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남조 소량(蕭梁)의 흥망 (502년―556년)
* 어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양무제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은 만승지존(萬乘之尊)의 제왕이었으나, 그의 일상생활은 청고(清苦, 맑고 고고하면서도 궁핍함)하기가 마치 한 명의 고행승(苦行僧)과 같았다. 그가 등극한 후, 스스로 오랫동안 불법(佛法)을 이해해 온 데다 수많은 수련인(修煉人)들의 훈도(熏陶)를 받은 덕분에 정식으로 수련하고자 했다. 이에 궁중에 제단을 쌓고 계(戒)를 받으려 했다. 계를 받는 과정에서 하늘에서는 감미로운 우로(雨露, 비와 이슬)가 내렸고, 또한 두 마리의 공작이 날아와 전각 앞의 계단에 내려앉았다. 이는 양무제를 매우 기쁘게 했다. 양무제는 계를 받은 이후로 계율을 엄격히 지켜, 매일 오직 정오에 한 끼 식사만 했고 오직 채소만 먹었으며, 게다가 겨우 약간의 콩죽과 현미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간혹 일이 바빠 정오 전에 식사를 하지 못하면, 정오가 지나서는 아예 먹지 않았다. 그는 베옷을 입고 이불을 덮었으며, 풀방석에 앉고 짚신을 신었으며 머리에는 칡베 수건을 썼다. 모자 하나를 3년 동안 쓰고 이불 한 채를 2년 동안 덮었다. 50세 때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고 풍류를 즐기지 않았다.
소연은 바쁜 와중에도 정사에 부지런하여, 겨울에는 4경(새벽 1시~3시 사이)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밤이 깊고 날씨가 추워도 여전히 부지런히 저술을 그치지 않아 손이 얼어 터지기도 했다. 그는 정사에 부지런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여 시종들을 친근히 대했고, 죄를 지은 자는 대부분 너그럽게 용서했으며, 사형 판결을 할 때마다 매번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는 작고 어두운 방에 거처하면서 비록 내궁의 지위 낮은 소신(小臣)을 만날 때도 마치 귀빈을 만난 것처럼 대했으니, 비록 고대의 현군(賢君)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이는 드물었다.
소연은 인덕(仁德)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제왕의 자리에 오른 초기에 그는 곧 명령을 내려 후궁의 악부(樂府)를 해산하고, 나이가 들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은 국가에서 봉양하도록 했다. 또한 형벌을 경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현덕(賢德)한 사람을 찾아내고, 억울한 일을 조사해 밝히도록 했다. 더욱 광범위하게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그는 다시 조서를 내렸다.
“공차부(公車府, 상소와 민원을 담당하는 관청)의 방목(謗木)과 폐석(肺石) 옆에 각각 상자(函, 건의함)를 하나씩 설치하노라. 만약 고관대작(肉食者)이 말하지 못하고 재야의 선비(山阿)들이 조정의 정치를 횡의(橫議, 자유롭게 비판)하고자 한다면 ‘방목함(謗木函)’에 글을 던질 것이요, 만약 “나를 따라 장강과 한수를 건너면 큰 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무모하게 갑옷과 방패(犀兕)만 닳게 하면서 훌륭한 인재(龍蛇)들을 시골에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 또는 자신의 재능이 높고 오묘함에도 배척과 억압을 받아 뜻을 통하지 못하여 부열(傅說)이나 강태공과 같은 책략을 품고서도 굴원(屈原)과 가의(賈誼) 같은 탄식만 품고 있는 자, 그리하여 그 이치가 명백함에도 곤경에 처해 조정에 닿지 못하는 인재가 있다면 역시 방목함에 글을 던지라.
또한, 거대한 정치 권력이 약자를 침해하고, 권세 높은 가문이 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짓밟아, 백성이 이미 궁지에 몰렸으나 구중궁궐(九重)에는 그 사정이 도달하지 못해, 스스로 억울함을 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폐석함(肺石函)’에 글을 던지도록 하라.”
소연은 전국에 대대적으로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불교 사찰을 널리 건립했다. 그는 또한 예의를 제창했으며, 자손들이 태평한 시기에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명하여 《천자문(千字文)》을 편찬하게 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고 영향이 가장 큰 아동 계몽 교과서로, 당대(唐代)에 나온 《백가성(百家姓)》과 송대(宋代)에 편찬된 《삼자경(三字經)》보다 앞선 것이다.
* 소량(蕭梁)의 멸망
547년, 동위(東魏)의 대장 후경(侯景)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고징(高澄)과 모순이 발생하자,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하남(河南) 13주의 땅을 바치고 양(梁)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양무제는 이익을 탐하여 소연명(蕭淵明)에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해 후경을 맞이하도록 명령했으나, 결과적으로 동위에게 팽성(彭城)에서 대패하고 소연명이 포로가 되었다.
고징은 후경과 양나라 사이의 모순을 도발하기 위해, 양나라와 다시 화친을 원한다는 뜻을 표시했다. 양무제는 이에 동의하고 후경을 소연명과 교환하겠다고 승낙했다. 갈 곳이 없어진 후경이, 548년 8월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후경은 강을 건너 순식간에 건강(建康)의 석두성(石頭城)과 동부성(東府城)을 함락했으나, 소연이 머물고 있던 태성(台城)은 한동안 함락하지 못했다. 이후 태성은 오랫동안 포위된 상태에서 군량이 끊겨 굶어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에 달했고, 작전할 수 있는 자는 겨우 4천여 명뿐이었다. 이듬해 3월, 후경이 태성으로 쳐들어왔고 소연은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소연이 죽은 후, 후경은 태자 소강(蕭綱)을 괴뢰 황제로 세웠다. 후경이 비록 건강을 함락하긴 했으나 양조 군대와 소씨(蕭氏)의 다른 세력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소연의 일곱째 아들인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대장 왕승변(王僧辯)을 파견해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니, 후경을 연달아 격파하고 승세를 타서 동쪽으로 내려갔다. 양 고요태수(高要太守) 진패선(陳霸先) 도 광주(廣州)에서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다. 후경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황제를 칭하기에 급급하여, 이에 소강을 폐위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황제로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동을 폐위하고 스스로 자립해 국호를 한(漢)으로 고치고 소연의 자손들을 대거 학살했다. 552년, 왕승변과 진패선이 건강을 함락했다. 후경은 도망치려다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난(侯景之亂)은 남조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전란 후, 남조가 장강 하류 이북에 가졌던 토지는 모조리 동위와 북제(北齊)에게 점령당했고, 한중(漢中) 및 장강 중류 이북의 토지는 모두 서위(西魏)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잔인하고 포악한 후경의 군대가 강동(江東) 지역에서 불지르고 죽이고 약탈하면서 사회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로부터 남조의 역량은 더욱 쇠약해졌다.
후경이 멸망한 같은 해에 소역은 강릉(江陵)에서 황제를 칭했고, 동시에 그의 동생 소기(蕭紀) 역시 성도(成都)에서 황제를 칭했다. 이듬해 소기가 군사를 동원해 강릉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서위가 이 틈을 타서 성도를 함락하고 익주(益州)를 차지했다.
양 원제(梁元帝) 소역이 즉위한 지 3년에 그의 조카인 소찰(蕭詧)이 서위와 결탁하여 강릉을 함락하고 소역을 죽였다. 강릉이 함락된 후, 진패선과 왕승변은 소역의 아홉째 아들 소방지(蕭方智)를 세워 건강에서 양왕(梁王)이라 칭했다. 이듬해 소찰이 강릉에서 황제를 칭하고 후량(後梁, 555년~587년)을 건립했으나, 실제로는 서위가 통제하는 괴뢰였다.
북제는 다시 소연명을 황제로 세웠고, 왕승변은 북제와 결탁해 소연명을 건강으로 맞이해 돌아갔다. 진패선은 이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여전히 소방지를 황제로 세우니, 양나라의 정권은 진패선의 손으로 떨어졌다.
557년 진(陳) 영정(永定) 원년, 진패선이 소방지를 폐위하고 스스로 자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진(陳)이라 했다. 이로써 양조는 멸망했다.
남조 진(陳)의 흥망 (557년―588년)
진조(陳朝)의 창립자 진패선(陳霸先)은 오흥군(吳興郡) 장성(長城, 절강 장흥) 사람으로 출신이 한미(寒微)했다. 후경의 난이 폭발한 후, 진패선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경을 토벌하고 점차 권위를 획득했다. 진을 건국할 당시 소찰은 강릉을 차지하고 있었고 소발(蕭勃)은 영남을 점거하고 있었으며, 일부 새로 일어난 토호(土豪)들 역시 각기 한 지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후 진 문제(陳文帝)가 농락과 정벌(征伐)을 겸용하는 방법을 써서 잇따라 많은 할거 세력들을 소멸시켰다.
진조는 문제(文帝)와 선제(宣帝) 시기에 정치 상황이 양나라 말기에 비해 개선되었고, 강남의 경제가 점차 회복되었다. 태건(太建) 5년(573년), 진의 장수 오명철(吳明徹)이 북제가 크게 혼란한 틈을 타서 북벌을 감행하여 여량(呂梁, 강소 행눌 남쪽)과 수양(壽陽)을 차지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회하(淮)와 사수(泗) 땅을 차지했다. 북주(北周)가 북제를 멸한 후 오명철이 다시 북벌을 감행했으나 팽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실패해 포로가 되었고, 진군(陳軍)의 주력이 복멸(覆滅)되니 남조의 역량은 더욱 쇠약해졌다.
583년,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제위를 이었으나 황음무도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또한 궁실을 크게 중수해 막대한 재화를 소모함으로써 경제를 다시 파괴했다. 이때 북방의 수(隋)나라가 이미 강력해져 있었기에, 588년 수군(隋軍)이 대거 남하하여 건강으로 쳐들어와 후주를 포로로 잡으니 진조가 멸망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