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12: 죄기조로 마음을 드러내고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한무제는 위로는 진시황과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일컬어지고, 아래로는 당 태종과 함께 한당성세(漢唐盛世)를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다. (유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는 재위 54년 동안 일생토록 날카로운 뜻으로 진취해, 문치와 무공에서 모두 전무후무한 공업(功業)을 창립했으며 대한제국(大漢帝國)을 흥성의 정점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성세의 아래에는 위기 또한 잠복되어 있었으니, 한무제 즉위 약 20년이 되었을 때 국가에 엄중한 재정 위기가 나타났고, 만년에는 또 중대한 변고를 겪었다. 반평생을 함께한 황후 위자부와 직접 키운 태자 유거(劉據)가 잇따라 자살했으며, 나라에 한때 후계자가 없는 곤경에 직면했다. 여기에 조정에 더 이상 위청, 곽거병 같은 대장이 없었으므로 흉노에 대한 전쟁 또한 좌절을 겪었다.
첩첩 위기에 직면하여 한무제는 어떻게 차분하게 대응해 한조 정권을 유지했는지, 또 천고에 전해지는 어떤 아름다운 일화를 남겼을까?
이익을 일으킨 조치 (興利舉措)
우리는 한무제가 일생 많은 큰 일들을 했음을 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흉노에 큰 타격을 입히고 사방으로 용병(用兵)해 강토를 넓혔으며, 안으로는 여러 번 순행하고 태산에서 봉선하며 삭방성을 쌓고 서남이를 소통하고 황하 제방을 수축하는 등 대공정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적의 배후에는 모두 강력한 재력(財力)의 지지가 뒤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한무제가 한 번 장졸들을 포상하고 항복한 흉노인을 안무하는 데만 백억여 전을 썼으며, 각종 수리 공사의 비용 또한 십조 전을 단위로 계산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한 초 문경지치가 창조한 재산은 곧 소진되었다.

청대(淸代) 《강소 의흥 매자경상씨 종보(江蘇宜興梅子境桑氏宗譜)》에서 취한 상홍양 초상.(공유 영역)
원수 3년(기원전 120년)의 막북 전투 이후, 국고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는 군색한 상황이 나타났다. 이듬해 산동 지역에 수해가 발생하여 조정이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고 부호들에게 대출을 받았으나 백성들이 굶주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부자들을 함곡관 서쪽으로 이주시키고 노정의 식사와 숙소를 관에서 공급하게 했으나 지방 정부의 재정 또한 곧 바닥이 났다.
한무제는 예지력 있는 안목으로 상업적 두뇌를 가진 신하들을 중용해, 경제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위기를 해소했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대신으로 ‘이재 삼걸(理財三傑)’, 즉 東郭咸陽, 공근(孔僅), 상홍양(桑弘羊)을 꼽을 수 있다.
동곽함양은 소금 상인 가문 출신이고 공근은 철 주조 사업을 경영했으니 그들은 모두 대부호였다. 한무제가 염철(鹽鐵) 관영 정책을 실시할 때 이 두 사람을 대농승(大農丞)에 임명하여 자신들의 장기를 발휘해 국가를 위해 염철을 경영하게 했다. 상홍양은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3세 때 계산에 정통했으므로 시중으로 선발되어 한무제 좌우에서 모셨으니 군신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 한조가 경제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상홍양은 곧 중용되어 재정 대권을 관장했다. 이 몇몇 상업 인재들의 건의 아래 한무제는 일련의 경제 정책 조정을 단행하여 단시간 내에 다시 재부를 축적했다.
첫 번째 조치는 이윤이 풍부한 염철업을 국유로 만들어 전국 각지에 염철관(鹽鐵官)을 설치하고 사영(私營)을 취소한 것이다. 당시 전국 27개 군에 30여 곳의 염관을 설치했고, 40개 군국 중에 50여 곳의 철관을 설치하여 대농승의 관할을 받게 했다. 원정(元鼎) 연간에 한조는 연속으로 용병했는데 그중 대부분의 비용은 관부에서 장악한 염철의 이윤 공급에 기댔다. 또한 관영의 규모가 크고 인력이 충분했으므로 소금을 굽고 철을 다스리는 기술이 민간 작업장보다 크게 진보했다. 나중에는 술의 경영권 또한 국가가 독점했다.
두 번째는 균수와 평준 정책의 실시인데, 이는 국가가 상품의 운송, 매매, 물가를 통제하는 조치이다. 균수란 오늘날의 물류와 유사하니, 각지에 균수관을 설치하여 상품 운영을 책임지게 하고, 각지에서 원래 경성으로 운송하려던 물품을 시장 가격에 따라 가격이 높은 곳으로 운반해 판매함으로써 멀리 떨어진 군국(郡國)의 운송비를 줄이고 중앙 조정이 운반 거래 과정에서 이익을 얻게 한 것이다. 평준은 곧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니 경성에 ‘위부(委府)’를 설립하여 천하의 화물을 거두어들이고,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低買高賣) 방식을 통해 재정 수입을 증대시켰다.
세 번째는 일정 기간 추진한 산민(算緡)과 고민(告緡) 제도이니, 곧 백성들에게 재산세를 징수하고 재산을 은닉한 자를 고발해 응징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조치는 진시황 이후 다시 화폐를 통일한 것이다. 한 초기에는 지방에서 자의적으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었으므로 시장에 화폐 혼란을 초래했고 호강(豪强)과 제후왕들의 야심을 기르게 했다. 한무제 때 국가는 주조권을 독점하고 전국에 통일 화폐, 즉 금속 성분이 좋고 무게가 적당하며 몰래 만들기 어려운 ‘오수전(五銖錢)’을 보급했다.
무고의 화 (巫蠱之案)
무고란 고대에 사람을 해치던 일종의 사술(邪術)로, 작은 나무 인형으로 저주하는 방식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옛사람들은 신명을 신봉했기에 무고의 술수에 대해 매우 미워했으며, 만약 누군가 궁정에서 이런 일을 하면 엄중한 책벌을 받거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졌다. 일찍이 한무제의 진(陳)황후가 무고안에 연루되어 폐위된 적이 있는데, 한무제 만년에 궁궐 내에서 또 한 차례 연루 범위가 매우 넓은 무고안이 발생했으니 이 일은 한무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고였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한무제의 태자 유거부터 말해야 한다. 유거는 한무제의 첫째 아들로 그때 한무제는 이미 즉위한 지 거의 13년이 되었으므로 매우 기뻐하며 유거의 생모 위자부를 황후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거가 7세 때 그를 태자로 세워 고심스레 육성했다. 한무제는 군신 중에서 덕과 재주를 겸비한 명유(名儒)를 선발해 태자를 가르치게 했고, 그가 성인이 된 후에는 박망원(博望苑)을 지어 태자가 자유롭게 빈객을 사귀며 견문을 넓히게 했다. 정무에 있어 한무제는 매번 궁을 나가 순유(巡遊)할 때마다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며, 태자가 재결한 일에 대해 한무제는 동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태자가 장성한 뒤 위자부는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퇴하여 점차 총애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젊은 비빈들이 선후로 황자(皇子)를 낳았다. 여기에 태자의 성격이 인후하고 신중하여 한무제의 성격과 닮지 않았고 정치 이념에서도 한무제와 달랐으므로, 이는 황후와 태자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우려하게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한무제가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후 태자의 외삼촌인 위청과 담소하며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많은 일들이 초창 단계에 있고, 여기에 외족(外族)의 침입이 끊이지 않으니 짐이 만약 제도를 변경하지 않으면 후대가 준칙으로 삼을 근거를 잃을 것이요, 만약 군사를 내어 정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될 수 없으므로 부득불 백성들에게 고생을 좀 시키는 것이오. 만약 후대도 이렇게 한다면 이는 진(秦)이 멸망한 전철을 밟는 것과 같소. 태자의 성격이 차분하고 정적(靜的)인 것을 좋아하니 분명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짐을 우려하게 하지 않을 것이오. 문치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군주를 찾으려는데 태자보다 더 강한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위청이 한무제의 이 말을 누나인 위자부에게 전하자 그녀는 장신구를 벗고 직접 한무제에게 사죄했다.
그러나 태자의 인후함 때문에 조정의 간사한 소인들이 자신의 권세를 보존하기 위해 고의로 태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악랄한 자가 한무제의 측근인 강충(江充)이었다. 한 번은 태자의 거마가 실수로 한무제의 치도(馳道), 즉 어용 차도로 지나갔다가 강충에게 고발당했으니 이때부터 두 사람은 원한이 생겼다.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 위자부의 형부이자 재상인 공손하(公孫賀) 부자가 황제를 무고로 저주했다는 모함을 받고 옥사했으며, 위자부의 딸과 조카들까지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강충은 한무제가 노쇠한 것을 보고 태자가 즉위하면 자신에게 불리할까 걱정하여 무고안을 이용해 태자를 쓰러뜨릴 독계(毒計)를 생각해냈다. 그는 먼저 한무제가 병환 중일 때를 틈타 궁중에 고의 기운(蠱氣)이 있으니 누군가 황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한무제는 강충을 사자로 임명하여 무고안을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강충은 사람을 시켜 도처의 땅을 파서 나무 인형을 찾게 했고 전후로 수만 명을 죽였다. 그 후 그는 다시 황궁의 총애받지 못하는 비빈들부터 조사하기 시작해 황후와 태자의 궁까지 수색했습니다. 강충은 궁전을 침대를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파헤친 뒤, 마지막에 태자 궁에서 발견된 나무 인형이 가장 많다고 공표했다. 한무제는 당시 장안성 밖에서 요양 중이었기에 태자와 황후가 문안드리기 위해 보낸 사람들은 모두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태자의 스승 석덕(石德)은 무고안에 휘말린 것이 매우 위험하며 현재 황제의 생사가 불명확하니 강충이 기회를 틈타 태자를 모함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석덕은 태자에게 먼저 성지(聖旨)를 사칭해 강충을 죽인 뒤 천천히 배후의 음모를 추적하라고 건의했다.
태자가 강충을 죽인 뒤 한무제의 상황을 알 수 없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지키려 했으니, 다급한 김에 황후의 시위, 죄수들 그리고 호인(胡人)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다. 이때 장안성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한무제 쪽에도 태자가 군사를 일으켜 모반했다는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한무제는 당초 믿지 않고 사신 한 명을 보내 태자를 불러 상황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이 사자가 겁을 먹고 장안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도망쳐 돌아와 태자가 정말로 모반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한무제는 그제야 명령을 내려 승상이 직접 군사를 내어 난을 평정하게 하고 황후의 인신(印信)을 회수했다. 위자부는 화를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조용히 자살했다. 그 후 재상과 태자의 군대가 닷새 동안 대전하여 수만 명이 죽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으며 태자는 패하여 도망갔다.
아들을 잃은 슬픔
태자가 모반했다고 오해했으므로 한무제는 슬프면서도 분노했으며 백관들도 어떻게 권유하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호관(壺關) 삼로(三老, 교육과 치안을 담당하는 지방 원로)가 한무제에게 상서를 올려 태자는 천추대업(千秋大業)을 계승할 저군(儲君)이자 황상의 적장자인데, 강충은 단지 일개 평민으로서 중용을 받아 귀해졌음에도 소인들을 규합해 태자를 모함하여 황제와 태자의 부자 관계를 파괴했다고 했다. 태자는 나아가 황제를 볼 수 없고 물러나면 간신에게 모해를 당하니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끝에 단지 강충을 죽였을 뿐이다. 그는 태자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지 자구(自救)를 위함이지 어떤 험악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한무제에게 다시는 태자를 추격해 그가 장기간 밖으로 유랑하지 않게 하라고 건의했다.
한무제가 이를 본 후 매우 감동했으나 사면령이 미처 하달되기도 전에 비극이 발생했다. 태자는 동쪽으로 탈출해 하남 호현(湖縣)의 어느 가난한 가정에 숨었으며 주인은 신발을 팔아 태자를 공양했다. 태자는 현지에 부유한 친구가 있음을 떠올려 사람을 보내 찾게 했으나 뜻밖에 현지 관부에 행적이 발각되었다. 관병들이 태자를 포위했을 때 태자는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고 여겨 방 안에서 목을 매어 자진했다. 혼란 속에서 이 집 주인은 관병과 격투하다 죽었고 태자의 두 아들도 함께 살해되었다.
또 1년이 지나 정화 3년(기원전 90년)에 이르렀을 때 한무제는 이미 66세였는데, 관리들이 다시 무고안을 조사했을 때 많은 것들이 억울한 사건임을 발견했다. 한무제도 깨닫게 되었으니, 태자는 강충에 의해 다급해진 끝에 군사를 일으켜 사람을 죽였을 뿐 모반의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한고조의 제묘를 지키던 전천추(田千秋)라는 관리가 한무제에게 상주해 “아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희롱했으니 그 죄는 태형(笞刑)에 해당한다. 천자의 아들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으니 무슨 죄가 되겠는가! 신이 꿈에 한 백두옹이 신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했다.
한무제는 즉시 그를 소견하여 감개무량하게 말하기를, 부자 사이의 일은 외인이 말을 보태기 어려운데 오직 그대만이 중점을 말했다고 했다. 이 말은 그대가 한 것이 아니라 그대가 꿈속에서 본 백두옹이 바로 우리 고황제(고조 유방)라고 했다. 한무제는 전천추가 보정(輔政)의 어진 인재라 여겨 그를 대홍려에 임명했으며, 또한 강충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태자를 모해하는 데 참여한 다른 자들도 처단했다. 태자 유거가 무고하게 살해된 것을 가련히 여겨 한무제는 특별히 사자궁(思子宮)을 지었으며, 또한 호현에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台)를 세웠다.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 모두 슬퍼했다.
유거는 세상을 떠났으나 국가는 저군(儲君 후계자)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한무제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참고 황자들 중에서 다시 계승자를 선발했고 결국 구익부인이 낳은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을 선택했다. 구익부인은 하간(河間) 사람인데 한무제가 하간을 순유할 때 기(氣)를 잘 보는 자가 여기에 기이한 여인이 있다고 말하여 한 젊은 여인을 불러왔다. 이 여인은 두 손을 주먹 쥔 채 펼 수 없었는데 한무제가 직접 그녀의 손을 벌리자 단번에 주먹이 펴졌다. 그리하여 이 여인은 궁으로 돌아와 권부인(拳夫人) 혹은 구익부인으로 봉해졌다.
구익부인은 한무제 만년에 매우 총애를 받았으며 임신 14개월 만에 황자 유불릉을 낳았다. 먼 옛날의 성왕 요(堯)가 그 어머니가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으므로 한무제는 이 아이가 비범하다고 여겨 구익부인을 위해 ‘요모문(堯母門)’을 지어주었다. 유불릉이 5, 6세가 되었을 때 체형이 크고 영리함이 비정상적이었으므로 한무제는 그가 자신을 매우 닮았다고 느껴 그를 태자로 세울 마음을 품었다.
이에 그는 궁정 화가에게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성격이 안정되고 신중한 대신 곽광(霍光)에게 하사하며, 신하들에게 막내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고자 함을 암시했다. 후원(後元) 2년(기원전 87년), 한무제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정식으로 겨우 8세인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고 곽광을 필두로 한 네 명의 보정(輔政)대신을 선발했으니, 이로써 제국 홍업(鴻業)의 전승을 완수했다.
윤대 조령 (輪台詔令)
정화 3년에는 또한 한 가지 큰 일이 발생했으니 곧 이광리가 7만 병마를 거느리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간 것이다. 이는 이광리의 마지막 전투이자 한무제 시대 흉노 정벌의 마지막 전투였다. 출발 전 재상 유굴리(劉屈犛)가 그를 위해 전송연을 베풀었다. 당시 태자의 자리가 계속 비어 있었으므로 이광리는 여동생인 이부인의 아들 창읍왕(昌邑王)을 태자로 만들고 싶어 유굴리가 한무제 앞에서 말을 좀 해주기를 바랐다. 유굴리와 이광리는 사돈 관계였으므로 그 역시 이 일을 성사시키기를 희망하여 쾌히 승낙했다.

윤대현이 위치한 파음곽륵주(巴音郭勒州)와 신강 위치. ( Croquant /Wikimedia Commons)
처음에 이광리는 군사력이 강해 전투가 매우 순조로웠으며 흉노병은 사방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석 달 뒤 어떤 관리가 유굴리와 이광리가 태자를 세우기로 몰래 모의한 일을 고발했으며, 또한 유굴리의 처가 남몰래 무술(巫術)로 한무제를 저주했다고 밀고했다. 결과적으로 유굴리의 일가족은 처형되었고 이광리의 가속들도 구금되었다. 이광리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죄를 갚기를 희망했으므로, 모험을 무릅쓰고 대군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계속 북진하여 질거수(郅居水)를 건넜다. 한군과 2만 흉노 대군이 교전하여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광리의 가속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한군 중에도 점차 퍼졌고, 그의 수하 장졸들은 몰래 상의하기를 이광리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전군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다고 여겨 그를 억류하고 진군을 저지하려 했다. 이광리가 이를 발견한 뒤 주모자를 죽였으나 또한 군심(軍心)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군을 연연산(燕然山)으로 철수시켰다. 흉노 선우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5만 군사를 발하여 한군을 추격했다. 이광리의 대오에서 군심이 이미 동요했고 여기에 그가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으므로 상황이 즉시 역전되었다. 흉노군은 한군이 방비하지 못한 틈을 타 한밤중에 한군 진영 앞에 수 척 깊이의 참호를 팠으며 새벽에 다시 한군의 후방에서 기습했다. 결과적으로 한군은 진퇴양난에 빠져 투지를 상실했고 7만 병마가 전군이 죽고 이광리는 패배해 투항했다.
원광 2년(기원전 133년)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한무제의 흉노 정벌은 이미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한무제는 만년에 일련의 변고를 겪으며 평생 집권의 득실을 반성하기 시작했고 계속 추진해온 확장 전략을 변경할 의사를 가졌다. 이때 재정 대신 상홍양 등은 윤대(지금의 신강 윤대현)에 둔전을 실시할 것, 즉 백성들을 모집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생산함으로써 한군의 서역 내 실력을 보장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무제는 이를 거부했으며 또한 한 통의 조서를 반포해 자신의 심지를 밝혔으니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윤대죄기조(輪台罪己詔)》다.
이 조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 몇 가지다.
첫째는 다년간의 용병 정벌에 대한 반성으로, 사방으로 원정하며 대군이 노정에서 끊임없이 병력을 잃었으며 군량 수송은 더욱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대는 차사국 서쪽으로 천 리 밖에 있으니 설령 둔전이 성공한다 해도 운송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둘째는 가혹한 정치를 금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전략을 제시했으니, 한무제는 윤대 둔전이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며 연년세세의 전쟁이 이미 재정과 민력(民力)을 고갈시켰으므로 현재의 급선무는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외에 한무제는 무비(武備)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아 말을 기르는 것으로 요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회복했다.
이 조서의 반포는 한조(漢朝)의 국책이 상공(尚功, 공적을 숭상함)에서 수성(守成)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중국 역사상 황제가 반포한 첫 번째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조서)로서 한무제의 넓은 흉금과 예지력 있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반고는 한무제를 찬양하며 “이로써 말년에 드디어 윤대의 땅을 버리고 애통한 조서를 내렸으니 어찌 어진 성인의 뉘우침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한무제가 담담하게 자신을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진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 후 한무제는 더 이상 군사를 쓰지 않았으며, 또한 일찍이 태자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었던 전천추를 재상으로 삼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해 국책이 조정된 것을 보여주었다. 《자치통감》에서는, 정화 4년(기원전 89년)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할 때 겸허하게 말했다.
“짐이 즉위한 이래 한 일들이 사납고 막되어 천하 많은 이들이 수고롭고 고통스럽게 했노라. 지금 후회하려 해도 돌이킬 수 없노라. 앞으로는 백성을 해치거나 다치게 하는 일과 천하 자원을 소모하는 일은 모두 중단할 것이다.”
한무제는 자신이 사방으로 군사를 쓰고 큰 공정을 실시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해서 백성들이 따라서 고생했다고 여겼고 이후 백성의 이익을 해치고 천하의 자원을 소모하는 일들은 일률적으로 중지시킨 것이다. 이 말은 또한 윤대조에 대한 주석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때 한무제의 붕어까지는 겨우 2년의 시간만 남아 있었다. 한무제는 6대(代) 제왕의 기업(基業)을 계승해 일생 동안 개척하고, 문(文)으로는 유학을 숭상하고 무(武)로는 사방을 안정시켰으며 천하의 현사(賢士)를 불러 모으고, 예악법도(禮樂法度)를 정립해 역사상 수많은 ‘최초’를 창조했다. 그는 전성시대를 개창함과 동시에 국내의 잠재적 위기를 의식해 만년에 방침을 바꾸고 국책을 전환해 훗날 한조의 중흥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역사가들은 ‘웅재대략(雄才大略)’이라는 말로 한무제를 찬탄하며 ‘환연가술(煥然可述, 찬란하여 기술할 만함)’이라는 말로 그의 혁혁한 공적에 찬사를 보냈다. 한무제의 일생을 회고해 볼 때 그야말로 천고일제(千古一帝)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시리즈 완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4/n1145359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