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280년)
심연(心緣)
【정견망】
조위(曹魏)의 흥망
적벽대전에서 실패한 후, 조조(曹操)는 북방으로 퇴각해 방어했다.
* 조조가 위를 일으키다
북방으로 퇴각하여 수비로 돌아선 조조는 잔여 세력을 한층 더 청소하듯 평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합비(合肥)에서 손권(孫權)과 밀고 당기는 시소전을 전개했으나 양측은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다.
이 외에도 조조는 인재의 선발을 더욱 중시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中興)을 이룬 군주가 어찌 어진 이와 군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현능한 인재를 얻었을 때 그들이 일찍이 여항(閭巷)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들, 어찌 요행히 서로 만났겠는가? 윗사람이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때야말로 특히 어진 인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오직 재능만을 보고 천거하면(唯才是舉) 내가 얻어서 쓸 것이다.”
그러나 조조가 관리를 뽑은 진짜 준칙은 단지 오직 재능만을 보고 천거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평할 때는 덕행을 숭상하고, 일이 있을 때는 공로와 능력을 상 준다(治平尚德行, 有事賞功能)”고 하여 신중한 덕성을 염두에 두었다.
조조의 웅재대략(雄才大略)과 호방하고 진취적인 기상은 그의 시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늙은 준마 마구간에 매여서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며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
老驥伏櫪
志在千裏
烈士暮年
壯心不已
조조는 경제 방면에서 둔전(屯田)과 조조제(租調制)를 계속 시행했으며, 백성들의 질고(疾苦)에도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어느 해 겨울에 큰 역병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조조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관리와 백성 남녀 중, 여자는 70세 이상으로 남편과 자식이 없거나, 나이 12세 이하로 부모 형제가 없는 자,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거나 손으로 일을 할 수 없고 발로 걸을 수 없으면서 처 자식이나 부형(父兄), 산업이 없는 자에게는 평생 관청의 곡식(廩食)을 주어 먹여 살리게 하라. 어린아이는 12세가 되면 멈추고, 빈궁하여 스스로 공양할 수 없는 자는 인구수에 따라 대여해 주어라. 늙고 쇠약하여 부양이 필요한 자 중 나이 90세 이상은 부역을 면제하고 가족 한 사람의 부역도 면제하라.”
북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동작대(銅雀台)를 세웠다. 이어 한 헌제가 위(魏) 땅을 조조에게 하사하고 위나라의 사직과 종묘를 세우게 했다. 훗날 다시 위군(魏郡)을 동서부로 나누어 도위(都尉)를 두었고, 처음으로 상서(尚書), 시중(侍中), 육경(六卿)을 두었다.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치를 제후왕의 위에 두게 했고, 금새(金璽 황금 도장)와 붉은 인끈(赤紱), 원유관(遠遊冠)을 수여했다. 몇 년 후, 조조는 처음으로 명호를 후(侯)부터 오대부(五大夫)까지를 두어 옛 열후(列侯), 관내후(關內侯)와 더불어 무릇 6등을 삼았고, 한 헌제에 의해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한 헌제는 조서를 내려 위왕에게 천자의 깃발인 정기(旌旗)을 세우고, 왕의 면류관에 12류(旒)를 늘어뜨리며, 금은 장식이 된 수레를 타고 여섯 마리의 말이 끌게 하며, 오시부차(五時副車 역주: 암살 방지를 위해 진짜로 타는 마차 외에 운행하는 5대의 가짜 마차)를 설치하게 하였고,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 조비(曹丕)를 위나라 태자로 삼았다.
만년의 조조는 스스로 쌓은 공로가 탁월하다고 여겨 갈수록 헌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한 번은 황후가 헌제와 더불어 과거 국구(國舅) 동승(董承)이 조조에게 주살당했던 일을 담소했는데 조조가 이를 전해 듣고는, 사람을 궁중에 보내 황후를 체포하게 했다. 체포된 황후가 머리를 산발한 채 헌제의 곁을 지나갈 때, 황후는 헌제의 손을 맞잡으며 죽음을 면할 수 있는지 물었다.
헌제는 “나 역시 내 목숨이 어느 때에 있을지 스스로 알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황후를 죽이고 그 일족 수백 명을 동시에 처형했다. 이로써 조조의 신하답지 않은 마음(不臣之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조는 비록 천하를 일통(一統)하겠다는 결심은 있었지만 황제가 될 야심은 없었다. 그는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 문왕(文王)이 되겠다”라고 했다.
220년, 조조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령(遺令)에서 그는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 법을 따를 수 없다. 장사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군사를 거느리고 진소에서 수비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부대를 떠나지 말라. 담당 관리들은 각자 자기 직무를 통솔하라. 염습은 평상복으로 하고 금옥이나 진귀한 보물을 매장하지 말라”고 했다.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한 평가는 “가히 비범한 사람(非常之人)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라고 했다.
* 위의 건립과 발전
조조가 죽은 후, 아들 조비가 한 헌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니 이가 바로 위 문제(文帝)이다. 국호를 위라 하고 낙양에 도읍했다. 이 후 네 명의 황제들은 기본적으로 조조 시절의 각종 제도를 계승했다.
그러나 인재를 등용하는 방면에서 조비는 진군(陳群)이 건의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채택해, 현능하고 식견과 감식안이 있는 사람을 택해 그 본래 군(郡)의 중정(中正)을 겸임하게 했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호적를 지녔으나 타지로 떠도는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살피는 책임을 맡아 9품으로 평정해 나열한 뒤, 이부(吏部)에서 관직을 수여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이다.
나중에 사마씨에 의해 제왕(齊王)으로 강등된 조방(曹芳) 시기에는 다시 주중정(州中正)을 증설했다. 구품중정제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 선비들의 품등을 판정하는 권한이 정부의 중정 손에 쥐어져 있었으므로, 중정이 여론을 채택하여 인재의 우열에 따라 품제(品第)의 높고 낮음을 평정했다. 이는 동한 말기 명사들이 인륜을 포폄하며 선거를 조종하던 국면을 어느 정도 변화시켜 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조 이후 북방의 사회 질서는 안정되는 추세로 나아갔고 생산도 점차 회복되었다. 정부는 도로를 보수하고 수리(水利)를 일으켜 교통과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했다. 회복된 야철업(冶鐵業) 중에서는 수력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쇠를 녹이는 수배(水排 수력을 이용한 풀무)가 보급되었고, 실과 비단을 만드는 직조업 또한 흥성해졌다. 상품 교환도 점차 활기를 띠어 위 명제(明帝) 시절에 다시 화폐를 발행하여 통용했다. 낙양과 업성(鄴城)이 모두 날로 번화해졌다. 위나라는 일본의 야마타이국(邪馬台國)과 비교적 빈번한 왕래를 유지했다. 서역 여러 나라의 사신과 상인들도 왕래가 있었다.
이 외에도 문화 방면에 있어서 문학, 철학, 과학기술 모두 중요한 성취를 취득했다.
* 위의 멸망
위나라가 건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제왕(齊王) 조방이 재위해 있을 때 정치를 보좌하던 종친인 조상(曹爽)과 태위 사마의(司馬懿)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조상은 명사(名士) 하안(何晏), 등신(鄧矧), 이승(李勝), 필궤(畢軌), 정밀(丁謐) 등을 중용하여 조정 전례를 고치고 사마의를 배척했다. 사마씨 가문은 동한 이래의 세가대족(世家大族)이었고 사마의 본인 또한 모략이 풍부해 여러 차례 군공(軍功)이 있었다.
238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평정해 요동을 위나라 판도 안으로 귀속시켰다.
249년, 사마의는 조상이 제왕 조방을 받들어 낙양성을 나가 고평릉(高平陵)을 참배하러 간 기회를 틈타 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굴복하도록 압박했고, 조상 및 그 당여들을 처형하고 조정 정치를 독차지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고평릉 사건이라 부른다.
훗날 사마의 및 그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는 회남(淮南)에서 일어난 왕릉(王淩)(가평 3년, 250), 관구검(毋丘儉 정원 2년, 255), 제갈탄(諸葛誕 감로 2년, 257)의 군사 반란과 기타 조정 신하들의 반항을 누르고 사마씨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이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현학(玄學) 명사들은 사마씨에 대해 소극적인 반항 태도를 유지했는데, 그중 혜강(嵇康)은 사마씨에 의해 명교(名教)를 비방하고 훼손했다는 죄명과 관구검을 도와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명으로 살해당했다.
263년, 사마씨는 군대를 보내 촉(蜀)을 멸했다. 2년 후 사마염(司馬炎)이 선양을 명목으로 위를 대신해 진(晉)을 세웠다. 위는 5명의 황제를 거치며 총 46년 동안 존속했다.
* 동오(東吳)의 흥망
솥의 세 발처럼 정립하는 국면이 형성된 후 손권의 주요 군사 활동은 회남(淮南)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주로 촉과 연합해 조위(曹魏)에 대항하는 책략을 채택했다. 동시에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제갈량이 죽고 위·촉의 전쟁이 중단된 후 위는 회남 지역에서 오나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오나라 군대는 장강을 따라 도독(督)을 설치해 군사를 주둔시키고 봉수(烽燧)를 도처에 배치하는 외에도, 소호(巢湖) 남쪽 어귀에 유수오(濡須塢)를 축조해 엄밀히 방어했다. 위 군대는 수군에 한계가 있어 공격이 효과를 내기 어려웠으므로 위와 오는 한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강남 경제의 발전과 대외 왕래
경제 방면에서 손권은 강남을 개척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둔전 제도를 시행했다.
중원 지역에서 빈번하게 전쟁이 났던 것과 달리 강남 지역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북방 사람들이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강남에 노동력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생산 기술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당시 동오 경내에는 많은 산월인(山越人)들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는데, 동오 정권이 “강한 자는 군사로 삼고 쇠약한 자는 호구에 보충한다(強者爲兵, 羸者補戶)”는 정책을 폄에 따라 절대다수의 산월인들이 산악 지역을 떠나 강제로 평지로 이주당해 한인들과 같이 거주하게 되었다.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손권은 둔전 제도를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농교위(典農校尉), 전농도위(典農都尉)를 두어 민둔(民屯) 생산을 관리하게 했다. 장강 양안 지역에는 모두 둔전 구역이 설치되었는데 그중 비릉(毗陵) 둔전 구역[지금의 강소성 상주常州, 진강鎮江, 무석無錫 일대]이 가장 거대했다. 회계군(會稽郡)은 농업 생산이 비교적 발달했다.
아울러 역대로 순차적으로 개통된 절동운하(浙東運河)와 강남운하(江南運河)가 이 시기에 운항 효익을 발휘했다. 강남운하의 운양(雲陽)에서 경구(京口)[지금의 강소성 단양에서 진강]까지의 구간은 산간 지역을 흘러 지나가 운항이 불편했는데 오(吳) 말기에 정비되었다. 운양의 서쪽으로는 파강독(破岡瀆)을 개척해 진회하(秦淮河)와 강남운하를 연결시켰으니, 삼오(三吳) 지역에서 건업(建業)으로 가는 편리한 수로가 되었다.
강남 지역의 경제는 이로 인해 거대한 발전을 획득했다. 당시 어떤 지역의 벼 생산은 매년 두 차례(2모작) 거둘 수 있었다. 영흥(永興)의 벼는 1무당 미곡 3곡 내외를 거두어 이전보다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수공업 방면에서는 야주업(冶鑄業)이 무창(武昌)에서 가장 발달했는데 225년 손권이 일찍이 이곳에서 구리와 철을 채굴하여 대량의 병기를 제조했다. 해염(海鹽)[지금의 절강성 해염], 사중(沙中)[강소성 상숙常熟]에는 관원을 두어 이 두 지역의 염업 생산을 관리하게 했다.
삼오 지역에서는 ‘8잠 비단(八蠶之綿)’이 생산되었고 제기(諸暨), 영안(永安) 일대에서 생산되는 실은 품질이 매우 높았다. 오나라 궁정 내부의 실과 비단 공장은 1,000명이 넘는 생산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이는 모두 강남의 사직업이 이미 초보적인 발전을 갖추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직조 기술이 아직 높지 못했기 때문에 촉의 비단이 중요한 수입 물자가 되었다.
하천과 바다 교통의 필요성 때문에 오나라는 조선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해선(海船)들이 북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남해(南海)의 여러 나라와 자주 왕래했다. 오나라는 건안군(建安郡) 후관(侯官)[지금의 복주시]에 전선교위(典船校尉)를 두고 죄수들을 시켜 배를 건조하게 했다. 장강에 다니는 전선 중에는 위아래가 무려 5층에 달하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병사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230년, 1만 명의 선대가 이주(夷洲)[지금의 대만]에 도달했으니 이는 대륙과 대만의 연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오나라 사신 주응(朱應), 강태(康泰)는 바다를 항해하여 임읍(林邑)[지금의 베트남 남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경내] 등 여러 나라에 이르렀다. 대진(大秦)[로마 제국]의 상인과 임읍의 사신 역시 건업에 온 적이 있었다.
경제 발전은 동오와 외부 세계의 왕래 증가를 가져왔고 강남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여 우번(虞翻), 육적(陸績), 위소(韋昭) 등 한 무리의 저명한 경학가와 문인들을 출현시켰다.
이때 불교가 강남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거사 지겸(支謙)이 낙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왔고 원래 천축(天竺) 출신인 서역 승려 강승회(康僧會)가 조금 늦게 교지(交趾)에서 북상했다. 그들은 건강(建康 오의 수도로 건업의 새 이름)에서 불경을 번역하고 법을 전하니 그 영향이 자못 컸다. 도교(道敎) 역시 남방 민간에서 계속 유전(流傳)되었다.
* 손호가 인덕(仁德)을 닦지 않아 나라가 망하다
손오의 여러 장수들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손씨 가문을 따라 정전(征戰)했으며, 손오는 국가의 전객(佃客 소작농)을 공신들에게 여러 차례 하사해 공신들이 흔히 많게는 수 개 현에 달하는 봉읍(俸邑)을 지녔다. 이로 인해 점차 오나라 무장들이 세습적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제도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강남에는 오군(吳郡)의 고(顧)·육(陸)·주(朱)·장(張)씨 가문처럼 대량의 토지와 하인을 점유하면서 각기 가풍(門風)이 있고 세대로 고위에 처하는 대족(大族)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세습적으로 군대를 이끄는 무장들과 더불어 손오 정권의 주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호강들이 동오의 반할거(半割據) 세력이 되었다.
252년 손권이 죽은 후 오나라는 날로 쇠약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는 오직 먹고 마시고 놀 줄만 알고 게ᄃᆞ가 불법(佛法)을 공경하지 않았다. 조정 정치는 점차 부패로 치달았다.
반면 이때의 위나라는 사마씨가 회남 지역에서 발생한 세 차례의 군사 반란을 소멸한 후 날로 강대해졌다. 사마씨는 먼저 촉을 멸한 후 오를 취한다는 것을 국책으로 삼았으나, 촉을 멸하고(263년) 위를 대신해(265년) 새로운 왕조의 제도를 정립하느라 바빴던 까닭에 오나라 정권은 잠시 지속될 수 있었다.
진 태시(泰始) 5년(269년), 양호(羊祜)가 왕준(王濬)에게 명령해 익주(益州)에서 수군을 소집해 오나라를 공격할 군사 방략을 미리 정했다. 함녕(咸寧) 5년(279년) 겨울, 진 군대가 출병해 장강 이북, 강릉에서 건업 사이에 이르는 다섯 갈래 길로 오나라를 공격했다. 아울러 익주의 수군을 기병(奇兵)으로 삼아 삼협을 나와 강물을 타고 내려가게 하니 태강(太康) 원년(280년) 3월에 건업을 함락시키자 손호가 항복하면서 오나라가 멸망했다. 오나라는 4명의 황제를 거치며 총 52년 동안 존속했다.
오나라의 멸망은 삼국시대가 철저히 막이 내렸다는 표지다. 동한 초평(初平) 원년(190년) 이후 출현했던 전국의 분열 국면은 위·촉·오 3 지역의 국부적인 통일과 대치를 거친 후, 이로써 다시 전국의 통일로 귀결되었다. 또 한 편의 새로운 연극이 무대에 올라온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