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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판에 관한 추억

소양춘(小陽春)

【정견망】

“구구는 일로 돌아가고(九九歸一)”, “삼을 내리고 오를 넣고 이를 뺀다”. 오늘날까지도 귀에 익은 이 주산 구결은 여전히 사람들의 일상적인 구어 속에 때때로 나타나곤 한다.

사실 주판는 중국 고인(古人)이 발명한 일종의 원시적인 계산 도구로, 전자계산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세월은 흔적을 남기고 지난 일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비록 한 시대가 끝나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미 수안보의 존재를 모르지만, 우리 노년 세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내 기억에 초등학교 3, 4학년이었을 때 학교에 주산 수업이 개설되었다. 학생마다 집에 있는 주판을 찾아내거나, 혹은 친척이나 친구에게 빌려와서, 직사각형 나무 틀 양 끝에 가느다란 삼줄을 매어 책가방과 함께 몸에 메고 학교에 갔다.

나는 어릴 때 장난이 좀 심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수업 끝”이라고 말씀하시기가 무섭게 참지 못하고 좌석을 떠나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로지 일찍 교실을 빠져나가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며 친구들과 장난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주의로 큰 사고를 쳤다. 두 줄의 책상 사이 복도를 따라 밖으로 달려가던 중, 몸이 바로 앞자리 동수의 책상에 부딪혔고, 책상 끝에 걸려 있던 그의 주판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판은 산산조각이 났고 교실 가득 수안보 알이 굴러다녔다.

그 동창의 아버지는 농촌 협동조합(供銷社)에서 회계로 일하셨기에, 그의 주판은 우리 반에서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 동창은 체구가 아주 작았는데, 당시 눈물을 흘리며 내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판을 물어내라고 했다. 당시 농촌에서 달걀 하나가 겨우 5분(分)에 팔리던 시절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 주판을 물어주겠니. 차라리 내가 흩어진 부품들을 다 주워 모아 다시 조립해 줄 테니 사용하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안 된다고 하며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선생님은 “이러면 어떻겠니, 얘 주판을 너에게 주는 것으로 하면 안 될까?”라고 중재하셨다. 하지만 동수가 보니 내 주판은 작고 가늘어 전혀 가치가 없었고 그의 것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니 선생님도 좋은 방법을 생각지 못하시고 더는 말씀하시기 어려워하셨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고학년에 다니는 자기 형을 불러왔다. 매일 방과 후에 형제가 나를 교실에 가두고 주판을 물어내라며 핍박했고, 물어내지 않으면 교실을 나가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내 책가방과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압수하여 담보로 삼았다.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릴 적 받은 가정교육은 지금 대다수 가정이 자녀에게 하는 교육과는 달랐다. 만약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과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시시비비를 따지지도 않은 채 일률적으로 책임을 자신의 자녀에게 돌렸다.

그때 아버지는 타지에서 근무하셨는데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일 년 혹은 몇 년에 한 번씩만 집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시골에서 조부모님이 키워주셨는데 가훈이 매우 엄격했다. 설령 우리가 밖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맞아도 집에 와서 일러바치기는커녕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고, 어른 앞에서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은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시며 우리를 호되게 꾸짖으셨다. 마치 식은 밥을 볶듯 몇 번이고 반복해서 훈계하시며, 왜 밖에서 말썽을 피우고 문제를 일으키느냐고 하셨다. 화가 풀리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를 다시 때리기도 하셨다. 밖에서 맞고 들어왔는데 집에서 또 맞으니 그야말로 ‘불에 타는 자라 속마음만 아픈’ 격이었다.

내 기억에 그분들은 자기 자손에 대해 결코 허물을 감싸거나 편들지 않았고 응석을 받아주지도 않았으며, 소위 귀하게만 키운다는 말은 아예 없었다. 이것이 아마 할아버지께서 현지에서 덕망이 높고 평판이 좋으며 멀리까지 이름이 알려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평범하지 않은 가정교육은 나의 후회 없는 수련 인생을 성취하게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 형제는 결국 내가 정말로 ‘죽여도 고기가 없고 껍질을 벗겨도 남는 게 없는’ 처지임을 보고는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어느 해 겨울방학 때 우리가 교외에서 근로장학 활동에 참여하여 농촌 협동조합의 하천 모래를 밀어준 적이 있었다. 뜻밖에도 우리가 작업한 토사량을 측량하고 품삯을 계산해 준 분이 바로 그 친구의 아버지였다. 그야말로 “인연이 깊다고 말하지 마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이다(相逢漫道恩情好, 不是冤家不聚頭).”

그 후 나는 은행학교에 합격했는데, 성(省) 주산협회가 우리 학교에 설치되어 있어서 매일 아침 자습 시간마다 ‘딱딱’ 소리를 내며 주판 연습을 했다. 게다가 누구나 급수 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며, 규정된 주산 등급에 도달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은행 업무를 시작한 후 나는 기층 영업소에서 신용 대출 담당자로 일했기에 주판을 직접 만질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공휴일에 회계나 출납의 대근을 설 때는 주판을 놓을 수 없었다. 또한 퇴근 전 장부를 맞출 때 단 한푼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전 직원은 장부가 맞아야만 영업장을 떠나 퇴근할 수 있었다. 특히 월말에 주판으로 잔액표를 작성할 때는 종종 눈이 침침하고 팔이 저릴 정도였다. 그래서 과거 은행에는 ‘철주판(鐵算盤), 철장부(鐵帳), 철현금(鐵款)’이라는 ‘삼철(三鐵)’이란 칭호가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컴퓨터가 점차 보급됨에 따라 은행과 상점 카운터 위의 주판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현대화된 계산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비록 현대의 슈퍼컴퓨터가 초당 수십억 번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지만, 중국 고인은 주판에 의지해 오늘날 하이 테크 기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찬란한 문명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고대에는 현재와 같은 위성 지도나 측량 및 계산 도구가 없었는데, 어떻게 북경 자금성과 중축선(中軸線 중심 축선)을 정확하게 자오선 위에 위치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은 과학계에 있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주판과 관련된 직접 겪으신 일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고, 나중에 아버지께서도 여러 번 이 일을 언급하셨다. 그때 할아버지는 지주의 집사로 일하셨는데 글을 한 자도 모르셨다. 현지의 한 마음씨 나쁜 사람이 할아버지가 글을 모르는 것을 알고 몰래 지주의 필적을 위조하여, 할아버지 손에서 쌀 몇 섬을 가로채 속여 갔다. 이것이 아마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이었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증조 할아버지께서 할아버지를 억지로 학교에 보내려고 낡은 집 옆 연못을 돌며 할아버지를 필사적으로 쫓아다니셨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국 서당 문턱을 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의 나중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아마 그때 사기를 당한 이후로 할아버지께서는 비로소 독서의 중요성을 깨달으셨을 것이고, 자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많은 문화를 배워야 하며 당연히 주산도 포함된다고 누누이 당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도시로 직장을 얻어 나가기 전, 농촌 합작사(나중에 대대로 바뀜)에서 한동안 재경(財經) 주임을 맡으셨다. 우리가 어릴 적에 당숙이 고 씨집 도련님을 따라 배우는 것을 보았는데, 옆 마을의 긴 도포를 입고 하얀 긴 수염을 기른 훈장 선생님을 특별히 집으로 모셔와 주판을 가르치게 했다.

“물은 아래로 흐르기를 잘하기에 결국 바다에 이르고, 산은 높음을 다투지 않기에 스스로 봉우리를 이룬다.”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 가족이 비록 온갖 풍파를 겪었지만, 많은 후손이 유행처럼 금융 보험업계에 발을 들이거나 재무 회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상님들이 생전에 품으셨던 숙원을 풀어드린 것인지, 아니면 선조들의 영혼에 대한 일종의 위로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