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북송(北宋) 왕조의 수많은 명신(名臣) 중에는 조금 독특하게 보이는 인물이 있다. 그는 구준(寇準)처럼 ‘방정하고 결단에 능하지[方正、善斷]’[1]도, 왕안석(王安石)처럼 ‘기이하고 탁월함[瑰瑋、卓絕]’[2]도 없었으며, 범중엄(範仲淹)처럼 유명한 ‘소열(昭烈)하고 홍의(弘毅)함’[3]도 없었다. 그러나 “무릇 권력을 잡은 지 18년, 재상으로 있은 지가 12년”[4]에 달했던 그는 자신의 덕량(德量)으로 ‘재상의 뱃속에는 배를 띄울 수 있다(宰相肚裏能撐船)’는 진정한 의미를 연기했다. 그가 바로 송 진종(眞宗)으로부터 “태평성대를 이룩할 자”라 칭송받았던 일대(一代) 현상(賢相) 왕단이며, 북송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재상이다.
왕단(王旦 957년~1017년 10월 3일)은 새벽[旦]에 태어났기에 이름을 단이라 지었으며 자(字)는 자명(子明)이고 대명부(大名府) 신현(莘縣) 사람이다. 왕단은 어린 시절 침착하고 정적이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채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중히 여겨 “이 아이는 장차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년) 진사에 급제해 대리평사(大理評事), 평강현(平江縣) 지현을 지냈다. 이후 전중승(殿中丞), 정주(鄭州) 통판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천하의 상평창(常平倉)을 세워 겸병(兼倂)의 길을 막을 것을 상소했다.
순화(淳化) 초년(990년), 왕우칭(王禹偁)이 그를 전운사(轉運使)로 추천했다. 역참을 통해 경성으로 불려 온 왕단은 글을 올려 시험을 치른 뒤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었다. 순화 2년(991년),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에 제수되었다.
당시 문장으로 유명했던 왕우(王祐)가 오랫동안 조서 기초를 맡아왔는데, 왕단이 10년도 안 되어 그 직무를 잇자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전약수(錢若水)는 왕단을 보고 “진정한 재상의 그릇이다!”라고 말했다.
왕단과 조정에서 함께 일하던 이들은 종종 “왕군(王君)은 하늘 높이 솟은 골짜기와 같고 동량의 재목이니 귀함이 끝이 없어 우리가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안으로 행실이 닦여 삼가고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5]는 평을 받으며 당시 ‘성상(聖相)’이라 불린 진사 동기 이항(李沆)도 왕단을 원대한 그릇으로 추대했다. 송 진종이 즉위한 후 왕단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다. 황제는 평소 왕단의 현능(賢能)함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왕단이 한 번은 일을 아뢰고 물러날 때 황제가 그를 배웅하며 “짐을 위해 태평성대를 이룩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1년 뒤 왕단은 공부시랑(工部侍郎)의 직함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즉 부재상이 되었다.
경덕(景德) 원년(1004년), 이항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노신 필사안(畢士安)은 진종에게 강직하고 고고한 구준(寇準)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이에 진종은 필사안과 구준을 함께 재상으로 삼아 필사안의 덕망으로 구준을 안정시키려 했다. 같은 해 늦가을(윤 9월), 요나라 소태후와 아들 요 성종(聖宗)이 20만 기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선봉이 황하 강변의 전주(澶州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성 아래에 이르러 수도인 변경(汴京 지금의 개봉)의 안위를 직접 위협했다.
조야(朝野)가 경악했고 남쪽으로 피난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참지정사 왕흠약(王欽若)은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고, 추밀부사(樞密副使) 진요수(陳堯叟)는 성도(成都)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다. 구준은 뭇 논의를 물리치고 결연히 주전론을 펼치며 황제의 친정을 권유했다. 양측이 10여 일을 대치한 후 화해의 뜻을 비추었고 마침내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어 백 년의 안녕을 가져왔다.
구준은 전연의 공로를 몹시 자부했고 송진종 또한 구준을 매우 감탄하며 보았다. 이에 왕흠약이 그를 시기했다. 어느 날 조례가 끝나고 구준이 먼저 퇴조하자 진종이 그를 배웅했다. 왕흠약은 이 틈을 타 전연의 맹은 치욕적인 맹세일 뿐이라고 아뢰었고, 진종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이후 구준을 점차 멀리했다. 이듬해 구준은 재상에서 물러났고 왕단이 그 뒤를 이어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즉 재상이 되었다.
왕단과 구준은 모두 태평흥국 5년(980년)의 동기 진사였으며 함께 관직 생활을 했기에 서로 동년(同年)이라 불렀다. 구준은 ‘도(道)를 붙잡고 사악함을 미워하며’ ‘강개하고 대절(大節)이 있는’ 것과 달리 왕단은 겸손하게 자신을 닦고 덕량이 웅대했다. 《역전(易傳)·상전 상·겸》에서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라고 했듯이, 도덕이 높은 사람은 항상 남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며 공이 높아도 자처하지 않고 이름이 높아도 스스로 기리지 않으며 지위가 높아도 오만하지 않았다. 공자는 《계사하전》에서 “겸(謙)은 덕의 자루[柄]요, 복(復)은 덕의 뿌리[本]이다”라고 찬탄했다.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정의(周易正義)》(권6)에서 다음과 같이 진일보로 해석했다.
“[소(疏)] 정의에서 이르길 ‘겸은 덕의 자루다’라고 했으니 덕을 행할 때 겸손을 도구로 삼는다는 뜻이다. 만약 덕을 행하면서 겸손을 사용하지 않으면 덕이 베풀어지지 않으니, 이는 겸손이 덕의 자루가 됨이 마치 도끼날이 자루를 써서 작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복(復)은 덕의 뿌리이다’라는 말은 덕을 행할 때 먼저 정묵(靜默)함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니, 복은 정묵함이므로 덕의 근본이 된다.”라고 했다.
겸손을 덕이라는 도끼의 자루(柄)에 비유하였으니, 겸손을 잡아야 비로소 덕을 행할 수 있으며 마음이 들뜨면 반드시 덕을 잃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흔히 ‘겸병(謙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겸손한 덕의 중요성을 비유하곤 했다.
당대(唐代)의 위징(魏徵)은 《논시정소(論時政疏)》에서 “높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겸충(謙沖)으로써 스스로 수양하기를 생각하고, 가득 차서 넘칠 것을 두려워하면 강해(江海)가 백천(百川)의 아래에 처함을 생각한다”고 했다.
왕단은 사람을 대함에 매우 관대하고 매사에 평온하며 타인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다. 《송조사실유원(宋朝事實類苑)》의 기재에 따르면, 동료인 구준이 여러 차례 송 진종 앞에서 왕단의 단점을 말했지만 왕단은 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오히려 그는 황제 앞에서 자주 구준을 칭찬했다. 한 번은 송진종이 참다못해 왕단에게 “경은 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나 그는 오로지 경의 나쁜 점만 말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왕단은 “신이 재상의 자리에 오래 있었으니 부족한 부분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구준이 폐하께 숨김없이 말하는 것은 더욱 그의 충직함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것이 제가 구준을 중히 여기는 이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로 인해 진종은 왕단을 더욱 현명하고 관대하게 여겨 그를 더욱 공경했다.
중서성에서 어떤 일을 구준이 있는 추밀원(樞密院)에 보냈는데 조서가 격식에 어긋나자 구준이 이를 진종에게 보고했다. 왕단은 책망을 들었고 조정 관리들이 처벌받았다. 한 달도 안 되어 추밀원에서 중서성(中書省)으로 보낸 일에 조서의 격식에 오류가 생기자 관리들이 신이 나서 왕단에게 올렸지만 왕단은 그저 추밀원으로 돌려보냈다. 구준은 왕단의 큰 도량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를 만나 “동년(同年 과거 동기), 어찌 그리 큰 도량을 얻으셨소?”라고 물었으나 왕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구준이 장안에서 재직할 때 생일에 산붕(山棚)을 세우고 연회를 베풀며 복식과 용도가 분수에 넘치게 사치스러워 전운사에서 이 일을 상소했다. 진종이 노하여 왕단에게 “구준은 매사에 짐을 본받으려 하니 되겠는가?”라고 했다. 왕단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구준은 과연 현능하나 다만 좀 어수룩한 면이 있으니, 대신들에게 알려 사치스럽다는 오명을 짊어지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상소 내용을 그에게 베껴 보내주면 반드시 스스로 허물을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종의 마음이 풀려 “옳소, 그것은 정녕 어수룩한 것일 뿐이오”라며 더는 묻지 않았다.
진종이 일찍이 추밀원과 중서문하(中書門下) 양부(兩府)에 어제(禦製) 《희우시(喜雨詩)》를 보여주었는데 왕단이 소매 안에 넣고 돌아가 보니 황제의 시에 오자가 하나 있었다. 왕흠약은 “이런 것은 해로울 것 없다”고 했으나 비밀리에 이 일을 상주했다. 진종이 기분이 상해 왕단에게 “어제 시에 오자가 있었는데 왜 상소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왕단은 “시를 받고 다시 읽을 시간이 없어 올리는 데 실수가 있었습니다”라며 황공해하며 절하고 사죄했다. 뭇 신하들이 모두 절했으나 추밀사 마지절(馬知節)만은 절하지 않고 실제 상황을 모두 아뢰며 “왕 아무개는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니 참으로 재상의 그릇입니다”라고 했다. 진종은 다시 웃으며 왕단을 위로했다.
이처럼 왕단이 다투지 않은 일은 부지기수다. 한림학사 진팽년(陳彭年) 등이 왕단에게 “매번 일을 아뢸 때 황제가 보시지 않은 것을 당신이 직접 비지(批旨)를 내려 시행하니 부적절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자 왕단은 그저 사과할 뿐이었다. 훗날 진종이 그 일에 관해 묻자 “왕단은 짐의 곁에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짐이 살펴봐도 사심이 조금도 없었다. 소소한 일은 독단으로 행하라고 짐이 일렀으니 그대들은 공경히 받들라”고 했다. 왕단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왕단은 재상으로서 인재를 추천할 때 평소에 세심히 살핀 뒤 몇 달 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사방에 이로움과 폐단을 물었다. 재능 있는 자는 이름을 기록해 두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만나주지 않았다. 사적인 청탁을 받지 않고 사적인 은혜를 도모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인재를 추천할 때면 비밀리에 서너 명의 명단을 올려 진종이 점찍게 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이를 몰랐고 임용을 두고 논쟁이 벌어져도 오직 왕단의 추천만큼은 채택되지 않는 법이 없었다. 임용된 이들도 왕단이 추천했음을 몰랐다. 왕단 사후 《진종실록》을 편찬할 때 내정에서 나온 상소문을 보고서야 조정의 많은 관원이 왕단이 추천한 인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구준이 추밀사에서 면직되었을 때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사상(使相 재상의 지위를 갖는 지방 절도사)’ 자리를 구하자 왕단은 놀라며 “장상(將相)의 임명을 어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적인 청탁을 받지 않소”라고 했다. 구준은 몹시 섭섭해했다. 얼마 후 구준이 무승군 절도사 겸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자 구준은 “폐하의 알아주심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습니까?”라고 했다. 진종이 왕단의 추천이었음을 밝히자 구준은 자신이 참으로 왕단에게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탄식했다.
왕단은 재임 기간이 길어 훼방하는 이가 있었으나 늘 자신을 반성하고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는 황제가 크게 노했을지라도 반드시 변명하여 밝혀내고야 말았다. 평소 몸이 약했던 왕단은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다. 하루는 자복전(滋福殿)에서 진종이 태자를 불러 왕단에게 절하게 했다. 왕단은 “태자의 성덕이 반드시 폐하의 대업을 감당할 것입니다”라며 임용할 만한 대신 10여 명을 추천했는데 그중 많은 이가 훗날 재상이 되었다.
천희(天禧) 원년(1017년) 봄, 왕단이 마침내 관직에서 물러났다. 진종은 그의 병이 깊어지자 천하의 일을 누구에게 맡길지 재삼 물었으나 왕단은 대답이 없다가 마지막에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구준만 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진종이 구준의 강직함을 염려하자 왕단은 “다른 사람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왕단 사후 1년여 만에 진종은 결국 구준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왕단이 세상을 떠나자 진종은 3일간 조례를 폐하고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경성 내에 10일간 음악을 금했다. 왕단에게 태사(太師)·상서령(尙書令)·위국공(魏國公)을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건흥(乾興) 초년(1022년), 인종은 그의 묘비에 “전덕원로지비(全德元老之碑 완전한 덕을 지닌 원로의 비)”라고 직접 썼다.
왕단의 일생은 겸허히 자신을 지키고 부드러움으로 처신하며 공이 있어도 머물지 않는 옹용(雍容)한 기품 그 자체였다. 그의 도량은 뱃속에 배를 띄울 만했을 뿐만 아니라 진종 또한 그 안에서 안연히 노닐게 할 정도였다.
인종(仁宗) 초년 장헌(章獻)태후가 수렴청정할 때 재상들에게 왕단을 ‘사범(師範)’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현상 왕단이 구현한 정신적인 내면은 무엇인가? 《역경》에서 말하듯 “하늘의 운행이 건건하니 군자는 스스로 강건하여 쉬지 않으며[自強不息], 땅의 형세가 유순하니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厚德載物].” 건강(乾剛)의 ‘자강불식(自強不息)’이 세간의 격앙된 분투를 나타낸다면, 곤유(坤柔)의 ‘후덕재물(厚德載物)’은 인류 도덕의 제고를 나타낸다.
노자는 “강함을 알면서 부드러움을 지키면 천하의 시내가 된다”라고 했다. 강함을 알면서 부드러움을 지키는[知雄守雌] 것에는 바로 중화(中和)와 수유(守柔)이자 덕을 지키는 지선(至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주석:
[1] 《송사·구준전(宋史·寇准傳)》(권281) “필사안(畢士安)이 말하기를, 구준(寇准)은 충의를 겸비하였고 큰일을 잘 결단하니 이는 재상의 재목이다. 구준은 강직하고 강개(慷慨)하며 큰 절개가 있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도를 잡고 사악한 것을 미워하였다”고 했다.
[2] 소식(蘇軾)의 《왕안석증태부(王安石贈太傅)》에서 “기이하고 아름다운 글은 만물을 꾸미기에 충분하고, 탁월한 행실은 사방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하다.”
[3] 《송사·범중엄전(宋史·範仲淹傳)》(권314)의 평 “범중엄(範仲淹)이 처음 상중(喪中)에 있을 때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천하의 일을 극진히 논하였는데, 훗날 정치를 함에 있어 그 말을 모두 실행하였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초려에서 처음 유비를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가 넓고 굳센 그릇을 가져 족히 그 책임을 맡을 만함을 믿었으니,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연구하게 했다면 어찌 옛사람에게 뒤졌겠는가!”
[4] 《송사·왕단전》(권282)
[5] 《송사·이항전》(권282)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6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