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심연(心緣)
【정견망】
4. 한번 울어 사람을 놀라게 한 초장왕(楚莊王)
진(晉)나라가 북방에서 패권을 잡았을 때 남방에 위치한 초나라도 북상하여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고 마침내 초장왕 때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
《사기》에 따르면 초나라는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후예라고 한다. 초나라 조상 중 한 명인 중려(重黎)는 제곡(帝嚳)의 화정(火正)을 지냈는데 공이 있어 축융(祝融)이라 명해졌다. 이후 그 동생 오회(吳回)가 뒤를 이었다. 오회의 여섯째 아들 계련(季連)은 미(羋)성으로 초나라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계련의 후예인 웅역(熊繹)이 주성왕(周成王)에 의해 초만에 봉해져 자남(子男)의 작위와 땅을 받았고 도읍을 단양(丹陽)에 정했다.
그는 주 초기의 중요한 이성(異姓) 제후로서 주의 동성 제후인 노, 위(衛), 진(晉), 제나라 등과 함께 주성왕을 섬겼다. 주이왕(周夷王) 때 주 왕실이 쇠락하자 초나라는 발전했고 그 수령 웅거(熊渠)는 자신이 만이이므로 중국의 호칭과 시호를 쓰지 않겠다며 자신의 아들들을 왕이라 칭했다. 춘추 시대에 들어와 각 제후국의 통치자들이 여전히 ‘공(公)’이라 칭할 때 웅통(熊通)은 주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왕이라 칭하니 이가 초무왕(楚武王)이다. 춘추 말년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 이를 경거망동한 행위로 여겨 《춘추좌전》에서 초나라 왕들을 모두 낮추어 ‘자(子 역주: 원래 초나라 제후의 작위는 자작이라 楚子로 불렸다)’로 불렀다.
초장왕은 기원전 613년에 즉위했다. 즉위 후 처음 3년 동안 그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즐기기만” 했으며 또한 “나라 안에 감히 간언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죽이겠다!”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오거(伍舉)가 간언하러 들어갔다. 장왕은 뜻밖에도 왼손에는 정나라 미녀를 안고 오른손에는 월나라 미녀를 안은 채 가희와 무희들 속에 앉아 있었다. 오거가 권계(勸誡)하며 말했다.
“새 한 마리가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무슨 새입니까?”
그러자 장왕이 답했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은 장차 하늘을 찌를 듯이 날기 위함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은 것은 장차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장왕은 여전히 옛 습관을 고치지 않고 음락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소종(蘇從)이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며 “자신의 몸을 죽여 임금을 밝게 하는 것”이 평소의 소원이라고 하니 마침내 장왕은 교화되어 번연히 깨달았다. 결국 “음란한 음악을 그만두고 정사를 돌보며” 일련의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수백 명의 죄인을 죽이고 수백 명의 현인을 발탁했으며 어진 신하 오거와 소종 등을 임용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이후 초나라는 정치를 개혁하고 생산에 힘쓰며 군비를 정돈하여 전투력을 높였다. 이에 초장왕이 연이어 중원에 군사를 냈음에도 국력이 충분하여 백성들은 원망이 없었다.
얼마 후 초나라가 주변의 소국인 용(庸)을 멸하자 서부의 위협이 제거되었고 지배 영역이 오늘날 호북 서북부까지 확장되어 진(秦)나라와 접하게 되었다. 이는 진(秦)과 초의 교류를 편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가 주의를 북쪽으로 돌릴 수 있게 했다.
노선공(魯宣公) 3년(기원전 606년), 초장왕은 대담하게 북진하여 육혼(陸渾 지금의 하남 숭현)의 융(戎)을 정벌하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대까지 진군했다.
주 정왕(周定王)이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위문하게 하자 초장왕은 그 기회를 틈타 왕손만에게 주 왕실의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구정은 왕권의 상징인데 초장왕이 그 무게를 물은 것은 자신의 강성함을 과시하며 천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왕손만은 논리적으로 그를 굴복시키며 말했다.
“덕(德)에 있지 정(鼎)에 있지 않습니다…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비록 정이 작아도 무겁고, 간사하고 어지러우면 비록 정이 커도 가볍습니다. 하늘이 밝은 덕을 축복하여 그치는 바가 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했으나 천명(天命)은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정의 무게는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
장왕은 왕손만의 말이 강경한 것을 듣고 주 왕실을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음을 알고 군대를 돌려 귀국했다.
기원전 605년 초나라 영윤 투월초(鬥越椒)가 초양(椒陽 지금의 하남 남양시)에서 사마 가(賈)를 죽이고 초야(椒野 지금의 하남 신야현)에 군대를 주둔시켜 장왕의 귀국을 저지했다. 장왕이 화해를 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호(皋滸 호북 양번시 서쪽)에서 싸워 투월초를 죽였다. 이때부터 장왕은 중원을 도모하려면 먼저 남방을 평정해야 함을 알았다. 기원전 601년 군서(群舒)들이 모두 초나라를 배반하자 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서(舒), 요(蓼)를 멸하고 경계를 바로잡아 활수(滑水 지금의 안휘 합비 동쪽) 지방까지 이르렀다. 오, 월 두 나라와 결맹하고 나서야 돌아왔다. 초나라가 강회(江淮 장강과 회수) 유역에서 세력을 점차 공고히 한 후 다시 북방을 정벌하러 나섰다.
노선공 11년(기원전 598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쳐서 동(棟) 땅까지 공격했다. 정나라 대신 자량(子良)이 말했다. “진(晉)과 초가 덕을 힘쓰지 않고 군사로 다투니 그중 먼저 오는 자를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좌전 선공 21년》) 진릉(辰陵)의 맹약 후 정나라가 다시 진(晉)나라에 붙자 장왕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포위했다. 3개월 만에 함락시키니 정나라가 초나라에 항복했다. 진(晉)나라가 소식을 듣고 대군을 보내 구원하자 진(晉)과 초의 양군이 필(邲, 오늘날 하남 형양 북쪽)에서 대전을 벌였다. 이때 진나라는 정령이 시행되지 않고 장수들이 화합하지 못하여 결국 패하고 도망쳐 돌아갔다.
진(晉)과 초의 패권 다툼에서 송나라는 원래 진나라를 가장 밀접하게 따랐는데 이는 제, 노와의 교통과 중원 패권 차지에 불리했다. 그리하여 초장왕은 구실을 찾아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노선공 14년(기원전 595년), 초나라는 다시 송나라를 9개월 동안 포위했다. 송나라가 진(晉)나라에 급보를 보냈으나 진나라는 초나라를 두려워하여 군사를 내지 못했다. 이때 노, 송, 정, 진(陳)이 모두 초나라에 귀복했다. 노성공 2년(기원전 589년), 초장왕은 이미 죽었으나 초나라는 촉(蜀) 땅에서 12개 제후를 소집하여 회맹했고 진(秦), 제와 같은 대국들도 모두 참석했으니 초나라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초나라는 춘추 시대에 선후로 12개국을 겸병했다.
진초(晉楚) 쟁패 기간에 제와 진(秦) 두 나라는 동과 서에 웅거하고 있었다. 춘추 중엽 이후 초나라가 진(秦)과 연합하고 진(晉)나라가 제나라와 연합했으나 여전히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패권 전쟁은 각국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켰고 이에 전쟁을 멈추는 ‘미병(弭兵)’이 나타났다.
기원전 579년 송나라는 진(晉)과 초를 조율하여 맹약을 맺게 했다. 서로 군대를 가하지 않고 신사(信使)가 왕래하며 서로 어려움을 구제하고 명령을 듣지 않는 제3국을 공동 토벌하기로 했다. ‘미병’은 두 패주 간의 결탁과 쟁탈을 반영하는 동시에 작은 나라들이 대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염원을 반영했다. 기원전 575년 진(晉)과 초가 언릉(鄢陵 하남 허창시 언릉현)에서 대전하여 초나라가 대패했고, 기원전 557년 담판(湛阪 하남 평정산 인근) 대전에서도 초나라가 또 패했다.
이 기간 진(晉)-진(秦), 진(晉)-제 사이에도 대전이 있었으나 진(晉)이 승리했다. 기원전 546년 송나라가 다시 진(晉)과 초를 중재해 ‘미병’을 성사시켰고 다른 10여 개국도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중소 국가들이 이후 진(晉)과 초 두 나라에 똑같이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진(晉)과 초 두 나라가 패권을 양분한 것이다.
5. 덕으로 사람을 두터이 대한 진목공(秦穆公)
진(秦)나라는 본래 영(嬴)성으로 원래 동방 부족이었으나 주 초기에 서방으로 옮겨가 마침내 오늘날의 감숙 천수 부근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 분봉받은 군주는 비자(非子)이며 처한 곳은 융적 사이였다. 주 여왕(周厲王) 때 견융(犬戎)의 세력이 강대해져 점차 동쪽으로 확장하자 주선왕은 비자의 손자 진중(秦仲)을 대부로 삼아 견융을 토벌하게 했으나 결국 전사했다. 진중의 손자 양공(襄公)이 평왕의 동천을 호위하자 평왕은 기산(岐山) 서쪽의 땅을 진나라에 하사했다. 이후 진나라는 끊임없이 융적과 싸우며 영토를 확장했다. 양공의 아들 문공(文公)은 견융을 격파하고 관중(關中) 지역을 점유했으며 위수가 만나는 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했다.
헌공(獻公) 때 평양으로 천도했고 덕공(德公) 때 옹(雍)으로 천도하여 문공의 천도 계획을 실현했다. 옹은 중요한 교통 요지여서 진나라 발전에 매우 유리했다. 노장공 6년(기원전 688년), 진 무공(武公)은 서쪽으로 방, 계융을 멸하고 현제(縣制)를 수립했으며 이듬해 소괵(小虢) 등을 멸하여 서주 왕조 경계 내의 800리 진천(秦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과 제철 기술의 발달은 진나라의 가일층 발전을 위한 두터운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덕공이 옹으로 천도한 이후 선공(宣公 재위 기원전 675~664년)과 성공(成公 재위 기원전 663~660년) 시대인 10여 년 동안 진나라의 융적 토벌은 큰 진전이 없었다. 진목공(秦穆公) 시대에 이르러 그는 정치를 부지런히 닦고 적극적으로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진나라는 점차 강대해졌다.
목공 원년(기원전 659년), 몸소 군대를 이끌고 모진(茅津)을 정벌하여 승리했다. 목공 4년(기원전 656년) 진(晉)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녀는 진 태자 신생의 누이였다. 그해 제환공은 초나라를 공격하여 소릉까지 이르렀다.
① 사람을 알아보고 잘 활용한 목공
목공 5년(기원전 655년) 진헌공(晉獻公)이 우(虞)나라와 괵나라를 멸하고 우나라 임금과 그의 대부 백리해(百里奚)를 사로잡았다. 이는 사전에 진헌공이 우나라 임금에게 백옥과 좋은 말을 보내 괵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우나라 임금이 승낙했기 때문이었다. 백리해를 사로잡은 후 그를 진목공 부인이 시집갈 때 수행하는 노예로 삼아 진(秦)나라로 보냈다. 백리해는 진나라를 탈출해 완(宛) 땅으로 도망쳤다가 초나라 국경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목공은 백리해가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거금으로 매수하고 싶었으나 초나라가 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사람을 보내 초왕에게 말했다.
“우리 집의 수행 노예 백리해가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검은 숫양 가죽 다섯 장으로 그를 사게 해주시오.”
초나라가 승낙하여 백리해를 넘겨주었다. 이때 백리해는 이미 70세가 넘었다.
목공은 그의 결박을 풀고 국가 대사를 논했다.
백리해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저에게 물으십니까?”
목공이 말했다.
“우나라 임금이 그대를 쓰지 않았기에 나라가 망한 것이지 그대의 죄가 아니오.” 목공이 간곡히 물었다. 사흘간 대화를 나눈 목공은 매우 기뻐하며 국가 정사를 그에게 맡기고 ‘오고(五羖, 다섯 장의 숫양 가죽) 대부’라 불렀다. 백리해가 겸양하며 말했다. “저는 제 친구 건숙(蹇叔)만 못합니다. 건숙은 재능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유학하며 벼슬을 구하다 제나라에서 곤궁하여 구걸할 때 건숙이 저를 거두어주었습니다. 당시 제가 제나라 임금 무지(無知)를 섬기려 하자 건숙이 말렸기에 제나라 내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고 주나라로 갔습니다. 주 왕자 퇴(穨)가 소를 좋아하여 제가 소를 기르는 솜씨로 자리를 구하려 했고 퇴가 저를 쓰려 하자 건숙이 만류하며 떠나게 했기에 퇴와 함께 죽지 않았습니다. 우나라 임금을 섬길 때도 건숙이 말렸습니다. 제가 우나라 임금이 중용하지 않을 것을 알았으나 마음속으로 작록을 탐해 잠시 머물렀던 것입니다. 제가 두 번 건숙의 말을 들어 험난한 곳을 피했으나 한 번 듣지 않아 이번에 포로가 된 것이니 건숙이 재능 있음을 압니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보내 두터운 예물을 가지고 건숙을 영입하여 상대부로 삼았다.
가을에 목공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하곡(河曲)에서 교전했다. 진(晉)나라 여희(驪姬)가 내란을 일으켜 태자 신생이 해를 입어 신성에서 죽고 공자 중이와 이오(夷吾)가 도망쳤다.
나중에 진헌공이 죽었다. 여희가 자기 아들 해제(奚齊)를 세웠으나 신하 이극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여희 동생의 아들인 탁자(卓子)를 세우자 이극이 또 탁자와 순식을 죽였다. 이오는 사람을 보내 진(秦)나라에 도움을 청해 귀국하려 했다. 목공은 승낙하고 백리해에게 군대를 주어 이오를 호송하게 했다.
이오가 진(秦)나라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진정 왕위에 오르면 진나라에 하서(河西) 8개 성을 떼어주겠습니다.”
그러나 본국에 돌아가 왕위에 오르자 비정(丕鄭)을 보내 사과하며 약속을 어기고 8개 성을 주지 않았으며 이극을 죽였다. 비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진목공과 상의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이오를 원하지 않고 실은 중이를 세우려 합니다. 지금 이오가 약속을 어기고 이극을 죽인 것은 모두 여생(呂甥), 극예(郤芮)의 계책입니다. 바라건대 군주께서 무거운 이익으로 여생과 극예를 진나라로 불러내십시오. 그들이 오면 중이를 보내는 것이 쉬워질 것입니다.”
목공이 이를 승낙하고 사람을 비정과 함께 보내 여생과 극예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비정의 속임수를 의심해 이오에게 보고하고 비정을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丕豹)가 진(秦)나라로 도망쳐 목공에게 권했다.
“진(晉)나라 임금이 도가 없어 백성이 따르지 않으니 토벌할 수 있습니다.”
목공이 말했다.
“백성이 적절치 않다 여겨 임금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어찌 대신을 죽일 수 있겠소? 대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진나라 위아래가 아직은 조화롭다는 뜻이오.”
목공은 겉으로는 비표의 계책을 듣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그를 중용했다.
⓶ 진목공의 어진 덕
진목공은 사람됨이 매우 현덕(賢德)하여 백성을 몹시 아꼈다. 목공 12년 진(晉)나라에 가뭄이 들어 사람을 보내 곡식을 청했다.
신하 비표는 주지 말라며 기근을 틈타 공격하자고 권했다.
목공이 공손지(公孫支)에게 물으니 그는 “어느 나라인들 흉년이 없겠습니까,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백리해에게 물으니 “진(晉)나라 임금 이오는 그대에게 죄를 지었으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목공은 식량을 보내 진(晉)나라를 구제했다. 식량을 운반하는 긴 대열이 진(秦)나라 도성에서 진(晉)나라 도성까지 이어졌다.
진목공 14년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진(晉)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진혜공(晉惠公)은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해가 넘어가자 오히려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켜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진목공 15년 9월 임술일, 진목공과 진혜공(晉惠公)이 모두 직접 참전하여 한(韓) 땅에서 싸웠. 목공이 진(晉)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다. 이때 기산 기슭에 살던 300여 명의 향민이 말을 타고 달려와 포위를 풀었다. 목공을 탈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晉)나라 임금 이오를 사로잡았다.
알고 보니 몇 년 전 진목공의 좋은 말 몇 필이 도망쳐 기산 아래 향민 300여 명에게 잡혀 먹혔던 일이 있었다. 관리가 이들을 잡아 엄벌하려 하자 목공은 “군자가 어찌 짐승 몇 마리 때문에 사람을 처벌하겠는가! 듣기로 좋은 말고기를 먹은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상한다 하였네”라며 오히려 술을 하사해 실컷 마시게 하고 사면해주었다. 그리하여 기산 아래서 말고기를 먹었던 300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목공을 구해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목공은 진(晉)나라 임금을 포로로 잡아온 후 전국에 명을 내렸다.
“사람마다 재계하고 홀로 잠자라. 내가 진나라 임금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겠다.”
주 천자가 소식을 듣고 “진나라 임금은 나의 동성이오”라며 청을 넣었다.
이오의 누이인 진목공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고 맨발로 “제가 제 형제를 구하지 못해 군상(君上)께서 그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게 했으니 참으로 군상께 욕이 됩니다”라고 했다.
목공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 임금을 사로잡아 큰일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천자가 청을 넣으시고 부인 또한 이 일로 근심하는구려.”
그리하여 진나라 임금과 맹약을 맺고 귀국을 허락했으며, 일등 거처를 주고 소, 양, 돼지를 각 일곱 마리씩 보내 제후의 예로 대우했다. 11월 진나라 임금 이오를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이오는 하서의 땅을 바치며 태자 어(圉)를 인질로 보냈다. 진(秦)나라는 종실의 딸을 어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진(秦)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황하에 이르렀다.
진목공 18년(기원전 642년) 제환공이 죽었다.
진목공 20년(기원전 640년) 진나라가 양(梁), 예(芮) 두 나라를 멸했다.
진목공 22년(기원전 638년) 진(晉) 태자 어가 진(秦)나라를 탈출해 귀국했다.
진목공 23년(기원전 637년) 진혜공이 죽고 아들 어가 즉위하니 진회공(晉懷公)이다. 진목공은 어의 탈출에 노하여 초나라에서 공자 중이를 맞이해 귀국시켰다. 2월 중이가 즉위하니 이가 진문공이다. 문공은 사람을 보내 어를 죽였다.
그해 가을 주양왕의 동생 대(帶)가 적인의 군대를 빌려 양왕을 공격하자 양왕이 정나라로 도망쳤다.
진목공 25년(기원전 635년) 주 양왕이 진(晉), 진(秦)에 화난을 알렸다. 진목공은 군대를 보내 진문공을 도와 양왕을 호송하고 왕자 대를 죽였다.
진목공 28년(기원전 632년) 진문공이 성복에서 초나라를 격파했다.
진목공 30년(기원전 630년) 목공이 진문공을 도와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나라가 사람을 보내 목공에게 말했다.
“정나라를 멸하면 결과적으로 진(晉)나라 실력을 증강해주니 이는 진(晉)나라에 유리할 뿐 진(秦)나라에는 이득이 없습니다. 진(晉)나라가 강대해지면 진(秦)나라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이에 목공은 군대를 철수해 귀국했다. 진(晉)나라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진목공 32년(기원전 628년) 겨울 진문공이 세상을 떠났다.
⓷ 잘못을 알면 고칠 줄 알았던 진목공
정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진(秦)나라에 나라를 팔아넘기려 하면서 기습 공격을 요청했다. 목공이 건숙, 백리해에게 물으니 두 사람은 “정나라를 공격하려면 여러 나라 경계를 지나야 하고 천리 밖을 기습하여 남을 치는 것은 이득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 정나라를 팔려 한다면 진나라 사람 중에도 진나라 실정을 정나라에 알릴 이가 있을 것이니 안 됩니다”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목공은 출병을 결정하고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과 백을병(白乙丙)에게 군대를 맡겼다. 군대가 출발하는 날 백리해와 건숙은 군대를 향해 대성통곡하며 아들들에게 말했다.
“너희 군대가 패한다면 분명 효산(殽山)의 험요한 곳일 것이다.” 33년
목공 33년(기원전 627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동진하여 진(晉)나라를 지나 주나라 도성 북문을 지났다. 주나라 왕손만이 진나라 군대의 활동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 군대는 예의를 모르니 패배를 기다릴 것밖에 없다!”
군대가 활읍(滑邑)에 이르렀을 때 정나라 상인 현고(弦高)가 소 12마리를 몰고 주나라 도성에 팔러 가다 진나라 군대를 만났다. 그가 소를 바치며 말했다.
“귀국이 정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우리 정나라 임금이 방비를 단단히 했으며 저를 보내 소 12마리로 군사들을 위로하게 했습니다.”
진나라 세 장군이 상의했다.
“기습하려던 정나라가 이미 알고 있으니 기습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아무 명분도 없이 활읍을 멸했다. 활읍은 진(晉)나라의 변방 성읍이었다.
이때 진문공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다. 태자인 진양공(晉襄公)이 노하여 말했다.
“진(秦)나라가 내가 아버지를 잃은 것을 업신여겨 상중에 우리 활읍을 깨뜨렸다.”
이에 상복(원래 흰색이었음)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행군과 작전을 편리하게 하고 효산에서 진나라 군대를 가로막았다. 진(晉)나라 군대가 공격하여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니 도망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진나라는 세 장군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마침 진문공의 부인이 진목공의 딸(회영)이었는데 그녀가 세 장군을 위해 이렇게 청했다.
“진(秦) 목공이 이 세 사람을 뼛속까지 미워하니 그들을 돌려보내 우리 아버지가 직접 시원하게 그들을 삶아 죽이게 하세요.”
진양공이 승낙하여 세 장군을 풀어주었다. 세 장군이 귀국하자 목공은 흰 상복을 입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울면서 말했다.
“과인이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그대들을 욕되게 했으니 그대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전력을 다해 이 수치를 씻고 게을리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세 사람의 직급과 녹봉을 회복시키고 더욱 두터이 대우했다.
목공 34년(기원전 626년)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부친인 초성왕(楚成王)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진목공이 이때 다시 맹명시 등에게 군대를 주어 진(晉)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팽아(彭衙) 교전에서 불리해져 철군했다.
목공 36년(기원전 624년) 목공은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하며 진(晉)나라 공격을 명했다. 황하를 건너자마자 배를 불태워 결사항전의 뜻을 보였고 결국 진(晉)나라를 대파하여 왕관(王官)과 호(鄗) 땅을 빼앗아 효산 전투를 설욕했다. 진(晉)나라 군대는 모두 성을 지키며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에 목공은 모진(茅津)에서 황하를 건너 효산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발인을 하며 사흘간 통곡했다.
목공이 진(秦)나라 군대에 맹세하기를 “장병들이여! 내 말을 듣고 소란 피우지 마라. 내가 맹세하노니, 옛사람은 일을 할 때 노인의 말을 겸허히 들었기에 과오가 없었다”라고 했다. 목공은 건숙과 백리해의 계책을 채택하지 않아 빚어진 과오를 깊이 반성하며 후대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려고 이 맹세를 남겼다. 군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아! 진목공은 사람 대우가 참으로 지극하니 마침내 맹명시 등이 승리라는 경사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목공 37년(기원전 623년) 진나라는 융왕(戎王)을 공격해 승리하고 12개 속국을 늘렸으며 천리 강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서융(西戎) 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주 천자는 소공(召公) 과(過)를 보내 징, 북 등 군중에서 지휘하는데 필요한 기물을 하사하며 축하했다.
목공 39년(기원전 621년) 진목공이 세상을 떠나 옹(雍)에 장사 지냈다. 순장된 자가 177명에 달했는데 진나라 어진 신하 자여씨(子輿氏) 엄식(奄息), 중행(仲行), 침호(鍼虎) 세 사람도 그 속에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하며 《황조(黃鳥)》라는 시를 지었다. 감
군자가 말했다. “진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속국을 늘려 동쪽으로 강한 진(晉)나라를 굴복시키고 서쪽으로 서융의 패자가 되었으나, 그가 제후의 맹주가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죽을 때 백성을 돌보지 않고 어진 신하들을 순장시켰기 때문이다. 고대 덕 있는 제왕은 서거할 때 좋은 도덕과 법도를 남기거늘 그는 그러지 못했고 오히려 백성이 동정하는 어진 사람을 뺏어갔으니 진나라가 더 이상 동진하지 못할 것임을 단정할 수 있다.”
목공 사후 그 아들이 왕위를 이으니 이가 강공(康公)이다.
6.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월왕 구천(勾踐)
진(晉)과 초가 중원에서 패권을 다툴 때 장강 하류에서는 오, 월 두 나라가 굴기했다. 진(晉)은 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오나라와 연합했다. 오와 초 사이에는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가 대거 초나라를 정벌해 승승장구하며 초나라 도성까지 쳐들어갔다. 이때부터 초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졌다. 진(晉)나라가 오나라와 손잡고 초나라를 제압하자 초나라는 월나라와 손잡고 오나라를 제압하니 오와 월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월왕 구천의 조상은 하우(夏禹)의 후예이며 하조 소강제(少康帝)의 서자이다. 소강제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져 하우의 제사를 공경하게 계승했다. 그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짧게 깎으며 풀숲을 제거하고 성읍을 쌓았다. 20여 대가 지나 윤상(允常)에 이르렀다. 윤상이 재위할 때 오왕 합려(闔廬)와 원한이 생겨 서로 공격했다. 윤상이 죽자 아들 구천(句踐)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월왕(越王)이다.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 오왕 합려가 윤상의 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토벌했다.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오왕 합려에게 부상을 입혔다. 합려는 유언으로 아들 부차(夫差)에게 “절대 월나라를 잊지 마라”라고 훈계했다.
월왕 구천 3년(기원전 496년), 구천은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를 꾀한다는 말을 듣고 선제공격을 하려 했다. 범려(範蠡)가 간언했다.
“안 됩니다. 듣기로 병기는 흉기이며 전쟁은 덕을 어기는(背德) 일이고 먼저 치는 것은 일 중에 가장 하등한 것입니다. 음모로 덕을 어기는 일을 하고 흉기 쓰기를 좋아하며 하등한 일에 몸소 관여하면 반드시 천제(天帝)의 반대를 사게 되니 절대 불리합니다.”
하지만 월왕은 “이미 결심했소”라며 군사를 내어 오나라로 진군했다. 오왕이 이 소식을 듣고 전국 정예부대를 동원해 부초(夫椒)에서 월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월왕은 패잔병 5,000명을 겨우 모아 회계산으로 후퇴했다. 오왕은 승세를 몰아 회계산을 포위했다.
월왕이 범려에게 말했다.
“그대의 권고를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범려가 답했다.
“공업(功業)을 온전히 보존하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도가 가득 차되 넘치지 않음을 본받고, 뒤집힌 것을 평정하는 자는 사람의 도(人道)가 겸손을 숭상한다는 것을 알며, 사리를 절제하는 자는 지형에 따라 알맞게 처신하는 땅의 도를 따릅니다. 지금 오왕에게 겸비한 예를 갖추고 두터운 예물을 보내십시오. 만약 응하지 않으면 몸소 가서 섬기며 자신을 담보로 맡기십시오.”
구천이 이 말에 동의하고 대부 문종(種)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문종이 오왕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기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망국의 신민(臣民) 구천이 대왕의 관리에게 전합니다. 구천은 대왕의 노복이 되고 그의 아내는 대왕의 첩이 되기를 청합니다.”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말했다.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주신 것이니 응하지 마십시오.”
문종이 돌아와 보고하자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뒤 전장에서 일전을 벌이려 했다. 문종이 만류하며 말했다.
“오나라 태재 비(嚭)는 매우 탐욕스러우니 재물로 유혹해 암중으로 통로를 열 수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구천은 비에게 미녀와 보석을 바쳤다. 비가 흔연히 받아들이고 대부 문종을 오왕에게 소개했다.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구천을 사면해주시면 전해 내려오는 보물을 다 바치겠습니다. 만약 사면되지 않으면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태운 뒤 5,000 군사와 결사 항전할 것이니 대왕께서도 대가를 치르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재 비가 틈을 타서 오왕을 설득했다.
“월왕이 이미 신하가 되었으니 사면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오왕이 다시 응하려 하자 오자서가 다시 간언했다.
“오늘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명한 군주이며 대부 문종과 범려는 어진 신하이니 그들이 돌아가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오왕은 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월왕을 사면하고 철군했다.
구천은 귀국 후 깊이 생각하고 고심하며 경영했다. 자리에 쓸개를 매달아 두고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맛보았다. 음식 앞에서도 쓸개를 맛보며 말했다.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 그는 몸소 농사짓고 부인은 직접 베를 짰으며 밥상에 고기를 올리지 않았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현인에게 예의를 갖추었으며 굴욕을 참았다. 빈객을 지성으로 대접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백성과 함께 노동했다.
월왕이 오나라에 인질로 들어가면서 범려에게 국내 정사를 맡기려 하자 범려가 대답했다.
“전쟁은 문종이 저만 못하나,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친하게 귀부하는 것은 제가 문종만 못합니다.”
이에 정사는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구천이 귀국한 지 7년 동안 항상 군사와 백성을 어루만지며 복수를 꿈꿨다. 대부 봉동(逢同)이 간언했다. “나라가 막 일어나 이제야 풍족해졌으니 우리가 군비를 정돈하면 오나라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 사나운 새가 목표를 칠 때는 반드시 숨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 군대는 제, 진(晉) 국경에 압박을 가하고 초, 월과는 원한이 깊으며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나 실제로는 주 왕실을 해치고 있습니다. 오나라는 도덕이 부족하면서 공로가 많으니 반드시 교만해질 것입니다. 진정 월나라를 위한다면 제나라와 사귀고 초나라와 친하며 진(晉)나라에 귀부하고 오나라를 두텁게 대접하십시오. 오나라가 뜻이 높아 전쟁을 가볍게 여기면 우리는 세 나라의 세력을 연합해 오나라를 치게 하고 그 틈을 타 오나라를 공략할 수 있습니다.” 구천이 좋다고 했다.
2년 후 오왕이 패자가 되기 위해 북방의 제나라를 치려 했다.
오자서가 간언했다.
“안 됩니다. 구천은 좋은 반찬을 두 가지 먹지 않고 백성과 고락을 같이합니다. 이 자가 죽지 않으면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입니다. 오나라에 월나라는 심장과 복부의 병이며 제나라는 피부병일 뿐입니다. 제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월나라부터 치십시오.”
하지만 오왕은 듣지 않고 제나라를 공격해 애릉(艾陵)에서 대파하고 제나라 고(高)씨와 국(國)씨를 포로로 잡아왔다. 오왕이 승리에 취해 오자서를 질책하자 오자서는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오왕이 노하자 자서가 자결하려 했으나 오왕이 말렸다.
월나라 대부 문종이 구천에게 말했다.
“오왕의 정치가 너무 교만하니 곡식을 빌려달라고 하여 오왕의 태도를 떠보겠습니다.”
문종이 곡식을 청하자 오왕은 빌려주려 했다. 오자서가 반대했으나 결국 빌려주었다. 월왕은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오자서가 말했다.
“왕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시니 3년 안에 오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다!” 태재 비가 이 말을 듣고 자서와 여러 차례 다투며 중상했다. “그는 겉은 충후하나 속은 잔인해 제 아비와 형도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돌보겠습니까? 지난번 제나라를 칠 때 자서가 강력히 반대했는데 왕께서 공을 세우자 오히려 원망하고 있습니다. 방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에 비는 봉동과 결탁해 왕 앞에서 끊임없이 오자서를 비방했다. 오왕은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그가 아들을 제나라 포(鮑)씨에게 맡겼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오원(伍員 오자서의 본명)이 과연 나를 속였구나!”
자서가 귀국하자 오왕은 ‘촉루’ 검을 내려 자결하라고 했다.
오자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 너의 부친을 도와 패자로 만들었고 너를 왕으로 세웠다. 네가 처음 오나라를 반으로 나누자 했을 때 내가 거절했는데, 오늘 참언 때문에 나를 죽이는구나. 너 혼자서는 절대 나라를 세울 수 없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말했다.
“반드시 내 눈을 뽑아 오나라 도성 동문에 걸어두어 내가 월나라 군대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게 하라.” 이후 오왕은 비를 중용해 국정을 맡겼다.
3년 후 월왕 구천이 범려를 불러 물었다.
“오왕이 자서를 죽였고 아첨꾼이 많으니 이제 오나라를 칠 수 있겠소?”
범려가 답했다.
“안 됩니다.”
듬해 봄 오왕이 북쪽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회맹하느라 정예부대를 다 이끌고 나갔으며 도성에는 노약자와 태자만 남았다. 구천이 다시 묻자 범려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수전에 익숙한 군사 2,000명, 훈련된 군사 4만 명, 지위 높은 근위군 6,000명 등을 보내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대패했고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 사신이 황지의 오왕에게 급보를 보냈으나 오왕은 패전 소문이 퍼질까 봐 비밀을 지켰다. 오왕은 회맹을 마친 후 두터운 예물로 월나라에 화친을 청했다. 월왕도 당장 오나라를 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강화했다.
4년 후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다. 월나라는 오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도성을 3년간 포위했다. 오나라 군대가 패하자 월나라는 오왕을 고소산(姑蘇山)에 몰아넣었다. 오왕이 화친을 청했으나 범려가 구천에게 진군을 권했다.
오왕은 자결하며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내가 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 월왕은 오왕을 장사 지내고 태재 비를 죽였다.
구천은 오나라를 평정한 후 북상하여 황하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 진(晉) 제후와 회합하고 주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주 원왕(周元王)이 사람을 보내 제사 고기를 하사하고 그를 ‘백(伯 패자란 의미)’이라 칭했다. 구천은 서주를 떠나 회하를 건너 남하하며 회하 유역을 초나라에 주었고 오나라가 뺏었던 송나라 땅을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사수(泗洙) 동쪽의 100리 땅을 노나라에 주었다. 당시 월나라 군대는 강회(江淮) 동쪽에서 거칠 것이 없었고 제후들이 와서 축하하니 월왕은 새로운 패주가 되었다.
그러나 구천은 “고난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군주였다. 범려는 그가 패주가 된 후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가 현덕하고 명성이 높아 사람들이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렀다.
총평: 춘추 시기 주나라 왕실은 점차 몰락해갔고 각국은 겉으로는 왕실을 존숭했으나 실제로는 겸병과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오히려 각 지역의 사회 경제 발전을 촉진했고 다른 종족 간의 접촉과 융합을 가속화했다. 이 시기의 대동란과 대개편을 거치며 수백 개의 소국들이 점차 7개의 대국과 그 주변의 10여 개 소국으로 되었고, 전쟁이 더욱 빈번한 전국(戰國) 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강자 존중, 약육강식의 법칙이 확립되기 시작했으며 이 법칙은 후세 중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