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9: “왕패(王霸)병용”과 찬란한 제도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역사상 많은 이들이 한무제에 대해 높은 찬사를 했는데, 그중 당대의 유명한 대신 우세남(虞世南)의 논술이 아주 유명하다. “한무제는 6세(世)의 업적을 계승해 해내가 풍부했으며, 또한 고인(高人)의 자질이 있어 영웅들을 총괄하고 호걸들을 부릴 수 있었으며, 안으로는 예악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변경(邊境)을 개척했으며, 제도와 헌장(憲章)이 환히 빛나 기술할 만하다.”
이 문장은 한무제의 일생 공적을 거의 정채롭게 개괄한 것이다.
우리는 앞선 몇 편의 글에서 한무제가 생활한 시대, 진취적인 정신, 그리고 그가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사방 오랑캐를 진압하고 어루만진 조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우세남이 평가한 “제도와 헌장이 환히 빛나 기술할 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한무제는 군사적으로 사방 오랑캐를 평정하는 동시에, 정치 제도상에서도 변혁을 추진하여 대일통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편에서 우리는 한무제가 내정(內政) 방면에서 어떤 중대한 조정을 했는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추은령(推恩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를 칭한 후, 서주 이래의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로 바꾸어 시행했다. 하지만 한고조 유방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항우와 맞서기 위해 적지 않은 이성(異姓) 제후들을 봉했다. 그리하여 서한 건립 후, 국가는 군현제와 분봉제가 결합된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유방은 이성 제후들에 대해 의심을 품고 하나하나 제거하는 동시에, 다시 유씨 성을 가진 제후왕들을 대거 봉함으로써 한가(漢家)의 천하를 공고히 하려 했다.
분봉제는 황권을 옹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제후왕들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중앙 정권에 대해서도 자연히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제후왕들 중에는 실력이 막강해서 등급을 참람되이 어기는 것이 천자와 같은 자도 있었고, 법기(法紀)를 위반하거나 심지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자도 있었다. 한무제 이전의 황제들도 이 문제를 주시하여 왕과 제후 세력을 약화시키고 황권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한경제 시기, 조조(晁錯)는 ‘삭번(削藩)’을 제기해 제후들의 봉지를 축소하려 했으나, 오히려 제후와 천자 사이의 모순을 격화시켜 ‘칠국(七國)의 난’을 촉발했다. 비록 반란은 평정되었으나 각 제후국의 세력은 여전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한무제는 즉위 후 대일통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중앙집권을 강화해야 했으며, 어떻게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각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킬지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이때 한무제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중용한 어진 인재가 제 몫을 다했는데, 공거(公車) 상서를 통해 파격적으로 선발된 주부언(主父偃)이 한무제에게 한 가지 계책을 냈으니, 곧 ‘추은령(推恩令)’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주부언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제후왕의 자제들이 십여 명에 이르나, 오직 적장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고 다른 자제들은 봉지가 없으니, 이렇게 되면 인효(仁孝)의 도가 선양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제후왕들에게 ‘은혜를 펼쳐(推恩)’ 토지를 다른 자제들에게도 나누어주어 그들을 ‘후(侯)’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면 사람마다 황제의 은덕을 입게 되어 모두가 기뻐할 것이나, 실제로는 소리 소문 없이 제후의 봉지가 분할되어 제후왕의 힘은 점차 쇠약해질 것입니다.”
즉 ‘추은령’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제후왕이 왕위를 적장자에게 전하여 계승하게 하되, 또한 ‘추은’의 형식, 즉 은혜를 널리 베푸는 방식을 사용하여 다른 아들들도 해당 제후국 내에서 분봉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조령이 반포된 후, 양왕(梁王) 유양(劉襄 무제의 6촌 형제)과 성양왕(城陽王) 유연(劉延 문제의 아들로 무제의 숙부)이 앞장서서 추은을 요청하는 상서를 올렸고 한무제는 조서를 내려 비준했다. 다른 제후왕들도 잇달아 상서를 올려 조정이 추은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서』의 기재에 따르면,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 추은령이 반포된 이래 하간왕국(河間王國)은 전후로 11개의 후국(侯國)으로 나뉘었고, 치천왕국(淄川王國)은 6개 후국으로, 조왕국은 13개 후국으로 나뉘었다. 다른 제후국들도 모두 약간의 후국들로 나뉘었다. 이렇게 되자 제후국의 봉지는 갈수록 작아져 큰 나라는 성(城)이 10여 개에 불과하고 작은 나라는 수십 리뿐이었으니, 조정에 공물을 바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받들기에도 충분하여 여전히 중앙 정부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과 제후의 힘이 이미 천자를 위협하기에는 부족해졌다는 점이다.
추은 제도에 따라 새로운 후국은 원래 왕국의 제한에서 벗어나 지역적으로 독립되었고, 현지 군현(郡縣) 관리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즉, ‘추은령’의 시행은 원래 독립적이었던 지방 왕국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권력을 중앙 조정에 바치게 만든 것이다. 이후 지방의 왕과 후는 단지 물질적인 특권, 즉 자기 봉지의 조세만 향유할 뿐 이전과 같은 정치적 특권은 없어졌다.
이후 제후왕 중 세력이 가장 크고 위망이 높았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모반 혐의로 고발당하자 한무제는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고, 결국 유안은 자살했다. 뒤이어 그와 연루된 형산왕(衡山王) 유사(劉賜),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 역시 자살했다. 한무제는 그들의 봉국을 폐지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관리들을 파견해 관할하게 했다.
이 외에도 제후들을 더욱 제한하기 위해 한무제는 부익법(附益法), 아당법(阿黨法)을 반포했으니, 곧 제후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을 위해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관리와 선비들은 제후들을 멀리하게 되었고, 그들이 세력을 키울 수 없게 만들었다. 중앙 정권에 대한 제후들의 위협은 점차 사라졌다.
상권(相權)을 억제하고 내조(內朝)를 설치
한무제 조정의 조직 구조에는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중조(中朝 즉 내조)의 설치로 중외조(中外朝)가 병존하는 국면이 형성된 것이다. 내조란 시중(侍中), 상서(尙書) 등의 관리들로 구성된 의사결정 기구로 황제의 좌우에서 수행하며 궁 안에서 업무를 보았다. 반면 외조(外朝)는 승상이 이끄는 삼공구경(三公九卿)으로 구성된 문무 백관 체계다. 내조를 증설한 것은 주로 한초(漢初) 이래 승상의 권력이 너무 비대했던 것을 억제하기 위해 내린 변혁이었다.

한조 초기 승상의 권력은 매우 컸다. 그림은 『삼재도회(三才圖會)』에 나오는 소하의 초상. (공유 영역)
한 혜제(惠帝), 문제(文帝), 경제(景帝) 시기의 승상은 대부분 유방을 따라 천하를 얻은 개국공신들이었고, 계승한 황제들은 그들의 아들과 조카 항렬이었기에 승상의 지위가 매우 높았다. 예를 들어 황제와 승상이 밖에서 마주치면 승상이 예법을 행한 후 황제는 수레에서 내려 답례한 후 다시 타야 했으며, 예관은 “황제께서 승상을 위해 수레에서 내리신다”라고 말해야 했다. 만약 실내라면 승상이 일어설 때면 황제도 일어났다 다시 앉아야 했으며, 예관은 “황제께서 승상을 위해 일어나신다”라고 해야 했다.
또한 승상은 삼공(三公)의 수반으로 그 아래 12조(曹)를 두었으며 전문적인 사무 기구가 있어 문무 백관을 관리할 책임이 있었으니, 권력이 대단히 커서 황제도 마음대로 정사에 관여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소규조수(蕭規曹隨 소하가 만든 법을 조참이 따르다)’의 조참이 승상이 되었을 때, 기본적으로 정무를 처리하지 않았는데 관리들이 그를 배알하러 오면 상대방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시 혜제는 조참의 아들을 보내 왜 매일 술만 마시고 황제에게 정무를 청하지 않느냐며 천하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게 했다. 그러면서 황제가 묻게 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결국 그의 아들은 매를 맞았고, 혜제가 직접 나서서 물어야 했다.
조참은 그제야 이렇게 아뢴다.
“선제(先帝)와 소하께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법령을 밝히셨으니, 이제 폐하께서는 팔짱을 끼고 계시고 신하들은 직분만 지키면 됩니다.” 혜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칭송했다. 이는 황제라 해도 많은 경우 승상의 집정(執政) 이념을 따라야 했음을 설명한다.
한무제는 즉위한 후, 선후로 두 명의 인척인 두영(竇嬰 무제의 할머니인 두태후의 조카로 당숙에 해당)과 전분(田蚡 무제의 외삼촌)이 승상이 되었다. 특히 전분은 매우 교만해서 정무를 보고할 때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고 대대적으로 관리들을 추천했으며, 그가 제시한 건의를 황제가 다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관부(官府)의 땅을 가져다 사저를 확장하겠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거울삼아 한무제는 의도적으로 상권(相權 승상의 권한)을 삭감하기 시작하여 승상의 ‘제리권(除吏權, 관리 임명권)’을 취소하고 열후(列侯)만 승상이 되던 전통을 바꿨다. 원삭 5년(전124년), 한무제는 평민 출신의 늙은 유생 공손홍(公孫弘)을 승상으로 임용한 후 그를 평진후로 봉함으로써 황권이 옆으로 새어 나가는 국면을 바꾸었다.
[역주: 무제 이전까지는 관례적으로 제후 중에서만 승상을 임명했는데 그러다 보니 인재풀이 아주 제한적이었고 임면이 쉽지 않았다. 이후 평민 중에서도 승상으로 발탁할 수 있게 변경함으로써 황제의 인사권이 커졌다.]
동시에 한무제는 자신의 웅재대략(雄才大略)을 실현하기 위해 특별히 내조(內朝)를 설치하여 한 무리의 재능 있는 선비들을 모아 자신이 대일통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보좌하게 했다. 주요 방식은 황제와 외조 대신들이 정견에서 차이를 보일 때, 내조 관리들이 나서서 외조와 변론함으로써 황제의 집정 이념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원삭 2년(기원전127년), 위청이 오르도스 지역을 수복하자 내조의 주부언은 이곳에 삭방성을 수축해 물자 운송을 돕고 국토를 개척하자고 제의하며 이것이 흉노를 소멸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한무제가 이 문제로 공경대신들에게 토론하게 했는데 승상 공손홍 등이 모두 반대했다. 이에 똑같이 내조에 있던 주매신(朱買臣)이 나서서 군신들을 힐문했고, 마침내 중론(衆論)을 물리치고 순조롭게 삭방군을 설치했다.
[역주: 당시 공손홍 등이 반대한 이유는 삭방성을 쌓고 군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 동원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주매신은 수비선을 단축하고 물류의 이점이 있으니 ‘일시적인 고통이 영원한 안락을 가져온다’는 논리로 맞섰다. 결과적으로 이후 한조가 흉노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서역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내조의 구성 구조는 어떠했을까? 그것은 주로 낭중령(郎中令)과 소부(少府) 중에서 대부(大夫), 중대부(中大夫), 중랑(中郎), 시중(侍中), 상서(尙書) 등의 관리를 선발했다. 낭중령의 관원들은 의정(議政), 거마 관리, 의례 주관 등의 직무가 있었고, 소부는 주로 황제의 후생 사무를 책임졌다. 내조 관리들은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황제의 친신(親信)이 되거나 일상적인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관리가 되었다. 비교적 유명한 인물로는 엄조(嚴助), 주매신, 사마상여, 주부언, 동방삭(東方朔), 매고(枚皐) 등이 낭중, 중대부, 랑(郞)과 같은 관직을 지냈다. 위청과 곽거병 같은 이들도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내조에서 직무를 보았다. 그들은 마치 천자의 빈객과 같아서 국사를 도모하고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정무 처리 방면에서는 소부 이하의 상서(尚書)가 책임졌다. 한무제는 상서대(尚書台)를 설립하고 상서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유생들을 선발해 임직하게 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재상권의 일부를 대체하고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지게 했다. 한무제 이후로 내조의 권력은 계속 확대되어 점차 외조의 직권을 대체하게 된다.
감찰 제도
한무제 정치 제도의 또 다른 커다란 변혁은 감찰 체제를 강화하고 완비한 것이다. 주요하게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 조정에 감찰관인 사직(司直)과 사례교위(司隸校尉)를 증설하여 문무 백관에 대한 감찰과 수도의 치안을 강화했다.
둘째, 지방에 13주 자사부(刺史部)를 설치해 지방과 제후국에 대한 감찰을 강화했다.
아래에서 한무제의 이러한 조치들을 상세히 알아보자.

한무제는 감찰 제도를 완비해 관리와 지방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그림은 명대 구영의 『청명상하도』의 일부분. (공유 영역)
서한 초기에는 감찰 업무를 주로 승상과 어시대부가 책임졌다. 승상의 권력이 매우 커서 백관을 감찰하는 직능을 겸비했고, 어시대부의 설치는 진(秦)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주로 승상을 보좌하는 부승상의 역할을 했다. 또한 역대 제왕들이 무위이치(無爲而治)를 받들었기에 지방을 겨냥한 감찰은 완비된 체계가 없었으며, 보통 승상이 감찰권을 행사해 임시로 관리를 파견해 각 군국(郡國)을 감독했다.
원수 5년(기원전 118년), 한무제는 승상 아래 ‘사직(司直 승상사직)’이라는 직책을 설치하여 법을 어긴 자를 검거하는 것을 보좌하게 했다. 한무제 말년에는 무고(巫蠱)의 사건을 거울삼아 정화(征和) 4년(기원전 89년) 사례교위(司隸校尉)를 창설했는데, 황제가 하사한 부절(符節)을 가지고 군대를 이끌어 왕공 귀족들을 감독할 수 있었다. 무고 사건 이후 사례교위의 병권(領兵權)은 취소되었고, 부절을 지니고 경기(京畿) 지역의 치안을 감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례교위의 권위는 높지 않았으나 황제에게 직속되어 직접 황제의 명령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특수한 신분은 비교적 독립적인 감찰권을 지녔다.
한무제의 또 다른 독창적인 제도는 13자사부를 설치해 중앙의 지방에 대한 감찰과 통제를 강화한 것입니다. 원봉 5년(기원전106년), 한무제는 전국을 13개 감찰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각 구역을 ‘부(部)’라 불렀다. 매 부마다 자사(刺史) 한 명씩을 파견했는데, 수도 근처의 7개 군은 하나의 구역으로 묶여 여전히 사례교위가 책임졌고, 다른 12개 주는 모두 ‘자사’가 책임졌다.
자사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지방을 감독했으니, 곧 ‘육조(六條)로써 일을 묻는다’는 것이다.
첫째는 호강(豪強 강한 호족)이 토지를 점유한 것이 제한 수량을 초과하고 세력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는 것,
둘째는 군수가 조서와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며 지방에서 횡포를 부리고 탐오 부패하는 것,
셋째는 군수가 안건을 심판함에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인명을 가벼이 여기며 제멋대로 상벌을 내려 백성들의 원한을 사는 것,
넷째는 관리의 선발과 임명이 불공평하고 현능(賢能)한 자를 배척하며 소인(小人)을 임용하여 관리를 삼는 것,
다섯째는 군수의 자제들이 세력을 믿고 사람을 기만하며 군수 또한 자제들을 위해 하속(下屬 소속 부하)들에게 청탁하여 하속이 법을 굽혀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
여섯째는 군수가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고 지방의 호강들과 결탁하여 권력과 돈의 거래를 하며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다.
자사의 역할은 주로 군수와 지방의 호족들이 서로 결탁해 중앙에 대항함으로써 예전의 동성왕(同姓王)들이 범상(犯上)하여 난을 일으키던 국면이 재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자사는 중앙에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관리를 추천할 책임도 있었으며, 정적(政績)이 좋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파면권도 있었다.
당시 자사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으니 흠차대신(欽差大臣)에 상당했으며, 상시 직무를 보는 자로서 지방에 자신의 집무 장소도 있었다. ‘자사’라는 이름 자체로 보면 ‘자(刺)’는 자거(刺擧), 즉 불법을 정탐하여 감시한다는 뜻이고 ‘사(史)’는 황제가 파견한 사자를 의미한다. 한무제가 감찰 방면에서 내놓은 세 가지 커다란 조치는 백관과 지방에 대한 황제의 감찰 강도를 크게 강화했으며 후세에도 계승되었다.
호강(豪強)을 억제
호강의 횡포, 제후의 강력함, 흉노의 변방 침범은 한무제가 대일통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세 가지 커다란 문제였다. 애초 동중서가 한무제에게 제안한 건의 중 하나도 호강의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호강이란 대지주, 대상인 및 그들에게 의지하는 문객(門客), 조직폭력배와 유사한 유협(遊俠) 등이 포함되었으며 흔히 호문(豪門), 호우(豪右)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경의 치 당시 조정이 황로학설을 따라 무위로 나라를 다스린 탓에 “(법)망이 성겨 백성은 부유해졌으나, 재물을 부리며 교만함이 넘쳐 혹 호강 무리들이 겸병에 이르러 시골에서 무단(武斷)을 일삼았다. 종실은 토지가 있고 공경대부 이하는 사치를 다투어 집과 수레, 의복이 위를 멋대로 범하니 한도가 없었다.” 즉, 이러한 강세 집단이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었다.
바꾸어 말해, 한무제가 그들을 타격하려 한 까닭은 그들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법 관리와 결탁하고 토지를 겸병하며 백성을 핍박하고 중앙 정령의 시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무제가 취한 한 가지 조치는 호강과 호족들을 무릉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년), 한무제는 무릉(茂陵 역주: 당시에는 황제가 살아 있을 때부터 자신의 능을 만들었다)을 수축하고 읍을 만들어 현을 설치했다. 무릉현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했으나 인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이듬해 한무제는 재산 20만과 밭 2경(頃)을 가진 호족들을 무릉현으로 옮겨 살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원삭 2년(기원전127년)에 이르러 주부언이 건의하기를 “무릉현이 막 세워졌으니 천하의 호걸과 겸병하는 집안,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키는 자들을 모두 무릉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경사(京師)를 충실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을 소탕할 수 있으니, 죽이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호강의 화란(禍亂)을 자동으로 해소할 수 있다.” 한무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가산이 300만 이상인 호강들을 모두 무릉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죄행이 가득한 호강들에 대해 한무제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징벌하여 법도를 수호했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은 당시 매우 유명했던 유협 곽해(郭解)도 이주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의 재산은 기준에 미달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주시킬 것을 건의했는데, 이유는 그의 개인적 영향력이 부유한 호강들을 훨씬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곽해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서에 따르면 곽해는 젊었을 때 사람됨이 음험하고 독살스러워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었으며, 나중에 일이 발생하자 도망쳐 강도질, 동전을 사적으로 주조, 무덤 도굴 등을 생업으로 삼았다. 나이가 든 후 비록 겉으로는 사회의 현달(賢達)한 인사가 되어 자선을 베풀었으나 본성은 진정으로 바뀌지 않았다.
곽해의 협객 기질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사적으로 그를 보호하거나 그를 대신해 살인을 저질러 분풀이를 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곽해의 조카가 그의 이주를 건의한 관리를 죽였고, 관리의 가족이 경사에 올라가 고발하려 했으나 묘연하게 살해당했다. 이에 한무제가 직접 곽해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고 곽해는 줄곧 도망쳤으나 많은 이들이 그의 도망을 도왔다. 지현(軹縣)에서 한 유생이 사건을 조사하러 온 사자와 담소하던 중, 곽해의 문객 하나가 곽해를 극찬하자 유생이 대꾸했다.
“곽해는 오로지 간사함으로 공법(公法)을 범하는데 어찌 현능하다 하는가?”
이 문객은 이 말을 듣고 유생을 죽인 뒤 그의 혀를 잘랐다.
바로 곽해의 죄행이 가득하고 그의 문객들이 폭력을 남발했기에, 결국 곽해는 자업자득으로 대역무도 죄로 판결 받고 처형되었다.
이 외에도 한무제는 법 집행이 엄격한 관리들을 중용해 호강들을 타격했다. 한무제는 나라를 다스림에 관대함과 엄격함을 조화시키고 왕도와 패도를 섞어 썼다(王霸雜用). 한 초기에 정사가 간소하고 형벌이 관대하여 호강들이 횡포를 부리고 불법 무리들을 단속하기 어려웠기에, 한무제는 비교적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사서에서 한무제 시기의 ‘혹리(酷吏)’가 서한 전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데, 장탕(張湯), 조우(趙禹) 등을 대표로 한다. 그들의 주요 직책은 권세에 굴하지 않고 가혹한 형벌로 불법적인 제후 귀족, 호강 부호 무리들을 징치(懲治)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처사가 너무 가혹하기도 했으나 호강을 타격하는 면에서 확실히 역할을 발휘했다. 결국 한무제의 엄한 타격 아래 호강의 세력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의심할 바 없이 ‘추은령’이든 자사 설치든, 상권을 회수하고 호강을 억제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한무제가 옛것을 변하여 제도를 창제한 거동이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그의 웅대한 대일통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견실한 기초를 닦아주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2/n1144896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