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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성세의 화려한 장을 연 왕조 수조(陏朝) (2)

(581년—618년)

심연(心緣)

【정견망】

양광(楊廣)은 수 문제 양견(楊堅)의 둘째 아들로, 또 다른 이름은 양영(楊英)이다. 양견이 수조를 창건한 후, 양광은 진왕(晉王)에 봉해졌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양견은 왕위(王位) 외에도 양광을 병주(並州, 지금의 산서 태원으로 춘추 시대 진晉의 영역) 총관으로 삼았다.

수조가 남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할 때, 막 스무 살이 된 양광이 원정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실제로 군사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한 것은 하약필(賀若弼)과 한금호(韓擒虎) 등의 장수들이었다. 진을 멸한 후 양광은 매우 담대하고 기량 있는 모습을 보였다. 건강(建康, 현재의 남경)에 진주해 진 후주(陳後主)의 간신들만 처형했을 뿐, 진숙보(陳叔寶)와 황후 등은 경성(京城)으로 압송했다. 또한 창고를 봉인하도록 명령하여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 이후 양광은 태위(太尉) 자리에 올랐으며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웠다. 서기 590년에는 명을 받고 강남으로 내려가 양주(揚州) 총관으로서 강남 고지혜(高智慧)의 반란을 평정했고, 600년에는 북상하여 침입해 온 돌궐(突厥)을 격파했다. 이러한 공로는 다른 황자(皇子)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광은 전형적인 이중인격자였다. 그는 허영심이 아주 강해서 은밀히 남몰래 즐거움을 탐하는 간사함이 있었고, 건달 자제의 비열한 소양과 뛰어난 문무 재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자신을 숨기는 데 매우 능했다. 예컨대 황위를 다투는 과정에서 그는 문제와 독고 황후를 속이는 데 대단히 치밀했다.

양광은 부모님이 모두 매우 절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지극히 검소한 척 가장했으나 실상은 매우 사치스러웠다. 부모님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아름다운 첩들을 모두 숨기고 자신은 정처(正妻)인 소씨(蕭氏 훗날의 소황후)와 함께 문앞까지 나가 직접 맞이했다. 또한 나이 들고 용모가 평범한 노파들에게 누더기 옷을 입혀 부모를 시중들게 했다. 양광의 이러한 위장은 부모의 환심을 샀다. 이외에도 그는 부모 곁의 시종들에게 자주 은혜를 베풀고 선물을 보냈으며, 그 사람들은 돌아가 양광에 대해 좋은 말만 했다. 이 두 가지 작용이 더해져 양견 부부는 갈수록 둘째 아들 양광을 좋아하게 되었고, 도량이 좁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태자 양용(楊勇)을 싫어하게 되어 마침내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양광을 태자로 세웠다.

태자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양광은 죄명을 조작하여 동생 양수(楊秀)를 모함했고, 그 역시 양견에 의해 서인으로 폐위되었다. 604년, 양견이 인수궁(仁壽宮)에서 병석에 눕자 황위를 탐내던 양광은 대신 양소(楊素)와 모의했다. 그러나 양소의 답장이 양견의 손에 들어가면서 양견은 극도로 분노했다. 이후 양견은 자신이 총애하던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양광에게 희롱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사람을 시켜 양광을 불러오게 한 뒤 그를 폐위하고 다시 양용에게 위를 물려주려 했다. 양견의 곁에 양광이 배치해 둔 친신이 급히 이 소식을 양광에게 보고했다. 양광은 즉시 양견 옆에서 시중들던 사람들을 물리고 자신의 측근들로 교체했다. 그날 양견은 6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역사서에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어 훗날 사람들은 양광이 독살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중병을 앓던 양견이 충격을 받아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 양제 즉위 후의 발전

양광은 즉위한 후 문제 시절의 각종 제도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그중 일부 제도를 한층 더 개혁하고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가장 큰 공적은 문제(文帝)의 기반 위에서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과거제(科舉制)를 발전시킨 것이다. 주로 진사과(進士科)를 신설해 평민 출신 독서인들이 발탁될 수 있는 극히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둘째, 법률을 수정해 주로 수 문제 말년의 비교적 가혹했던 법률을 취소했다. 수 문제는 말년에 몇 가지 실책을 범했는데 가혹한 법률이 그중 하나였다. 수 양제는 일부 잔혹한 법률 조항을 폐지하거나 처벌 수위를 경감했다. 그러나 수 양제 역시 통치 말기에는 그의 아버지처럼 매우 잔인해졌고, 더 이상 법에 따라 일하지 않으며 독단성이 매우 강해졌다.

셋째, 학문을 진흥하는 정책을 펼치고 흩어진 서적들을 수집하여 보호했다. 양광은 양견에 의해 폐지되었던 국자감(國子監), 태학(太學) 및 주현학(州縣學)을 회복시켰다. 또한 사람들을 조직하여 《장주옥경(長洲玉鏡)》 400권과 《구우도지(區宇圖志)》 1,200권을 편찬하게 했으니, 이는 중국 고대 전적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넷째, 체제 측면에서 수 양제는 주(州)를 군(郡)으로 고쳤다. 동시에 “전국의 크고 작은 관리는 모두 이부(吏部)에서 임명한다”고 규정했으며, 현의 보좌관은 반드시 타 군 출신 사람을 쓰도록 하여 지방 호족이 본지의 정무를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지방 장관 및 주요 막료들이 매년 말 중앙에 올라와 업무를 보고하는 ‘상고과(上考課)’를 규정했다. 중앙에서는 자주 사신을 보내 각지를 순찰하며 주현 관리들의 정치적인 성적을 감찰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관리들의 비리를 정돈하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는 데 유익했다.

다섯째,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605년 수 양제는 낙양성(洛陽城) 건설을 명령했다. 당시 수도 장안(長安)은 나라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어 동쪽으로 가는 길이 원활하지 않아 정령(政令)의 전달에 지장이 있었다. 낙양은 국가의 중심 지대에 위치하여 강남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북방을 통제하며 국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장안에 있을 때 각지의 식량을 장안으로 운송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어 낭비가 심했다. 낙양에서는 식량을 수송받기가 매우 편리해져 백성들의 부담도 그만큼 경감될 수 있었다. 새로 지어진 낙양성은 궁성(宮城), 황성(皇城), 외곽성(外郭城)으로 구성되었다. 외곽성은 대성(大城)으로 둘레가 70리에 달했다. 안쪽의 황성은 문무 관청이 공무를 보던 곳이었고, 더 안쪽의 궁성은 둘레가 30리에 달했다.

수조는 문제와 양제의 통치를 거치며 양제 즉위 초년에 이르러 창고가 가득 차고 국고가 풍족하며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는 흥성한 국면을 맞이했다.

주요 특징으로는 농업 인구의 급증, 경작 면적의 확대, 국가 식량 창고의 풍족함이었다. 수나라 초기에는 호구가 359만 9천여 가구에 불과했으나 진을 멸망시킨 후 50만 가구를 얻어 전국의 총 가구 수는 거의 410만 가구, 인구는 약 3,000만 명에 달했다. 606년에 이르러 전국의 가구 수는 890만 7천 여 가구, 인구는 4,600만 여 명에 달했다. 불과 26~27년 사이에 가구 수는 400만 이상 늘어났고 인구는 1,600만 이상 증가했다. 인구가 이처럼 급증한 것은 호적을 정비해 누락된 인구를 찾아낸 덕분이기도 하지만,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인구 급증은 농업 생산에 대규모 노동력을 제공하여 경작지 면적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수많은 수리 시설을 새로 수리하거나 개조했다. 예컨대 수주(壽州, 안휘 수현)에서 중수한 작피(芍陂)는 5,000여 경(頃)에 달하는 농경지에 물을 대어 주었다.

수대 창고의 풍성함은 후대 사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 수 문제 말년에 이르러 “천하의 축적이 50~60년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양제 초년에는 공현(鞏縣) 동남쪽 평원에 낙구창(洛口倉)을 설치했는데, 창고 성 둘레가 20여 리에 달했고 3,000개의 움을 파서 움 하나당 8,0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여양창(黎陽倉, 하남 준현 여양진) 및 영풍창(永豐倉, 섬서 화음) 등에 쌓아둔 식량 또한 매우 풍부했다.

이 시기 수공업 역시 전대(前代)의 기반 위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주로 직물업과 도자기 제조업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하북(河北)은 대대로 직물업의 중심지였는데, 이 시기 상주(相州)에서 생산된 능문세포(綾紋細布)는 대단히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촉군(蜀郡)의 비단 능금(綾錦) 조각 기술의 오묘함은 전국 으뜸이었다.

수대(隋代)는 중국 도자기 생산 기술의 중요한 발전 단계였다. 두드러진 성과로는 하남 안양과 산서 서안의 능묘에서 백유자(白釉瓷 흰색 유약을 바른 백자)가 출토된 점이다. 출토된 백자는 바탕이 견고하고 색택이 영롱하며 조형이 생동감 있고 아름다워 중국에서 비교적 초기에 등장한 백자에 속한다. 수대 청유자(青釉瓷 청색 유약을 바른 청자)의 생산은 더욱 광범위하여 하북, 하남, 섬서, 안휘 및 강남 각지에서 청자가 출토되었으며 여러 곳의 수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당시 조선(造船) 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시의 오아(五牙) 대전함(大戰船)은 배 위에 5층 눅각이 있어 높이가 무려 100여 척에 달했고, 전후좌우에 높이 50척의 박간(拍竿) 6개를 설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었다. 사서에 따르면 양제가 강도(江都)를 유람할 때 탄 ‘용주(龍舟)’는 제작이 대단히 정교해서 높이 45척, 너비 50척, 길이 200척에 달했다. 배의 몸체는 4층으로 나뉘어 상층에는 정전(正殿), 내전 및 동서 조당(朝堂)이 있었고, 중간 2층에는 120개의 방이 있었다.

수 양제의 대운하 개착

수 양제가 재위 기간 동안 추진한 가장 큰 공사는 대운하(大運河) 개착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남북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강남으로 유람을 가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605년, 수 양제는 명을 내려 황하에서 변수(汴水)로 들어간 뒤 다시 변수에서 회하(淮河)로 들어가는 통제거(通濟渠)를 개착 및 준설하게 했다. 이어서 회하에서 장강으로 들어가는 한구(邗溝), 경구(京口 강소 진강)에서 여항(餘杭 절강 항주)에 이르는 강남하(江南河), 심수(沁水)를 끌어들여 남쪽으로는 황하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탁군(涿郡, 지금의 북경)에 이르는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했다. 이 운하들이 남북으로 연결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대운하(大運河)다.

대운하는 북쪽의 탁군에서 남쪽의 여항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5,000여 리나 굽이쳐 흐르며 대단히 중요한 수운의 대동맥이 되었다.

대운하는 수 왕조의 남방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통치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남방의 물자가 당시의 낙양과 장안으로 원활하게 도달하게 함으로써 군사와 정치에 유익함과 동시에 남북의 문화 교류도 강력히 촉진했다. 대운하는 이후 중국 역사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훗날 원조, 명조, 청조가 북경에 도읍을 정한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대운하의 물자 공급 능력과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개착하는 데는 전후 6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의 재위 기간이 14년이었음을 감안할 때 대운하 하나만으로도 수 양제의 역사적 공적은 인정할 수 있다. 당대 정관의 치(貞觀之治)가 이룬 공적 속에는 당연히 대운하의 요소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수 양제 시대의 대외 관계

*서역 개발

606년, 양광은 대규모 서역 개발에 나섰다.

이전까지 수조는 주로 장액(張掖)에서 서역 상인들과 무역을 진행했으며, 수조에서는 황문시랑(黃門侍郎) 배구(裴矩)가 구체적인 사무를 담당했다. 훗날 배구가 상소를 올려 서역을 개발하고 경영할 것을 주장하자 수 양제는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수 양제는 주로 돈으로 서역 상인들을 유인하여 조정에 와 무역하게 했으며, 서역 상인들이 지나가는 지방 주현에 그들을 정성껏 대접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대등한 무역이 아니라 무역이란 이름을 빌려 자신의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했다.

수 양제는 서역을 개발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여 서돌궐의 처라가한(處羅可汗)을 격파함으로써 큰 장애물을 제거했다. 또한 토욕혼(吐谷渾)을 격파하고 그 영토에 4군을 설치한 뒤 관리를 파견해 다스림으로써 서역과의 원활한 소통을 보장했다.

본래 서역과의 무역은 양측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어야 했으나, 수 양제의 조공(朝貢)식 무역 명령 하에서는 주로 서역에 수조의 부유함을 과시하는 데 치중했으므로 수조는 기본적으로 손해를 보았다. 서역 상인들이 돌아갈 때 수많은 하사품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에 거액의 재정을 소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부담 역시 극심하게 증가시켰다.

610년 정월, 수 양제는 낙양에서 백희(百戲 기예 곡예 노래 가무극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크게 열어 서역 상인들을 대접했는데 그 기간이 무려 한 달에 달했다. 낙양의 점포들은 모두 휘장으로 장식되었고, 서역 상인들에게 무료로 식사와 숙박을 제공했다. 수 양제는 거액의 국부를 허비하여 헛된 명성을 얻었으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다.

* 고구려 정벌

수 양제는 즉위 후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수조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고구려는 중국 동쪽에서 가장 강성한 이웃 나라로, 서쪽 국경이 이미 요하(遼河)를 넘어 현재의 요녕성 일부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수 문제 시절 고구려가 수나라 국경을 침범한 적이 있어 양견이 군대를 보내 토벌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고, 양견은 이후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607년, 즉 수 양제 즉위 3년째 되던 해, 그가 동돌궐로 순유(巡遊)를 나갔을 때 칸의 대장(大帳 큰 장막)에서 우연히 고구려 사신을 만났다. 양제는 고구려 왕 고원(高元, 영양왕)이 수조에 하례하러 오기를 바랐으나 고구려 왕이 응하지 않자 이에 분노하여 이를 구실로 고구려 출병을 감행했다.

612년, 1차 고구려 정벌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원정길이 멀어 군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다. 행군 도중 무거운 식량을 버리는 자들이 속출했고, 나중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 길에 고구려 군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30여 만 명의 대군 중 겨우 2천~3천 명만이 생환했다. 1차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 수 양제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막 전선에 도달했을 때 후방에서 양소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이 대군에 위협받게 되었다. 양광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거두어 낙양을 구하러 돌아갔다. 2차 정벌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이 무렵 수조는 이미 위기에 봉착하여 왕조의 패망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광은 613년, 3차 고구려 전쟁을 다시 감행했다. 이번에는 평양 부근에서 수조의 수군이 고구려 군을 격파하자 고구려 측에서 강화에 응해 전쟁을 중단할 것을 제의해 왔다. 양광 역시 고구려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을 알고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대고구려 전쟁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수 양제와 수조의 운명 역시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인덕(仁德)을 닦지 못한 수 양제

비록 수 양제가 통치 초기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그의 잔혹하고 사치스러운 본성과 인덕(仁德)을 닦지 않은 태도는 결국 그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수 양제는 황제가 된 후 제어할 사람이 없었기에 본성이 점차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는 여색(女色)을 탐하고 화려한 궁전을 좋아했으며 사방을 유람하기를 즐겼다.

그의 생활은 지극히 사치스러웠다. 사서에는 그가 매일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실제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유람을 좋아해 10여 년 동안 강남의 산수를 구경하러 세 차례나 내려갔고, 북쪽으로 돌궐 칸의 주둔지까지 갔으며, 서쪽으로는 장액에까지 이르렀다. 한번은 북방의 장성을 순유하다가 돌궐에 둘러싸여 곤경에 처했는데, 훗날 이연(李淵)이 군사를 이끌고 와 그를 구출해 내기도 했다.

수 양제는 서역의 사신과 상인들에게 기세를 부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외출하여 순유할 때도 갖은 거드름을 피웠다. 그가 처음 남쪽 강도(江都)로 순유할 때 탔던 용주는 높이가 45척, 너비 50척, 길이가 200척에 달했다. 위아래가 4층으로 나뉘어 정전, 조당 및 시신(侍臣)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안은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황후, 비빈(妃嬪), 귀인 등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독립된 배를 탔다. 수행하는 다른 배만 해도 수천 척에 달해 앞뒤로 연이어 늘어선 길이가 200리에 이르렀다. 양쪽 강변에는 기병들이 호위했다. 지나가는 주현 중 500리 이내의 지역은 정성껏 물자를 공급해야 했으며, 결국 다 먹지 못한 음식은 그 자리에 묻어 버렸다. 매번 순유할 때마다 벌어진 낭비가 이와 같았다.

수조의 국력은 문제의 세심한 다스림을 거쳐 비록 강성한 편이었으나, 수 양제가 10여 년 동안 헛되이 소모한 끝에 결국 온 강산을 종말로 몰아넣었다.

수 양제는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나 매우 잔혹했으며 간신과 소인배들을 등용했다. 글재주가 뛰어난 일부 대신들은 구실을 붙여 해쳤다. 그는 간언을 받아들이길 거부해 누구의 상소문이든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는 것이 보이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했다. 언급한 내용이 수 양제를 자극했다는 이유로 자진을 명령 받은 대신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3차 고구려 정벌이 끝난 후, 태사령(太史令) 유질(庾質)이 백성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어야 한다며 낙양 순유를 말리자 결국 그를 죽여 버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대신들 중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 각지를 순유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는 등용하고 화나게 하는 자는 파면하거나 죽였다. 강도를 순유할 때 현지 관리들은 앞다투어 희귀한 보물을 바쳤는데, 마음에 들면 승진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면직시켰다.

양소(楊素), 우문술(宇文述), 곽연(郭衍) 같은 간신들은 안색을 살피고 아첨하여 총애를 얻는 데 매우 능하여, 늘 희귀한 보물로 양제의 환심을 샀다. 이러한 신하들이 있었으니 수조가 멸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조 말년의 천재(天災)

수조 전기는 안정을 누린 날이 많아 전염병이 적었으나, 수말에 이르러 천하가 다시 혼란에 빠지고 수 양제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무력을 남용하여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자 전염병이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수조의 전염병은 여러 차례 전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12년, 산동과 하남에 대홍수가 발생해 40여 군이 물에 잠겼고 곧이어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중 산동 지역의 역병이 특히 심각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여기에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원정하면서 산동 지역은 “군수 물자와 대접을 위한 수탈에 치중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곤궁해졌다.

수 양제 말년의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은 경제를 심각하게 파괴하여 “궁궐은 잡초로 무성해지고, 마을에는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으며,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어 10명 중 4~5명이 죽었다.” 이때 관중(關中) 지역에 전염병이 유행하고 “극심한 가뭄으로 곡식이 상했다.” 사서에 전염병 유행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전염병의 유행이 수나라 통치의 붕괴를 가속화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염병의 창궐은 어떤 의미에서 수말 부패한 통치의 결과였다.

수 양제의 죽음과 그에 관한 예언

617년, 수 양제는 다시 남쪽 강도로 순유를 떠났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수 양제가 강도를 순유할 때, 악공(樂工) 왕령언(王令言)의 아들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왕령언이 아들에게 물었다.

“오늘 임금께 바친 곡조는 무엇이냐?”

아들이 대답했다.

“《안공자(安公子)》입니다.”

왕령언이 아들에게 연주해 보라고 한 뒤 듣고 나서 말했다.

“너는 임금을 따라 강도로 가지 말거라. 이 곡조에는 궁성(宮聲)이 없으니 임금은 필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훗날 역사는 과연 그의 말대로 진행되었다.

수 양제의 이번 강도 행차는 황천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 1년 넘게 머물며 자신의 강산이 농민 기의(起義)의 충격 속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각지의 장수들 중 상당수가 영토를 점유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킨 이연(李淵)은 비록 황제를 자칭하지는 않았으나, 장안을 공략한 후 양제의 손자 양유(楊侑)를 황제로 옹립하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높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그를 물러나게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연 자신이 황제에 오르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수 양제는 비빈들과 함께 즐거움을 탐하며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삶을 잊지 않았다. 그는 소황후(蕭皇后)에게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몰아내고 대신 황제가 되려 하는구려. 내가 쫓겨난다 해도 장성공(長城公) 정도는 될 수 있고, 당신도 두 번째 심후(沈後, 장성공은 남조 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의 작위고 심후는 그 황후 심씨를 말함)가 될 수 있으니, 우리는 그저 술이나 마십시다. 어찌 사서 고뇌하겠소.”

그러나 내심 양제는 자신의 목숨을 매우 걱정했다. 한번은 수 양제가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후에게 말했다.

“참으로 좋은 머리로다, 마지막에 누가 이 머리를 베어 갈지 모르겠구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양제는 독약을 몸에 품고 다녔는데, 남에게 모욕을 당하며 비참하게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함이었다.

618년, 즉 수 양제 즉위 14년째 되던 해 3월, 시위하는 군사들이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을 수령으로 추대하고 병변(兵變)을 일으켰다. 수 양제는 결국 교살당하여 목숨을 잃었으니, 향년 50세였다. 동시에 그의 두 아들과 손자 한 명도 처형되었다. 수 양제가 죽은 후 소황후와 궁인들은 침상 판자로 작은 관 세 개를 만들어 시신을 넣고 대충 묻었다.

훗날 강도 태수 진핵(陳核)이 그를 강도성 서쪽 오공대(吳公台) 아래에 이장했고, 이후 다시 뇌당(雷塘)으로 옮겨 묻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수 양제가 악행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에 그가 묻히는 곳마다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수 양제의 무덤은 이후 점차 황폐해졌다. 청조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러서야 뇌당 근처에 살던 양주(揚州) 학자 완원(阮元)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현재 능 앞에는 완원이 중수할 때 세운 비석이 남아 있다. 비석에는 당시의 서예가이자 양주 지부였던 이병수(伊秉授)가 쓴 ‘수양제릉(隋煬帝陵)’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양광이 죽은 후 받은 시호는 ‘양제(煬帝)’로, 가장 낮고 나쁜 평가를 담은 것이다. 수 문제 양견은 원래 북주 우문씨의 제위를 빼앗았으나, 결국 자신의 아들이 우문씨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풍수의 바퀴가 돌고 돌아 역사가 이곳에서 작은 원을 그린 셈이다. 그러나 제위가 다시 우문씨에게 돌아가지는 않았고 이(李)씨 가문으로 넘어갔으니, 중국 역사상 위대한 왕조인 당나라의 막이 천천히 오르게 되었다.

[역주: 시법(諡法)에 따르면 “살을 깎아 먹는 듯한 가혹한 정사를 펼쳐 백성들을 괴롭게 한 것을 일러 양이라 한다(去禮遠衆曰煬, 逆天虐民曰煬)”고 했다. 재밌는 것은 진후주(陳後主) 진숙보가 사망한 후 수양제가 내린 시호가 진양제(陳煬帝)다. 결국 자신이 내린 시호를 자신이 받은 셈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