이후의 무한 군민들은 악비에 대해 깊은 경의와 그리움을 품어왔다.
악비(1103년 3월 24일 ~ 1142년 1월 27일)는 자가 붕거(鵬舉)이며 송나라 하북서로(河北西路) 상주 탕음현(湯陰縣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탕음현) 영화향(永和鄉) 효제리(孝悌里) 사람으로 중국 남송의 항금(抗金) 명장이자 애국 영웅이다. 어린 시절 학문에 힘썼으며 뛰어난 무예를 익혔다. 19세에 군에 입대해 요나라에 대항했다. 얼마 후 부친상을 당해 퇴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효를 다했다.
서기 1126년 금나라 군사가 중원을 대거 침략하자 악비는 다시 군에 투신해 금나라 군대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 생애를 시작했다. 그는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일편단심을 품고 중원을 수복하여 정강의 치욕을 씻는 것을 직분으로 삼았다. 그가 통솔한 악가군은 훈련이 잘 되어 있고 군기가 엄격하여 배고파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고 추워 죽을지언정 남의 집을 헐지 않았으며 침입한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좌절시켜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군마의 생애 동안 그의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직접 지휘한 126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실상부한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 주선진(朱仙鎮) 대첩에서 금나라 군대를 여지없이 격파하자 금나라 군대조차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감탄을 내뱉었다.
악비는 일생 중 7년(서기 1134년~1141년) 동안 무한에 주둔했으며 무한은 악가군의 주둔지이자 북벌 기지였다. 악비는 악주(지금의 무창)에서 출발해 네 차례 북벌을 진행했기에 무한과 깊은 역사적 인연을 맺었다. 고증에 따르면 당시의 사령부는 무창 옛 성의 사문구(司門口)에 설치되었고 연병장은 소동문(小東門) 사호(沙湖) 가에 중군영(中軍營)은 대동문(大東門) 쇄호(曬湖) 옆에 마대(馬隊)는 양도가(糧道街) 마제영(馬蹄營)에 수군 훈련 및 기지는 성 밖의 악가취(岳家嘴)에 설치되었다.
바로 무한에서 그는 인생의 찬란한 정점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공을 세워 양양과 등주 대첩을 바탕으로 불과 32세의 나이에 후작(무창군 개국후)에 봉해졌다. 악비가 4차 북벌에서 주선진 대첩을 거둔 후 곧장 금나라 황룡부까지 쳐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남송 황제 조구(趙構)는 12차례나 금패를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소흥 11년 음력 12월 29일(서기 1142년 1월 27일) 섣달그믐날 밤 간신 진회에 의해 “막수유(莫須有 혹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죄명으로 항주 대리시(大理寺) 풍파정(風波亭)에서 해를 당했다.
악비가 살해된 후 남송 왕조의 고압적인 정책 아래에서도 악주 백성들은 간신 진회의 기세가 얼마나 높든 개의치 않았고 이로 인해 어떤 번거로움이나 재앙이 닥칠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열 가구 중 적어도 아홉 가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악비의 초상화를 집안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악비가 몸소 앞장서고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한 푼도 사사로이 감추지 않았기에 그의 옛 부하들은 줄곧 그를 그리워하며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항변했다.
1161년 여름 어사중승(御史中丞) 왕철(汪澈)이 악주에 있는 악비의 옛 부대 시찰을 나갔을 때 장교들은 왕철에게 악비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왕철이 조정에 보고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장교들은 천둥 치듯 울며 “악공을 위해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소흥 32년(서기 1162년) 송 효종이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악비의 죄를 씻어주고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송 영종 가태(嘉泰) 4년에는 악왕(鄂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로 고쳤으며 서호 서하령으로 이장하니 이곳이 바로 항주 서호 근처의 ‘송악악왕묘(宋嶽鄂王墓)’이다. 또한 호북 무창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하고 이름을 충렬(忠烈)이라 했으며 송사에 열전을 기록했다.
사료에 따르면 악비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역사적으로 유명한 효자였다. 그는 안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어찌 주군을 사랑하는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직접 약을 달이고 음식을 대접하며 간호했다. 어머니 요(姚)씨는 소흥 6년 3월 26일(서기 1136년) 악주 군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악비는 장남 악운(岳雲) 등과 함께 맨발로 관을 메고 거의 천 리 길을 걸어 황제가 하사한 여산의 와호산(臥虎山)에 안장했다. 삼년상을 치르기를 청했으나 조서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송 조정이 복직 조서를 내리자 악비는 효를 충으로 옮겨 6월에 양양에 주둔했다. 8월에 다시 군대를 지휘해 북상하여 부장들을 위제(偽齊 금이 세운 괴뢰정권 제를 가리킴) 경내로 보내 괵주 노씨현(虢州盧氏縣), 상주(商州) 및 서경의 장수현(長水縣)을 수복했다. 9월에 고립된 군대에 원군이 없자 악주로 군대를 되돌렸다. 11월 강주(江州)에 주둔하며 위제 군대를 패퇴시키고 다시 악주로 돌아왔다. 악비의 충효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어머니의 영당이 있던 곳은 충효문(지금의 무창 소동문)으로 명명되었다.
악비는 평생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정직했다. 그는 “문관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악비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춘추좌전》과 《손오병법》 읽기를 좋아했다. 전투 중 틈틈이 막료들과 감회를 읊기도 했는데 악비가 남긴 시문은 명대 서계(徐階)가 수집한 《악무목유문(嶽武穆遺文)》에 실려 있다. 사(詞) 3수와 시 16수가 세상에 전해진다. 그중 무창에서 쓴 《만강홍》의 “분노로 머리칼이 솟구쳐 난간에 기대어(怒發衝冠憑欄處)”라는 구절은 천고의 절창으로 애국심과 보국의 뜻이 지극히 담겨 있다. 민족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광범위한 민중 사이에서 애창되었다.
악비는 서예 또한 매우 사랑했다. 그의 소해(小楷)는 안진경을 배워 자태가 정묘하고 행서는 소동파를 배워 필법이 종일(縱逸)하다. 세상에 전해지는 악비가 쓴 비첩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전후출사표》가 가장 유명하다. 필력이 강건하고 구도와 결구가 모두 감상할 만하다.
요컨대 중국인의 마음속에서 악비는 “정충보국”의 상징이라면 진회는 “나라를 팔아 영화를 구한(賣國求榮)” 전형이다. 외적이 침입하고 강산이 부서지며 생령이 도탄에 빠진 난세에 가난한 집안 출신의 악비는 오랑캐를 몰아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며 옛 강산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광란의 파도를 되돌리고 이미 무너지려는 건물을 부축하려는” 거대한 용기,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중히 여기고 사악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고귀한 품격, 그리고 충절을 굽히지 않고 기개가 장렬하며 마음이 하늘에 비치는 민족 정절을 통해 중화 5천 년 역사 문명의 긴 강물 속에 호기(浩氣)와 충혼의 비장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약 900년 동안 악비의 애국 정신과 호연지기는 해와 달이 하늘을 지나고 강물이 땅을 흐르는 것처럼 대대로 수많은 중화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고금의 수많은 애국지사를 격려했다. 반면 스스로 간첩이 되어 나라를 팔아 영화를 구하고 음험하고 독살스러우며 충신을 해치고 법을 어겨 나라와 백성을 어지럽히며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은 비겁하고 간사한 무리인 진회는 천고의 비난을 받으며 만 년 동안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말로를 맞이했고 중화민족의 역사적 치욕 기둥에 영원히 박혔다. 그러므로 손중산(孫中山)은 “악비의 혼은 중화민족의 정신적 대표이며 곧 민족의 혼이다”라고 말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105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