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칠웅 중 연나라 흥망사
심연(心緣)
【정견망】
연나라의 흥망사
연나라는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굴기한 칠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에 속했다. 연나라는 만맥(蠻貉) 등 외부 종족과 인접해 있었고, 강토는 제나라, 진(晉)나라 등과 엇갈려 있어 강대국 사이에서 힘들게 생존하며 여러 차례 멸망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연나라는 800~90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주 왕실의 희성(姬姓) 봉국 중에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사마천은 이것을 연나라 조상 소공(召公)의 공업(功業)이라 보았다. 소공 석(奭)은 인덕(仁德)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기에 그의 후손들이 그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연나라의 조상과 초기 발전
소공 석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희성이다. 주무왕이 주왕을 멸한 후 동생인 소공 석을 북연(北燕)에 봉했다. 주성왕 때 소공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섬서 서쪽 지역은 소공이 주관하고, 섬서 동쪽 지역은 주공이 주관했다.
소공이 서부 일대를 다스릴 때 많은 민중의 옹호를 받았다. 소공이 마을과 성읍을 순찰하다가 근처에 있는 한 그루의 당리(棠梨)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고 정무를 처리했다. 후작과 백작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절한 안식처를 얻었으며 직업이 없는 이가 없었다. 소공이 세상을 떠난 후 백성들이 그의 정치적인 성과를 그리워하고 소공이 앞에 앉았던 당리나무를 생각하며 차마 베어내지 못했다. 《시경(詩經)·감당》이 바로 이를 위해 지어진 것이다.
소공 이후 9대를 전해 내려와 혜후(惠侯)가 즉위했다. 연혜후 재위기는 마침 주 여왕이 체(彘)로 도망치고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공동으로 국정을 집행하던 공화 시기였다.
혜후가 죽고 아들 이후(釐侯)가 즉위했다. 이해는 주선왕이 막 즉위한 해였다. 이후 36년(기원전 791년) 이후가 죽고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경후 20년(기원전 771년) 주유왕이 음란하여 견융에게 살해당했다. 진(秦)나라가 이때부터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24년(기원전 767년)만에 경후가 죽고 아들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애후 2년(기원전 765년)에 죽고 아들 정후(鄭侯)가 즉위했다. 정후 36년(기원전 729년)에 죽고 아들 무후(繆侯)가 즉위했다.
또 13대를 거쳐 평공(平公)이 즉위했다(기원전 524년). 이때 진(晉)나라의 공실이 약해지고 범, 중행, 지, 조, 한, 위 등 6개 가문의 세력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평공 18년(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초나라를 격파하고 도성인 영도(郢都)에 입성했다.
평공 19년(기원전 505년) 평공이 죽고 간공(簡公)이 즉위했다. 간공이 12년(기원전 493년)만에 죽고 헌공(獻公)이 즉위했다. 진(晉)나라의 조앙이 범씨와 중행씨를 조가(朝歌)에서 포위했다.
헌공 12년(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군주인 제간공을 시해했다. 헌공 28년(기원전 465년) 헌공이 죽고 효공(孝公)이 즉위했다. 효공 12년(기원전 453년) 한, 위, 조 세 가문이 지백을 멸하고 그 봉토를 나누어 가졌으며, 이 세 가문이 점차 강대해졌다. 다시 3대를 전해 기원전 403년 이공(釐公)이 즉위했다. 이해에 한, 조, 위 삼국이 제후로 봉해졌다.
이공 30년(기원전 373년) 연나라는 임영(林營)에서 제나라를 정벌하여 패배시켰다. 이공이 죽고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11년(기원전 362년) 후 환공이 죽고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이해에 진(秦)헌공이 죽었으나 진(秦)나라는 더욱 강대해졌다. 문공 28년(기원전 334년) 소진이 처음 연나라에 와서 문공을 알현하고 유세했다. 문공은 그에게 수레와 말, 황금과 비단을 주어 조나라로 가게 했으며 조숙후(趙肅侯)가 그를 중용했다. 소진은 그리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6국 연맹을 결성했고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29년(기원전 333년)만에 문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역왕(易王)이다. 역왕이 막 즉위할 무렵 제선왕(齊宣王)이 문공의 장례를 치르는 틈을 타서 연나라를 공격해 10개 성을 빼앗았다. 소진이 제나라로 가서 유세하여 제왕을 설득해 10개 성을 다시 연나라에 돌려주었다. 역왕 10년(기원전 323년) 연나라 군주가 비로소 정식으로 왕을 자칭했다. 역왕이 12년(기원전 321년)만에 죽고 아들인 연왕 쾌(噲)가 즉위했다.
* 명예를 쫓다 나라를 쇠락케 한 연왕 쾌
연왕 쾌가 즉위한 후 제나라 사람이 소진을 살해했다. 소진이 연나라에 있을 때 국상(國相)인 자지(子之)와 사돈을 맺었고, 소진의 동생 소대(蘇代)도 자지와 밀접하게 교류했다. 소진이 죽은 후 제선왕은 다시 소대를 임용했다.
연왕 쾌 3년(기원전 318년) 연나라가 초나라 및 한, 조, 위 삼국과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당시 자지가 연나라 국상이었는데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여 국가 대사를 주관했다.
소대가 제나라 사신으로 연나라에 왔을 때 연왕이 물었다.
“제나라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소대가 대답했다.
“그는 결코 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연왕이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소대는 “신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소대는 이런 말로 연왕을 자극하여 자지를 존중하게 하려 했다. 이에 연왕은 자지를 매우 신뢰했다. 자지는 이로 인해 소대에게 황금 백 일(鎰)을 주어 마음대로 사용하게 했다.
녹모수(鹿毛壽)도 연왕에게 말했다.
“왕께서는 나라를 국상 자지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요임금을 성현(聖賢)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는 그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허유는 받지 않았으므로 요임금은 천하를 양보했다는 명예를 얻으면서도 실제로는 천하를 잃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양보하신다면 자지는 분명 감히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왕께서 요임금과 똑같이 고상한 품격이 있음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연왕은 이에 나라를 자지에게 위탁했고 자지의 지위는 더욱 존귀해졌다. 어떤 사람이 연왕에게 말했다.
“대우(大禹)는 백익(伯益)을 천거했으나 계(啓)의 신하를 관리로 임용했습니다. 대우가 늙었을 때 계가 천하를 다스릴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군주 자리를 백익에게 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는 그의 무리와 함께 백익을 공격하여 군주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천하 사람들은 대우가 명의상으로는 천하를 백익에게 전했으나 실제로는 계가 스스로 빼앗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자지에게 위탁한다고 하시지만 관리는 태자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으니, 이는 명의상으로는 나라를 자지에게 위탁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여전히 태자가 집권하는 것입니다.”
연왕은 이에 봉록 300석 이상의 관리 인신(印信)을 거두어 자지에게 주었다. 자지는 남쪽을 향해 군주 자리에 앉아 국왕의 권력을 행사했다. 연왕 쾌는 늙어 더 이상 정무를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신하가 되었으며 국가의 모든 정무는 자지가 결정했다.
자지가 집권한 지 3년 만에 연나라는 대란이 일어났고 백관은 모두 두려워했다.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平)이 모의하여 자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제나라 장수들이 제민왕에게 말했다.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보내 연나라로 달려가면 반드시 연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민왕이 이에 사람을 보내 태자 평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 태자께서 정의를 주관하여 사(私)를 폐하고 공(公)을 세우며, 군신의 윤리를 정돈하고 부자의 지위를 명확히 하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작아서 당신의 보좌가 되기에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태자의 심부름을 듣고자 합니다.”
태자 평은 이에 동당(同黨)과 무리를 모았고 장군 시피가 왕궁을 포위하고 자지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군 시피와 백관이 다시 돌아서서 태자 평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장군 시피가 전사하여 시체가 조리돌림당했다.
이로 인해 국내에 몇 달 동안 화란이 조성되었다. 당시 난리 통에 수만 명이 죽었고 민중은 매우 두려워했으며 백관은 마음이 떠났다. 맹자가 제왕에게 말했다. “지금 연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바로 주문왕과 무왕이 주왕을 벌한 것과 같은 좋은 시기이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제민왕은 이에 장자(章子)에게 5도(都)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북방 국경의 사졸들과 함께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연나라 군사들은 영전하지 않았고 성문도 닫지 않았으며 연왕 쾌가 죽고 제나라 군대가 대승했다. 자지가 죽은 지 2년 후 연나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태자 평을 옹립하니 이가 바로 연소왕(燕昭王)이다.
* 연소왕이 덕치를 시행해 나라를 일으키다
연소왕은 연나라가 공격받아 망가진 후에 즉위했는데 그는 스스로 겸손하고 풍성한 예물로 어진 인재를 초빙했다. 그가 곽외(郭隗)에게 말했다.
“제나라가 우리 국내의 혼란과 무방비한 틈을 타서 연나라를 격파했으니 나는 연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복수하기에 부족함을 잘 압니다. 그러나 현사(賢士)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염원입니다. 선생께서 보시기에 이런 적합한 인재가 있다면 내가 친히 그를 받들겠습니다.”
곽외가 말했다.
“만약 대왕께서 반드시 현사를 부르려 하신다면 우선 저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저보다 더 현능(賢能)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를 멀다 하고 오지 않겠습니까?”
소왕은 이에 곽외에게 화려한 주택을 지어주고 스승처럼 대하며 최고 예절로 모셨다. 이때 악의(樂毅)가 위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왔으며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왔다. 현사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다. 연왕은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를 위문하며 신하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28년(기원전 284년) 연나라가 튼실하고 부유해졌으며 군사들이 기꺼이 출격하고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연왕은 이에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고 진(秦), 초 및 조, 위, 한 등 나라와 공동으로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 군대가 패하고 제민왕은 타지로 도망쳤다. 이후 연나라 군대가 단독으로 도망치는 제나라 군대를 추격해 제나라 수도 임치에 입성했고 제나라의 모든 보물을 탈취했으며 제나라의 종묘와 궁실을 불태웠다. 제나라 성채 중 함락되지 않은 곳은 요(聊), 거(莒), 즉묵(卽墨) 세 곳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예속되기를 6년 동안 지속했다.
* 연나라의 멸망
소왕이 33년만에 죽고(기원전 279년) 아들인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혜왕은 태자 시절부터 악의를 싫어했다. 즉위한 후 그는 악의를 신뢰하지 않고 기겁(騎劫)을 대신 악의의 장군직에 앉혔다.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 전단(田單)이 즉묵성 하나의 병력으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니 기겁은 전사하고 연나라 군대는 본국으로 후퇴했으며 제나라는 다시 그 원래 성채를 모두 수복했다.
혜왕이 7년만에 죽고(기원전 272년) 한, 위, 초 삼국이 연합해 연나라를 공격했다. 뒤를 이어 무성왕(武成王)이 즉위했다. 무성왕 7년(기원전 265년) 제나라 전단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중양(中陽)을 점령했다. 14년만에 무성왕이 죽고(기원전 258년) 아들 효왕(孝王)이 즉위했다. 효왕 3년(기원전 255년)에 죽고 아들 연왕 희(喜)가 즉위했다.
연왕 희 4년(기원전 251년) 진소왕(秦昭王)이 죽었다. 연왕은 국상 율복(栗腹)을 보내 조나라와 우호 동맹을 맺고 황금 500일을 조왕에게 보내 주연을 베풀어 축수하게 했다. 율복이 귀국하여 연왕에게 보고하기를 “조나라는 국내의 젊고 힘센 사람들이 모두 장평에서 전사했고 그 아이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조나라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연왕이 악의의 아들인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이 일을 물었다.
악간은 “조나라는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여 자주 항전한 국가라 그 백성들이 군사에 익숙하니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이 “우리는 다섯 명으로 그들 한 명을 공격하는 셈이다”라고 하자 악간은 여전히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이 매우 화를 냈고 이때 군신들이 모두 공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연나라는 마침내 두 갈래 군대와 병거 2,000대를 파견하여 율복이 한 갈래를 이끌고 호를 공격하고 경진(卿秦)이 한 갈래를 이끌고 대를 공격했다.
오직 대부 장거(將渠)만이 연왕에게 말했다.
“남과 관문을 서로 통하고 맹약을 맺었으며 황금 500일을 상대 군왕에게 주어 축배를 들게 해놓고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자마자 반대로 공격하는 것은 길하지 않으니 작전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연왕은 듣지 않고 스스로 측면 부대를 거느리고 종군하여 출발했다. 장거가 연왕의 허리에 맨 인신(印信)을 붙잡고 저지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절대 친히 가시면 안 됩니다. 가셔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연왕은 발로 그를 걷어찼다.
장거가 울면서 말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왕을 위해서입니다!”
연나라 군대가 송자(宋子)에 도착했을 때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게 했고 호에서 율복을 격파했다. 낙승도 대에서 경진을 격파했다. 악간은 조나라로 도망쳤다. 염파는 연나라를 추격하여 500여 리를 쫓아가 연나라 도성을 포위했다. 연나라 사람들이 화친을 청했으나 조나라 사람들은 응하지 않았고 반드시 장거가 나서서 화친을 주관하게 했다. 연나라는 곧 장거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가서 화친을 주관하게 했다. 조나라는 장거의 중재를 듣고 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연왕 희 6년(기원전 249년) 진(秦)나라가 동주(東周)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7년(기원전 248년) 진(秦)나라는 조나라 유림 등 37개 성을 점령하고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9년(기원전 246년) 진왕 영정(贏政)이 즉위했다. 연왕 희 23년(기원전 232년) 연태자 단이 진(秦)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이때 연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연왕 희 25년(기원전 230년) 진(秦)나라는 한나라를 멸하고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다. 연왕 희 27년(기원전 228년) 진(秦)나라가 조왕 천을 포로로 잡고 조나라를 멸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자립해 대왕(代王)이 되었다.
연나라 군신은 진(秦)나라가 곧 육국을 멸할 것임을 보았고 진나라 군대가 이미 역수(易水)에 도착하여 화가 연나라에 닥치려 함을 알았다. 연태자 단은 암암리에 20명의 장사를 공양하고 있었는데 이때 형가를 파견하여 독항(督亢) 지도를 진왕에게 바치게 하고 기회를 틈타 갑자기 진왕을 암살하려 했다. 진왕이 이를 발각해 형가를 죽이고 장군 왕전(王剪)을 보내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왕 희 29년(기원전 226년)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 도성 계를 점령하자 연왕은 도망쳤고 나중에 요동으로 천거하여 태자 단을 죽여 그 머리를 진(秦)나라에 바쳤다. 연왕 희 30년(기원전 225년) 진(秦)나라가 위나라를 멸했다. 연왕 희 33년(기원전 222년) 진나라 군대가 요동을 점령하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으니 마침내 연나라가 멸망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