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劉曉)
【정견망】
도도히 흐르는 장강 물줄기 동쪽으로 사라져 가니
물보라 속에 영웅들도 모두 씻겨 사라졌네.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는 고개 돌리니 모두 허공이요
푸른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저녁 노을은 몇 번이나 붉게 물들었던가.
강가에서 머리 하얀 어부와 나무꾼은
가을 달과 봄바람을 늘 보아왔으니
한 병 탁주로 기쁘게 서로 만나
고금의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웃음 섞인 이야기 속에 부쳐보네.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
是非成敗轉頭空
青山依舊在
幾度夕陽紅
白髮漁樵江渚上
慣看秋月春風
一壺濁酒喜相逢
古今多少事
都付笑談中
이 작품은 《삼국연의》 드라마 주제곡이자,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양신(楊愼)의 시다. 중국 고대 4대 명저 중 하나인 《삼국연의》는 그야말로 집집마다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파란만장하고 영웅들이 배출된 삼국 시대는 도대체 어떤 큰 연극을 ‘연기(演)’한 것일까? 《삼국연의》라는 서명은 사실 세상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연의(演義)’란 ‘의(義)’를 연기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연의를 소설의 한 체재로 이해하지만, 《삼국연의》가 해석해낸 것은 진정한 ‘의(義)’다. 소설은 도원결의, 삼고초려, 관도 전투, 오관엣 여섯 장수를 벰, 적벽대전, 칠종칠금 등 수많은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충의(忠義), 은의(恩義), 인의(仁義), 신의(信義)’인지를 연출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의’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본받을 대상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소설은 정치적, 군사적 모략 등을 보여준다. 소설은 적벽을 불태우고, 관도 전투, 이릉 전투, 상방곡에서 사마의를 불태우려 한 일, 등갑군을 불로 태운 등등 수많은 고전적인 전투를 묘사했다. 그속의 지혜와 모략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고 복종하게 만든다.
《삼국연의》가 세상에 나온 후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책을 소재로 한 각종 문예 작품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명청 시대에는 ‘제1재자서(第一才子書)’라는 칭호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청조의 여러 황제를 포함한 만주족들도 《삼국연의》를 각별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일부 만주족 장군들은 소설을 병법 교재로 삼아 휘하 장수들에게 전수하기까지 했다.
청조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간주되는 누르하치는 일찍이 요동 총병 이성량(李成梁)에게 거두어져 그의 휘하에서 시종으로 있었다. 누르하치는 《삼국연의》와 《수호전》 읽기를 매우 좋아했으며, 그 속에서 문도무략(文韜武略)을 배웠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 황도주(黃道周)는 《박물전휘(博物典彙)》에서 “(누르하치는) 삼국연의와 수호전을 즐겨 보며 스스로 모략이 있다고 말했다”라고 기록했다.
1583년(명 만력 11년), 누르하치는 조상이 남긴 13벌의 갑옷으로 거병했다. 1593년에는 건주(建州)여진을 통일했다. 누르하치가 ‘대명(大明)에 충성’하고 ‘변방을 지킨 공’이 있었기에, 명나라 정부는 선후로 그를 지휘사, 도독첨사, 용호장군으로 봉했다. 1619년, 누르하치는 다시 해서(海西)여진을 통일했다. 동시에 그는 동해(東海)여진의 많은 부족을 병합했고, 우수리강과 송화(松花)강 하류, 혼동(混同)강 양안 및 외흥안령 등지에 흩어져 살던 각 부족을 정복했다.
여진 각 부족이 기본적으로 통일된 후인 1616년, 누르하치는 혁도아랍(赫圖阿拉 헤투알라,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서노성)에서 칸(汗)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금(大金), 연호는 천명(天命)이라 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우니 역사는 이를 ‘후금(後金)’이라 부른다. 그는 대명 군대와 작전하며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거나 기습으로 승리하곤 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누르하치의 용병 모략 중 많은 부분이 《삼국연의》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누르하치 시기에 그는 대학사 달해(達海)에게 명하여 정사 《삼국지(三国志)》 등의 저술을 만주어(滿文)로 번역하게 했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쓰여진 《삼국연의》가 참조한 대본이 바로 이 《삼국지》이며, 소설 속의 많은 이야기는 《삼국지》의 사실(史實)에서 취한 것이다.
당시 만주어는 몽골 문자를 참조해 창제되었기에 문법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천하가 갈라져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번역 인재가 심각하게 부족했기에 번역 속도가 매우 느렸다. 1632년 달해가 세상을 떠난 후 번역 작업은 한때 중단되었다.
누르하치가 부상을 입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즉위하니 바로 훗날의 청 태종이다. 홍타이지는 문무를 겸비하고 지용(智勇)이 출중해 전공이 혁혁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매우 능했다. 즉위 후 그는 한족(漢族) 신하들을 중용했고, 명나라의 문무백관을 초빙했으며 한족의 제도를 본받아 혁신을 추진했다. 또한 문관(文館)을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번역팀을 구성하여 방대한 한문 전적들을 번역하게 했는데, 그중에는 《삼국연의》를 만주어로 번역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역시 《삼국연의》의 충실한 독자였다.
1636년,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숭덕(崇德), 국호를 ‘대청(大淸)’, 족명을 ‘만주(滿洲)’로 고쳤다.
홍타이지가 붕어한 후 아들 순치(順治)가 즉위했고, 섭정왕 도르곤의 도움을 받아 남하하여 산해관을 넘고 북경에 도읍을 정하니 중국을 통치하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다.
순치 3년, 만주어 《홍무보훈(洪武寶訓)》(일명 홍무요훈洪武要訓)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청조가 입관(入關)한 후 번역한 첫 번째 한문 전적이다. 순치 7년(1650년)에는 다시 만주어 《삼국연의》를 간행했으니, 이는 청나라 입관 후 번역된 첫 번째 한문 문학 작품이 되어 많은 만청(滿淸) 공경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전반부 16권은 현재 중국국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병서는 아니지만, 수많은 고전적 대전투와 고도의 모략, 행군 포진(布陣)에 대한 묘사는 사람들을 감복시켰으며 만주족과 몽골족 장령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만주어 《삼국지연의》를 번역한 이유에 대해 섭정왕 도르곤은 일찍이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삼국연의》를 번역하여 판각해 반포하라. 이 책은 충신, 의로운 현자, 효자, 절부(節婦 절개를 지닌 부녀)의 아름다운 행실을 거울로 삼을 수 있고, 또 간신이 나라를 망치고 악정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로 삼을 수 있다. 문장은 비록 거칠지만 매우 유익함이 있으니, 마땅히 국인들이 흥망성쇠의 이치를 알게 해야 한다.”
이로 보건대 청조 통치자들은 국인들이 이것을 행위 규범으로 삼게 하고, 그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정수를 취해 국인들을 가르침으로써 통치에 조력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만주족이 중원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점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청나라 사람 구위훤(邱煒萲, 1874년~1941년)이 편찬한 《숙원췌담(菽園贅談)》에는 강희제가 조서를 내려 《삼국연의》 1,000부를 판각하게 하여 이를 황실의 하사품으로서 만주족과 몽골족 각 부족의 추장들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옹정(雍正) 연간에는 만주어와 한문이 결합된 만한합벽본(滿漢合璧本) 《삼국연의》가 출현했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옹정 연간 판본은 민간 방각본(坊刻本)으로 보이며, 만주어 부분은 순치본과 동일하여 순치 7년 판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건륭제 시기, 양황기(鑲黃旗) 만주족 명장 해란찰(海蘭察)은 특히 《삼국연의》 읽기를 좋아하여 이를 병법과 모략을 깨우쳐주는 아주 좋은 교재로 여겼다. 그리하여 소설을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추천했다. 가령 그는 자신이 아끼던 만주어 《삼국연의》 한 권을 수하의 용맹한 무장 액륵등보(額勒登保)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가르칠 만한 장재(將才)이나, 용맹함에만 기대어서는 안 되고 병법을 좀 알 필요가 있다.”
《청사고(淸史稿)·액륵등보전》에 따르면, 액륵등보는 비록 용맹하게 잘 싸웠으나 병법을 몰랐고 한자는 단 한 자도 알지 못했다. 그는 《삼국연의》를 얻은 후 수시로 읽으며 그 속에서 조조, 제갈량, 사마의 등의 군사 사상과 작전 도략(韜略)을 공부하고 연마했다. 그리하여 병가의 모략, 대열 정비, 장수된 도리 등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아마도 《삼국연의》에서 영양분을 섭취했기 때문인지 그는 이후 전쟁에서 상벌을 분명히 했다. 승전할 때마다 반드시 친히 장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했고, 공이 있는 이에게는 만 전(錢)의 상금을 내리는 데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전공이 혁혁했으나 동료의 공을 시기하지 않았고,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게 굴지도 않았으며, 무장이었으나 조수(操守, 지조와 행실)가 매우 좋았다. 가경(嘉慶) 시기에 그는 일대의 중신(重臣)이 되었다.
가히 청조 만주족의 《삼국연의》에 대한 심취 정도는 한족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청조 궁중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연극 또한 삼국희(三國戱 삼국연의를 소재로 한 전통극)였다. 청조 만주족은 황제부터 관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삼국연의 마니아였다. 가령 옹정의 외삼촌 융과다(隆科多)는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이런 설도 있다. 만약 청나라 때 대대적으로 추숭하지 않았다면 아마 《삼국연의》가 오늘날과 같은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이렇게 안배된 것일지도 모른다. 《삼국연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세상 사람들도 ‘충의, 은의, 인의, 신의’ 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