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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울린 5천 년 메아리——2026년 스페인 션윈 관람소감

마드리드 관객

【정견망】

들어가는 말

어떤 것은 연습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기교나 동작, 표정이야 연습할 수 있지만, 무대 위에 선 사람의 눈 속에 서린 그 빛, 즉 그가 단순히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정으로 믿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생한 질감(質感)은 연습실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내면에서만 나올 수 있다.

조명이 꺼지는 순간, 나는 내가 이미 수년째 션윈(神韻 공연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습관 때문이 아니라, 매번 공연장을 나설 때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한 감동도, 완전한 경탄도 아닌,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긴 세월을 넘어 나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부드럽게 어루만져지는 느낌이다.

1. 아름다움은 제1의 언어다

션윈의 아름다움은 번역이 필요 없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관객들 사이에 앉아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해 보았다. ‘수수(水袖 소매춤)’ 프로그램에서 비단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공중에 곡선을 그릴 때, 중국 문화를 전혀 모르는 한 중년 여성은 숨을 죽였다. ‘공작 천국’에서 공작이 날개를 펴는 순간 무용수의 치맛자락이 동시에 펼쳐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같이 온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아름다움에는 구조가 있다. 션윈의 의상은 박물관의 복원 전시물이 아니라 살아 있다. 빠른 회전과 큰 도약을 위해 설계되었으며, 모든 의상은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 흐르는 수수의 실크, 북소리에 맞춰 떨리는 몽골 기수의 가죽, 나무판 위에서 경쾌한 리듬을 새기는 거거(格格)들의 화분저(花盆底 꽃신). 5천 년의 심미안이 두 시간으로 농축된 이곳은 진열이 아니라 호흡이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이 모든 것의 호흡 리듬이다. 얼후의 소리는 중국 악기 중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아 있다. 완곡하고 호소력이 있으며, 서양 관현악의 화성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독을 유지하면서도 기묘한 공명을 이룬다. 이 융합은 타협이 아니라 자신감 넘치는 대화다. “나는 다른 문명에서 왔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선언이다.

2. 이야기 속의 우주 질서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프로그램은 《기연(奇緣)》이다. 강도들에게 빼앗긴 금불상을 되찾기 위해 승려 중 세 명이 여장을 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강도를 유혹하는데, 중간에 가발이 떨어지거나 잘못 쓰는 실수 장면이 연출되어 관객석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다 금불상을 들고 강가로 도망쳤을 때 퇴로가 끊기고 강도의 칼날이 날아드는 찰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금불상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수배로 커졌고, 겁에 질린 강도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설정이 효과적인 이유는 코미디와 신성함을 같은 이야기 안에 두었으며, 그 순서가 정확했기 때문이다. 먼저 웃게 한 뒤 나중에 경탄하게 했다. 웃음은 관객의 심리적 무장 해제를 유도하고,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신앙에 관한 메시지를 수용하게 한다. 인간이 절망스런 처지에서도 여전히 견지(堅持)를 선택할 때, 마지막 순간에 더 큰 힘이 나타난다는 진리 말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自食其果)》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다. 한 쌍은 마음씨 착한 부부이고, 다른 한 쌍은 부유하지만 어질지 못한 부부인데, 거지로 변장한 신선을 만나 각자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선량한 부부는 규칙을 지켜 선과(仙果)를 하나만 먹고 젊어졌지만, 탐욕스러운 부자는 경고를 무시하고 두 개를 먹었다가 아기로 변해버린다. 이 결말은 신의 분노가 아니라 탐욕의 논리가 자연스레 끝까지 작동한 결과다. 징벌은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행위 자체의 연장이다. 이는 인과율(因果律)에 대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금후출세(金猴出世, 손오공의 탄생)》는 특히 몰입해서 보았는데 왜냐하면 션윈 손오공 이야기 중 가장 드물게 다뤄지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궁에서 큰 소란을 피우거(大鬧天宮)나 서천취경(西天取經)이 아닌 ‘학예(學藝)’ 과정 자체를 소재로 선택했다.

손오공은 사부를 따라 수행하며 춘하추동이 바뀌어도 사부의 명을 엄격히 지키고 한서(寒暑)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행을 견지한다. 다른 제자들은 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떠나갔지만, 오직 손오공만이 자리를 지켰다. 스승은 이에 그에게 관정(灌頂)을 해주고 72가지 변화를 전수한다.

이 대목은 무대 위에서 사계절이 바뀌는 동안 한 그림자가 같은 자리에서 줄곧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화면으로 체현되었다. 주변의 제자들은 속속 떠나가고 조명은 봄날의 밝음에서 겨울날의 혹한으로 변하지만, 오직 그 그림자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전체 공연 중 가장 고요한 순간이자 가장 힘 있는 순간이다. 힘은 동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동(不動)’에서 나온다.

션윈이 이 대목을 선택한 것은 수행의 본질을 말하는데 공부(功夫)란 타고난 재능이나 기연(機緣)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하나이며, 시간과 의지로 바꾼 것이다. 관정은 결과이고 견수(堅守 견고한 지킴)가 원인이다. 신통(神通)은 외적인 능력이지만, 가부좌를 튼 그 그림자야말로 진정한 손오공이다.

화과산으로 돌아와 세 마리의 요괴가 집을 점거한 것을 발견한 손오공은 신통력을 발휘해 그것들을 쫓아낸다. 이 결말의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수련이란 세상을 멀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지킬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다. 학예(學藝)가 안으로 찾음이라면 요괴를 물리치는 것은 밖을 향한 것으로, 두 가지는 같은 일의 양면이다.

배경 화면(디지털 천막) 속의 돌원숭이가 갑자기 화면을 뚫고 나와 살아있는 무용수가 되었을 때 수많은 관객이 탄성을 질렀고, 그가 다시 매끄럽게 화면 속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날 때 관객석에서는 이 독특한 표현력에 찬사를 보내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무대 아래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며 이날 밤 무대 위 배우들 자신의 수련 과정을 떠올렸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소년 시절부터 시작했다. 매일 연공(煉功), 법공부(學法), 그리고 내심에서 ‘진선인(眞·善·忍)’ 수지(修持)를 무용 훈련과 동시에 진행하며 하나로 융합시켰다. 《금후출세》가 보여준 사계절 흔들림 없는 그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초상이다. 그들은 손오공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 가벼움 아래의 무게

올해는 몽골 춤이 두 개나 편성되었는데, 이는 따로 언급할 가치가 있다. 1부의 남자 몽골 춤은 감각의 향연이었다. 맑은 강물, 우뚝 솟은 먼 산, 준마의 울음소리, 초원에서 영웅 소년들이 도약하는 모습. 이 프로그램은 배경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극장에 앉아 그 광활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감정적 연결을 구축한다. 초원은 아름답고, 자유로우며, 동경할 만한 곳이라는 연결이다.

2부의 여자 몽골 춤은 완전히 달랐다. 설산의 서루(書樓 책을 보관하는 누각), 밝은 달빛, 신불(神佛)에게 예를 올리는 소녀들의 모습을 비추는 수유 등불의 불빛. 카메라(시선)는 외부의 장엄함에서 내부의 평온함으로, 천지의 광활함에서 마음의 경건함으로 향한다.

이 두 프로그램은 무엇이 아름답고 신성한지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 먼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신성함을 탐색하게 한다.

만주족 춤은 올해 가장 과소평가되기 쉬운 프로그램이다. 거거들이 나막 꽃신을 신고 궁궐 뜰에서 연을 날리는데, 웃음소리는 맑고 춤사위는 완만하다. 하지만 나막 꽃신은 걷는 것조차 균형과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수련의 은유다. 외적인 제한이 내면의 여유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연이 궁궐 담장 밖으로 날아가도 실은 여전히 손안에 있다. 비록 담장 안에 있을지라도 하늘과의 연결은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는 의미다.

《서원(書院)》 프로그램은 올해 바느질을 싫어해 남장을 하고 서원에 들어가 공부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겉으로는 가벼운 희극이지만, 내면에는 ‘추구’에 관한 명제가 담겨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은 세속의 규범을 깨뜨려서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으며, 정신과 학문의 공간은 성별과 관계없이 그것을 갈망하는 모든 이의 것이라는 메시지다. 이는 세상에 장난치듯 머물며 공명첩록에 얽매이지 않는 《장과로(張果老)》의 모습과 더불어, 세상을 벗어난 마음으로 세상의 일을 한다는 션윈의 일관된 인생 태도를 보여준다.

4. 견수에 관한 하나의 거대한 서사

수년째 션윈을 관람하며 나는 전체 공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숨겨진 주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독한 견수(堅守)’다. 강가에서 죽음에 직면한 승려들, 박해 앞에서도 변치 않는 수련자의 마음, 홀로 서원에 잠입한 소녀, 미행을 나선 강희제. 모든 핵심 인물은 결정적인 순간에 고독하며, 외부의 지지 없이 어떤 신념을 지켜낸다.

이것은 서사상의 우연이 아니라, 인류가 처한 환경에 대한 션윈의 가장 깊은 통찰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모든 견수는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만큼은 대개 고독하다. 주변의 박수도, 지지도 없으며 오직 내면의 확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금후(金猴 손오공)는 무술을 익히던 절벽 위에서 고독했고, 장과로는 인간 세상을 구름처럼 떠돌 때 고독했으며, 승려는 강가에서 금불상을 지키던 그 순간 고독했다. 그러나 고독이 진정한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 전통 신앙에서 선념(善念)을 품고 신앙을 독실히 지키는 자 곁에는 반드시 신불(神佛)의 가호가 있었다. 육안으로는 혼자 가는 것처럼 보이나, 천도(天道)는 그를 결코 버린 적이 없다. 공자는 “덕이 있는 이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鄰)”라고 했고, 《상서(尙書)》는 “황천은 친함이 없으되 오직 덕 있는 자만을 돕는다(皇天無親, 惟德是輔)”라고 했다. 수천 년의 지혜가 오늘 밤 무대 위에 구현된 것이다.

션윈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고독은 약점이 아니라 모든 위대한 견수의 공통된 형태라고. 신적(神跡)은 고독 속에서 내려오고, 인과는 지켜보는 이가 없어도 똑같이 작동하며, 천도(天道)는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소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매우 귀중한 일깨움이다.

결문: 그 강가, 그리고 그 이후

공연이 끝나자 스페인 관객들은 기립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배우들은 세 번의 커튼콜을 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나는 《기연》에서 승려들의 퇴로를 막았던 그 큰 강을 떠올렸다.

강가는 인간의 모든 힘이 다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손에 안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말 안고 있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지 여부뿐이다.

션윈은 매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시대와 인물, 이야기가 바뀔 뿐이다. 그 메시지는 “이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크며, 선량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견수하는 사람은 결국 고독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연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명 상태이며, 공연의 형식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마드리드의 공연장에 앉아 나는 곤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량함을 지키기로 선택한 모든 이들을 생각했다. 반드시 수련자나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강가의 순간에 손을 놓지 않기로 선택한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션윈은 중국 고대 이야기와 무용 예술가들의 신체를 통해 인류 공동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강을 만날 것이며,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지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연장을 나서니 마드리드의 밤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내 손에는 여전히 프로그램 북이 들려 있다. 그 속엔 내가 웃고, 침묵했던,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어루만져짐을 느꼈던 스무 개의 프로그램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매년 다시 돌아오는 이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