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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와 무한 이야기 (2)

소양춘(小陽春)

【정견망】

2. 무한 삼진(三鎭)에 있는 악비의 역사 유적

1) 악무목 유상정(岳武穆遺像亭): 줄여서 악비정이라 부르며, 무창 황학루 공원의 악비 청동상 앞에 위치한다. 이 정자는 1937년 항일 전쟁 기간에 세워졌으며, 1981년에 새로 보수되었다. 정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무와 돌로 만들었으며,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육각양식으로 푸른 기와를 얹어 고풍스럽고 단정하다. 정자 처마의 편액에는 “악무목 유상정”이라 쓰여 있고 돌기둥에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정자 안에는 악무목 유상 석비(무창 대동문大東門 밖 옛 악충렬묘鄂忠烈廟의 유물로 전해짐)가 모셔져 있는데, 위쪽에는 “악무목왕 유상(岳武穆王遺像)”이라는 글자와 장익선(張翼先)이 지은 상찬(像贊)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정자 주변에는 현재 정충보국 석방(精忠報國石坊), “환아하산(還我河山 내 산하를 돌려달라는 의미)” 석각, 악비 청동 조각상 및 대형 청사석(青沙石) 부조 등이 조성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빛나고 있다.

악비 청동상은 기단 2미터를 포함해 전체 높이 8미터, 무게 16톤에 달하는 대형 청동 주조물이다. 악비가 안장을 잡고 말고삐를 당기는 모습은 영무(英武) 당당하고 정기가 넘치며, 눈빛은 횃불처럼 타올라 마치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멀리 바라보는 듯하다. 길이 25.6미터에 달하는 청석(靑石) 부조는 당시 악가군이 전장을 누비며 금올출을 크게 격파하던 역사적 장면을 재현했다. 부조에는 악비가 쓴 《만강홍·등황학루유감》 친필이 새겨져 있다. 전체 조각상은 조형이 힘 있고 선이 매끄러워 강렬한 전율이 느껴진다.

옛사람들은 “나라가 어려워지면 어진 장수를 생각한다(國難思良將)”고 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중화민족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악비는 일본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인민을 격려하는 애국의 귀감이 되었다. 무한의 항일 군중 단체들이 무너진 악왕묘를 정리하던 중, 기와더미 속에서 명 만력(萬曆) 10년(서기 1582년) 4월에 새겨진 청석비를 발견했다. 이 비석에는 악무목의 초상과 운남 태화(雲南太和 지금의 대리) 사람 장익선이 지은 4언 상찬시가 적혀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신해수의동지회(辛亥首義同志會 신해년에 처음 기의한 동지회)의 호지(胡贄)를 추대해 자금을 마련하게 하고,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8미터 떨어진 곳에 악무목 유상정을 세워 비석을 안치했다. 정자의 이름은 이 비석에서 유래했다.

2) 충렬묘(忠烈廟): 악비묘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항주의 악왕묘(岳王廟)를 떠올리지만, 사실 옛날에는 전국 각지에 악묘가 매우 많았다. 그중 항주, 탕음, 주선진과 무창의 악비묘가 전국 4대 악묘로 병칭되었다. (앞 세 곳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세워진 악비묘는 바로 무창의 충렬묘이다.

소흥(紹興) 32년(서기 1162년), 남송의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악비의 원한을 씻어주고 관직을 회복시켰으며, 무목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예법에 따라 이장하게 했다. 악비의 아들 악림(岳霖)이 악주에 도착했을 때, 악주(鄂州) 군민(軍民)들은 울면서 그를 맞이하며 악비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표했다. 악비의 억울함이 밝혀진 후, 그가 공을 세웠던 호북의 악주 민중들이 가장 먼저 악비를 위한 사당 건립을 요청했다.

건도(乾道) 6년 2월(서기 1170년), 형호북로荊湖北路 계도전운부사計度轉運副使 장광(張珖)이 조정에 첩문을 올렸다. “엎드려 보건대 고(故) 소보(少保) 악비는 10만 군대를 거느리고 면악(沔鄂 지금의 호북 면양과 무창) 지역에 주둔하며 군기가 엄명하고 백성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백전백승의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도 악주의 군사들이 정돈되어 쓸모 있는 것은 모두 악비의 힘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30년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풍모와 공렬을 나라 사람들이 잊지 못해, 열 가구 중 아홉 가구가 그의 초상을 그려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그런데 사당의 모습이 갖춰지지 않았으니 어찌 충의롭고 영웅적인 기개를 북돋울 수 있겠습니까. 악주 군민들이 현재 악비를 위한 사당 건립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효종 황제가 “충렬묘”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성지(聖旨)를 내려 4,000관의 건립 기금을 지원해 악왕묘를 세우게 했다. 당시 1,000무의 향화전(香火田 묘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한 토지)도 함께 하사했다.

가태(嘉泰) 4년(서기 1204년) 악비가 악왕으로 추봉된 후 충렬묘는 악왕묘(속칭 악묘)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당 옆에는 악비가 생전에 심은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옮겨 심어졌는데, 이를 악백(岳柏), 악송(岳松)이라 불렀다. 또한 악주 백성들은 악비의 행적을 전설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로 만들어 서로 전하며 퍼뜨렸다.

이처럼 무창 충렬묘는 남송 효종 황제의 조령으로 건립된 중국 최초의 악왕묘로, 항주보다 51년 앞서 세워졌다. 탕음과 주선진은 남송 당시 금나라 군대의 점령지였기에 그곳의 악묘는 모두 명대(明代)에 건립된 것이다. 청말(淸末) 이래로 악씨 종족의 중대한 활동은 남쪽으로는 호북 무창 옛 성의 충렬묘, 북쪽으로는 하남 탕음의 악왕묘라는 구도를 형성했다. 이 사당은 불행히도 청말 함풍(咸豐) 연간에 전란으로 처음 훼손되었고, 1938년 무한 보위전 직전에 일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일제(日帝)가 무한을 점령한 후 충렬묘 터는 한때 시신 소각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원래 사당 부지와 황토파(黃土坡)에 있던 악씨 분묘는 현재 중남재경정법대학中南財經政法大學 수의首義캠퍼스 내에 있었는데, 중공 정권이 들어선 후 중원(中原)대학이 무창으로 이전하는 과정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강하현지江夏縣志》에 따르면 당시 무창에는 악비를 기념하는 충렬묘가 두 곳 있었다. 호북 무창의 진회 부부 무릎 꿇은 상은 무창현 남쪽 대동문 밖 악비묘 안에 있었는데, 남송 건도 6년에 철로 주조하여 병풍 아래에 묶어 무릎을 꿇려 놓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병이 있는 자가 돌로 치면 효험이 있다고 했다.

또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옛 무창에 여러 차례 세워졌던 악왕묘는 적어도 다섯 곳에 달한다. 명(明) 홍치(弘治) 11년(서기 1498년), 어사 왕은(王恩)이 악비를 기릴 사당이 없는 것을 보고 소동문小東門 밖에 동한(東漢)의 효자 맹종(孟宗)을 모시던 효감사(孝感祠)를 충효사(忠孝祠)로 이름을 바꾸어 악비와 맹종을 한 사당에 합사했다. 효감사 옛 터는 현재 장춘관(長春觀)이 있는 쌍봉산(옛 이름 백학산)인데, 이후 경광(京廣)철도를 놓으면서 산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또한 명 정덕(正德) 16년(서기 1521년)의 《호광도·경지서》에 따르면, 정덕 14년 포정사(布政使) 주계봉(周季鳳)이 장대역(將台驛) 옛 터(지금의 홍산洪山 보통사寶通寺 서쪽)에 악비를 위한 전용 사당을 세웠다.

청 강희 연간에 악비의 20대 손 악훙예(岳宏譽)가 시초학사(視楚學使)로 부임하여 쓴 《중수무창악충무왕묘비기》에는 “전우와 문루가 높이 솟아 있고, 앞은 큰길에 닿아 있으며, 병풍 벽에는 정충보국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다. 뒤로는 높은 언덕이고 왼쪽은 뇌조전雷祖殿,오른쪽은 세마지洗馬池,에 닿아 있으며 대학사 양정화의 기록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하여 소동문 밖에는 충(忠)과 효(孝)를 대표하는 두 명사의 사당이 있게 되었다.

1535년 도어사 고린(顧磷)이 무창성을 중수하면서 소동문을 충효문으로 개칭했다. 이 사당은 여러 번 흥망을 거듭하다 결국 함풍 연간 태평군이 무창성을 공격할 때 파괴되었다.

3) 악송(岳松): 무창에 주둔할 당시 악비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 종종 혼자 말을 타고 성 밖 보통사가 있는 소홍산에 올라 조용히 사색하곤 했다. 소홍산에는 지금까지도 악송 유적지가 남아 있다. 무창 홍산보탑에서 동쪽으로 수백 걸음을 가면 고송 몇 그루가 의연하게 서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악송이라 부른다.

《홍산보통선사지》에는 “송 충무왕 악공(岳公) 비가 고종 소흥 연간에 산에 올라 직접 거대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모양이 용과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세 사람들이 악비의 정충보국을 기려 이를 악송이라 이름 붙였다.

역대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읊었는데, 청의 서준극(舒峻極)은 소나무를 보며 악비를 그리워하며 “소나무는 악비 전대(前代)의 나무를 기억하네”라는 감동적인 시를 남겼다. 악비가 직접 심었던 원래의 악송과 악매(岳梅)는 이미 사라졌고, 기록에는 명말에 도적들에게 베였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고송들은 후세 사람들이 악비를 기념해 새로 심은 것이다. 악송의 사시사철 푸른 모습은 애국 정신이 대대로 이어짐을 상징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10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