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
【정견망】
《삼국연의》는 중국 고전 장회체(章回體) 역사 소설의 효시이다. 이 책은 ‘의(義)’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위, 촉, 오 세 세력 간의 지혜와 용기를 겨루는 대결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동한 말기부터 서진 초기에 이르는 약 한 세기 동안의 역사적 풍운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으며, 유비의 인의(仁義), 조조의 간사함, 관우의 충의(忠義), 장비의 용맹함, 제갈량의 다재다능한 지략, 주유의 시기심, 손권의 인내(委曲求全), 원소의 우유부단함 등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역사적 영웅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외에도 세간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민간에 깊이 숨어 산림에 은거하던 세외고인(世外高人)들이 책 속에서 가끔 ‘진면목’을 드러내기도 한다.
1. 관로(管輅): 삼국 시대 위(魏)의 술사로 자는 공명(公明)이며 평원(현 산동성 평원) 사람이다. 8~9세 때 벌써 별자리를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성인이 된 후 《주역》에 정통하여 복서와 관상에 능했고 새의 언어를 익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말하는 것마다 적중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술사(術士)로, 후세에 점복과 관상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일생 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주역통령결(周易通靈訣)》, 《주역통령요결(周易通靈要訣)》, 《파조경(破躁經)》, 《점기(占箕)》 등이 있다. 《삼국지·방기전(方技傳)》에서는 관로의 술수를 “화타의 의술, 두기(杜夔)의 음악, 주건평(朱建平)의 관상, 주선(周宣)의 해몽”과 나란히 언급하며 “진실로 모두 현묘하고 특별하며 뛰어난 절기”라고 평가했다. 연의에서는 그가 조조를 위해 점을 쳐서 허도(許都)의 화재와 정군산(定軍山)에서 대장 한 명을 잃을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서술하며, 예언이 실현된 후 조조가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2. 화타: 자가 원화(元化)이며 또 다른 이름은 부(旉)이다. 동한 말 패국(沛國) 초(礁 지금의 안휘 박주) 사람으로 동한 말기의 유명한 의학자이다. 젊은 시절 타지에서 유학하며 의술을 연구했으나 벼슬길은 구하지 않았다. 의술이 전방위적으로 뛰어났고 특히 외과에 능해 후세에 ‘외과의 성수(聖手)’, ‘외과의 비조’라 불렸다. 그가 발명한 ‘마비산’은 세계 의학사에서 전신 마취를 이용해 수술 치료를 진행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 등 짐승의 동작을 본떠 ‘오금희(五禽戲)’를 창시했다. 저술한 의서 《청낭서(青囊書)》는 유실되었다.
삼국연의에서 화타는 동오의 주태(周泰)를 치료하고 형주의 관우(關羽)에게서 독을 제거하며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이야기를 남겼다. 이후 조조의 머릿속에 종양이 있음을 진단하고 개두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심이 많았던 조조는 화타가 기회를 틈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하옥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조조는 결국 뇌종양의 통증으로 사망했다.
3. 누자백(婁子伯): 조조가 마초(馬超)를 정벌할 때 두 군대가 위하(渭河)에서 대치하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종남산에 은거하던 누자백은 조조에게 용병은 천시(天時)를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며, 물을 뿌려 얼음을 얼려 성을 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조군(曹軍)은 하룻밤 사이에 토성을 쌓고 마초를 크게 격파했다. 사건 후에 누자백은 조조의 하사품을 받지 않고 표연히 떠났다.
4. 방덕공(龐德公): 동한의 명사로 양양 사람이다. 형주 자사 유표(劉表)가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유표가 관직과 봉록을 마다하면 후세 자손에게 무엇을 남겨주겠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자손에게 남기는 것은 향락을 탐하고 게으른 나쁜 습관이지만, 내가 자손에게 남기는 것은 농사짓고 공부하는 가풍과 편안히 살며 즐겁게 일하는 생활이니 남기는 바가 다를 뿐입니다.”
방덕공은 당시 양양에 은거하던 서서(徐庶), 사마휘(司馬徽), 제갈량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제갈량을 ‘와룡(臥龍)’, 사마휘를 ‘수경(水鏡)’, 방통을 ‘봉추(鳳雛)’라 부르며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 칭송받았다. 유비가 수경 선생을 방문했을 때 동자의 입을 빌려 이 어른을 언급하며 천기를 누설했다. 복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훗날 유비의 ‘삼고초려’ 이야기로 이어진다.
5. 맹절(孟節):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 중 남만왕 맹획(孟獲)의 형이자 스스로 ‘만안은자(萬安隱者)’라 칭한 맹절의 도움을 받는다. 맹획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맹절이 여러 번 간했으나 맹획은 듣지 않았고, 그는 산림 속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정벌에 나섰을 때 군사들이 실수로 아천(啞泉)의 물을 마시고 말을 못 하게 되었다. 맹절은 안락천의 샘물로 제갈량이 사안독천(四眼毒泉)의 재난을 해결하도록 도왔고, 촉군에게 해엽운향초(薤葉芸香草)를 입에 물어 장기(瘴氣)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제갈량이 천자에게 보고하여 맹절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맹절은 거절했다. 제갈량이 다시 금과 비단을 선물했으나 맹절은 끝내 받지 않았다.
6. 좌자(左慈): 동한 말의 방사로 노강(盧江) 사람이다. 젊어서 천주산에 머물며 연단을 익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조와 연회할 때 조조가 송강의 농어를 얻고 싶어 하자, 좌자가 구리 쟁반에 물을 담아 낚아 올리니 조조가 크게 기뻐했다. 삼국연의에는 잔을 던져 조조를 희롱하는 대목이 있다. 이후 교외 연회에서 그는 환술(幻術)로 조조 부하들의 술과 고기를 모두 취해 손님들에게 대접했고, 노한 조조가 그를 추격하자 몸을 숨겼다. 나중에 다시 양산(羊山)에서 발견되었는데 머리를 양떼 속에 숨기니 끝내 잡을 수 없었다.
《후한서·좌자전》 외에도 동진 간보의 《수신기》에 기록이 있으며, 《방여승람》, 《천하명승지》, 《강남통지》, 청나라의 《노강현지》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7. 이의(李意): 갈홍의 《신선전》에 따르면 이의는 촉군(지금의 사천 성도) 사람으로 한 문제 때 태어나 삼국 시대까지 생존했다. 노자의 17대 현손이라는 설도 있으며 도행(道行)이 고매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릉대전 전, 유비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를 정벌하여 결의형제인 둘째 아우 장비의 원수를 갚으려 할 때 이의에게 길흉을 물었다. 이의는 종이와 붓을 찾아 병마와 병기 40여 장을 그린 후 다 그린 즉시 하나하나 찢어버렸다. 또 한 명의 대인이 땅에 누워 있고 곁에서 한 사람이 흙을 파서 묻는 그림을 그린 뒤 그 위에 큰 ‘백(白)’ 자를 쓰고는 읍을 하고 떠났다. 유비는 기분이 좋지 않아 신하들에게 “미친 노인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말하고 불태워 버린 뒤 군사를 전진시켰다.
이의가 그린 병마와 병기 그림 40여 장은 유비가 강을 따라 세운 40여 개의 영채를 암시했고, 이를 찢은 것은 영채가 파괴될 것을 암시했다. 대인이 땅에 눕고 흙을 덮는 것은 유비가 패전하여 사망할 것을 은유했으며, ‘백’ 자는 유비가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고아를 부탁할 것을 가리켰다. 불태운 것은 영채가 불타는 것을 의미했다. 이 모든 것은 훗날 하나하나 증명되었다.
8. 우길(于吉): 동한 말기의 도사로 낭야(지금의 산동성 교남) 사람이다. 처음에 동방에 거주하며 오회(吳會) 지역을 왕래했고, 정사(精舍)를 세워 향을 피우고 도서를 읽으며 부적물로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니 오회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소패왕(小霸王) 손책(孫策)이 이를 듣고 크게 노했다. 그는 방술과 무속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사들이 민간에 흩어져 군중을 모아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이자는 요망하여 대중의 마음을 홀릴 수 있으니, 장수들로 하여금 군신 간의 예의를 돌보지 않게 하고 모두 누각 아래에서 절하게 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여겼다.
명신(名臣) 장소(張昭)와 손책의 어머니가 모두 죽이지 말라고 권했으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손책은 민심을 현혹했다는 이유로 참수 명령을 내렸다.
사건 후 손책은 궁전에서 우길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자주 보았으나 병사들은 보지 못했다. 손책은 이로 인해 매일 광분하며 ‘우길을 추격’했고 궁전의 물건들을 마구 베어 넘기다가 결국 상처가 터져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