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
【정견망】

당대 무용가——공손대낭 무검도(舞劍圖) (공유 영역)
서언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장이 칼춤을 추는 것은 패공(沛公 유방)을 겨냥한 것이다”라는 전고에 대해서는 아마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검무(劍舞 검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리고 중국 고대 검무를 역사의 정점으로 밀어 올린 이는 ‘당대 궁정 검무 제일인(第一人)——공손대낭’임에 틀림없다. 당대 대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는 《당시삼백수》에도 수록되어 그녀의 뛰어난 무예와 깊은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1. 검무는 중국 고전무용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검이 최초의 전장에서 사용되던 무기에서 체육 무술과 무용 예술에 채택되는 도구로 변모한 것은, 검과 검술의 발생 및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검이 있었기에 검술이 생겨났고, 검술이 있었기에 검무가 완성될 수 있었다.
1) 검의 발생
검은 중국 고대 병기로서 ‘백가지 병기의 으뜸(百兵之君)’이라 칭송받는다. 검은 중국에서 기원이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에서도 검의 그림자는 빠지지 않는다. 고적 《황제본기(黃帝本紀)》에는 “황제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검을 주조하고, 천문의 고어(古字)를 그 위에 명문으로 새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자·수지편(管子·數地篇)》에서는 “옛날 갈천로(葛天盧) 산에서 금속이 나오자 치우(蚩尤)가 이를 받아 검, 갑옷, 창, 극을 만드니 이것이 검의 시작이다”라고 했다.
춘추시대 말기 월나라 사람 오야자(歐冶子, 약 기원전 560년-전 510년)는 월왕 구천을 위해 담로(湛盧), 거궐(巨闕), 승야(勝邪), 어장(魚腸), 순균(純鈞) 등 다섯 자루 보검을 주조했고, 또 초소왕을 위해 용연(龍淵), 태아(泰阿), 공포(工布)의 세 자루 명검을 주조했다. 오왕 합려가 초와 월 두 나라를 격파하자 보검은 오나라로 넘어갔다. 그중 공포검은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하사하여 자결하게 했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다시 월왕 구천이 문종에게 하사하여 자결하게 했다.
오야자가 주조한 검 중에서도 담로가 가장 유명해서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불렸다. 역사에는 “검이 완성되자 정기가 하늘을 꿰뚫고 일월이 다투어 빛나며 별들이 노여움을 피하고 귀신이 슬피 울부짖으니 월왕이 이를 신령하게 여겼다”, “이는 오금(五金)의 정화요 태양의 정기라, 나오면 신령함이 있고 차면 위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담로검이 여러 번 전전하며 유전되다가 당대 초 명장 설인귀(薛仁貴)가 얻게 되었고, 후에 남송의 민족 영웅 악비(岳飛)의 손에 들어갔으나 악비 부자가 살해된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12월, 지하에 2천여 년간 매장되어 있던 월왕 구천의 검이 호북성 형주 강릉에서 출토될 당시, 차가운 빛을 발하며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매우 예리했다. 현재 호북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유 영역)
중국 고대에 검은 자신을 방어하고 작전하는 병기인 동시에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검은 단병(短兵)의 조상이자 근접전의 기구로서 도예(道藝)가 심오하고, 휴대가 간편하며 차고 있으면 신채(神采)가 나고 사용이 신속하므로 역대 왕공제후(王公帝侯)와 문사협객, 상인과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를 지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검이란 도리에 어긋나는 자를 위엄으로 제압하고 덕 있는 자를 호위하는 것이기에 이를 어루만지며 지니는 것이다.
역사에서 ‘국사무쌍(國士無雙) 병선전신(兵仙戰神)’이라 일컬어지는 한신(韓信)은 소년 시절부터 무예를 닦고 항상 보검을 차고 다녔다. 그러나 당당한 대장부임에도 대중 앞에서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견뎌낼 수 있었다. 소식(蘇軾)이 《유후론(留侯論)》에서 말한 바와 같다. “옛날에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개가 있어 보통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았다. 필부가 모욕을 당했을 때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던져 싸우는 것은 용맹이라 하기 부족하다. 천하의 큰 용맹을 가진 자는 갑자기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으며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해도 노하지 않으니, 이는 그가 품은 바가 매우 크고 그 뜻이 매우 원대하기 때문이다.”
2) 검술의 기원
검술은 고대에 ‘검도(劍道)’라고도 불렸다. 가볍고 빠르며 민첩하고 시원하며 산뜻한 것으로 유명하며, 중국 전통 무술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병기교(兵伎巧) 중에는 ‘검도(劍道)’ 38편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검술에 대한 이론적 총결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실전되었다.
검술은 인류의 전쟁 행위에서 기원했다. 중국에서 검술은 전국시대에 성행했는데, 전차(戰車)가 점차 전쟁에서 물러나고 보병(步兵)이 주요 역량이 되면서 검 역시 주요 무기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은 로마 시대에 성행하기 시작했다. 천백 년 동안 검술은 전장을 누비고 무림을 제패하며 입신양명과 치국안민, 협행을 위해 수많은 세상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
3) 검무의 형성과 발전
검무는 검을 공연 도구로 삼아 인체의 형(形), 신(神), 경(勁), 율(律) 등 신체 동작을 통해 무용 형상을 창조해 정취와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형성과 발전은 검술과 검법을 기초로 한다.
“무당이 검을 들고 춤추며 신명께 제사 지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검무는 검을 법기(法器)로 삼아 신령과 소통하고 제사 지내며 복을 비는 종교 활동이었을 것이다. 그 목적은 요마(妖魔)를 베고 귀신을 물리쳐 집안을 편안히 하고 사악함을 쫓거나, 하늘에 풍요를 빌고 경계를 보전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데 있었다.
검을 차고 다니는 패검(佩劍)의 풍습이 성행하던 주나라 시대에는 방패(干), 창(戈), 도끼(戚) 등 법기를 들고 춤추는 것을 ‘무상(舞象)’이라 불렀다. 여기서 ‘상(象)’에는 다시 무왕이 주왕을 벌한 것을 찬양하는 무무(武舞)의 상과, 주공의 공덕을 찬미하는 문무(文舞)의 상으로 나뉘었다. 이는 제사, 연향, 사례(射禮) 등 장소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당시 왕실 및 귀족 자제들의 필수 과목이기도 했다. 이로써 주나라 시대에 중국 악무 문화의 첫 번째 고점이 나타났다.
《공자가어》 기록에 따르면 “자로는 군복을 입고 공자를 뵙고 칼을 짚고 춤을 추었다”, “자로는 칼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공자가 화답하니 곡이 세 번 끝나자 광(匡)나라 사람들이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라고 한다. 《장자·설검편(莊子·說劍篇)》에는 “조문왕이 검을 좋아하여 검객들이 문하에 3천여 명이나 모여 밤낮으로 앞에서 서로 겨루었다”라고 했으며, 《사기·항우본기》에는 홍문연에서 항백과 항장이 장검을 마주하고 춤춘 것이 사실은 춤을 빌미로 암살을 실행하려 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천에서 발굴된 한대(漢代) 화상전(畫像磚 그림 벽돌)에는 장검(長劍) 독무의 화면이 있고, 산동 가상의 추호산 한 화상전에도 두 사람이 검을 치며 마주 춤추는 장면이 있다. 한무제가 친히 결정한 대규모 백희(百戲) 공연에는 검무 프로그램이 편성되었다. 당시의 검무는 흔히 무술 잡기와 결합하여 무용의 난도를 높임과 동시에 흡인력과 예술적 매력을 더했다.

한대에는 검이 이미 도구로서 예술의 전당에 들어갔고, 검무 역시 예술 공연 형식으로 매우 유행했다. 그림 속 한대 화상전에서 오른쪽 여인이 두 손에 검을 들고 무릎을 굽혀 검무를 선보이고 있다. (공유 영역)
“키가 8척이요 표범 머리에 고리 눈, 제비 턱에 호랑이 수염을 가졌으며 목소리는 거대한 천둥 같고 기세는 달리는 말과 같았던” 장비는 장판교 전투에서 장팔사모를 들고 한 번 크게 호통쳐 조조의 백만 대군을 겁주어 물리쳤다. 이처럼 전쟁에서 검의 실용적 가치가 낮아지고 예의적 작용이 높아짐에 따라 검은 신분의 상징이 되거나 자위, 예식, 공연용으로 쓰이게 되었고 이는 검술이 폭넓게 예술화되는 길을 열었다.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에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장비는 장팔사모를 들고 여포와 교전하고 있다. (공유 영역)
알다시피 중국 고전무용은 화하 민족의 예술적 보배이자 정수다. 검무는 중화 전통 무술 중 검술의 초식과 율동을 희곡의 신단(身段), 운치와 융합하여 중국 고전무용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즉 검무는 사실 무(武)와 무(舞)가 같은 근원이거나, 무술과 무용을 병용하고 문(文)과 무(武)를 병용하는 예술 공연인 셈이다. 그러나 검무는 무술에서 빌려왔으되 무술과는 다르다. 무술은 기술로 사람을 이기는 것이 목적이나, 검무는 무술에 없는 내면의 감정과 미학적 의미를 갖춘다. 동시에 검무 속에는 독특한 고전적 운치와 풍부한 민족적 풍모가 담겨 있다.
이는 바로 리훙쯔 사부님께서 《페이톈(飛天)대학중국고전무용수업설법》에서 밝히신 바와 같다. “근본부터 말하자면 중국 고전무용의 ‘신법(身法)’은 많게는 고대부터 무술의 ‘일무양용[一武(舞)兩用]’에서 내원한 신(神)이 전한 기법이다. 그러나 ‘신운(身韻)’은 많게는 희곡 중의 ‘신단(身段)’에서 내원했다.”
“근원을 깊이 파고들고 끝까지 추적하면, ‘일무양용[一武(舞)兩用]’이다. 문용(文用)하면 그것은 곧 무용이 되고, 무용(武用)하면 그것은 곧 싸움에 쓰이는 것이다. 일문일무(一文一武), 일정일부(一正一負)이다.”
2. 검무는 성당(盛唐) 시기 정점에 달했고 공손대낭이 대표 인물
“아홉 하늘의 대문이 열리니 궁궐이 나타나고
만국의 의관이 면류관에 절하도다.”
九天閶闔開宮闕,萬國衣冠拜冕旒
주지하다시피 당대(唐代)는 중국 역사상 황금시대로, 강성한 국력은 경제와 문화의 지대한 번영을 가져왔다. 그중 중요한 매개체인 당대 무용 예술 역시 전무후무한 전성기에 진입했다.

당궁악무도(唐宮樂舞圖 공유 영역)
당대 무용은 연무(軟舞 문무)와 건무(健舞, 무무)의 두 갈래로 나뉘어 중국 고대의 음양 조화와 강유상제(剛柔相濟)의 문화적 내함을 품었다. 검무는 검기무(劍器舞)라고도 불리며 건무에 속한다. 두 무용의 차이는 주로 신체 동작의 질감과 힘에서 나타나며 무용 스타일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연무는 주로 남방에서 기원하여 춤사위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건무는 주로 북방에서 나와 동작이 웅건하고 힘차며 리듬이 명쾌하다. 격렬한 북소리에 맞춰 고도의 기량과 참신한 공연 기교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예술적 특색이다.
공손대낭은 당 명황(明皇 현종) 개원 연간에 가장 명성이 높았던 무용가로, 성당(盛唐) 무용 역사에서 지위가 매우 높다. 민간 예인 출신인 그녀는 깊은 내공과 정교한 기교, 전설적인 솜씨로 일약 기예가 세상을 덮는 ‘당궁(唐宮) 제일 무인’이 되었다. 공손대낭이 선보인 검기무는 군복 차림에 보검을 들고 등장하여 무술 속의 검기를 무용의 도구로 변모시켰다. 여성을 부드러움과 검술의 굳셈을 결합하여, 고대 여인의 강인한 기개와 부드러운 정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검합일(人劍合一)의 신법을 충분히 표현함으로써 당궁 악무를 중국 문화예술 역사의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이와 동시에 공손대낭은 전통 검무의 계승과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의 제자 20명은 ‘칠수십삼차(七秀十三釵)’라 불리며 고대 검무 전승에서 이정표적인 역할을 했다.
공손대낭의 대표작으로는 《서하검기(西河劍器)》, 《검기혼탈(劍器渾脫)》, 《배장군만당세(裴將軍滿堂勢)》, 《인리곡(鄰裏曲)》 등 획기적인 작품들이 있다. 그중 특히 《배장군만당세》의 예술적 성취가 가장 충격적이다. 이 작품은 배민(裴旻) 장군의 검무 절기를 공손대낭이 개편한 것으로 기세가 웅혼하고 검초(劍招 검의 초식)가 날카롭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검술과 예술의 정수를 추출하여 남성의 양강(陽剛)함과 여성의 음유(陰柔)함을 융합함으로써 무술 검도의 기운과 용맹함, 영무(英武)함과 예리함을 표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볍게 나는 기러기 같고 노니는 용 같은 신체 언어를 통해 대당성세(大唐盛世)를 전시했다. 이는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검무의 전형이 되었다.
《명황잡록(明皇雜錄)》의 기록에 따르면 명황은 음률에 정통했는데, 공손대낭이 검무에 능했기에 황실의 중시를 받아 장안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여러 차례 궁중에 소환되어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고대의 수많은 시문에도 공손대낭 검무에 대한 전설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중 ‘시성(詩聖)’ 두보의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병서》가 가장 유명하며 지금까지 전해진다.
“예전에 공손씨라는 가인(佳人)이 있어
한 번 검기무를 추니 사방이 진동했네.
구경꾼은 산처럼 모여 안색이 변하고
천지가 그 때문에 오랫동안 출렁였네.
번뜩임은 예가 아홉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듯하고
날램은 신선들이 용을 타고 나는 듯하네.
올 때는 뇌정처럼 노여움을 거두는 듯하고
멈출 때는 강해(江海)에 맑은 빛이 응집된 듯하네.
……
선제(先帝)의 시녀가 팔천 명이었으나
공손의 검기무가 제일이었네.”
두보는 이 작품에서 당대 악무(樂舞)의 극치에 달한 예술적 성취를 표현했다.
두보은 또 이 시 서문에서 “예전에 오(吳) 사람 장욱(張旭)은 초서를 잘 썼는데, 자주 업현(鄴縣)에서 공손대낭이 서하검기를 추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초서의 성인(草聖)’ 장욱이 공손대낭의 거침없는 검기무를 보고 영감을 얻어 필치가 용과 뱀이 꿈틀대는 듯한 절세의 서법을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공손대낭은 검무를 잘 추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조예가 극히 깊었다. 또한 고운 외모와 비단옷을 입은 당대의 절세가인(絶世佳人)이기도 했다. (공유 영역)
공손대낭과 같은 시대에 또 한 명의 검무 고수 배민(裴旻)이 있었는데, 당시 이백(李白)의 시와 장욱의 초서, 배민의 검무를 일컬어 ‘삼절(三絕)’이라 했다.
배민은 현종 개원 연간의 장수로, 일찍이 검을 구름 위로 수십 장 높이 던졌다가 전광석화처럼 떨어지는 것을 손을 뻗어 칼집으로 받아내니 검이 공중을 뚫고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그 검법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시선(詩仙)’ 이백조차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검술을 배웠다.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배민이 유주(幽州) 도독 손전(孫佺)과 북벌을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니 번개 소리가 나고 화살이 별처럼 쏟아졌으나 칼에 닿는 족족 끊어졌다. 적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도법(刀法)이 이토록 신묘했으니 검법(劍法)은 말할 것도 없다. 생각건대 당시의 검무는 무용 동작에 무술 동작을 단순히 조합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겉모습만 화려하고 실용성 없는 무술 공연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손대낭은 비록 여성이었으나 그 기예가 ‘검성(劍聖)’ 배민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은 그녀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3. 공손대낭 이후 검무는 정점에서 저점으로 내려가기 시작
옛말에 이르기를 천도(天道)의 순환은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한다 했다. 당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은 전례 없는 고도의 발전을 거친 뒤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안사의 난’은 당나라가 성세에서 쇠락으로 가는 전환점이었으며 동시에 검무가 성세에서 저점으로 가는 분수령이었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낙양이 함락되고 중원이 유린당했다. 당 현종은 도성을 탈출했고 ‘이원제자(梨園子弟)들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두보는 고향을 떠나 전전긍긍 떠돌며 머리가 희어졌을 때, 우연히 사천 백제성에서 다시 한번 검무를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검무를 춘 여인은 바로 공손대낭의 전인(傳人 전수받은 제자)인 이십이낭(李十二娘)이었다. 이때는 두보가 예전에 공손대낭의 검무를 본 지 이미 수십 년이 흐른 뒤였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은 그대로인데 가인의 붉은 얼굴은 변했고, 성세는 가고 난세가 닥쳤다. 두보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공손의 제자 역시 꽃다운 나이가 아니었다. 광경에 마음이 흔들리고 감개가 무량해진 두보는 붓을 들어 천고의 가작을 남겼다.
이에 대해 명대(明代) 문장가 왕사석(王嗣奭)은 평하기를 “이 시는 검기무를 보고 지난 일을 슬퍼하니 이른바 사물에 닿아 강개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씨를 읊으며 공손을 생각하고, 공손을 생각하며 선제(先帝)를 그리워하니, 이는 온전히 개원·천보 50년의 치란흥쇠(治亂興衰)를 위해 쓴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 여자 예인(藝人 예술가)들은 강호로 떠돌았고 이원제자들은 존망이 위태로워졌다. 만당(晚唐) 말년에 이르러 이원제자들은 거의 사라졌고 한때 풍미했던 검무는 결국 역사의 먼지 속에 묻히고 말았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희곡(戱曲 전통극) 예술이 궐기하고 번영하면서 검무는 희곡 무용의 일부가 되었다. 중화민국 시기 경극(京劇) 대사 매란방(梅蘭芳)은 태극검을 참고하여 《패왕별희(霸王別姬)》 중의 검무를 창조했다. 그러다 21세기인 오늘날, 중화 정통 문화를 널리 알리는 션윈(神韻) 예술단의 출현으로 중국 고전무용으로서의 검무라는 전설적 기예가 세계 무대 위에서 진정으로 부활하고 재현되었다!
결어
공자의 《논어》에 ‘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은’ 이야기가 있다. 안연이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묻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韶舞)를 연주하라. 정나라의 음악을 버리고 아첨하는 소인을 멀리하라. 정나라 음악은 음란하고 아첨하는 소인은 너무나 위험하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가 성·주·괴·멸의 발전 법칙 속에서 이미 말겁(末劫)의 마지막 고비에 와 있는 지금, 무신론의 당문화를 버리고 오천 년 신전(神傳) 문명으로 회귀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8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