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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동주 제후 쟁패 시기 ─ 춘추전국 (1) 상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심연(心緣)

【정견망】

순식간에 200여 년이 흘러갔고, 한때 천하가 조공하던 서주(西周)는 결국 유왕(幽王)의 혼탁함과 잔학함으로 인해 망했다. 이는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두려워하는 인덕(仁德)의 왕만이 민심을 얻고 천하를 얻으며 신(神)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군주는 도를 잃어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제 역사의 다음 장면으로 계속 들어가 보자.

서주 시기에는 비록 많은 제후국을 봉했으나, 주왕(周王)은 여전히 천하의 종주로서 권위를 유지하며 제후국 간의 상호 공격이나 병합을 금지했다.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한 이후 왕실은 쇠락해졌고 제후를 통제할 힘을 잃었다. 반면 사회 경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만이융적(蠻夷戎狄)이라 불리던 민족들이 중원 문화의 영향이나 민족 융합을 바탕으로 빠르게 따라잡았다. 중원의 각 제후국도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 어떤 나라는 강대해지고 어떤 나라는 쇠락했다.

그리하여 제후국들이 서로 병합하고 대국들 사이에 패권(覇權)을 다투는 국면이 나타났다. 여러 나라 사이의 경쟁도 그리 치열하지 않던 것에서 매우 치열한 상태로 변했으며, 이에 따라 후세 사가들은 춘추와 전국 시기로 구분했다. ‘춘추’는 공자가 저술한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했고, ‘전국’은 아마도 이 시기에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서한의 유향(劉向)은 일찍이 《전국책》을 저술했다. 그러나 동주 시기의 사회적 대동란은 오히려 전국적인 통일을 위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동란이 가중되고 국가 간의 교류와 경쟁, 인적 교류의 확장은 사람들의 도덕 수준을 하락하게 했다. 상고(上古) 시기부터 서주(西周) 시기까지 사람들이 숭상하던 ‘덕(德)’은 현실적인 권력욕과 이익에 자리를 내주었고, 약육강식과 강자 존중의 법칙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공자는 이때를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라고 여겼다.

《사기·진본기(秦本記)》에는 진목공(秦穆公)과 융왕(戎王)이 보낸 신하 유여(由餘)의 대화가 있는데, 이는 중원 각국에 분쟁이 나타난 근원을 반영한다.

진목공이 유여에게 물었다.

“중원 각국은 시서예악(詩書禮樂)과 법률을 빌려 정무를 처리하면서도 때때로 화란이 일어나는데, 지금 융족은 이런 것이 없으니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유여가 대답했다.

“이것들이야말로 바로 중원 각국에서 화란이 발생하는 근원입니다. 상고 시대 성인 황제(黃帝)께서는 예악과 법도를 만드시고 몸소 앞장서서 관철하고 집행하시어 작은 태평을 이루셨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군주는 날로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하고 게을러졌습니다. 법률 제도의 위엄을 빌려 백성을 요구하고 감독하니 백성은 피로해져 군주를 원망하고 인의(仁義)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위아래가 서로 원망하고 찬탈하며 살육하고 심지어 멸족하기까지 하니, 이는 모두 예악과 법도라는 것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후한 인덕을 품고 아래 신민을 대하며, 신민은 충신(忠信)을 가득 품고 군주를 섬기니 온 나라의 정사가 마치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것과 같아 다스리는 방법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시대적인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절실히 찾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 춘추전국 시대에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국면이 나타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는 존재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행위 도덕을 규범화하며, 인연 있는 사람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학설은 많았으나 시대의 변화를 대표하는 것은 주로 도가, 유가, 묵가, 법가, 음양가, 농가 등이었다. 특히 유가와 도가 두 가는 이후의 중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진정한 도(道)는 그 속에 있었다.

이 시기의 역사는 매우 번잡하고 복잡하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제1부분은 제후 간의 패권 전쟁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제2부분은 사상 학설과 문화 과학 기술 방면의 서술에 중점을 둔다.

제1부: 춘추 시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함’ 아래에서의 제후 간 경쟁

(기원전 770년-기원전 477년)

—–약육강식, 강자가 왕이 되는 법칙의 점진적 확립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천자가 직접 관할하던 ‘왕기(王畿)’는 융적의 끊임없는 침입과 제후들의 잠식 아래 크게 축소되었다. 결국 성주(成周) 주변의 100~200리, 즉 오늘날 하남 서부의 한 모퉁이 땅만 남게 되었다. 동시에 천자가 제후를 통제하던 권력과 직접 보유했던 군사력도 날로 상실되었다. 천자는 경제적으로 제후에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흔히 제후들의 뜻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천자는 ‘공주(共主)’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 경제 발전에 따라 점차 강대해진 일부 제후국은 왕실이라는 기치를 이용해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挾天子以令諸侯)’하며 적극적으로 자기 세력을 확장했다.

중원 일대에서는 오늘날 산서(山西)에 위치한 진(晉)나라, 산동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호북(湖北)의 초(楚)나라, 북경과 하북 북부의 연(燕)나라, 그리고 조금 뒤 장강 하류에서 굴기한 오(吳), 월(越) 등의 나라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한 후 선후로 강대해져 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 주 왕실의 서쪽 땅은 진(秦)나라 소유가 되었다. 진(秦)나라는 점차 주변의 일부 융족 부족이나 국가를 병합하여 서방의 강국이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대국들 간의 전쟁은 아직 빈번하지 않았으며 자기 세력을 발전시키는 시기였다. 《좌전(左傳)》의 기록에 따르면 춘추 시대에는 총 140여 개국이 있었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나라로는 제, 진(晉), 초, 진(秦), 노, 송, 정, 위(衛), 진(陳), 채, 오 및 월나라 등이 있다.

1. 사람을 알아보고 잘 썼으나 끝을 잘 맺지 못한 제환공(齊桓公)

가장 먼저 굴기한 대국은 제나라다. 제나라의 개국자는 여상(呂尙)으로 강상(姜尙) 또는 강태공이라고도 불린다. 강태공이 주 문왕과 무왕을 보좌하여 대업을 세우고 최종적으로 상나라 주왕(紂王) 정권을 뒤엎는 데 공을 세웠기에,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된 후 제나라 영구(營丘)를 그에게 봉했다. 나중에 봉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제나라는 지리적으로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태산에서 낭야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에 닿으니 비옥한 땅이 2,000리였다.” 또한 개국 이래 경제 발전을 매우 중시하여 태공 시기에 이미 “공업과 상업을 유통하고 어업과 소금의 이로움을 편리하게 했다.” 정치 문화적으로는 “그 백성이 활달하고 지혜가 많다”라는 기존 문화에 순응하여 종법제(宗法制)와 집권제(集權制)의 결합을 조건부로 추진했다. “그 풍속을 따르고 그 예법을 간소하게 하여” 정치는 간결하면서도 가혹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평이하게 다가갔다.

제환공(齊桓公 기원전 685년–643년)은 사람을 알아보고 잘 등용하며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군주였다. 그는 즉위 후 과거의 원한을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화살을 쏘았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임용했다. 나중에 누군가 참소를 하여 관중을 중상모략했으나 제환공은 이를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관중을 더욱 신임하여 ‘중부(仲父)’라 존칭했다. 그리고 “나라에 큰 정사가 있으면 먼저 중부에게 알리고 그다음에 과인에게 알리며, 시행하는 바는 모두 중부의 결정에 따른다”라고 명시했다. 이로 인해 관중은 자신의 총명함과 재능을 발휘하여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관중은 이름이 이오(夷吾)이고 자는 중(仲)이며 시호는 경(敬)으로 춘추 초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철학가이다. 그는 제환공을 보좌한 후 내정과 외교 정책에 대해 전면적인 개혁을 진행했으며 일련의 부국강병 방침과 전략을 세웠다. 그는 세금을 합리적으로 징수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여 민부(民富)와 민안(民安)을 달성했다. 또한 국가 관리 체제를 개선하고 민간 무장 세력을 발전시켰으며 군정과 정무의 리더십을 통일했다. 아울러 국가의 힘을 운용해 소금과 철 사업을 발전시켜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는 제나라 발전의 훌륭한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관중은 정치적으로 제환공에게 “옛 법을 고쳐 그중 선한 것을 택해 새롭게 쓸 것[修舊法,擇其善者而業用之]”을 요구했다. 이른바 ‘옛 법을 고침(修舊法)’은 낡은 제도를 정돈한다는 뜻이다. 또 업(業)이란 위소의 주에 따르면 ‘창(創)과 같다’고 했으니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내용을 주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여섯 가지 자루(六柄)를 신중히 사용”(《국어·제어(齊語)》)할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여섯 가지 자루란 《국어·제어》 위소의 주에 따르면 “생, 살, 빈, 부, 귀, 천(生, 殺, 貧, 富, 貴, 賤)”을 말한다.

“그 선한 것을 택하여 새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방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속세와 호오(好惡)를 같이” 했으며, “풍속이 바라는 바는 그에 따라 베풀고, 풍속이 거부하는 바는 그에 따라 제거했다(《사기·관안열전》)”. “병(柄)”은 후대 법가(法家)의 매우 중요한 집권 개념이다. “육병(六柄 여섯 가지 자루)”을 요약하자면 상벌의 “이병(二柄)”인데, 즉 생·부·귀는 상이고 살·빈·천은 벌이다. 이로 보아 관중이 비록 “준법(峻法 엄격한 법)”을 제정하거나 공포하기는 불가능했을지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기를 마치 질병처럼 여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관중의 “엄형(嚴刑)”에 따른 결과였다. 만약 “엄형”이 관중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한다면, 소위 “법가” 역시 관중에게서 그 단초가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관중은 또한 나라 안에 “부모에게 자애롭고 효도하며 총명하고 인자하여 향리에 소문이 난 자”나 “무용과 힘이 있어 대중보다 뛰어난 자”(《국어·제어》)가 있으면 향장(鄕長)이 추천하여 관직에 시험적으로 임용하게 했다. 시험 임용에서 직무를 잘 수행하면 정식으로 관리로 임명했다. 임관 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자는 군주의 심사를 거쳐야만 상경(上卿)을 도와 정사를 다스리게 했다. 이러한 인재 선발의 삼선제(三選制)는 어느 정도 과거의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타파하고 하층 사민(士民)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춘추 초기에 각국의 대외 정치는 대략 세 가지 관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화하(華夏)와 이적(夷狄), 둘째는 제후와 주 천자, 셋째는 제후와 제후 간의 관계였다. 제환공은 국내 정세를 안정시킨 후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외교상에서 관중이 제기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전략을 받아들였다. 즉 주 왕실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만이(蠻夷)의 나라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제나라는 먼저 연(燕)나라와 연합하여 북융(北戎)을 격파했고, 또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적인(狄人)의 침입을 제지해 형(邢)나라를 남기고 위(衛)나라를 구했다. 기원전 656년 제나라는 노, 송, 정, 진(陳), 위(衛), 허, 조(曹)나라 등과 연합군을 결성해 채(蔡)나라를 침공하고 초나라를 정벌했다. 소릉(召陵)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초나라가 왜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지 않는지 문책했다. 당시 초나라의 국력도 매우 성하여 연이어 정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제환공의 기세가 맹렬한 것을 보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화친을 허락하고 중단했다. 이후 제환공은 여러 차례 제후들과 회맹(會盟)을 가졌으며 주 왕실도 사람을 보내 회맹에 참가시키고 노고를 치하했다.

제환공은 사람을 알아보고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신의를 매우 잘 지켰는데, 이 역시 그가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환공 5년(기원전 681년) 노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노나라 군대는 패배를 앞두고 있었다. 노장공(魯莊公)이 영토의 일부를 바치고 강화를 요청하자 환공은 이를 허락하고 가(柯) 땅에서 노나라 사람들과 맹약을 맺었다. 맹세를 하려던 찰나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단 위에서 단검으로 제환공을 위협하며 침탈한 노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은 위협하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나중에 환공은 풀려난 뒤 노나라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고 조말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관중이 말했다.

“만약 위협당했을 때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서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다면, 이는 작은 쾌거에 만족하는 일일 뿐 제후들 사이에서 신의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천하 사람들의 지지를 잃게 되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환공은 조말이 세 번 패하며 잃었던 모든 영토를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가 신의를 지킨다고 여겨 귀부하기를 원했다. 환공 7년(기원전 679년) 제후들이 제환공과 견(甄) 땅에서 회맹했고 제환공은 이때부터 천하 제후의 패주(霸主)가 되었다.

제환공은 천하의 패주가 되었지만 여전히 예제(禮制)를 준수할 수 있었다. 환공 23년(기원전 663년)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략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환공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구하고 이어 산융을 정벌한 뒤 고죽(孤竹)에 이르러서야 군대를 회군했다. 연 장왕(燕莊王)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몸소 환공을 전송하며 제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환공이 말했다.

“천자를 제외하고 제후끼리는 전송할 때 자기 국경을 넘을 수 없으니 내가 연나라에 무례를 범할 수 없소.” 그리하여 연나라 임금이 이른 곳까지의 제나라 영토를 도랑으로 나누어 연나라에 주었으며, 연나라 임금에게 소공(召公)의 정치를 다시 닦고 주 성왕, 강왕 시대처럼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게 했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더욱 존경하고 복종했다.

환공 35년(기원전 651년) 여름, 환공이 제후들과 규구(葵丘)에서 회맹했다. 주 양왕(周襄王)은 재공(宰孔)을 보내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을 제사 지낸 복육(福肉), 붉은색으로 장식한 활과 화살, 천자가 타는 수레를 하사했으며 특별히 환공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환공은 본래 응하려 했으나 관중이 말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것이 혼란의 근본입니다.” 임금이 임금이고 신하가 신하인 것은 예를 근거로 하는 것인데 만약 제환공이 예의 규정을 지키지 않아 천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후들도 이를 본받아 예를 지키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환공의 지위도 보존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결국 절을 하고 제사 고기를 받았다. 환공이 왕을 존중하니 제후들도 왕을 존중해야 했고 이로 인해 환공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어·제어》에서는 “제후들이 순종한다고 일컬었다(諸侯稱順)”라고 했다. 이번 회맹을 통해 제환공은 비로소 중원의 패주가 되었다.

가을에 다시 제후들과 규구에서 회맹할 때 제환공의 얼굴에는 교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후들은 환공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일부는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 주 왕실은 쇠락했고 천하에는 오직 제, 초, 진(晉), 진(秦) 네 나라만 강성했다. 진(晉)나라는 막 회맹에 참가하려 했으나 진헌공(晉獻公)이 죽어 국내가 크게 어지러웠다. 진목공(秦穆公)은 처한 곳이 멀어 중원 제후들의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초성왕(楚成王)은 막 형만(荊蠻)의 땅을 자기 소유로 삼고 스스로 이적의 나라라 여겼다. 오직 제나라만이 중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할 수 있었다.

이에 환공은 선포했다. “과인이 남쪽으로 정벌하여 소릉에 이르러 웅이산을 바라보았고, 북쪽으로 산융, 이지, 고죽국을 정벌했으며, 서쪽으로 대하를 정벌하고 멀리 유사를 건넜다. 말발굽을 싸매고 병거를 매달아 태행산 험로를 올라 비이산에 이르고서야 돌아왔다. 제후들 중에 과인을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과인이 병거 회맹을 세 번, 승차(乘車) 회맹을 여섯 번 하여 아홉 번 제후들을 규합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다. 과거 삼대의 개국 천자와 비교해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태산에서 봉사(封祀)를 지내고 양보산에서 선사(禪祀)를 지내고 싶다.”

태산에서 봉사를 지내고 양보산에서 선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은 오직 주 천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환공이 제후 패주의 신분으로 이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참월(僭越)한 행위였다. 관중이 극력 만류했으나 환공은 듣지 않았다. 이에 관중은 봉선의 예법은 먼 곳의 온갖 희귀한 보물들이 갖춰져야 거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고 그제야 환공은 그만두었다.

환공 41년(기원전 645년) 관중이 세상을 떠난 후 환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품행이 좋지 못한 역아(易牙), 개방(開方) 등을 임용했다.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제나라는 어지러워졌다. 나중에 환공이 병들었을 때 그의 다섯 아들은 각자 당파를 결성해 태자가 되기를 요구했다. 환공이 죽은 후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 동안 버려졌고 시신에는 구더기가 가득했다.

환공 사후 제나라는 점차 쇠락해졌다. 특히 최저(崔杼), 경봉(慶封)의 난을 거치며 원기(元氣)가 크게 상했고 결국 귀족인 전(田)씨에 의해 공실(公室)이 대체되었다.

2. 패업을 이루려다 실패한 신의의 군주 송양공(宋襄公)

제환공이 죽은 후 내란 때문에 태자 소(昭)가 송나라로 도망쳤다. 송양공(宋襄公)은 노희공(魯僖公) 18년(기원전 642년) 조(曹), 위(衛), 주(邾)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고 태자 소를 귀국시켜 즉위하게 하니 이가 제효공(齊孝公)이다. 제나라를 물리친 후 송양공은 자신이 이미 강대해졌다고 여겨 제나라와 초나라의 위세를 빌려 중원의 패자가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노희공 21년(기원전 639년) 제효공을 불러 초나라 녹상(鹿上)에서 함께 결맹했는데, 초나라는 겉으로는 허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천라지망을 쳐두었다. 그해 가을 다시 만났을 때 송양공은 신의를 지켜 군대를 거느리지 않고 회맹에 나갔다.

초, 정, 진(陳), 채, 허, 조 등의 제후가 송양공과 우(盂) 땅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초나라는 그 기회를 틈타 그를 구금하고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했다. 송나라 공자 목이(目夷)가 회맹장에서 도망쳐 돌아와 초나라 군대에 맞서며 결사적으로 항복하지 않았다. 초나라는 임금 한 명을 잡아두는 것이 소용없음을 보고 송양공을 노나라에 보내주었고 노희공이 기회를 봐서 중재하여 그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송양공은 이때 이미 다른 나라들이 더 이상 신의를 근본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당시 초나라가 강성하여 정나라가 초나라에 조공하자 송양공은 기원전 638년 정나라를 정벌했다.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송나라 군대와 홍수(泓水)에서 교전하게 되었다. 당시 송나라 군대는 이미 진영을 갖추었고 초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마 자어(子魚, 공자 목이)가 송양공에게 말했다.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저들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송양공은 동의하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넌 후 아직 진영을 갖추지 못했을 때 자어가 다시 기회를 틈타 공격하자고 했으나 그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가 준비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송양공은 공격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송나라 군대는 대패했다. 송양공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원망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다친 이를 거듭 상처를 입히지 않고 머리가 센 노인을 포로로 잡지 않는 법이오. 옛날 군대를 운용할 때는 험난한 곳을 이용하지 않았소. 과인이 비록 망국(상나라)의 후예이나 대열을 갖추지 않은 자를 상대로 북을 치지는 않소.”

홍수 전투에서 송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국세는 이때부터 다시는 떨치지 못했다. 얼마 후 송양공은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3. 간언을 들을 줄 알았던 명군 진문공(晉文公)

일찍이 제나라가 중원에서 패권을 잡았을 때 남방의 초나라는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제환공 사후 제나라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 국력이 조금 쇠퇴하자 초나라는 다시 북쪽으로 발전했다. 송양공은 제환공의 패업을 잇고자 초나라와 겨루었으나 결과적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제나라가 패권을 잡았을 때의 맹방이었던 노, 송, 정, 진(陳), 채, 허, 조, 위(衛) 등은 이때 모두 초나라 편으로 돌아섰다.

초나라가 중원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할 즈음 진(晉)나라는 진문공의 정돈 아래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봉해진 시기가 비교적 빠르다. 처음 봉해진 군주는 주성왕의 동생인 숙우(叔虞)이며 도읍은 당(唐)이었다. 숙우의 아들 섭보(燮父) 때 오늘날의 태원 진수(晉水) 옆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진(晉)으로 고쳤다. 그 강역은 오늘날 산서성 남부와 분수(汾水), 회수(澮水) 유역 일대였으며 사방이 융적의 소국들이었다. 땅이 넓고 기세가 굳건했으나 중원과의 교류에는 지장이 있었다.

서주 말년 진나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했는데 진문후(晉文侯)는 정무공(鄭武公)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도왔다. 기원전 745년 문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가 섰는데 문후의 동생 환숙 성사(成師)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이후 진나라는 사실상 둘로 분열되었다. 춘추 초기의 67년 동안 내란이 그치지 않다가 기원전 679년 방계인 무공(武公 곡옥의 후손)이 진(晉)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서서 주 왕실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종가를 대신해 정식 제후가 되었고 장기적인 분열 국면을 끝내고 통일했다.

진무공(晉武公)이 죽고 아들 궤제가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헌공(獻公)이다. 그는 부친이 대종(大宗)을 멸하는 투쟁에 참여했기에 방계 종족의 해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 사(士)의 계책을 써서 환숙(무공의 조부)과 장백(무공의 부친)의 종족들을 이간질해 서로 죽이게 함으로써 진나라 내부에서 군위를 위협하는 힘을 제거하고 외부 영토 확장에 전력을 다했다. 노민공(魯閔公) 원년(기원전 661년), 진헌공은 군사를 일으켜 경(耿 지금의 산서 하진현), 곽(霍 지금의 산서 곽현), 위(魏 지금의 산서 예성현)의 삼국을 멸하고 경과 위를 조숙(趙夙)과 필만(畢萬)에게 하사했다. 이것이 나중에 삼가분진(三家分晉)의 싹이 되었다.

이듬해 태자 신생(申生)에게 적인(狄人) 동산고락(東山皋落)씨를 공격하게 했다. 노희공 2년(기원전 658년) 이극(里克), 순식(荀息)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괵(虢)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러 진(秦)나라와 접하고 남서쪽으로 三門峽 일대의 요새를 장악했으며 남쪽으로는 하남 접경지, 동쪽으로는 태행산 기슭에 도달해 북방의 대국이 되었고 중원 제후들의 회맹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진헌공이 종족들을 멸한 후 진나라의 힘은 일시에 공실(公室)로 집중되었고 군사 훈련과 무기 정비를 통해 외부로 패권을 다툴 잠재력을 축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말년에 여색에 빠져 분발하지 못했고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워 내란을 일으켰다. 이어 즉위한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은 평범하고 무능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한동안 동요하고 불안한 상태에 머물렀다.

노희공 24년(기원전 636년), 19년 동안 타국을 유랑하던 공자 중이(重耳)가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즉위하니 이가 역사상 유명한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은 젊을 때부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7세에 일찍이 다섯 현사(賢士)와 사귀었다. 국외로 19년간 망명하며 온갖 고난과 험난한 고비를 겪으며 치국(治國)과 치민(治民)의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마침내 62세의 나이로 진나라에 돌아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귀국 후 그는 어진 이를 등용하고 정무를 밝게 닦으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상벌을 분명히 했다. 일련의 생산 발전 개혁 정책을 실시하여 대대로 공인받는 성현(聖賢)의 군왕이 되었다. 이로써 “정치는 평온하고 백성은 풍족하며 재용(財用)이 부족하지 않게”(《국어・진어(晉語)》) 되어 진나라는 크게 다스려졌고 패업을 창건할 기초를 닦았다.

비록 진문공도 두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으나 그는 잘못을 알고 고칠 줄 알았으며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았다.

하나는 망명 도중 제나라에서 맞이한 아내를 사랑하여 안락함에 빠진 나머지 중임을 잊고 이상을 포기하며 더 이상 분발하지 않았던 점이다. 그의 아내와 수행원들이 계책을 써서 그를 술에 취하게 한 뒤 수레에 태워 제나라를 떠났다. 깨어난 후 그는 계책에 빠진 것을 알고 수행원이자 자신의 외삼촌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수행원이 자신을 제나라에서 떠나게 한 것이 옳은 조치였음을 깨닫자 결국 외삼촌을 죽이지 않고 수행원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다른 하나는 그가 진나라로 돌아온 후 고락을 같이한 공신들에게 상을 줄 때 개자추(介子推)를 잊어버린 일이다. 그러나 진문공은 개자추에게 제때 상을 내리지 못한 잘못을 깨닫고 사람을 보내 곳곳으로 개자추를 찾았다. 개자추가 면상산(綿上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는 온 산을 ‘개추전(介推田)’으로 삼아 개자추에게 봉하고 면상산을 개산(介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나의 잘못을 기록하고 또한 선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민심을 얻었고 그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노희공 23년(기원전 635년), 주 왕실에서 왕자 대(帶)의 난이 발생하자 주양왕(周襄王)은 정나라 사(汜) 땅으로 피신하고 진(秦), 진(晉)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문공과 신하들은 이것이 근왕(勤王)의 대업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에 진(秦)나라 군대를 사양하고 직접 군사를 일으켜 왕자 대를 죽이고 양왕을 호송하여 귀국시켰다. 양왕은 문공의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양번陽樊(지금 제원현濟原縣 남동쪽), 온(溫 지금의 하남 온현), 원(原 지금의 하남 제원현 북쪽), 찬모(櫕矛 지금의 하남 수무현修武縣) 네 읍을 하사했다. “진(晉)나라는 이때부터 남양(오늘날 하남 서북부 일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중원 제후들 사이에서 위망을 높였다.

진문공이 즉위했을 때 송양공이 죽은 지 이미 2년이 지났고 당시 노, 정, 송 등의 나라는 초나라에 굴복해 있었으며 쇠락한 제나라조차 초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진문공이 중원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면 먼저 창끝을 초나라로 돌려야 했다.

노희공 27년(기원전 633년), 초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는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 대부 선진(先軫)이 문공에게 말했다.

“은혜를 베풀고(문공이 망명 중 송나라에 있을 때 두터운 대접을 받았음) 환난을 구제하여 위엄을 세우고 패업을 정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호언(狐偃)도 문공에게 말했다.

“초나라가 막 조나라를 얻고 위(衛)나라와 새로 혼인을 맺었으니, 만약 조와 위를 공격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고 그러면 제와 송은 위기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공은 이 말을 따라 진나라의 기존 2군을 3군으로 확충하고 먼저 초나라의 맹방인 조와 위를 토벌했다. 그리고 침탈한 조와 위의 땅을 송나라에 주었으며 송나라 사람들에게 제와 진(秦)의 구원을 얻어내게 했다. 초나라는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송나라의 포위를 푸는 대신 진나라 군대도 조와 위에서 물러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몰래 조와 위에게 철군을 약속하며 그들이 초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를 따르게 했다. 진나라는 또한 초나라 사신을 구금하여 초나라를 분노케 했다. 그리하여 노희공 28년(기원전 632년), 진(晉)나라는 진(秦), 제, 송과 연합하여 병거 700승을 내어 초나라와 성복(城濮 지금의 산동성 범현)에서 대전을 벌였다.

전쟁 초기 초나라 군대가 우세하자 진나라 군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삼사(三舍)를 후퇴’ 즉 90리 밖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그러나 초나라 장수 성득신(成得臣 자옥)은 개전을 고집했고 초나라 군사들은 멈추고 싶어 하여 사기가 높지 않았다. 전쟁 중 진나라 하군(下軍) 부장 서신(胥臣)은 초나라 군대 중 힘이 약한 우군(右軍)인 진(陳), 채 두 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중군(中軍)과 상군(上軍)은 힘을 모아 초나라의 하군을 타격하여 초나라 군대의 좌우 양익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 전쟁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복 대전’으로 춘추 전기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으며 초나라의 확장에 처음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초나라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제지했다.

진문공은 적족(狄族)을 물리치고 왕실을 보호했으며, 또한 북침하던 초나라를 타격하여 긴장된 국면을 다시 한번 완화했다. 성복 대전 후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자 진문공은 천토(踐土)에서 제, 노, 송, 위(衛) 등 7국 군주와 함께 맹약을 맺었다. “모두 주 왕실을 돕고 서로 해치지 말자! 이 맹약을 어기는 자는 밝은 신께서 벌하실 것이니 그 군대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며 현손(玄孫)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막론하고 멸하게 하소서.” 이번 회맹에는 주양왕도 소집되어 참가했으며 진문공을 ‘후백(侯伯)’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공식적으로 패주의 지위를 확립했다.

본래 진나라는 치우친 곳에 위치하여 타국과의 교류가 적었으나 춘추 이후에야 끊임없이 융적과 동성 국가들을 공격했다. 진나라 사마 여숙후(女叔侯)는 말했다. “우(虞), 괵(虢), 초(焦), 활(滑), 곽(霍), 양(揚), 한(韓), 위(魏)는 모두 희성(姬姓)이나 진나라가 이를 먹고 커졌다. 만약 작은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취했겠는가? 무공과 헌공 이하로 겸병한 나라가 많으니 누가 다스릴 수 있겠는가?”(《좌전 양공 29년》)

진나라의 패업은 문공 이후 끊임없이 이웃 나라들을 파괴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635년 진문공이 왕자 대의 난을 평정한 후 주양왕이 양번, 온, 원, 찬모의 땅을 하사했을 때 그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진문공이 양번을 접수할 때 《국어·주어(周語)중》에 따르면 “양번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자 진후가 이를 포위했다. 창갈(倉葛)이 외치기를 ‘…이제 그 종묘를 멸하고 그 백성을 멸살하려 하니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했다.”

여기서 ‘백성(民人)을 멸살한다’는 것은 그 인민의 ‘국인(國人)’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종묘를 멸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 계급을 파괴하여 피정복민 전부를 ‘야인(野人)’으로 강등시키고 정복지를 자국의 읍(邑)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아마도 진나라의 일관된 방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번 사람들은 하상(夏商)의 후예이지 보통의 ‘예민(裔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예법대로라면 진나라는 본래 그들의 존재를 유지해주어야 했으나 문공은 여전히 “그 백성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 이로 보아 진문공 이후 비록 제후 회맹의 겉모습은 유지했으나 제환공 이래의 소위 패주(霸主) 정신은 이미 상실되었으며, 이전의 인덕으로 천하를 복종시키던 대도(大道)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방식은 이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용인되었다.

기원전 541년 진(晉)과 초가 회맹했다. 노나라가 거(莒)를 공격하자 부인(富人)이 회맹장에서이를 알리자 초나라에서 노나라 사신을 죽이려 했다. 진나라 집정(執政) 조앙(趙鞅)이 말했다. “변경의 읍이 이쪽에 속했다 저쪽에 속했다 하는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소? …훌륭한 왕(令王)이 없어진 후로 제후들이 다투어 나아가며 번갈아 맹주가 되었으니 어찌 하나로 통일될 수 있겠소? 큰 나라를 걱정하고 작은 나라를 버려두는 것이 맹주가 되기에 족한데 또 어디에 쓰겠소? 봉강(封疆)이 깎여나가는 일이 어느 나라엔들 없겠소? 맹주 된 자가 누가 이를 다 다스릴 수 있겠소?”(《좌전 소공 원년》)

여기서는 이미 제환공 패정(覇政) 시대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들도 개의치 않았다. 조앙이 맹주로서 정식으로 회맹의 공존 정신이 끝났음을 선포했으니 그 대신 일어난 것은 당연히 명분 있는 잔혹한 살육과 정벌이었고 전국 시대의 겸병 전쟁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