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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5)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남방에서 유유(劉裕)가 동진(東晉) 정권을 찬탈하여 송(宋)을 건립한 후, 북방의 북위(北魏) 역시 439년에 북방을 통일하면서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남북조 시기는 불교가 흥성한 시기로, 많은 황제들이 불교를 믿었고 불교 사찰 역시 광범위하게 건립되었다. 불교는 점차 당시 사람들의 신앙이 되었다.

남조(南朝)의 대대적인 불교 흥성

남조 각 대(代)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전대(前代)와 같았으며, 황실 귀족과 일반 문인 학사들 역시 대부분 불교를 숭상하고 믿었다. 송(宋)의 여러 황제 중에서는 문제(文帝)가 불교를 가장 중시했고, 효무제(孝武帝) 역시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 일찍이 약왕사(藥王寺)과 신안사(新安寺) 두 사찰을 건립했다.

양(梁)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더욱 전성기에 달했는데, 무제는 초기에 도교(道教)를 숭상했으나 즉위 후 3년이 되던 해 4월 8일에 승려 2만 명을 이끌고 중운전(重雲殿)의 중각(重閣)에서 친히 글을 지어 발원하며 도(道)를 버리고 부처를 깨달았으며, 애경사(愛敬寺)·광택사(光宅寺)·개선사(開善寺)·동태사(同泰寺) 등의 큰 사찰을 건립했다.

진(陳)의 여러 황제들 역시 양무제(梁武帝)를 본받았는데, 건강(建康)에 본래 700여 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후경의 난(侯景之亂)으로 인해 심각한 파괴를 입었다가 진대(陳代)에 이르러 대부분 복구되었다. 진 무제(武帝)는 일찍이 사부무차대회(四部無遮大會)를 열어 대장엄사(大莊嚴寺)에 몸을 바치기도 했다.

남조 각 왕조의 사찰과 승니(僧尼)의 수는 매우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송에는 사찰이 1,913소에 승니가 36,000명이었고, 제(齊)는 사찰이 2,015소에 승니가 32,500명이었으며, 양은 사찰이 2,846소에 승니가 82,700명이었고, 진은 사찰이 1,232소에 승니가 32,000명이었다. 많은 왕공 신하 등 달관(達官) 및 문인 학사, 나아가 민간에서도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이에 불교 사찰이 강동(江東)에 두루 퍼졌는데, 양무제가 지은 것이 가장 많았고 또한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특히 동태사(同泰寺)는 “문루와 전각, 방과 회랑의 화려한 장식이 구름을 능가하는 9층이었으며, 북위의 영녕사(永寧寺)와 짝할 만했다.”

남조 유송(劉宋)의 흥망 (420년―478년)

* 인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유유(劉裕)

송 무제(武帝) 유유(劉裕)는 동진(東晉)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일찍이 일련의 경제적 조치를 취하여 폐단을 개혁했는데, 예를 들어 사족(士族)의 특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중앙의 핵심 부서에는 한인(寒人, 세력이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을 임용하고, 주군(州郡)의 중진(重鎮)에는 종실(宗室)을 임용했다. 경제적으로는 호강(豪強, 토호 세력)이 호구를 은닉하고 산림을 강제로 점유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명령했다.

유유는 백성을 대함에 매우 어진 덕이 있었는데, 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리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현능하고 선량한 사람을 표창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었다. 원옥(冤獄,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평하게 처리하게 했다. 그는 또 연이어 조서를 내려 도망치거나 반역한 이들을 사면하고 일부 이족(吏族, 하급 관리 계층)·병사·형도(刑徒, 형벌을 받는 죄인)들을 석방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그는 다시 국가의 판사기구(辦事機構, 관공서) 인원수를 감축하도록 명령했다.

유유는 “맑고 검소하며 욕심이 적었고, 엄정하며 법도가 있었으며, 일찍이 주옥(珠玉)과 거마(輿馬, 수레와 말)의 장식을 따지지 않았고 후정(後庭)에는 비단과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없었다.” 한 번은 영주(寧州)에서 호박침(虎魄枕, 호박 베개)을 바쳐왔는데 색이 아주 고왔다. 당시에 장차 북정(北征)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호박이 금창(金創, 칼이나 창에 입은 상처)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유유는 곧 그것을 찧어서 부수어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했다. 관중(關中)을 평정한 후 유유는 한 절색(絕色)의 여인을 얻어 매우 총애하여 이로 인해 정사를 황폐화했다. 대신(大臣) 사회(謝晦)가 간언하자 유유는 즉시 그 여인을 쫓아냈다.

유유는 궁 안팎으로 매우 검소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기거처인 옥촉전(玉燭殿) 침상 머리맡에는 흙으로 만든 가리개가 있었고, 벽에는 칡으로 만든 등롱과 삼베 실로 만든 먼지떨이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유유의 다스림 하에 송 초기 남방은 점차 안정되었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유는 황제를 칭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아들 유의부(劉義符)가 제위를 이었다.

* 원가의 치(元嘉之治)

유유의 아들 유의부(劉義符)가 즉위한 후, 황음무도하여 오직 향락만을 알았다. 즉위한 지 2년 만에 대신(大臣) 서선지(徐羨之) 등에게 폐위되었고, 그의 동생 의륭(義隆)을 황제로 세우니 이가 송 문제(文帝)이며 연호는 원가(元嘉, 424년~453년)이다.

문제는 타고난 총명에 임금의 덕이 있었다. 그는 유유가 국가를 다스리던 정책을 계승하여 국가의 “벼리와 기강이 다 갖추어 갖춰졌고, 조문과 금령이 밝고 치밀했으며, 형벌에는 과조(科條, 법률 조항)가 있었고 작위에는 지나치게 남발되는 품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가 연간에는 정치가 비교적 청명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생산 역시 비교적 큰 발전이 있어 일종 소강(小康) 국면이 출현했다.

유송(劉宋)의 국력이 점차 발전하고 있을 때, 북위는 439년에 북방을 통일하고 끊임없이 남쪽으로 진공해 왔다. 450년(원가 27년), 탁발도(拓跋燾)가 60만 대군을 징집하여 남하했고,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송의 현호성(懸瓠城, 하남 여남)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 유송은 국력이 증강되었기 때문에 이를 틈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북벌(北伐)을 감행했다. 비록 일부 전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오히려 실패로 끝났다. 송 군이 남쪽으로 철수할 때 탁발도가 현호와 항성(項城)을 함락하고 팽성(彭城)을 넘어 회하(淮河)를 건너 과보(瓜步, 강소 육합六合)로 직진하여 장강을 건너 건강(建康)을 탈취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위급한 국면에서 유송 정부는 건강 부근 각 주군(州郡)의 모든 정장(丁壯, 젊고 건장한 남자)을 동원하여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위 군대는 송의 장강 방어가 공고하고 게다가 식량 운반이 이어지지 않자 부득이 군대를 퇴각시켰다. 북위 군대가 퇴각할 때 불지르고 죽이고 노략질하여 “지나가는 군현마다 황폐해져서 남은 것이 없었다.”

* 유송(劉宋)의 멸망

북위와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 문제는 장자(長子) 유소(劉劭)에게 시해당했다. 문제의 셋째 아들 유준(劉駿)이 군사를 일으켜 형인 유소를 죽이고 즉위하니 이가 바로 효무제(孝武帝)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인 전폐제(前廢帝)가 무도하자 무제의 동생인 명제(明帝)에 의해 폐위되었다. 무제와 명제 때에는 종실이 찬위(篡位)할까 염려해 종친들을 대거 도륙했다. 정치도 나날이 부패해 “조세와 부역은 전보다 증가했고, 나라 재정은 과거보다 더욱 빈곤해졌다. 겸하여 군사적 위기 상황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이 입은 상처가 복구되지 못했다.” “소민(小民, 일반 백성)들이 아우성치며 삶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사회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명제가 죽은 후 대권은 금군(禁軍)을 통솔하던 중령군(中領軍) 소도성(蕭道成)이 장악하게 되었고, 그는 연이어 무도한 후폐제(後廢帝)와 순제(順帝)를 폐위했다.

479년, 소도성이 유송의 정권을 빼앗아 국호를 제(齊)로 고치니 이가 세칭 남제(南齊)의 고제(高帝)다.

남조 소제(蕭齊)의 흥망 (479년―501년)

* 고제(高帝)와 무제(武帝)의 청명한 다스림

제(齊) 고제 소도성(蕭道成)은 평민 출신으로 위인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으며, 관대하면서도 엄격하고 맑고 검소하여 기쁘고 노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간언을 잘 받아들여 대중의 명망을 깊이 얻었다. 그가 황제가 된 후 검소함을 제창하여 후궁의 기물과 난간에 모두 구리를 쓰지 않고 철로 바꾸어 장식했으며, 내전에는 황색 사장(紗帳, 얇은 비단 휘장)을 설치했고 궁인들은 자색 피혁 신발을 신었으며 화개(華蓋)에서 금화과(金花瓜)를 없애고 철회정(鐵回釘, 철못)을 사용했다.

고제는 늘 “나로 하여금 천하를 10년 동안 다스리게 한다면 마땅히 황금을 흙과 같은 값으로 만들겠다”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표상이 되어 천하의 기풍을 바꾸고자 했다. 그의 신하들이 일부 남제의 국운이 예전의 도참(圖讖) 수십 개 조항과 부합한다는 기록을 올렸을 때도 고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다.

《제서(齊書)》에서는 순경(孫卿, 순자)이 말하기를 “성인이 천하를 소유함은 받는 것이지 취하는 것이 아니다(聖人之有天下,受之也,非取之也)”라고 했다.

백성에 대해서도 고제는 인덕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가 재위한 4년 동안 취한 하나의 중대한 조치는 호적을 정돈하고 유민(流民)들이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진(晉)·송(宋) 이래로 부역이 번거롭고 가혹하여 백성들이 빈곤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떠돌이가 되었다. 소제(蕭齊)의 호적 조사는 원가 27년의 호적을 기준으로 삼아 무릇 이 해의 호적과 부합하지 않는 자가 적발되면 일률적으로 원래 현으로 돌려보내어 시정하게 하니 이를 ‘각적(卻籍)’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호적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검적관(檢籍官)들이 탐오하고 부정행위를 저지른 결과 “앞의 조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뒤의 교묘한 속임수가 다시 번창했다.” “마땅히 돌려보내야 하는데도 돌려보내지 않고, 돌려보낼 필요가 없는데도 돌려보내니” 돌려보내진 호구들이 불만을 품어 모순이 더 격화되었다.

고제 소도성이 죽은 후 제 무제(武帝)가 즉위하니 연호는 영명(永明, 483년~493년)이다.

무제는 백성들의 질고를 진심으로 염려해 즉위한 후 곧 조서를 내려 “근년에 곡식이 익지 않아 빈궁한 자가 적지 않으니 경사(京師) 양안(二岸)에 그러한 폐단이 많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보내어 헤아려 진휼하게 하라”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장맛비가 자주 내리고 조류가 거듭 차올라 양안의 주민들이 많이 침수되었다. 중서사인을 보내어 두 현의 관장(官長)과 함께 헤아려 진휼하게 하라”라고 했다.

이듬해에 그는 다시 조서를 내려 군대 중의 죄수들을 사정에 따라 돌려보내고 죄수를 대사면했으며, 백성 중의 환과(鰥寡, 홀아비와 과부)와 빈궁한 자들을 구휼하게 했다. 그는 농상(農桑)을 제창하고 장려했으며 재해가 든 해에는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재위 4년에 조서를 내려 “양주(揚州)와 남서주(南徐州)는 올해 호조(戶租)의 3분의 2는 현물로 포(布)를 취하고 3분의 1은 돈(錢)을 받아라. 내년 이후로는 멀고 가까운 여러 주에서 돈을 납부하는 곳은 아울러 포의 값을 감경해 한 필당 400문을 기준으로 하고 예전처럼 절반을 바치게 함으로써 영구한 제도로 삼도록 하라”라고 했다.

무제는 또한 학교를 많이 개설하고 학문이 있는 자를 골라 가르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덕행을 배양하도록 명령했다. 무제는 부국(富國)을 우선으로 삼아 놀이나 사치스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검소함을 제창했다. 그는 일찍이 혼례를 치를 때 사치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무제는 자신의 후사(後事)에 대해서도 특별히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몸에는 여름철 평상복을 입히고 천의(天衣, 하늘의 옷 모양)를 그리며, 머리에는 순수한 검은 물소 뿔로 만든 비녀를 꽂으라. 장례에 쓰는 온갖 기물에는 절대로 보석이나 짜임이 화려한 비단 등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솜을 넣은 겉옷과 얇은 여름옷 각 한 벌씩만 갖춰라. 내가 평소에 차고 다니던 고리가 달린 철제 칼 긴 것과 짧은 것 두 자루는 내 관 속에 함께 넣어라.

제사를 지내고 공경을 표하는 의례는 본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데 있는 법이다. ‘동쪽 이웃이 소를 잡는 성대한 제사는, 서쪽 이웃이 정성으로 소박한 제물을 바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내 영좌(靈座) 위에는 절대로 가축을 잡아서 희생으로 바치지 말고, 오직 떡, 차, 마실 거리, 마른 밥, 그리고 술과 육포만을 올리도록 하라. 천하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이 제도를 똑같이 따르게 하라. 산릉(황제 무덤)을 조성하기 전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오직 채소로 된 음식만을 올려라. 능묘는 만세(萬世)토록 머무는 집이다.

내 마음 한구석에 늘 선왕의 휴안릉(休安陵)이 격식에 맞지 않게 화려했던 것이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이제 동쪽 세 곳의 땅 중 가장 동쪽에 있는 땅을 써서 나를 묻고, 그 이름을 ‘경안릉(景安陵)’이라 하여라. 상례(喪禮)는 매사 아끼고 덜어내어 간소하게 치러야 하며, 백성들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 백관들이 하루에 여섯 번씩 와서 곡을 하던 의식은 중단하고,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발인하는 날에만 예전의 예법대로 와서 조문하게 하라. 여러 옹주들과 후궁들은 산릉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다. 대궐 안의 봉화전(鳳華殿), 수창전(壽昌殿), 요령전(耀靈殿) 세 곳은 내가 직접 다스리던 곳이다.”

무제 시기에는 또 북위(北魏)와 화친을 맺어 변경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고제와 무제의 청명한 통치는 강남의 경제 역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게 했으며 사회도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

* 소제(蕭齊)의 멸망

제 무제가 사망한 후 소도성의 조카인 소란(蕭鸞) 부자가 즉위했다. 그들은 고제와 무제의 자손들이 권력을 탈취할까 두려워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제나라 종실이 서로 잔혹하게 죽이는 와중에 소도성의 족제(族弟 친척 동생)이었던 소연(蕭衍)이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建康)으로 쳐들어와 황제를 칭하고 양조(梁朝)를 건립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