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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13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 간언을 받아들이고 절검을 숭상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유가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쿠빌라이는 인재(人才)야말로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임을 깊이 알았다. 그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이를 선발하여 임용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한족 제도를 본떠 관원을 선발·조사·감찰하는 제도를 제정했다. 아울러 당 태종처럼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 능했고, 검소함 또한 숭상했다.

인재는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

쿠빌라이는 자신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주변의 모사(謀士)와 현신(賢臣)들 덕분임을 깊이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람을 쓰는 ‘용인(用人)’의 중요성을 충분히 의식했으며, “인재가 다스림의 근본”이라는 도리를 깨달았다.

일찍이 잠저(藩邸·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저택)에 있을 때부터 쿠빌라이는 당 태종을 본떠 재능 있는 선비들, 주로 유생들을 초빙해 자신을 보좌하게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이름도 높은 ‘금련천막부(金蓮川幕府)’였다. 그는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수차례 조서를 내려 성현(聖賢)의 후손, 유의(儒醫·유학자 출신 의사), 복서(卜筮)뿐만 아니라 천문과 역수에 정통한 자와 산림에 은거한 현인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널리 구했다. 흉금이 아주 넓었던 쿠빌라이는 오직 재능만을 보고 사람을 임용했다. 즉, 진짜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민족과 지역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가 중용한 인재 중에는 몽골인, 한인(漢人 북인), 색목인(色目人), 남인(南人), 서하인(西夏人), 외국인 등이 섞여 있었다.

후대 사람들이 쿠빌라이 시기부터 사람을 4등급으로 나누어 민족 차별 정책을 추진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오해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가 남인(南人 남송에 살던 인물)인 정거부(程钜夫)를 임용하려 할 때, 어떤 대신이 “정거부는 남인인 데다 나이도 젊습니다”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그대들은 남인을 써보지도 않고 어찌 남인을 쓸 수 없다고 아는가! 이제부터 성(省)·부(部)·태(台)·원(院)에는 반드시 남인을 쓸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마찬가지로 남송의 종친이었던 조맹부(趙孟頫)를 임용할 때도, 어떤 이가 그는 남인이니 원나라 사람과 한마음이 아닐까 두려우므로 황제의 주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으나, 쿠빌라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임용했다.

실제로 원조는 신분의 차별이나 등급 제도를 특별히 제정하지 않았다. 현대 연구자들이 가장 최하층에 처해 있었다고 여기는 ‘남인’의 경우에도, 그들이 어떤 잔혹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상등인’으로 여겨진 몽골인 중에서도 가난에 허덕이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1314년 과거 시험을 다시 열었을 때 네 부류 사람의 합격 정원을 구분하기는 했으나, 이것만으로 보편적인 차별이 존재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쿠빌라이는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여, 인재들이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유병충(劉秉忠)은 일찍이 그에게 “현명한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대목수가 재목을 쓰는 것과 같아서, 그 크고 작음과 길고 짧음에 따라 먹줄과 자를 들이대어 씁니다”라고 건의한 바 있다. 명유(名儒) 허형(許衡)은 유가 경전에는 깊이 통달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 경험이 부족했기에, 쿠빌라이는 그를 재상으로 임용하지 않고 교육 등을 관장하게 했다. 반면 아합마(阿合馬) 등은 이재(理財·재물 관리)에 뛰어났으므로 쿠빌라이는 그 특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재상으로 임용해 재정을 담당하게 했다. 역사가들이 쿠빌라이를 두고 “도량이 넓고 사람을 알아보고 잘 임용했다(度量恢弘,知人善任)”고 평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평가다.

忽必烈还知人善用,使得人才都可以发挥各自的长处。图为清 陈士倌《圣帝明王善端录(宋元明).元世祖》。(<a href="https://painting.npm.gov.tw/Painting_Page.aspx?dep=P&PaintingId=6820"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国立故宫博物院提供)</a>

쿠빌라이는 또한 사람을 알아보고 잘 임용하여, 인재들이 모두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사진은 청 진사관(陳士倌)의 《성제명왕선단록(聖帝明王善端錄)·원세조》이다.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관리의 선발·심사·감찰을 중시

인재를 중용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는 각급 관리의 선발, 심사 그리고 감찰을 매우 중시했다.

1264년 아직 남송을 정벌하기 전, 쿠빌라이는 제후들이 대대로 관직을 지키던 세습을 폐지하고 로(路)·부(府)·주(州)·현(縣)의 관리를 정리하여 병합했으며, 천전법(遷轉法·관직을 옮겨 소통시키는 법)을 추진하여 관리의 임면권을 중앙으로 회수했다.

1277년 쿠빌라이의 조서와 승인 아래 중서성은 《순행선법체례(循行選法體例)》를 반포해, 조정 관원, 외직 관원, 조정 관원, 외지 로(路)의 관원, 장관(匠官·기술관)의 순환과 승진 등에 대해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했다. 또한 추밀원, 어사대, 선정원 등 삼대 기구가 예하 관리를 위임할 때 자체적으로 선발해 상주(上奏)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타 기구의 관원은 모두 중서성의 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관원의 승진에 있어서 종7품 이하는 이부(吏部)가 주관하고, 정7품 이상은 중서성이 책임졌으며, 3품 이상의 고위 관원은 황제가 직접 결단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떻게 관직에 나아갔을까? 수당(隋唐) 이래로 관원을 선발하던 과거제는 오구데이 시절 한화(漢化)된 거란 대신 야율초재가 제안해 오구데이의 인정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 통치하의 회하 이북 중원 지역에서만 일시적으로 시행되었을 뿐이라서, 시험의 규모나 조정의 중시 정도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오구데이가 세상을 떠난 후 구육, 뭉케 시기에는 과거 제도가 끝내 전면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쿠빌라이 시기에 이르러, 비록 그가 여러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를 통한 관리 선발 제도를 시행하는 데 지속적으로 동의하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쿠빌라이 재위 기간에는 과거제가 추진되지 못했다. 대신 주로 천거(薦舉), 특소(特召), 이진(吏進), 승음(承蔭) 등 몇 가지 경로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다.

천거란 각급 관원이 출신, 품행, 재능에 따라 인재를 추천해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방식이었다. 중서성 등 고위 관원 및 지방의 핵심직은 모두 황제가 훈구 귀족, 명문 가문, 유리(儒吏 유학자 출신 하급관리) 출신의 재능 있는 사람을 임명했는데, 그중 많은 이가 귀족 출신이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던 케식(怯薛軍·친위대)에서 나왔다.

이외에도 천거되는 인재들은 각지 학교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학교에서 선발된 관리가 원조(元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았다. 오구데이가 일찍이 지방에 학교를 건립하도록 명령한 바 있었는데, 1261년 쿠빌라이는 각지에 학교관(學校官)을 두어 지방 학교의 교육을 전담하게 했다. 학생들이 졸업하면 주·현의 행정 장관이 추천하고 어사가 심사한 후, 교사나 이원(吏員)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1269년 조정은 각 로(路)에 몽골어 학교를 설립하도록 명령하여, 각 로와 부의 관원 및 민간의 자제들이 모두 입학할 자격을 갖추게 했다.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한림 고시에 응시하여 학관(學官)이나 역사(譯史·번역을 담당하는 관리)가 될 수 있었다. 1271년 쿠빌라이는 대도(大都)에 몽골국자학(蒙古國子學)을 건립하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학생의 자격은 몽골인, 한인 관원, 그리고 케식 관원의 자제로 제한되었다. 학생들은 배우고 얻은 바가 있어 학교 시험을 통과하기만 하면 관직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다.

1287년 조정은 국자학(國子學)을 설립해 주로 유가 경전을 학습하게 했다. 학생들은 국자학 시험을 통과하면 관직을 제수받았다. 1289년에는 다시 회회국자학(回回國子學)을 설치하여 공경대신과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입학할 수 있게 했으며, 이들은 각 부서의 역사(譯史 통역이나 번역)가 될 수 있었다. 문재(文才)가 있는 어린아이들은 지방에서 추천을 받아 국자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원대(元代)에는 의학, 음양학 등 전문 학교를 두어 전문 관리를 양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재위 기간 동안 몽골 원나라 조정은 2만여 개의 공립 학교를 세워 모든 아동이 일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287年,朝廷设立国子学,学习内容主要为儒经。示意图,图为北京国子监的辟雍大殿。(Shutterstock)

1287년, 조정이 국자학을 설립해 주로 유교 경전을 학습하게 했다. 시의도, 사진은 북경 국자감의 벽옹대전(辟雍大殿).

특조(特召)란 황제가 특출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직접 불러 쓰는 것으로, 이는 쿠빌라이가 잠저 시절에 사방에서 유능한 인사를 초빙하던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예컨대 1281년 “전대 성현(聖賢)의 후손, 유의(儒醫), 복서(卜筮), 천문과 역수(曆數)에 정통한 자 및 산림에 은거한 현인을 구한다”는 조서를 내린 것이 그러했다.

승음(承蔭)은 말 그대로 몽골 귀족과 각 민족 고위 관리의 자제가 세습이나 음보(蔭補)의 방식으로 관직을 맡는 것으로, 대개 적장자 상속제를 채택했다. 예를 들어 케식 사대(四大) 핵심가문의 자손은 영원히 숙위(宿衛)의 장관이 되었고, 공신이나 군공(軍功)이 있는 군관은 능력이 있는 자제를 음보할 수 있었으며, 사망한 군관의 관직은 그 자손이 규정에 따라 물려받았다. 소수민족 지역의 일부 토관(土官)도 세습이 허용되었다. 다만 쿠빌라이는 이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었으며, 인원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관장(官場)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았다.

이진(吏進)이란 각 부서의 이원(吏員·하급 실무직) 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발탁해 관원(官員)의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이는 쿠빌라이 시기 관리를 선발하는 가장 주요한 경로였다. 이원의 선발과 고핵 또한 구체적인 규정이 있었는데, 상당 부분 한족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관청의 이원이 되려는 사람은 먼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오경(五經) 중 한 경전에 통달하거나, 산술을 알거나, 문장에 능하고 언변이 날카로우면 선발될 수 있었다. 선발된 이원에 대해서는 매년 심사를 진행해, “품행이 순수하고 신중하며 유학의 지식과 실무 능력을 겸비한 자를 상(上)으로 삼고, 재주와 식견이 밝으며 실무에 숙련된 자를 그다음으로 삼았으며, 근무 기간이 비록 많더라도 재능에 취할 점이 없는 자는 올리지 못하게 했다.” 이는 비록 과거 시험은 없었지만, 관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여전히 유가 문화를 진지하게 공부해야 했으며 스스로의 덕행과 수양에 주의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심사에서 ‘상(上)’이나 ‘차상(次上)’으로 평가받아야만 상급 기관의 이원(吏員)으로 추천될 가능성이 있었다. 쿠빌라이는 매년 각급 관원(官員)이 상급 기관에 이원을 추천하여 조정이 임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원은 현(縣)에서 시작해 주(州), 부(府)를 거쳐 로이(路吏)가 된 후, 염방사(廉訪司)로 선발되었고, 다시 어사대나 행태(行台)의 서리(書吏)를 거쳐 성(省)·부(部)의 이원으로 승진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6품이나 정7품의 관직에 출세할 수 있었다.

관원의 심사 주기에 대해 쿠빌라이는 수도의 관청과 행성(行省)의 군관은 30개월을 ‘1고(一考 심사)’로 삼아, 1고마다 직급을 한 등급 올리도록 규정했다. 외직 관원은 3년을 1고로 삼아, 1고마다 품계를 한 단계 올리거나, 2고에 한 등급, 3고에 두 등급을 올렸다. 심사 기준에는 현지의 호구가 늘어났는지, 전지(田地)가 증가했는지, 소송이 줄었는지, 도적이 자취를 감추었는지, 세금이 공평하게 부과되었는지 등 다섯 가지 사항이 포함되었다. 이 다섯 가지 일을 모두 해내면 당연히 관직이 한 등급 올라갔고, 다섯 가지 중 세 가지만 잘 처리하면 중등 관원으로 분류되어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승진했다. 만약 다섯 가지 일을 모두 해내지 못했다면 관직이 강등되거나 유배를 가야 했다.

내외 관원을 막론하고 ‘1고’를 채운 후에는 반드시 소속 기관에서 일종의 감정서인 ‘해유(解由)’를 제공해야 했다. 그 내용에는 관원의 조상 3대, 나이와 본적, 성씨와 민족, 출신, 관직에 나아간 이력, 과오 유무, 정치적 업적이 어떠한지, 누가 보증했는지 등이 포함되었다.

이외에도 1262년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장부를 두고 양식을 세우라(置簿立式)”고 하여 관원의 정치적 업적 등을 전담해서 기록하게 했는데, 이는 후일 ‘행지부(行止簿 일종의 공무원 인사기록카드)’로 발전했다. 행지부와 해유는 관원의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관리를 감찰해 탐욕과 부패를 엄벌

관원의 선발과 심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는 그들에 대한 감찰 강도를 높이는 데 주목했다. 중앙에 설치된 어사대(간칭 중대)는 모든 관리의 선악과 정치적 득실을 규찰하는 곳으로, 산동·하북·하남 등 성(省)의 관원들을 직접 감찰했다. 지방에는 동남쪽 여러 성을 감찰하는 강남제도행어사대(江南諸道行禦史台 약칭 남대)와 서남·서북 여러 성을 감찰하는 운남제로행어사대(雲南諸路行禦史台 약칭 서대)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다시 여러 도(道)에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를 설치했다가 후일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로 개칭했다. 이로써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감찰 체계가 형성되어, 지방 행정 기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실질적인 감찰 작용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제형안찰사에 복무하는 관원에 대해서도 조정은 규정을 두었다. “안찰사의 관원 중 명성과 행적이 좋지 않은 자가 있으면 어시대가 조사해 비록 임기가 차지 않았더라도 주청해 교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른바 주청하여 교체한다는 것은 직위를 해제하고 조사를 진행하며 다른 인원을 파견해 교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안찰사 관원들을 단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지 못했고, 탄핵과 규찰은 반드시 공정하고 공평해야 했다.

如此一来,从中央到地方形成了垂直监察系统,可以不被地方行政机构干扰,切实发挥监察作用。示意图,图为清金门镇总兵署衙门大堂。(曾晏均/大纪元)

이와 같이 함으로써,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감찰 체계가 형성되어, 지방 행정 기관에 의해 간섭받지 않고 확실하게 감찰 작용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림은 청 금문진 총병서(金門鎮總兵署) 아문(衙門)의 대당(大堂). (쩡옌쥔/에포크타임스)

관원들의 뇌물 수수를 방지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향후 성(省)·원(院)·육부(六部) 등 여러 관청의 관원은 아무런 연고 없이 관직을 구하거나 임명을 기다리는 관원과 사사로이 연회를 함께하여 청탁을 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지방 관원들이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을 금하기 위해, 그 가족들이 권력을 믿고 장사를 해 이익을 취하거나 고리대금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동시에 “비록 정치적인 성적이 있더라도 비석을 세우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기존에 이미 건립된 것이라도 만약 뇌물죄를 범하면 즉시 철거하도록 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끝까지 추궁해 다스린다”라고 규정했다.

관원들이 직무를 유기하거나 업무 처리에 힘쓰지 않는 경우에도 “이치에 따라 추궁해 다스렸다.” 아울러 쿠빌라이는 위법한 관원을 탄핵하는 것을 장려했다.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법함을 탄핵하거나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자가 있다면, 따로 논의하여 관직을 승진시킨다.” 즉, 탄핵이 사실로 밝혀지기만 하면 탄핵을 제기한 자의 관직이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는 탐욕과 부패를 도모하려는 관원들에게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했다.

간언을 잘 받아들이다

쿠빌라이는 자주 역사 속의 명군(明君)들을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가 흠모했던 당 태종은 간언을 잘 받아들인 천고(千古)의 제왕이었다. 쿠빌라이가 잠저에 있을 때나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그리고 천하를 통일한 후의 행적을 보면, 그 역시 언로(言路)를 널리 열고 대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인 명군이었다.

1268년 쿠빌라이는 정식으로 어사대를 설치하고 타차르(塔察兒)를 어사대부로, 장웅비(張雄飛)를 시어사(侍御史)로 임명했다. 중앙 최고 감찰 기관으로서 어사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직책 또한 가지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타차르와 장웅비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경들이 대관(台官)이 되었으니 직책은 바른 말을 하는 데 있다. 짐이 그대들의 군주이니 만약 행하는 바가 선하지 못하다면 마땅히 극진히 간해야 하거늘, 하물며 백관들이겠는가! 그대들은 짐의 뜻을 마땅히 알라.”

쿠빌라이는 대신들과 역사 인물에 대한 견해를 자주 토론했다. 예컨대 당 태종이 ‘거울’로 여겼던 위징(魏徵)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1277년 어느 날, 대신 왕사렴(王思廉)이 쿠빌라이에게 《자치통감》을 강론하면서 위징이 황제의 안색을 거스르며 직간하고, 장손황후가 옆에서 권유해 말린 이야기를 전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듣고 왕사렴에게 이 이야기를 대신들과 후궁의 황후, 비빈들에게도 들려주라고 했다. 그들이 위징과 장손황후를 본보기로 삼아 과감하게 간언하기를 바랐으며, 자신 또한 당 태종을 본받아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다.

대신들이 과감히 간언할 수 있도록 쿠빌라이는 때로 직언하는 자에게 포상을 내렸다. 예컨대 요천복(姚天福)이 조정에서 권세를 쥔 신하를 탄핵하자, 쿠빌라이는 그가 강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마치 호랑이와 같다며 특별히 ‘바아스(巴兒思·몽골어로 호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유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쿠빌라이는 ‘예(禮)’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사만(撒蠻)을 임명해 궁정 인원들의 예의를 감독하게 했다. 하루는 쿠빌라이의 근신(近臣)인 볼로(孛羅)가 명을 받고 궁을 나가 일을 보려다, 걸음걸이가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만에게 붙잡혀 갇힌 채 징계를 받았다. 쿠빌라이는 오랜 시간 기다려도 볼로가 돌아오지 않자 물어본 후에야 그가 갇힌 사실을 알았다. 사만을 불러 볼로를 풀어주라고 하자 사만이 답했다. “법령이 폐하에게서 나왔거늘 폐하께서 스스로 이를 어기신다면, 어찌 신하들을 꾸짖으시겠습니까?” 쿠빌라이는 이에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볼로는 처벌을 다 받은 후에야 풀려났다.

남송이 멸망한 후 쿠빌라이는 강남의 송조 종실 및 호족 대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고자 했다. 대신 엽이(葉李)가 이에 대해 간언했다. “송은 이미 천명에 귀순했고 그 백성들이 농토에서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 지금 까닭 없이 이주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며, 만에 하나 간사한 사람이 그 틈을 타고 일어난다면 나라에 이롭지 않습니다.” 쿠빌라이는 마침내 이주 생각을 접었다.

쿠빌라이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정 신하들 중에 어리석을 정도로 강직하게 충언하는 자가 있으면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내 뜻을 거스르는 자라 할지라도 죄를 준 적이 없다. 대개 충성스럽고 곧은 이를 기르고 아첨하고 간사한 이를 물리치고자 함이다.” 쿠빌라이의 이러한 태도는 충직한 신하들이 감히 말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大臣王思廉在给忽必烈讲解《资治通鉴》时,说了魏徵犯颜直谏、长孙皇后从旁劝谏的故事。图为《清陈士倌圣帝明王善端录册‧唐太宗三》。(公有领域)

왕사렴이 쿠빌라이에게 《자치통감》을 강론할 때, 위징이 당 태종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간언하고 장손황후가 옆에서 간언을 권한 이야기를 말했다. 그림은 《청 진사관 성제명왕선단록책(聖帝明王善端錄冊‧)·당태종 3》이다

검소함을 숭상하다

쿠빌라이가 재정 관리를 중시한 목적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반면 개인 생활에 있어서 그는 검소함을 숭상하고 순박한 풍조를 제창했다. 대신 왕운(王惲)은 상소문에서 쿠빌라이를 두고 “즉위하신 이래 몸소 검소함을 행하시어 순박한 풍조로 돌아가기를 생각하셨으니… 금장식을 없애고 말안장과 신발을 소박하게 하셨다”라고 적었다.

쿠빌라이는 귀하고 화려한 옷과 모자를 결코 착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입었던 옷들을 상자에 보관해 두어 후세 자손들이 근면하고 검소한 풍조를 유지하도록 교육했다. 사서에 따르면 원나라의 세 번째 황제인 무종(武宗)이 황태후와 함께 대안각(大安閣)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각 내부에 오래된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환관 이방녕(李邦寧)에게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물었다. 이방녕은 세조(쿠빌라이)께서 가죽 띠를 저축해 두시던 상자라고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이를 보관해 자손에게 남김으로써 내가 소박하고 검소했음을 보게 하여, 화려하고 사치 부리는 것에 대한 경계로 삼으라’ 하신 성상(聖上)의 교훈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종은 이에 상자를 열도록 명령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경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당시 어떤 종친왕(宗王)이 옆에 있다가 즉시 말했다. “세조께서 비록 신성(神聖)하시지만 재물에는 인색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방녕은 동의하지 않고 반박했다.

“세조의 한 마디 말씀은 후세의 법도가 되지 않음이 없었고, 한 번 주고 빼앗으심은 공과 죄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한 천하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비록 풍부할지라도 만약 절약해 쓰지 않으면 반드시 고갈에 이르게 됩니다. 선조 이래로 해마다 걷는 세금이 이미 부족해졌고, 또 수차례 종번(宗藩) 모임을 가지며 비용이 헤아릴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대지 못하니, 반드시 가혹하게 거두어 원망을 사게 될 터인데 그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무종과 태후는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쿠빌라이는 이처럼 자신을 다스림이 매우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후궁의 후비들에게도 낭비하지 말 것을 자주 권계했다. 쿠빌라이와 정이 깊었던 차비(察必) 황후 역시 천성이 어질고 현명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녀는 몸소 궁인들을 이끌고 낡은 활시위를 엮어 옷을 만들고, 양의 다리 가죽을 가져다 꿰매 양탄자를 만들었으며, 전통적인 모자에 앞챙을 더해 햇볕을 가리기도 했다.

또한 쿠빌라이는 막북(漠北) 초원의 특산인 푸른 풀을 궁중에 옮겨 심었는데, 이를 황궁 앞의 돌계단 아래에 심고 난간으로 둘러친 후 이름을 ‘사검초(思儉草 검약을 생각하게 하는 풀)’라 지었다. 후인들에게 검소함을 생각하게 하고 “태조(칭기스칸)께서 창업하신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사(元史)》에는 쿠빌라이가 궁중에서 사용하는 양초에 채색 그림을 그려 넣지 말도록 명령했고, 사용하는 말안장, 장화, 화살촉 등에도 황금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292년, 무슬림인 훌부쿠(忽不木)가 커다란 진주를 쿠빌라이에게 팔려고 했으나, 쿠빌라이는 그것이 쓸모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참고자료: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28/n1305350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