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부위자은(父爲子隱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숨겨준다)’이란 말은 《논어》 〈자로(子路)〉 편에서 유래했다. 조위(曹魏)의 하안(何晏)이 주를 모으고 북송(北宋)의 형병(邢昺)이 소를 내어 만든 《논어주소(論語注疏)》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섭공(葉公)이 공자(孔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몸을 곧게 바르게 행하는 직궁(直躬)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증언해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을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정직함이 바로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논어주소》는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그 속뜻을 풀이했다.
【“정의(正義)에서 말하길 이 장은 정직함을 행하는 예법(禮)을 밝힌 것이다.
‘섭공이 공자에게 우리 마을에 직궁이라는 자가 있다’고 한 것은, 우리 고향에 몸을 곧게 가다듬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했다’는 것은 정직하게 행했다는 그 구체적인 사실을 말한다. ‘양(攘)’이란 어떤 인연이나 상황으로 인해 도둑질하게 된 것을 뜻한다. 즉, 남의 양이 제 발로 자기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가 이를 가졌고, 아들이 양을 잃어버린 주인에게 말하여 아버지의 절도를 증언했다는 뜻이다. 섭공은 이 아들을 정직하게 행하는 자라 여겨 공자에게 자랑한 것이다.
‘공자가 우리 마을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정직함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한 것은, 공자가 섭공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우리 마을의 정직함은 아버지를 고발한 저 정직함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자식에게 만약 허물이 있을 때 아버지가 이를 숨겨주면 ‘자애(慈)’가 되고,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자식이 이를 숨겨주면 ‘효도(孝)’가 된다. 효도하고 자애로우면 ‘충성(忠)’스럽게 되고, 충성스러우면 ‘정직(直)’하게 되므로 정직함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이다. 지금 법률(역주: 대당률)에서도 8촌 이내 친족끼리는 서로 죄를 숨겨줄 수 있도록 허용하고, 부모나 조상을 고발하는 자는 십악(十惡) 대죄로 다스리니, 나라의 법전과 예법 또한 이와 같다.”】
《논어주소》에서 ‘양(攘)’ 자의 의미는 남의 집 양이 우리 집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그대로 가둬둔 것을 뜻하며, ‘직(直)’은 몸을 곧게 바르게 행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섭공이 이해한 정직은 공자의 생각과 크게 달랐다. 수천 년 동안 이 구절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며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견인견지(見仁見智 역주: 보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 논쟁들의 근본적인 분쟁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또 이 분쟁은 왜 발생한 것이며, 어떤 가치 지향점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까?
‘견인견지(見仁見智)’라는 성어는 《역경(易經)》 〈계사상(繫辭上)〉에서 유래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道)라 하니, 이를 이어받는 것이 선(善)이요, 이를 이루는 것이 본성(性)이다. 인자한 이가 이를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가 이를 보면 지(智)라 한다. 백성들은 날마다 이를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아는 이가 드물구나!”
이 구절은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도(道)’를 설명하고 있다. 음과 양이 서로 반대되면서도 서로를 생성하는 흐름이 곧 우주 만물을 만드는 도다. 이 음양의 도를 이어받아 만물을 생성하는 성질이 곧 선(善)이며, 만물을 성취하는 것이 천명으로 부여된 본성이자 인의도덕(仁義道德)이다. 어진 덕을 가진 사람은 이 도를 보고 ‘인(仁)’이라 여기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 도를 체득하여 ‘지(智)’라 여긴다. 백성들은 비록 일상생활 속에서 날마다 이 도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만물을 포용하고 있으나 이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이 성어는 ‘인자견인, 지자견지(仁者見仁, 智者見智 인자는 인을 보고 지자는 지를 본다)’로도 표현되는데, 모두 동일한 사물을 두고도 처한 차원과 경지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가 나타남을 형용한 말이다.
맹자(孟子)는 인·의·예 외에 전통적인 가치에 ‘지(智)’를 더해 사덕(四德) 또는 사단(四端)을 구성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곧 지(智)다. 인·의·예·지는 외부에서 나에게 주입된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것인데 다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맹자》 〈고자하〉)”
맹자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 본래 내재된 고유한 바탕이라고 보았다. 남송(南宋)의 진순(陳淳)이 지은 《북계자의(北溪字義)》에서는 “양지(良知)가 스스로 옳음을 알아 사랑으로 발현되는 것이 곧 ‘인의 지(仁之智)’이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을 구하는 것을 가장 크게 가르쳤다. 오직 인만을 전문적으로 말한 까닭은 인이 만 가지 선(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니, 인할 수 있다면 만 가지 선이 그 가운데 있게 된다”라고 상세히 설명했다.
지난 천 년 동안 ‘부위자은’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된 실질적인 원인은 ‘직(直)’이라는 내함의 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분기점에 있다. 즉, 미시적인 차원의 도덕적 가치와 표면적인 인간 세상 차원의 법리를 혼동했기 때문에 “자르려 해도 잘리지 않고 정리하려 해도 얽히는(剪不斷, 理還亂)”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한의학 이론에는 구체적인 사물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도출해내는 인지 방법인 ‘팔강변증(八綱辨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팔강이란 음양(陰陽)·표리(表裏)·한열(寒熱)·허실(虛實)의 여덟 가지 변증 강령을 뜻한다. 이 중 ‘표리’와 ‘허실’은 서로 다른 공간적 차원의 인지적 구분을 잘 보여준다.
인류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의 표면 차원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 시기마다 ‘외부 주입’을 통해 겹겹이 쌓인 수많은 관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표층 공간의 관념은 흔히 사람에게 내재한 인선(仁善)의 존재와 ‘표리’ 관계를 이루며 엄연한 차원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인류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사람들의 사상 경지 역시 자신도 모르게 이동하여 점점 표면 공간의 기준에만 서서 시비를 가리려 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평면 기하학에서 평행하지 않은 두 직선은 반드시 한 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지만, 입체 기하학으로 넘어가면 두 직선이 서로 다른 기하학적 평면에 존재함으로써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람들은 특정한 고정 차원 안에서는 그 차원의 준칙에 따라 시비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차원과 차원을 뛰어넘어 시비를 논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의 내함(內涵)과 지향점의 문제가 된다.
맹자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으니, 모두 ‘천하국가’를 말한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으며, 집안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라고 했다. (《맹자·이루장구 상》)
청나라 유보남과 그의 아들 유공면이 편찬한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는 청나라 학자 정요전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정요전(程瑤田)의 《논학소기(論學小記)》에 이르길 “사람들이 늘 하는 말 중에 ‘일공무사(一公無私, 철저히 공할 뿐 사사로움이 없다)’라는 것이 있다. 이는 공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공(公)의 참뜻에 미치지 못하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같다. 그 시작은 주관적 집착(意·必·固·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폐단은 반드시 ‘아버지가 양을 훔치고 아들이 이를 증언하는(父攘子證)’ 냉혹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마음속에는 대공(大公)의 명예를 널리 얻고자 하는 욕망이 빠져 있어, 결국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굽혀 사리사욕을 채우게 만든다. 그런데 오직 이 한 사람만이 홀로 공평무사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에게 사사로움이 없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공(公)’과 ‘사(私)’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고발하는 ‘부양자증(父攘子證)’의 행위가 결국 ‘자신을 굽혀 사사로움을 행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됨을 논증한 것이다.
춘추전국 이후 《공양전(公羊傳)》이 제기한 ‘덕이 천지와 합치된다’는 의미의 ‘대일통(大一統)’은 점차 가천하(家天下) 전제(專制) 통치를 위한 ‘대통일(大統一)’로 변질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公)’의 개념은 국가라는 개념과 융합되었고, 백성들은 그저 세금을 바치는 기반이자 농사와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상 표면의 법과 제도가 도덕적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러한 법의 강제력이 사람 내면의 선한 본성을 억누르게 되었다. 특히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 대륙의 당문화(黨文化) 언어 환경 속에서는 ‘대공무사(大公無私)’, ‘마음속에 스치는 한 자락의 사심도 철저히 투쟁하여 처단하라’, ‘모든 것을 당에 바치라’, ‘대의를 위해 친족을 멸하라(大義滅親)’와 같은 변이된 관념들이 강압적으로 주입되고 강조되어 왔다.
청조 조정에서 편찬하고 강희제(康熙帝)가 직접 검정한 《일강예기해의(日講禮記解義)》 권9 〈자로 제13〉에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해설했다.
“아버지는 자식의 과오를 덮어주고 자식은 아버지의 과오를 덮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서로 죄를 숨겨주는 것은 곧 인간 본심의 자연스러움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천리에 순응하는 길(順)이며 인정에 안온한 길(安)이다. 굳이 정직함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정직함은 이미 서로 숨겨주는 그 행위 속에 들어 있다. 어찌 반드시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고발해야만 정직함이 되겠는가? 이로써 도(道)는 인간의 정에서 멀리 있지 않으며, 일은 반드시 이치에 부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무릇 인정을 거슬러 가며 명예를 구하고, 남과 다르게 행동하여 자신을 높이려 하는 자들은 모두 성인(공자)께서 취하지 않으신 바다.”
이 주해는 인간의 본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순(順)’, 굳이 정직함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무위(無位)의 태도, 그리고 명예나 어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 인정을 억지로 거스르는 ‘교정(矯情)’의 허구성을 찌르고 있다.
근대의 수많은 해석에서 ‘직(直)’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대개 정직(正直), 무사(無私),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음(不徇情) 등 인간 세상의 표면 공간에서 주입된 이데올로기적 관념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미시적인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내면에 깃든 선심(善心)과 선념(善念)이 아무런 작위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본심에 순응하는 인선(仁善)이자 양지(良知)의 순연한 정직함이다. 즉, 공자가 말한 참된 정직함이란 인간이 가진 선량함과 불성(佛性)의 측면이 발현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인성 중의 마성(魔性)을 풀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류 사회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진정한 요체는 사람들이 물질적·정신적인 이욕의 만족을 한도 없이 추구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오직 사람 마음 깊은 곳의 양지(良知)와 선념(善念)을 온전히 지켜내는 것이 가장 긴요한 과제다. 인류의 참된 행복과 미래는 결국 사람들이 미혹에서 깨어나 도덕적 승화와 본성으로의 회귀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6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