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정견망】
반신문화 시기
*황제(黃帝)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신주(神州) 무대에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 출현했으니 바로 황제 시대가 강림한 것이다. 황제는 중화민족을 위해 풍부하고 찬란한 중화문화를 창조하여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존경을 받았다. 사실 중국인이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는 “경천법조(敬天法祖)”의 특성은 상고 신전(神傳) 시대 사람과 신이 공존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여겨지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제 이후에는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었다는 “절천지통(絕天地通)”의 전설이 있는데, 이는 곧 신과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중화민족은 신이 전해준 문화적 기초 위에서 황제 시대를 기점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찬란한 반신문화의 서막을 열었다.
초기 중국 선민(先民)들은 주로 황하 유역에 거주했는데, 이는 풍부한 자연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후에야 서서히 남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러 부족은 신농씨를 천하의 공동 주군으로 받들어 염제(炎帝)로 추대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 종족은 주로 황하 하류 일대에서 생활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황하 유역에서 생활하던 또 다른 점차 강성해진 부족은 유웅씨(有熊氏) 부족이었다.
유웅씨는 소전(少典) 부족의 자손으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상이 상인(속인)과 달랐는데, 《춘추위・원명포(元命苞)》에서는 그가 “용의 수염”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또한 매우 영특하여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말을 할 줄 알았고, 어린 시절에는 총명하고 기민했으며, 자라서는 성실하고 근면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견문이 넓어 사물에 대해 명확한 판단력을 갖추었다. 후에 부족의 수령으로 추대되어 황제(黃帝)라 불렸다. 그의 부족은 원래 서북쪽에 거주하다가 나중에 탁록(涿鹿), 즉 오늘날의 하북 탁록 동남 일대로 이주했다.
헌원 시대에 염제 부족은 이미 쇠락해 있었다. 다른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고 전쟁을 벌이며 백성을 해쳤으나, 신농씨는 그들을 정벌할 힘이 없었다. 이에 황제는 병법을 익히고 무예를 닦아 조공을 오지 않는 부족들을 정벌하기 시작하자 각 부족이 비로소 귀순해 왔다. 그러나 하북, 하남과 산동 일대에 살던 구리족(九黎族)의 수령 치우(蚩尤)가 가장 흉포하여 아무도 그를 정벌하지 못했다. 그는 염제와 황하 하류 지역을 다투기 위해 큰 전쟁을 벌였고, 염제는 패배하여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연맹을 맺었다. 황제는 두 부족의 군사를 거느리고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와 싸웠다.
‘탁록 대전’은 중국 상고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인물인 치우는 관련 문헌에 따르면 폭군이자 난적이며 상당히 추악한 형상으로 묘사된다. 《상서・여형》의 기록이 이러한 관점의 대표적인데, 치우가 난을 일으켜 혹독한 형벌과 살육으로 묘민(苗民)을 통치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용어하도(龍魚河圖)》의 기록에 따르면 치우는 괴이한 신력을 가진 신의 형상이다. 다섯 가지 병기를 제작하고 구름과 안개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술이기(述異記)》에서도 치우는 구리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졌으며, 여덟 개의 팔과 여덟 개의 발가락, 인간의 몸에 소의 발굽,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가졌으며 모래와 돌을 먹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황제도 그를 이기지 못해 하늘의 신령에게 도움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현녀전법(黃帝玄女戰法)》의 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황제가 치우와 아홉 번 싸웠으나 아홉 번 모두 이기지 못했다. 황제가 태산으로 돌아가 3일 밤낮을 머물자 안개가 자욱해졌다. 이때 사람의 머리에 새의 형상을 한 부인이 나타나니, 황제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엎드려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현녀(玄女)다, 무엇을 묻고자 하느냐?’라고 하니, 황제가 ‘소자가 만 번 싸워 이기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법을 얻었다.
또한 《현녀병법》에서도 ‘황제가 치우를 공격했으나 3년 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라고 했다. 아홉 번 싸워 모두 지고 3년 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치우가 매우 강력한 상대였으며 그 힘이 황제와 대등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는 여신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전쟁의 기록을 통해 치우의 신성한 형상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 머리와 철 이마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부려 큰 비바람을 일으키고 3일 동안 큰 안개를 만들 수 있었다. 황제가 풍후에게 지남차를 만들게 한 후에야 그를 이길 수 있었다. 치우에게 신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 역시 신력을 지녀 풍후(風后) 등 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하북 계주에는 ‘치우희(蚩尤戲)’라는 놀이가 있는데, 백성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소 뿔을 머리에 쓰고 서로 맞부딪친다. 태원의 촌락 사이에서는 치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소 머리를 쓰지 않는다. 지금의 기주(冀州)에는 치우천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탁록의 들판이다.
한무제 때 태원에서 치우신이 낮에 나타났는데, 개구리 발에 뱀의 머리 형상이었으며 전염병을 관장한다고 하여 풍속에 따라 사당을 세웠다. 이는 대전이 일어났던 탁록과 기주 사람들이 오랫동안 치우신에게 제사를 지냈음을 설명하며, 태원이나 조선 같은 다른 곳에서도 치우신에게 제사 지냈다. 황제의 형상 역시 이와 같아서, 그들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고대사 속에서 신의 특징을 구비한 형상들이다. 이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던 시기가 오제 시기까지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음을 나타낸다.
황제가 치우를 크게 물리치고 죽인 후, 염제와 황제 두 부족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염제가 다른 부족들을 공격하려 하자 다른 부족들이 모두 황제에게 귀순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에 헌원은 덕업(德業)을 닦고 군대를 정돈하며 사시 절기의 변화를 연구하고 오곡을 심었으며, 백성을 안무하고 사방의 토지를 측량했다. 또한 각종 맹수를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염제와 교전했는데,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염제를 굴복시키고 승리했다. 이때부터 중원 각 부족은 모두 황제를 천하의 공동 주군, 즉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했다.
천자란 의미는 곧 하늘의 사랑을 받는 자식으로서 천명(天命)을 받아 인간 세상에서 천도(天道)를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실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무력과 정벌의 형식을 통해 제후들을 굴복시키고 화하족을 통일한 제왕이 되었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가 천자가 될 때 토(土)의 속성을 가진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는데, 흙의 색이 황색이라 황제라고 불렀다고 한다. 염제와 황제 등의 부족은 황제의 영도 아래 화하(華夏)민족으로 융합되었다. 그리하여 중화민족은 스스로를 황제의 후예라고 부르며, 염제와 황제 두 부족이 융합되었기에 염황자손(炎黃子孫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고도 부른다.
황제는 천하의 공주(公主)가 된 후 점차 천하를 평정했다. 동쪽으로는 동해에 이르러 환산(丸山)과 태산(泰山)에 올랐고, 서쪽으로는 공동(空桐)에 이르러 계두산(雞頭山)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장강에 이르러 웅산(熊山)과 상산(湘山)에 올랐다. 북쪽으로는 훈육 부족을 쫓아내고 탁록산 기슭에 도읍을 세웠다.
황제는 이어 백관(百官)을 세우고 전장(典章) 만들며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황제가 봉한 관직은 모두 구름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으며 군대는 운사(雲師)라 불렀다. 좌우대감을 설치하여 각 부족을 감찰하게 했다. 또한 귀신과 산천에 자주 제사를 지냈는데 그 횟수가 고금에 가장 많았다. 풍후, 역목(力牧), 상선(常先), 대홍(大鴻) 등 어진 신하들을 임용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황제는 천지 사시의 법칙에 순응하고 음양의 변화를 추측하며 삶과 죽음의 도리를 설명하고 존망(存亡)의 원인을 논술했다. 계절에 맞게 백곡과 초목을 심고 조수와 누에 등을 길들였으며 토석(土石)과 금옥(金玉)을 채취하여 백성이 쓰게 했고 물, 불, 목재 및 각종 재물을 절도 있게 사용했다.
또한 황제는 신하와 백성에게 집을 짓고 오곡을 심으며 의복을 만들고 배와 수레를 만들게 했다. 황제 시대에 문자, 의학, 산수(算數), 역법, 악기, 도기, 잠상(蠶桑 양잠) 등 각종 발명이 잇따라 나타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지남차도 황제가 발명한 것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중화 문명의 기틀이 황제 시대에 닦였다고 여긴다.
황제 곁에 있던 창힐(倉頡)이라는 사관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창힐의 머리에는 네 개의 눈이 있어 신명(神明)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 규성(奎星)이 굽은 형상을 보고, 고개를 숙여 거북 껍질의 문양과 들짐승과 날짐승의 발자국을 관찰했다. 창힐은 세상의 수많은 아름다운 형상을 널리 수집하여 종합해 문자를 만들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상고문자(上古文字)”라 불렀다. 창힐이 글자를 만들자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곡식이 내린 것은 창힐이 문자를 만든 것이 경축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운 것은 문자가 생김으로써 백성들의 지혜가 열리고 백성들의 덕(德)이 떠나 기만과 교활, 쟁탈과 살육이 이로 인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에 더 이상 태평한 날이 없고 귀신조차 안녕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귀신이 울었던 것이다.
역법(曆法)에 있어서 황제는 하늘이 내려준 보정(寶鼎)을 이용해 태양의 운행을 관측하고, 점복에 쓰이는 시초(蓍草)로 역법을 추산하여 절기와 일진을 미리 알았다. 황제 시대에는 날짜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기일법(記日法)도 발명되었다. 《사기・오제본기》에서는 ‘황제가 해를 맞이하며 대나무 산가지로 역수를 추산했다(迎日推策)’라고 했다. 산가지는 작은 대나무 조각이다. 해가 뜰 때마다 대나무 조각을 하나씩 옮겼다. 기일법의 발명 중에서 천간(天干) 기일법이 가장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천간 기일법이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열 글자를 사용하여 매일 순서대로 하루씩 표기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나중에 지지(地支)와 결합하여 간지 기일법이 되었으며 현대까지 계속 사용되어 중화문화의 매우 특색 있는 부분이 되었다.
중국 수학의 창시자 역시 황제라고 전해지며, 최초의 수학 지식과 수학 도구들은 모두 황제 시대에 발명되었다. 가령 한대 수학 저작인 《수술기유(數術記遺)》에서는 황제가 수의 표기법과 용법을 발명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최초의 산수가 황제 시대의 ‘예수(隸首)’라는 사람에 의해 창작되었다고도 한다.
황제의 정비(正妃)는 서릉국 딸인 누조(嫘祖)이다. 누조는 양잠을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실고치로 옷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수서・예의지》 기록에 따르면 북주(北周)는 누조를 선잠, 즉 잠신의 시조로 받들었다. 누조는 황제의 또 다른 비인 모모(嫫母)와 함께 황제를 도와 천하를 다스렸으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고귀한 품덕을 지녔다. 누조는 황제와 함께 천하를 시찰하던 중 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황제는 누조를 “조신(祖神)”으로 추존했다.
황제의 현덕(賢德) 덕분에 만국(萬國)이 안정되고 백성의 삶이 풍족해졌다. 사적에 따르면 황제가 재위한 100년 동안 중국에는 도둑이나 싸움이 없었고 사람들이 겸양하며 화목했다. 풍년이 들고 기후가 순조로웠으며 심지어 호랑이나 표범이 사람을 해치지 않았고 조수와 충나방까지 그의 교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야말로 “도가 천하에 행해진 인간 천국의 성세” 전형이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헌원 황제를 인문초조(人文初祖)로 추대했다.
황제에 관해서는 또한 그가 도(道)를 구했다는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황제가 보정과 신령한 산가지인 신책(神策)을 얻었으며,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 “천지의 기강과 음양의 점복, 생사의 설과 존망의 어려움”에 순응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황제가 하늘에 순응하여 다스릴 줄 알았으며 음양과 생사의 변화 이치를 알고 도를 행한 수련 득도자였음을 형용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법을 얻어 도를 깨달은 후 나랏일을 다스리는 동시에 단을 연마하고 솥을 구하며 정심으로 수련했다.
기원전 2598년, 황제는 교산(橋山) 아래에서 큰 솥을 주조했는데, 솥이 완성되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황룡 한 마리가 내려와 그를 영접했다. 황제는 수행하던 신하 70여 명과 함께 황룡에 올라타 낮에 하늘로 솟아올라 원만공성했다. 복분(福分)이 부족했던 신하들은 너무 늦게 도착하여 용의 수염만 잡았으나 결국 수염이 빠지면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만백성은 이 신성하고 장관인 광경을 직접 우러러보았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신하들과 백성들은 은혜에 보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황제가 남긴 의복을 교산 아래에 묻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섬서성 황릉현(黃陵縣)의 황제 의관총이다.
이것이 아마도 중국인들이 생명의 원만한 마무리를 하늘로 돌아가 신(神)이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된 연유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세상을 떠난 조상을 다른 형태의 신으로 여겨, 조상의 영혼이 하늘에서 자손을 보살피고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에 집집마다 조상을 모시고 같은 성씨의 친족들은 사당을 지어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명절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천제조가 중화문화의 큰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삼황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황제가 일정한 신력(神力)을 가졌으나 더 이상 신화 시대의 삼황처럼 “신”의 형상으로 세상에 강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치세의 제왕이자 도를 얻은 수련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신전문화와 인본문화의 교체를 이어나갔다. 황제의 마지막 원만 회귀는 인류가 수련을 통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과 신 사이를 잇는 유일한 통로는 “수련”이며, 하늘은 신의 세계를 대표하고 인간은 신이 만든 존재로서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돌아간다는 “천인합일”의 관념은 이렇게 중국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렸다.
* 전욱과 제곡 시대
황제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자신의 성씨를 세운 이가 14명이었다. 누조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현효(玄囂), 즉 청양(淸揚)으로 부족 수령에 봉해져 강수(江水)에 거주했다. 다른 한 명은 창의(昌意)로 역시 부족 수령에 봉해져 약수(若水)에 거주했다. 창의는 촉산씨의 딸 창복(昌仆)과 혼인하여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고양은 성인의 품덕을 지녔다. 황제가 승천한 후 그의 손자이자 창의의 아들인 고양이 제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전욱제(顓頊帝)이다.
전욱제는 침착하고 신중하며 기지가 있었고 통달하여 사리에 밝았다. 그는 백성에게 각종 가축을 기르는 법을 가르치고 지력(地力)을 충분히 이용하게 했으며, 자연에 순응하도록 사시 절기를 추산했다. 귀신에 의지해 예의를 제정하고 사시와 오행의 기운을 다스려 만민을 교화했으며, 심신을 깨끗이 하여 귀신에게 제사 지냈다. 그는 북으로 유릉(幽陵), 남으로 교지(交址), 서로 유사(流沙), 동으로 반목(蟠木)에 이르렀다. 각종 동식물과 크고 작은 신들 등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평정되어 귀순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전욱제가 낳은 아들은 궁선(窮蟬)이다. 전욱이 죽은 후 현효의 손자이자 전욱의 조카인 고신(高辛)이 즉위했으니 이가 바로 제곡(帝嚳)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고신은 태어날 때부터 영기가 있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제왕으로서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대중에게 은택을 널리 베풀었다. 멀리 내다보고 세밀한 부분까지 살폈으며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백성의 급한 사정을 이해했다. 인덕을 행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신의를 지켰으며 스스로 수양하여 도덕이 고결하니 천하가 귀순하지 않음이 없었다. 토지에서 거둔 물산은 항상 검소하게 사용했고 때에 맞추어 행동했으며 먹고 입고 쓰는 것을 선비들과 같이했다. 만민을 아끼고 교화하며 이로운 일을 가르쳤고 해와 달의 운행을 추산하여 세시 절기를 정했으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공경히 맞이하고 배웅했다. 귀신을 명확히 알고 신중하게 받들어 모셨다.
제곡은 진봉씨의 딸과 혼인하여 방훈(放勳)을 낳았고, 추자씨의 딸과 혼인하여 지(摯)를 낳았다. 제곡이 죽은 후 지가 제위를 계승했다. 제지(帝摯)는 등극한 후 별다른 정치를 펴지 못하여 방훈이 등극했으니 이가 바로 제요(帝堯 요임금)이다.
*제요 시대
《춘추위・원명포》에 따르면 요가 태어날 때도 기이한 현상이 있었는데, “요의 눈썹이 여덟 가지 색깔이라 역법과 천상에 통하는 일월선기옥형(日月旋璣玉衡)”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천문을 알고 역법 등에 밝음을 상징한다. 《춘추위・합성도》에서는 그의 이마가 태양과 같았다고도 전한다.
요는 즉위 후 부친과 마찬가지로 인덕(仁德)이 하늘 같고 지혜가 신(神)과 같았다. 부유했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고귀했으나 방자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과 똑같이 초가집에 살며 거친 밥을 먹고 나물국을 마셨으며 여름에는 굵은 베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을 걸쳤다. 선덕(善德)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친족 9대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게 했다. 친족들이 화목해지자 백관을 고찰했다. 백관의 정적이 뚜렷해지니 각 부족도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백성을 지극히 아꼈으며 사심이 조금도 없었다.
황제, 전욱, 제곡과 마찬가지로 제요는 신하인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하늘의 뜻을 받들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과 별자리의 순서를 근거로 역법을 제정하게 하고 백성에게 농사 절기를 신중히 가르치게 했다.
또한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욱이에 머물며 해 뜨는 것을 공경히 맞이하고 봄철 경작을 상세히 안배하게 했다. 춘분날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주작 칠수 중 성수(星宿)가 초저녁 정남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중춘의 때를 정했다. 이때 백성은 흩어져 일하고 조수는 새끼를 치고 교미한다.
또 희숙(羲叔)에게 명하여 남교에 머물며 여름 농사일을 상세히 안배하게 했다. 하짓날 낮이 가장 길고 창룡 칠수 중 심수(心宿 또는 대화大火)가 초저녁 정남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중하의 때를 정했다. 이때 백성은 높은 곳에 거주하고 조수는 털이 성겨진다.
또 화중(和仲)에게 명하여 서토에 거주하며 지는 해를 공경히 배웅하고 가을 수확을 단계적으로 안배하게 했다. 추분날 밤과 낮의 길이가 같고 현무 칠수 중 허수가 초저녁 정남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중추의 때를 정했다. 이때 백성은 평지로 이주하고 조수는 새 털이 난다.
또 화숙(和叔)에게 명하여 북방 유도에 머물며 겨울 저장을 철저히 안배하게 했다. 동짓날 낮이 가장 짧고 백호 칠수 중 묘수가 초저녁 정남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중동의 때를 정했다. 이때 백성은 방에 들어가 온기를 취하고 조수는 가는 털이 가득해진다. 1년은 366일로 하며 윤달을 두어 춘하추동 사계절을 교정했다.
이외에도 제요는 백관에게 각자의 직분을 굳게 지키라고 훈계하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게 했다.
제요 재위 기간에 천하의 각 종족은 화목하게 지냈고 사람마다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두려워하며 덕을 중시하고 스스로를 규율했다. 훗날 제요가 늙자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의 덕행이 부족하다고 여겨 제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곁에 있던 신하 사악(四岳)에게 물었다. “내가 재위한 지 이미 70년인데 누가 천명에 순응하여 내 제위를 이어받겠는가?”
사악이 곤을 추천했으나 요는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중에 사악이 다시 우순(虞舜)을 추천했다. 우순은 눈먼 이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리석고 어머니는 완고하며 동생은 오만했으나, 순은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효제의 도를 다해 집안을 잘 다스려 그들이 악으로 흐르지 않게 했다. 이는 우순이 비범한 품행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우순의 덕행을 고찰하기 위해 요는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두 딸을 통해 그의 덕행을 관찰하게 했다. 순은 그녀들이 귀한 마음을 내려놓고 규하(媯河) 가의 집으로 가서 부녀의 도를 지키게 했다. 요는 이를 매우 좋게 여겨 순에게 사도(司徒) 직을 맡겨 부의(父義 아버지는 의리가 있고), 모자(母慈 어머니는 자애하며), 형우(兄友 형은 우애가 있고), 제공(弟恭 동생은 공손하며), 자효(子孝 자식은 효도)라는 다섯 가지 윤리 도덕을 신중히 다스리게 하니 백성이 모두 어기지 않고 따랐다.
요가 또 그를 백관의 일에 참여시키니 백관의 업무가 일목요연해졌다. 명당(明堂) 사문(四門)에서 빈객을 접대하게 하니 사문마다 화목했고 멀리서 온 빈객들이 모두 공경히 대했다. 요는 또 순을 산야와 숲, 큰 하천과 늪지로 보냈는데 폭풍우를 만나도 순은 길을 잃거나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요는 그가 매우 총명하고 덕행이 높다고 확신했다. 순을 불러 지금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순은 자신의 덕행이 부족하다며 사양했다. 그러나 정월 초하루, 순은 문조묘(文祖廟)에서 요의 선양을 받아들였다. 문조란 바로 요의 태조(太祖)이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선양’이다. 훗날 순 역시 제위를 우에게 선양했다.
‘선양’의 전설은 우리나라 고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후세 사람들은 공자의 입을 빌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공의 것이 되어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선발하고 신의를 숭상하며 화목을 닦으니… 이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평했다.
‘대동’ 사회는 우리나라 옛 사람들이 추구한 이상 사회였다.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선발하고 신의와 화목을 닦는다’는 것은 사회가 어질고 능력 있는 현능(賢能)한 인재를 선발하여 국가를 통치하고 관리하게 하며, 성실과 신용을 제창하고 조화롭고 융화된 인간관계 기준을 세워 ‘사람들이 자신의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사회를 건립함을 의미한다.
요는 제위를 순에게 선양한 후 연세가 높았기에 순에게 천자의 정사를 대행하게 하여 그가 천자가 되는 것이 천의에 부합하는지 관찰했다. 요가 현자를 선택해 지위를 계승하게 한 방식에 대해 공자는 “위대하도다, 요의 임금 됨이여”라고 찬탄하며 요를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여긴 모범이라고 칭송했다.
순이 요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게 된 후 북두칠성을 관측하여 해와 달 및 금, 목, 수, 화, 토 오성의 운행에 이상이 있는지 관찰했다. 또한 임시 의식을 거행해 상제에게 고하고 제물을 불에 태우는 의식으로 천지와 사시에 제사 지냈으며, 멀리서 제사 지내는 방식으로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각처의 신령들에게 보편적으로 제사 지냈다. 그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다섯 등급의 제후들이 지닌 환규(桓圭), 신규(信圭), 궁규(躬圭), 곡벽(穀璧), 포벽(蒲璧)의 다섯 가지 옥으로 만든 부신(符信)을 거두어 길한 달과 날을 택해 사악과 각 주의 주목(州牧)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나누어 주었다.
순은 또한 그해 2월에 동방을 시찰하여 태산에 이르렀을 때 땔나무를 태우는 의식으로 동악(東嶽)에 제사 지내고 멀리서 제사 지내는 방식으로 각지의 명산대천에 제사했다. 이어 동방 각 부족 수령을 소견하여 사시 절기, 달의 크기, 일진을 협조하여 교정했고 음률과 길이, 용량, 무게의 표준을 통일했다. 길(吉), 흉(凶), 빈(賓), 군(軍), 가(嘉)의 다섯 가지 예의를 닦아 밝히고 제후는 다섯 가지 규벽(圭璧)과 세 가지 채증(彩繒)을, 경대부는 어린 양과 기러기 두 종류 동물을, 선비는 죽은 꿩을 조현(朝見) 시의 예물로 쓰게 규정했다. 다섯 가지 규벽은 조현례가 끝난 후 다시 각 수령에게 돌려주었다.
5월에 순은 다시 남방을 시찰했고 8월에는 서방을, 11월에는 북방을 시찰했는데 그 행보는 처음에 동방을 시찰할 때와 같았다. 돌아온 후 조묘(祖廟)와 부묘(父廟)에 고제하고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썼다.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시찰했으며 그사이 4년 동안은 각 부족 수령들이 때맞춰 경사로 와서 조현했다. 순은 그들에게 치국의 도를 상세히 강설하고 실적에 따라 고찰하여 공로에 따라 수레와 말, 의복을 하사했다.
순은 처음으로 천하를 12개 주로 나누고 하천을 준설했다. 순은 형벌을 신중히 사용할 것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형벌에 따라 집행하되 유배 보내는 방법으로 먹물을 새기는 자자(刺字), 코를 자르는 할비(割鼻), 발을 자르는 단족(斷足), 거세하는 엄할(閹割), 목을 자르는 살두(殺頭) 등의 오형(五刑)을 너그럽게 감해줄 수 있게 규정했다. 관청에서 일을 다스릴 때는 채찍으로 형을 집행하고 학부 교육 시에는 회초리로 징계했으며 황금으로 벌금을 내어 죄를 속할 수 있게 했다. 재해로 인해 과실을 범한 자는 사면해 주고, 악행을 고치지 않고 해악을 끼치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했다.
요는 재위 70년에 순을 얻었고 다시 20년이 지나 노쇠하자 물러나며 순에게 천자의 정무를 대행하게 했다. 요는 제위를 내어준 지 28년 만에 서거했다. 백성들은 친부모를 여읜 것처럼 슬퍼하고 통곡했다. 3년 동안 사방 어디에서도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이는 제요를 애도하기 위함이었다. 요는 자신의 아들 단주가 어질지 못해 천하를 물려줄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잠시 시험 삼아 순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순에게 양보하면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얻고 단주 한 사람에게만 불리하지만, 단주에게 물려주면 천하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고 단주 한 사람만 이득을 보게 된다.
요는 “나는 차마 천하 사람을 해치면서 한 사람만 이롭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결국 천하를 순에게 전했다. 요가 서거한 후 3년 상을 마치자 순은 제위를 단주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남하의 남쪽 기슭으로 숨었다. 그러나 제후들이 조현하러 갈 때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로 왔으며, 소송을 하는 이들도 단주를 찾지 않고 순을 찾아왔다. 공덕을 칭송하는 이들도 단주를 칭송하지 않고 순을 칭송했다. 순이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한 후에야 도읍으로 가서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순제(舜帝)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