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心緣)
【정견망】
순제(舜帝)와 우제(禹帝) 시대
순제(舜帝)의 가계에 관해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순(虞舜)의 이름은 중화(重華)다. 중화의 아버지는 고수(瞽叟)이며, 고수의 아버지는 교우(橋牛)이고, 교우의 아버지는 구망(句望)이며, 구망의 아버지는 경강(敬康)이고, 경강의 아버지는 궁선(窮蟬)이다. 궁선의 아버지가 바로 전욱제(顓頊帝)이며,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다. 창의부터 순까지는 7대다. 궁선이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 순제에 이르기까지 중간 세대는 지위가 미미하여 모두 평민이었다.
순의 아버지 고수는 장님이었다. 순의 생모가 죽은 후 고수는 다시 아내를 얻어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오만하고 거칠었다. 고수는 후처의 아들을 편애하여 자주 순을 죽이려 했으나 순은 매번 이를 피했다. 순은 작은 실수만 있어도 가혹한 벌을 받았다. 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고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황하 강변에서 도기를 만들고 수구(壽丘)에서 각종 가용 기물을 만들었으며 부하(負夏)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순은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계모의 동생을 매우 공순하게 섬겼으며 날이 갈수록 충성스럽고 신중하여 조금의 게으름도 없었다. 그들이 순을 죽이려 할 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일이 있어 그를 찾을 때는 항상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순은 20세 때 효성으로 이름을 떨쳤다. 30세 때 요제가 누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지 묻자 사악(四嶽)이 우순을 추천하며 이 사람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요는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집안에서의 덕행을 관찰하게 했고, 아홉 아들을 그와 함께 지내게 하여 밖에서의 됨됨이를 살폈다. 순이 규수(媯水) 강변에 거주하며 집안일을 더욱 신중히 하니, 요의 두 딸은 출신이 고귀하다 하여 순의 친족에게 오만하게 대하지 않고 부녀자의 도리를 다했다. 요의 아홉 아들도 더욱 독실하고 후덕해졌다.
순이 역산에서 농사를 지으니 역산 사람들은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게 되었고,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으니 뇌택 사람들은 물고기 잡기 좋은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으며, 황하 강변에서 도기를 만드니 그곳에는 불량품이 전혀 없게 되었다. 1년이 지나자 그가 사는 곳이 마을이 되었고, 2년이 되니 작은 도시가 되었으며, 3년이 되니 큰 도시로 변했다. 이를 본 요는 순에게 고운 갈포 옷 한 벌과 거문고를 주고 창고를 지어주었으며 소와 양도 하사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고수는 여전히 그를 죽이려 하여, 순에게 높은 곳에 올라가 진흙으로 곡식 창고를 수리하게 하고 아래에서 불을 질렀다. 순은 두 개의 삿갓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날개 돋친 듯 뛰어내려 도망쳐 죽음을 면했다. 나중에 고수는 다시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는데, 순은 우물을 팔 때 옆벽에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순이 깊은 곳까지 파 내려가자 고수와 상이 함께 흙을 쏟아부어 우물을 메웠으나, 순은 옆의 통로로 빠져나와 다시 도망쳤다. 고수와 상은 순이 죽은 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순의 재산을 나누려 했다. 이후 순이 돌아왔으나 예전처럼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며 더욱 공경했다. 그제야 요는 순에게 다섯 가지 윤리 도덕을 바로잡고 백관의 일에 참여하게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잘 해냈다.
예전에 고양씨(高陽氏)에게 재능과 덕이 풍부한 자손 여덟 명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혜택을 입고 ‘팔개(八愷)’라 불렀으니, 이는 여덟 명의 화선(和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신씨(高辛氏)에게도 재능과 덕이 있는 자손 여덟 명이 있어 사람들이 ‘팔원(八元)’이라 불렀으니, 이는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열여섯 가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선조의 미덕을 지키며 선조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다.
요의 시대에 요는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으나, 순은 팔개의 후손을 등용하여 토지를 관장하는 관직을 맡겨 각종 사무를 처리하게 하니 모두 이치에 맞게 처리되었다. 순은 또 팔원의 후손을 등용하여 사방에 오교(五敎)를 전파하게 하니,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애로우며 형은 우애 있고 동생은 공손하며 아들은 효도하게 되어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이 진실해졌다.
예전에 제홍씨(帝鴻氏)에게 못난 후손이 있어 인의(仁義)를 가리고 잔적(殘賊)을 감싸며 흉악한 짓을 즐기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혼돈(渾沌)’이라 불렀다. 이는 야만적이고 계발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호씨(少皞氏)에게도 못난 후손이 있어 신의를 버리고 충직함을 싫어하며 사악한 말을 즐기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궁기(窮奇)’라 불렀으니, 이는 괴이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전욱씨에게도 못난 후손이 있어 가르칠 수 없고 좋은 말과 나쁜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사람들이 ‘도올(檮杌)’이라 불렀는데, 이는 흉악하고 완고함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세 부류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요의 시대에 요는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진운씨(縉雲氏)에게도 못난 후손이 있어 먹고 마시는 것에 탐닉하고 재물을 탐하니 사람들이 ‘도철(饕餮)’이라 불렀는데, 이는 탐욕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앞의 세 흉물과 함께 사흉(四凶)이라 불렀다. 순이 사방의 빈객을 맞이할 때 이 네 흉악한 가문을 유배 보내 변방 지역으로 쫓아내어 해로운 요마(妖魔)를 막게 하니, 이때부터 사방의 문이 열리고 악인이 없다고들 했다.
나중에 요의 나이가 들자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대행하게 하여 사방을 순시하게 했다. 순은 정사를 맡은 지 20년 만에 요를 대신해 천자의 정무를 대행했다. 대행한 지 8년 만에 요가 서거했다. 3년 상을 마친 후 순은 단주(丹朱)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순에게 귀순했다. 우(禹), 고요(皋陶), 설(契), 후직(後稷), 백이(伯夷), 기(夔), 용(龍), 수(倕), 익(益), 팽조(彭祖)와 같이 덕행이 있는 사람들은 요 시대부터 등용되었으나 직무가 없었다.
이에 순은 문조묘(文祖廟)에 가서 사악과 의논하여 사방의 문을 열고 사방의 상황을 파악했으며, 12주의 목(牧)들에게 천제가 갖춰야 할 공덕을 토론하게 하니 그들은 모두 큰 덕이 있는 일을 하고 아첨하는 소인을 멀리해야 먼 곳의 외족들이 귀순할 것이라고 했다.
순은 이에 백우(伯禹)를 사공(司空)으로 임명하여 자신을 보좌하게 함으로써 제요의 사업을 광대하게 했다. 우에게는 수토(水土)를 평정하는 일을 맡겼다. 직(稷)에게는 농업을 맡겨 백성들에게 백곡을 파종하는 법을 가르치게 했다. 설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백관에게 오륜 교육을 시행하게 하며, 오륜 교육의 핵심은 너그러움에 있음을 알렸다. 고요를 사법관으로 임명하여 오형(五刑)을 적절히 사용하게 하고, 죄의 경중에 따라 큰 죄는 들판에서 집행하고 다음 죄는 저자나 조정 내에서 집행하며, 동족이 죄를 지으면 전사씨(甸師氏)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다. 유배로 감형되는 오형은 유배지의 거리를 규정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사경(四境) 밖, 구주(九州) 밖, 국도(國都) 밖으로 각각 유배 보냈다. 오직 공정하고 엄명해야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순은 또 수를 공공(共工)으로 임명하여 각종 장인을 거느리게 했다. 익을 짐우(朕虞)로 임명하여 산택(山澤)을 주관하게 하고 주호(朱虎)와 웅비(熊羆)를 조수로 삼았다. 백이를 질종(秩宗)으로 임명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천(天), 지(地), 인(人)의 세 가지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순은 백이에게 제사를 주관할 때는 아침저녁으로 경건하고 정직하며 숙연하고 깨끗해야 한다고 일렀다.
또한 기를 전악(典樂)으로 임명하여 음악을 관장하고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게 하며, 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며 강직하되 포학하지 않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시(詩)는 뜻을 말하고 노래는 말을 길게 하며 소리는 영(永)에 의지하고 율(律)은 소리와 화합하게 했다. 여덟 가지 악기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서로 섞이거나 침범하지 않게 함으로써 음악을 통해 인신(人神)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
순은 또 용을 납언관(納言官)으로 임명하여 아침저녁으로 명령을 전달하고 아래의 정황을 보고하게 하며, 반드시 성실할 것을 훈계했으니 이는 순이 타인을 무함(誣陷)하는 언론과 도의(道義)를 멸절시키는 행위를 매우 미워했기 때문이다. 순은 또한 3년마다 한 번씩 관리의 공적을 심사하여 세 번의 심사를 거쳐 성적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파면하기로 결정했다. 순의 덕치와 현신들의 보좌 아래 천하의 제반사가 진흥되었다.
순이 임명한 관리들은 제각기 공업(功業)을 이루었다. 고요는 대리(大理)를 맡아 형법을 관장하며 판결을 공정히 하니 사람들이 그가 실정에 근거해 다스림을 존경했다. 백이는 예의를 주관하여 위아래가 서로 예우하게 했고, 수는 공사(工師)를 맡아 백공(百工)을 주관하니 모든 장인이 자신의 일을 잘 해냈다. 익은 우(虞)를 맡아 산택을 주관하니 산림과 호수가 개발되었고, 기는 직(稷)을 맡아 농업을 주관하니 백곡이 계절에 따라 무성하게 자랐다. 설은 사도를 맡아 교화를 주관하니 백관이 화목해졌으며, 용은 빈객 접대를 주관하니 먼 곳의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러 왔다. 순이 배치한 12주 목의 정사와 우가 정한 구주 내의 백성 중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그중 우의 공로가 가장 커서 아홉 산을 뚫고 아홉 호수를 다스렸으며 아홉 강을 소통시키고 구주의 경계를 정하니, 각지에서 조공물을 바치러 오지 않음이 없었다. 종횡 5천 리의 영역이 안무되어 도성에서 가장 먼 변방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남쪽으로는 교지(交址)와 북발(北發), 서쪽으로는 융(戎), 석지(析枝), 거수(渠廋), 저(氐), 강(羌), 북쪽으로는 산융(山戎), 발(發), 식신(息慎), 동쪽으로는 장(長), 조이(鳥夷)까지 안무되어 사해 안에서 모두 순제의 공덕을 칭송했다. 이에 우는 《구소(九招)》라는 악곡(樂曲)을 지어 순의 공덕을 노래했고 상서로운 물건들이 나타났으며 봉황도 날아와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천하의 청명한 덕치는 모두 우순(虞舜)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순은 20세 때 효성으로 이름이 났고, 30세 때 요에게 등용되었으며, 50세 때 천자의 정무를 대리했고, 58세 때 요가 서거했으며, 61세 때 요의 뒤를 이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등극한 지 39년 만에 남방을 순시하다가 남방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서거했다. 장강 남안의 구의산(九嶷山)에 매장하니 이것이 바로 영릉(零陵)이다.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창오로 달려가다 상강(湘江) 가의 대나무에 눈물을 뿌렸다. 아황과 여영은 거센 풍랑을 만나 상강에서 숨졌으며 오늘날 동정호(洞庭湖) 근처 산에는 두 왕비의 묘가 남아 있다.
순의 아들 상균(商均)이 못났기에 순은 미리 우를 하늘에 추천했다. 17년 후 순이 서거했다. 3년 상을 마친 후 우도 순의 아들에게 제위를 양보했으나, 순이 요의 아들에게 양보했을 때와 상황이 같았다. 각 부족이 우에게 귀순하자 우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우는 즉위 후 요와 순을 본받아 조금의 게으름도 부리지 않았으며 그의 주요 공적은 치수(治水)였다. 우는 마지막에 절강(浙江)에서 치수를 하다가 회계(會嵇)에서 죽었다. 지금의 소흥(紹興)에는 우릉(禹陵)이 있으며 고증에 따르면 우의 후손들이 우릉을 관리하고 있다.
요의 아들 단주와 순의 아들 상균은 각각 당(唐)과 우(虞)에서 봉토를 받아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우는 또한 그들이 자기 가문의 복식을 입고 자기 가문의 예악 의식을 사용하게 했다. 그들은 손님의 신분으로 천자를 배현(拜見)했으며 천자 또한 그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음으로써 제위를 독단하지 않음을 표시했다.
전해오는 바로는 대우(大禹)가 치수할 때 신령스러운 거북이 등에 글을 싣고 낙수(洛水)에서 나왔는데, 이를 얻어 바탕으로 삼아 ‘구주(九疇)’를 이루었으니 이를 ‘서(書)’라 하며 옛사람들은 ‘낙서(洛書)’라 불렀다. 그러나 나중에 발견된 낙서에는 문자가 없고 흑백의 둥근 점으로 수를 표시한 그림(혹은 ‘낙도(洛圖)’라 함)만 있었다. 그 그림에 이르기를, 머리에는 9를 이고 발로는 1을 밟으며 왼쪽은 3이고 오른쪽은 7이며 2와 4는 어깨가 되고 6과 8은 발이 되며 5개의 고리는 중앙에 있다고 했다. 나중에 주문왕(周文王)이 하도(河圖)와 낙서를 근거로 팔괘를 연역하여 중국 역학(易學) 문화의 기초를 닦았다.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을 역사적으로 ‘오제(五帝)’라 부른다. 그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덕행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며, 현군(賢君)과 성주(聖主)의 귀감으로서 대대로 칭송받았다. 이전의 신들이 직접 하계로 내려온 것과는 달리, 그들은 비록 기이한 모습과 신통한 자취가 있었으나 역사 속에서 주로 ‘치세의 제왕’ 형상으로 나타나 사명을 완수했다. 또한 그들은 성씨는 같았으나 서로 다른 국호를 세워 각자의 광명한 덕업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유웅(有熊), 전욱은 고양(高陽), 제곡은 고신(高辛), 제요는 도당(陶唐), 제순은 유우(有虞)라 했다. 우제의 국호는 하후(夏后)이며 따로 씨(氏)를 나누어 사씨(姒氏)라 했다. 설은 상(商)의 시조로 자씨(子氏)였고, 기는 주(周)의 시조로 희씨(姬氏)였다. 하(夏) 이후 중국 역사는 왕조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삼황오제 시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 현재 사료상의 이유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알 수는 없으나,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이미 우주와 자연, 생명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자연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고고학적 발견도 이를 증명한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7천 년에서 5천 년 전 하남성 면지현의 앙소(仰紹) 사람들은 이미 정착촌을 이루고 매우 정교한 채도(彩陶)를 제작했음이 밝혀졌다. 7천 년 전 절강성 여요현의 하모도(河姆渡) 사람들은 나무 골조에 진흙 벽을 바른 집을 짓고 독목주를 만들기도 했다. 오곡을 심고 육축을 기르며 농경 생활을 했다. 2004년 초 홍산문화 고고학에서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역사 속 황제에 관한 전설에 중요한 실증을 제공했다.
또한 현재 많은 사학자는 제자백가가 각기 기치를 세우고 다투던 시대를 중화 문화와 사상, 지혜가 크게 발전한 시대로 보지만, 후세에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로 존경받는 공자는 제자 언언(言偃)에게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와 하, 상, 서주의 현왕(賢王)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나는 만나지 못했으나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가 공평하여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해 사회를 다스렸고, 사람마다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재산을 사유로 여기지 않고 노동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음모와 도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도가 이미 몰락하여 천하가 통치자의 집안 중심이 되었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에게 전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으며, 사람들은 오직 자기 친족과 자녀만 돌보고 재물과 노동력을 자신만을 위해 쓰며 각자 사사로움을 챙긴다”라며 탄식했다.
삼황오제 시기는 신과 인간이 공존했던 단계이며 화하 문명은 반신문화(半神文化)로서 진정으로 대도가 세상에 행해지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상고 시대의 민풍은 매우 순박하여 사람들은 하늘의 이슬을 받고 땅의 단샘을 마시며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으며, 삶을 즐거워할 줄도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모른 채 완전히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황제내경》 〈상고천진론〉에서는 “상고 시대 사람들 중 도(道)를 아는 자는 음양을 본받고 술수(術數)에 화합하며 음식에 절제가 있고 거처가 일정하며 망령되이 노동하지 않았기에 형체와 정신이 함께하여 천수를 다하고 백 세가 되어서야 떠났다”라고 했다. 사람이 완전히 자연에 순응하여 살 때는 비록 도를 닦지 않았더라도 도(道) 안에 있는 상태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마땅히 누려야 할 진정한 생활 상태다.
참고 서적
1. 《북미순회설법》, 리훙쯔
2.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리훙쯔
3. 《사기》, 사마천
4. 《산해경》
5. 《태평어람》
6. 《상서》
7. 에포크타임스와 정견망 관련 문장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