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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6): 범중엄 《악양루기》 배후에 숨겨진 상처

왕사미

【정견망】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은 중국 역사상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다. 인종(仁宗) 시기에 그는 비록 참지정사(參知政事), 즉 부재상에 불과했으나 ‘경력신정(慶曆新政)’의 직접적인 기획자이자 추진자였다. 경력신정이 좌절된 후에도 그는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우환 의식과 담당하는 정신으로 후세에 이름을 떨치며 사대부 계층의 모범이 되었다.

그가 유배된 후 지은 《악양루기》 중의 명구인 “외물(外物)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일로 슬퍼하지 않는다. 묘당(廟堂)의 높은 곳에 처하면 그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江湖)의 먼 곳에 처하면 그 군주를 걱정한다.”와 “천하의 근심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보다 나중에 즐거워한다.”는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 이는 그의 가국정회(家國情懷 자기 집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와 천하를 구제하려는 책임감을 보여주며 후세의 수많은 학자와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을 격려해 왔다.

범중엄과 등자경(滕子京)은 모두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년)의 동기 진사로, 조정에서 함께 관직 생활을 했으며 변방의 장수로 서하(西夏)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경력(慶曆) 4년(1044년), 두 사람은 차례로 좌천되어 등자경은 파릉군(지금의 호남 악주)으로, 범중엄은 빈주(지금의 섬서 빈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지기(知己)로 여겨 깊은 우정을 쌓았다.

경력 6년(1046년) 6월 15일, 등자경이 범중엄에게 《여범경략구기서(與範經略求記書)》라는 편지를 보내 《동정만추도(洞庭晩秋圖)》와 역대 명인들이 악양루를 읊은 시문을 동봉하여, 오랜 친구 범중엄에게 중수된 악양루를 위한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악양루는 호남성 악양시 고성(古城) 서문 성벽 위에 위치하며, 앞으로는 군산(君山)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동정호(洞庭湖)를 굽어보아 예로부터 “동정호는 천하의 물이요, 악양루는 천하의 누각이다”라는 미명이 있었다. 악양루 주루(主樓)는 3층으로 높이 19.42미터, 깊이 14.54미터, 너비 17.42미터이다. 그 특징은 순수 목조 구조로, 건물 전체의 들보, 기둥, 도리, 서까래가 모두 장부맞춤으로 연결되어 못 하나 풀 하나 쓰지 않고도 정밀하게 맞물려 혼연일체를 이룬다는 점이다. 정교한 공예 덕분에 악양루는 태산처럼 견고하다.

악양루는 동한(東漢) 건안 20년(215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대장군 노숙(魯肅)의 ‘열군루(閱軍樓 군대 사열을 위한 누대)’였다고 한다. 서진과 남북조 시기에는 ‘파릉성루(巴陵城樓)’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조의 송(宋) 원가 3년(426년), 시인 안연지(顔延之)가 파릉을 지나며 지은 시에 “맑은 기운이 악양에서 개었다[淸氛霽嶽陽]”라는 구절이 있어 ‘악양’이라는 이름이 처음 시문에 등장했다.

이후 당 숙종 건원 2년(759년),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누각에 올라 지은 《여하십이등악양루(與夏十二登嶽陽樓)》 중의 명구 “누각에서 악양을 다 보니, 강물 멀리 동정호가 열리네[樓觀嶽陽盡,川迥洞庭開].”에 의해 악양루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범중엄에게 기문을 부탁한 등종량(滕宗諒 991년~1047년, 자는 자경)에 대해 《송사·열전 제62》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사 양견(梁堅)이 등종량이 전에 경주(涇州)에 있을 때 공금 16만 관을 썼다고 탄핵했다. 중사(中使)를 보내 검시하게 하니, 부임하자마자 관례대로 부하들과 주변 강족(羌族)들에게 포상하고 선비와 옛 친구들에게 선물을 준 것이었다. 등종량은 연루될 사람이 많을까 걱정하여 장부를 불태워 이름을 없앴다. 범중엄이 당시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힘써 그를 구해주어 한 등급 강등되어 괵주(虢州) 지주가 되는 데 그쳤다. 어사중승 왕공진(王拱辰)이 계속 상소하자 다시 악주로 옮겨졌고, 소주로 옮겨졌다가 세상을 떠났다. 등종량은 기개가 높고 구속받지 않았으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죽었을 때 남은 재산이 없었다.”

즉, 관직에 있을 때 공금을 군사들을 포상하는 데 썼다는 이유로 탄핵당해 파릉으로 유배된 것이다. 송대 왕벽지(王辟之)의 《면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는 “등자경이 파릉을 다스림이 천하 제일이었다”라고 칭송했다.

경력신정에서 등자경 역시 범중엄의 확고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북송의 재정 적자는 진종(眞宗)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송 인종(宋仁宗)은 어진 군주로 여겨졌지만, 북송의 재정 적자가 확대된 것은 바로 그의 손을 거치면서였다. 일찍이 인종 보원 원년(1038년), 삼사탁지판관(三司度支判官) 송기(宋祁)가 조정 재정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그의 유명한 상소문 《상삼용삼비소(上三冗三費疏)》에서 “천하가 안정되었는데 관원의 수가 제한이 없는 것이 첫 번째 군더더기[冗]요, 천하의 상군(廂軍 지방군)이 전쟁은 못 하면서 입고 먹는 것만 축내는 것이 두 번째 군더더기요, 승려와 도사가 나날이 늘어나 정해진 수가 없는 것이 세 번째 군더더기이다”라고 지적했다. 재정 수입의 80%(혹은 6분의 5)가 군대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鑒長編)》(권161)에 기술된 경력 7년(1047년) 삼사사 장방평의 주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금병의 호적이 백만 명에 달하여 앉아서 입고 먹으며 해제할 기약이 없으니, 7~8년 사이에 천하가 이미 곤궁해졌음에도 안팎에서 태연하게 바로잡아 구제할 줄을 모른다. 천하가 곤궁해진 근본 원인이 병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례를 열거하였다.

“송 태조 때는 병사가 15만 명에 미치지 못했고, 송 태종 때는 연계(燕薊 연운 16주)를 수복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병사는 역시 40만 명에 불과했다. 송 진종 때는 전사를 모집하여 50여만 명에 이르렀으나, 거란이 화친을 청한 상부 이후에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송 인종 때에 이르러 보원과 경력 이후 안팎으로 금군을 증설해 125.9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진교병변(陳橋兵變)을 통해 건립된 송나라의 중문억무(重文抑武) 국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대내외적으로 가능한 한 회유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재해를 당해 대규모 기민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상군(廂軍 지방군)으로 충원되었고, 이에 따라 농사를 짓는 자는 갈수록 적어지고 군인이 되어 놀고먹는 자는 갈수록 많아졌다.”

이외에도 은음(恩蔭 조상이 벼슬을 하면 자식도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음서)과 천벽(薦辟 천거와 벽소로 일종의 특별 관리 채용)이 광범위하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져 정원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대량의 용관(冗官)이 생겨났다. 또 황제는 3년마다 한 번씩 교사(郊祀)를 거행했는데, 그때마다 조정의 대소 관원들은 모두 자녀에게 은음을 베풀 수 있었으니, 즉 자제들이 일정 수준의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볼 때 북송의 ‘삼용삼비(세 가지 군더더기와 세 가지 낭비)’는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부양 방식은 사회 발전의 객관적 법칙을 위반하여 인간의 운명과 안배를 제도적으로 뒤흔든 것다. 본래 인간 일생의 조우는 고층 생명이 각자의 복분 크기에 따라 체계적으로 안배하는 법이다.

경력신정은 본질적으로 재정 적자를 줄이려는 시도였으나 기득권을 줄이다 보니 그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다. 또한 북송의 너그럽게 회유하는 국책과도 구조적인 충돌을 일으켰다. 개혁 초기 채양(蔡襄)은 상소에서 송인종이 “너그럽고 인자하나 결단력이 부족하다” [1]고 지적했다. 명말의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송인종이 “정해진 뜻이 없었다[無定志]”라고 비평하면서, 인종이 친정한 30년 동안 대신들이 빈번히 교체되어 많은 정책이 오래 시행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어쩌면 이것이 북송 왕조가 쇠망해가는 과정이자 역사극의 모종의 안배였을지도 모른다.

범중엄은 경력 6년(1046년) 9월 15일에 이 《악양루기》를 썼다. 이는 범중엄 산문의 대표작으로, 변려체와 산문을 결합하여 기사, 사경(寫景), 의론을 하나로 녹여냈으며 필치가 유창하고 문장이 수려하다. 유배된 선비들이 누각에 올라 경치를 보며 느끼는 희비의 감정에 대한 의론을 통해, 저자의 “외물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개인의 일로 슬퍼하지 않는” 드넓은 흉금과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거워한다”는 정치적 포부를 토로했다. 이 문장은 천 년 동안 치국(治國) 이념의 하나가 되었으며, 범중엄은 사대부 계층의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악양루기》에 대해 제일 먼저 평가를 내린 사람은 당시 북송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선도자이자 범중엄의 붕당(朋黨)으로 몰려 좌천되었던 윤수(尹洙)와 구양수(歐陽修)였다. 진사도(陳師道)의 《후산시화(後山詩話)》에 따르면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악양루기》를 지으면서 대구(對句)를 사용하여 당시의 풍경을 서술하니 세상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윤사로(尹師魯 윤수)가 이를 읽고 이르기를 전기체(傳奇體)라고 하였는데, 전기는 당나라 배형(裴鉶)이 지은 소설을 말한다.”

또한 우육(尤焴)의 《가재잡고(可齋雜稿)》 서문에 따르면 “문정공의 《악양루기》는 정밀하고 간절하며 격조가 높고 고풍스러우나 구양공은 오히려 문장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윤수는 “전기체”라고 말했고 구양수는 “《악양루기》가 문장으로서 칭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이 고문운동의 원인은 위진남북조 이래 변문(駢文)이 크게 유행하면서 문풍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워졌으며 형식에 치중하고 내용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하(夏) 은(殷) 주(周) 삼대와 양한(兩漢) 시대의 평이하고 소박하며 문장으로써 도를 전하는 고문을 회복하자고 제창하였으며, 변문을 깨뜨리고 산문을 쓴다는 파변위산(破駢爲散)을 주장하여 화려하고 부화뇌동하는 변려문의 풍조를 바꾸고자 했다.

명대의 손서(孫緖)는 《사계집(沙溪集)·무용한담(無用閑談)》에서 평하기를, “범문정공(范文正公)의 《악양루기》를 두고 혹자는 부체(賦體)를 사용했다고 하나 이는 깊이 고찰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여온(呂溫)을 배운 것으로 체제가 마치 한 축에서 나온 듯하나, 《악양루기》가 훨씬 거창하고 원대하며 초월적이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할 만하다”고 보았다. 그는 범중엄의 《악양루기》가 비록 당나라 여온의 《삼당기(三堂記)》 체례를 모방하여 지어졌으나 더욱 거창하고 뛰어났다고 여긴 것이다.

당나라 여온의 《곽주삼당기(虢州三堂記)》에는 “태평성대의 다스림은 쉽고 정무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이 많으니, ……덕(德)에 거(居)하고 선(善)을 즐김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몸이 편안함을 알면 남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생각하고 자신의 성품이 적절함을 얻으면 만물을 적절하게 할 방도를 생각하여, 스스로 즐겁다하여 홀아비와 과부의 고통을 소홀히 하지 않고 스스로 한가롭다하여 농사일의 부지런함을 잊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체현된 의경(意境)은 덕에 거하고 선을 즐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데, 이는 천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범중엄의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뜻”과 그 책임감이 투영된 국가에 대한 사랑 및 정치적 포부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왕국유(王國維)가 저술한 《인간사화(人間詞話)》 개편에서는 “사(詞)는 경계(境界)를 최상으로 치며 경계가 있으면 스스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절로 명구(名句)가 나오게 되는데, 오대(五代)와 북송의 사가 독보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계에는 문학의 경계와 이상의 경계라는 차이가 있다.

여온이 쓴 《곽주삼당기》는 문학적 경계 속에서 개인의 사상적 경계를 보여준 것으로 이 마음을 미루어 경내에 은혜를 베풀 수 있다는 수준이다. 반면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는 그의 정치적 포부와 위정(爲政)의 이상이 투영된 것으로, 조정의 높은 곳에 있으면 그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그 임금을 걱정한다고 하였다. 비로소 입의(立意)가 높고 멀며 마음을 울리는 기상이 드러난 것이다. 호쾌한 감정과 전염력이 충만하기에 범중엄의 명구가 널리 유포될 수 있었고 《악양루기》 또한 후세에 전해지는 명편이 된 것이다.

《송사(宋史)·열전 제73》의 기록에 따르면 “범중엄은 육경(六經)에 두루 통달하고 역(易)에 능했으며, 매번 감격하여 천하의 일을 논할 때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니 일시의 사대부들이 지조와 풍절을 숭상하게 된 것은 범중엄이 창도한 것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희(朱熹)는 “범공은 평소 흉금이 활달하여 의연하게 천하와 국가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3]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서가 중국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전통적 가치를 온전하고 정확하게 체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자는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도를 지키며,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篤信好學,守死善道。危邦不入,亂邦不居。天下有道則見,無道則隱。]”고 했다.

증자는 “선비는 넓은 마음과 굳센 의지가 없어서는 안 되니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士不可以不弘毅,任重而道遠。仁以爲己任,不亦重乎;死而後已,不亦遠乎。]”[4]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공자가 강조한 것은 선(善)을 지켜 옮기지 않고 “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에 거하여”[5] 자신을 승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만약 환경이 적절하지 않으면 나와서 정치를 하지 않았다. 반면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 증자)이 처한 경계는 입세(入世)하여 작위(作爲)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이해로, 천하가 아닌 인(仁)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이로 보아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이자 일종의 반신문화(半神文化)의 전개라 할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이 처한 경계에 따라 각자 처한 층차의 이해를 바탕으로 후세에 집대성된 유가 사상은 흔히 입세의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경향이 있어, 격앙되면서도 긴장감이 넘치게 된 것이다.

범중엄이 처했던 북송 중기는 바로 신유학(新儒學) 사조가 흥기하던 시기였다. 이 유학 부흥 운동의 원인 중 하나는 이론적으로 동한(東漢) 시대에 전래된 불교의 영향에 대항하여 신유학의 이론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범중엄이 《악양루기》에서 제시한 ““천하의 근심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보다 나중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명제와 “의연하게 천하 국가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는다”는 가국정회(家國情懷)는 바로 신유학 핵심 가치관의 집중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때의 유학은 분명히 입세(入世)의 기점에 서서 천하의 땅을 품는(懷土) 즐거움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공자가 가르친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땅을 품는다”(君子懷德 小人懷土)는 말 속의 신성(神性)한 내포에서 점차 멀어진 것이다.

인류 사회는 본래 고난과 복락이 공존하는 상태이며, 이는 사람에게 덕을 쌓거나 업을 소멸한 후 승화할 수 있는 얻기 힘든 기연(機緣)이 되는 동시에, 각자 선(善)을 향해 승화하느냐 아니면 타락해 내려가느냐 하는 인생의 선택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중엄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자신의 봉록으로 고향 문중에 의장(義莊 기증한 장원)을 설치하고 친족을 부양했다. 그의 널리 사랑하고 선을 베품은 개인의 고상한 품격이 나타난 것이지만, 만약 자기 한 몸의 격앙된 정서가 담긴 정치적 포부로써 천하의 임금과 백성을 모두 안락하고 근심 없게 만들고자 했다면 그것을 어찌 해낼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경력신정(慶曆新政)이 실패한 심층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내 삶은 본래 고향이 없으니 마음 편한 곳이 바로 돌아갈 곳이다(我生本無鄉 心安是歸處)라는 말처럼, 이는 마치 《홍루몽》 제1회에서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青埂峰) 아래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뒷면에 적힌 “하늘을 보수할 재능이 없어 헛되이 홍진 속에서 이토록 많은 세월을 보냈구나”(無材可去補蒼天 枉入紅塵若許年)라는 묘사와도 같다.

주석:
[1] 《송사·열전 제79(채양)》(권320)
[2] 《송사·열전 제73(범중엄)》(권314)
[3] 《주자어류·본조 3》(권129)
[4] 《논어·태백》
[5] 《논어·술이》
[6] 《논어·이인》
[7] 당나라 백거이 《초출성유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