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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와 무한 이야기 (4)

소양춘(小陽春)

【정견망】

3. 호북(湖北)의 악비의 후예들

1) ‘마지막 묘지기’: 무창 악왕묘는 원래 악비의 장남인 악운(岳雲)의 종손이 관리하도록 지정되어 있었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로 전수되지 못해 종족이 공동 협의하여 악뢰(岳雷)의 후예가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다시 전수가 끊기자, 호북 황매(黃梅) 악가만(岳家灣)에 사는 16대손 악정(岳霆)의 후예가 계승하기로 협의했다.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에 이르러 25대손 악방선(岳邦銑)에게 전해졌고, 민국 4년(1915년)에는 26대손 악숭준(岳崇峻)에게, 1960년에는 다시 27대손 악수원(岳修圓) 즉 송파(宋波)에게 전해졌다.

[주: 송파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랐고, 호북성 전자과학연구소에서 퇴직한 고급 경제사高級經濟師다.]

청말, 그의 할아버지 악방선은 충렬묘(忠烈廟)의 수호인으로서 사당과 묘우를 운영하며 향불이 끊이지 않게 했고, 사회와 종족 활동을 자주 지원했다. 신해혁명 기간에는 혁명에 참가한 장령 공경(孔庚) 및 다른 혁명가들과 연락하며 혁명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부친이 민국 연간에 묘지기 직을 물려받은 후에는 더 이상 묘지기 봉록을 받지 못했다. 당시 기비(紀飛) 향화전(香火田) 또한 여러 차례의 역사적 변혁과 전란 등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침탈당해 남은 것이 거의 없었고 수입도 매우 적었으나, 그는 여전히 직무에 충실하여 생활이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조상 묘를 지켜냈다.

무한 보위전이 시작되고 일본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많은 사람이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악씨 가문은 ‘절대 무창을 떠나지 않는다’는 규정을 묵묵히 지켰다. 그래서 모든 이가 피난할 때도 그들 일가족은 시종 조상 묘 주변을 지키며 무한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 폭격기가 무창 남호(南湖)에 있는 국민당 좌우기(左右旗)의 두 군수 창고를 폭파한 후, 기수를 돌려 충렬묘 상공에서 중형 폭탄 세 발을 투하했다. 악수원의 큰고모와 큰형이 현장에서 희생되었고, 작은고모는 폐허 속에서 구조되었으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미치고 말았다. 부친은 양쪽 귀의 청력을 잃고 왼쪽 다리가 끊어져 자립 생활 능력을 상실했다.

이렇게 큰 부상을 당했음에도 그는 목숨을 걸고 폐허 속에서 네 가지 유물을 구해냈다.

첫째는 충렬묘 현판,
둘째는 악가 족보,
셋째는 선조들의 위패,
넷째는 기비 향화전의 장부였다.

이 물건들은 나중에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거나 민간으로 흩어졌다.

악수원 세대에 이르러서는 묘가 파괴되어 사라졌기에 더 이상 지킬 묘가 없었고, 마음속으로만 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정부와 사회 각계가 악왕묘의 중요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중시하고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나는 이미 환갑을 넘겼으니, 살아생전 유일한 소원은 하루빨리 무창성의 충렬묘가 재건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2) 이천(利川) 후예: 이천시 도량(都亮) 가도판사처 간부인 악영명(岳永明)은 악비의 26대손이다. 그가 보존하고 있는 《악씨가보(岳氏家譜)》에 따르면, 악씨는 요순(堯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악씨의 중자(仲子)가 선룡(先龍)을 낳았고, 5대를 전해 내려와 휴(休)를 낳았으며, 휴는 언진(彥真)을 낳으니 부자가 주(周)나라의 절도사를 지냈다. 언진은 해(海)를 낳고, 해는 맹림(孟林)을 낳았으며, 맹림은 현(鉉)을 낳고, 현은 환(渙)을 낳았으며, 환은 성(成)을 낳았다. 성이 탕음(湯陰)으로 옮겨와 립(立)을 낳았고, 립은 화(和)를 낳았으며, 화는 비(飛 악비)를 낳았고, 비는 운(雲), 뢰(雷), 림(霖), 진(震), 정(霆) 다섯 아들을 낳았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악비와 악운이 화를 당한 후 “네 아들은 타지에 숨어 살았는데, 송 효종 때 네 아들의 억울함이 씻겨 조정에 복귀했다. 악림의 셋째 아들 가(珂)가 좌시랑이 되어 다시 탕음으로 옮겨갔고, 11대를 전해 내려오다 귀금(貴金) 형제가 명말에 노(魯) 땅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악서성(岳西城) 노인은 ‘노 땅으로 옮겨간’ 후예 중 한 갈래인 악씨 가문의 후손이다. 이번에 발견된 악비 가보(家譜)는 역사적 맥락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악비의 초상화, 악씨 종묘의 외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보첩 중에는 청 건륭제가 무목묘(武穆廟)를 유람하며 지은 시도 기록되어 있다.

기이하고 빼어남이 다시 열리니
길이 조정과 나라를 돕도다.
기꺼이 인재를 닦고 숭상하니
종친이 멀리 현능함을 빛내리라.

重開奇秀
永佐朝幫
崇修喜才
宗耀遠賢

3) 강하(江夏) 후예: 무한시 강하구 유방가(流芳街) 상하악촌(上下岳村)에는 수십 가구의 악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지의 《악씨종보(岳氏宗譜)》에 기재된 계보를 보면, 이들 악씨는 남송 초기의 항금 명장이며 민족 영웅인 악비의 셋째 아들 악림(岳霖)의 후예다. 악비를 시조로 받들며 현재 30여 대까지 전해졌다.

원 지정(至正) 24년(서기 1365년), 하남 탕음으로 돌아갔던 악비의 6대손 악자충(岳子忠)은 집현전학사 겸 시어사였던 정문해(程文海)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호광(湖廣) 한양부(漢陽府) 한천현(漢川縣)의 교유(敎諭)란 관직을 제수받았고, 이에 온 가족이 남쪽 한천으로 이주했다. 11대 악정(岳楨)에 이르러 다시 한번 큰 이주를 겪었는데, 명 정통(正統) 12년(서기 1447년)에 그가 강서 남창(南昌) 지현(知縣)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강서로 옮겨갔다. 16대손 악기원(岳起元)이 청 초기 다시 강서를 떠나 ‘초강읍 성성 수륙가(楚江邑省城水陸街)’를 거쳐 서쪽 불조령(佛祖嶺) 동쪽으로 옮겨왔다. 이후 19대손 악치신(岳致身)이 강하 유방령(江夏流芳嶺)으로 옮겨와 오늘날까지 번성하고 있다.

4) 황매(黃梅) 후예: 당시 악비가 항주 풍파정(風波亭)에서 살해당한 후, 진회는 밀령을 내려 악비 가문을 추적해 살해하라고 했다. 악비의 가족들은 멸문의 화를 피하고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악진(岳震, 7세)과 악정(岳霆, 5세)은 충신들의 도움으로 강서 구강(九江)에서 황매현 오랑관(五郞關, 현재의 양마령) 아래 섭가만(聶家灣)으로 도망쳐 은거했다. 이곳에서 자손을 번창시키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니, 민족 영웅 악비의 혈맥과 정신이 이곳에서 전승되고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악비 묘를 참배하고, 무목고풍(武穆古楓)에 절하며, 악가권(岳家拳)을 익히고, 악비체의 서법을 감상하며, 유찰회(油炸檜)를 먹고, 만강홍(滿江紅)을 노래하는 것이 황매에 사는 3천여 명 악비 후예들의 특별한 흔적이 되었다.

[역주: 유찰회는 악비가 억울하게 죽은 후 분노한 백성들이 꽈배기를 두 가닥 꼬아 간신 진회 부부라고 여기고 기름가마에 튀겨 먹은 데서 유래한 음식으로 나중에 비슷한 발음의 요우티아오(油条)로 변했고 지금도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간식의 하나다.]

황매의 악비 후예들은 꽈배기를 ‘요우티아오(油條)’라 부르지 않고 ‘유찰회(油炸檜, 진회를 기름에 튀긴다는 뜻)’라 부른다.

5) 무혈(武穴) 후예: 호북 무혈시는 하팽만촌(下彭灣村)에 악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다. 무혈시에는 악비 문무학교(文武學校)가 있다. 또한 항금 장령 악비에 대한 숭배의 마음으로, 홍콩 총경사(總警司) 채건상(蔡建祥)이 홍콩 경찰을 대표해 무혈에 악비 기념학교를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2006년 11월 21일, 화교진(花橋鎭) 하팽초등학교 교정에 깃발이 휘날리고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악비 기념학교 교수동 낙성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10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