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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하나 당조(唐朝) (1)

(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세월의 흐름 속에 눈 깜짝할 사이 수많은 왕조가 화하(華夏)라는 거대한 무대를 차례로 지나갔다. 역사가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시공의 터널에 도달했을 때, 하나의 ‘천조(天朝)’를 담은 그림이 서서히 펼쳐지며 그 황홀한 빛을 후세인들 앞에 마음껏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바로 ‘성세천조(盛世天朝)’라 불리는 대당(大唐)이다.

당조는 중화 역사에서 앞을 이어 뒤를 계발하고, 백화가 만발해 크게 이채를 발했던 전성시기였다.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 비약적으로 발전한 문화, 그리고 멀리까지 미친 국력과 위엄은 당시 서양 세계의 부패, 혼란, 분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류 문명 발전사에서 독보적인 선두를 달렸다.

특히 초당 시기의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마치 밝은 달처럼 인류 역사의 밤하늘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문화, 경제, 농업, 수공업, 상업, 교통 등 제반 분야에서 대당은 이전의 모든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唐詩)의 번영, 산문(散文)의 부흥, 그리고 전기(傳奇)의 성숙은 인류 문학사를 찬란한 최정상으로 올려놓았다. 뒤이어 음악, 무용, 서예, 회화, 조각(造像), 건축, 야금, 도자기, 방직, 인쇄, 양조, 차(茶) 등 제반 분야가 다채롭게 어우러지고 화려하게 빛나며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사서(史書)에서는 당시를 가리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영(嶺 역주: 영남으로 넘어가는 오령의 하나인 대유령大庾嶺을 가리킴)에 이르기까지 집 대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길을 가는 나그네가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인류 사회는 이때 진정으로 상화(祥和), 예양(禮讓), 안정, 풍요가 는 태평한 시기로 들어섰으며, 후세 사람들 역시 이 성당(盛唐)의 기상을 창조해 낸 주인공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다.

성당의 이런 기상은 해외로도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천하의 수많은 나라가 당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훗날 ‘당’은 중국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외국인들은 화교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해외 화교 거주지를 ‘당인가(唐人街, 차이나타운)’라 부르며, 그들이 입는 옷을 ‘당장(唐裝)’이라 부른다.

당조는 또한 불법(佛法)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시대였다. 불교는 위진남북조와 수조의 흥기와 전파를 거쳐 당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수많은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되었고 불교 종파가 정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석굴 예술 역시 일보 더 발전했다.

당조 흥기에 관한 예언

당조가 수조를 대신해 흥기할 것에 대해, 삼국시대 제갈량(諸葛亮)은 《마전과(馬前課)》 제4과에서 일찍이 이렇게 예언했다.

十八男兒
起於太原
動則得解
日月麗天

여기서 “십팔남아(十八男兒 十八을 합하면 木이고 남아는 子이므로 합하면 李가 된다)”는 바로 이(李)를 가리킨다. “태원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이연(李淵)이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있다가 기병해 천하를 평정한 출발지가 태원이었음을 뜻한다.

이연은 양광(楊廣, 수 양제)과 외사촌 관계였기에 원래 선뜻 병사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당시 시중에는 ‘이(李)’ 씨 성을 가진 자가 ‘양(楊)’ 씨를 대신해 천하를 다스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양광은 이연을 매우 경계했다. 태원은 또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이연이 당시 병사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밀(李密), 두복위(杜伏威) 등 군웅들에게 멸망당할 가능성이 컸다. 즉 병사를 일으키면 살고, 일으키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었으니, 이연이 맞닥뜨린 형세는 진정 “움직여야만 풀리는(動則得解)”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연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사를 일으켜 사지에서 살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은 일대(一代)의 영웅으로, 설인고(薛仁杲), 유무주(劉武周), 두건덕(竇建德), 왕세충(王世充) 등 각지의 군웅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대당의 강산을 다졌다. 626년, 이세민이 즉위하여 동서양 사학자들이 줄곧 찬사해 마지않는 ‘정관의 치’를 창조해 내었으니, 이야말로 “해와 달이 하늘을 아름답게 비추는(日月麗天)” 격이다.

당조(唐朝)의 흥기와 건국

*고조 이연과 기이한 상(異相)

고조 이연은 산서(山西)의 한족과 호족(胡族)의 혈통이 섞인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호(李虎)는 서위(西魏) 팔주국(八柱國) 중 한 명으로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아버지 역시 북주(北周)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어머니는 독고(獨孤) 씨 가문이었다. 독고 가문은 북주 황실인 우문(宇文) 씨 및 수조 황실인 양(楊) 씨 가문과도 사돈을 맺었기에 이연은 양견 및 북주 명제(明帝)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 독고 씨는 수 문제 황후의 친동생이었다.

이연은 일곱 살 때 아버지의 당국공 직위를 이어받았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성년이 된 이연은 기개가 호탕하고 넓으며 성품이 솔직하고 너그러워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당시 관상을 잘 보던 어떤 사람이 이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의 골상(骨相)이 비범하니 반드시 임금(人主)이 될 것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아끼시고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연은 이 말을 듣고 자부심을 가졌다. 수조(陏朝) 때 이연은 태수(太守), 전내소감(殿內少監), 위위소경(衛尉少卿) 등을 역임했다.

이연은 평소 사람들에게 은덕(恩德)을 베풀고 호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기에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의지했다. 이는 의심이 많던 수 양제의 의구심을 자극했다. 한번은 양제가 이연을 불러 접견하려 했으나 이연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당시 이연의 외조카인 왕(王) 씨가 후궁으로 있었는데, 양제가 물었다. “너의 외삼촌은 어찌하여 늦는 것이냐?”

왕 씨가 병 때문이라고 답하자 양제가 이어 물었다.

“그러면 죽을 병이더냐?”

이연은 이 소식을 듣고 극도로 두려워하여, 이때부터 술과 여색에 빠진 척 가장함으로써 양제의 의심을 피했다.

*수말의 천하 형세와 이연의 거병

수나라 말년, 양제 양광의 잔혹하고 무도한 통치와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탄에 빠졌다. 611년부터 천하가 대란에 빠지며 군웅들이 봉기했고 각지의 호강(豪强)들이 저마다 군사를 일으켜 자립했다. 그중 세력이 강성했던 부대는 하남의 와강군(瓦崗軍), 하북의 의군(義軍), 그리고 강회(江淮)의 의군이었다.

617년, 이연은 태원유수로 부임했다. 의심이 많던 양광은 이연이 의군을 진압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고 여겨, 이연을 체포해 강도(江都)로 끌고 와 죄를 물으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어 사면해주었다. 수 양제의 이러한 행동은 이연과 이세민으로 하여금 안팎으뒤로 적에 포위당한 ‘복배수적(腹背受敵)’의 두려움을 각인시켰다. 조정의 의심에 죽든, 반군의 협공에 죽든 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양제의 명을 받고 이연을 감시하던 부태수 고군아(高君雅)와 편장(偏將) 왕위(王威)가 이연이 진사(晉祠)로 기우제를 지내러 가는 기회를 노려 그를 해치려 했다. 이연과 이세민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즉시 두 사람을 처형하는 동시에 수 조정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병사를 일으켜 군웅들과 천하를 다투기 시작했다. 이연은 스스로 대장군이라 칭하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좌·우군으로 나누었다. 이건성(李建成)을 좌군 통솔자로 삼아 농서공(隴西公)에 봉하고, 이세민을 우군 통솔자로 삼아 돈황공(燉煌公)에 봉했으며, 이원길(李元吉)을 진북(鎮北)장군으로 삼아 태원을 지키게 했다. 이때 와강군과 하북 농민군이 중원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수조 군대의 주력을 묶어두고 있었기에, 수도 장안 지역의 방어력이 매우 허술했다.

617년 6월, 이건성과 이세민 두 형제는 힘을 합쳐 군대를 이끌고 서하(西河)를 맹렬히 공격했다. 두 사람이 솔선수범하니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질렀다. 행군 도중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 천하를 얻기도 전에 이미 어진 정치를 널리 펼치니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대군의 기세가 대나무를 쪼개듯 기세등등하여 서하성(西河城)은 단숨에 무너졌다. 성에 들어간 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군승(郡丞 군 태수를 보좌하는 실무 책임자) 고덕유(高德儒)만을 처형했다. 이세민이 백성들을 위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서하성은 순식간에 질서를 되찾았고, 이씨 가문의 위엄과 성망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연은 이에 대해 겨우 열여덟 살에 불과한 이세민을 칭찬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처럼 군대를 이끄니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구나.”

같은 해 7월, 이연은 좌·우군 도합 3만 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관중(關中)으로 서진하여 각지의 군웅들과 경쟁적으로 수도인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는 장마철이라 길이 진흙탕이 되어 군대의 진격이 지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돌궐이 마읍(馬邑)의 할거 세력인 유무주(劉武周)와 손을 잡고 태원을 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연은 이원길이 위태로울까 걱정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회군을 고려했다.

이세민은 회군에 강력히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군대를 물리면 수나라 군사가 뒤에서 추격하여 군심이 흔들리고 결국 대패할 것이다. 둘째, 돌궐과 유무주의 습격은 사실이 아닐 수 있으며 수군(隋軍)의 교란 작전일 수 있다.

셋째, 현재 군사의 사기가 충천하니 단숨에 수나라를 무찌를 수 있으며 후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넷째, 다른 군웅이 장안을 먼저 점령하면 반쪽 강산이 순식간에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연의 회군 결정을 철회시키기 위해 이세민은 밤새 이연의 군막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이연이 그를 막사 안으로 불러 왜 우느냐고 묻자 이세민이 대답했다.

“의군이 진격하면 반드시 이기고 후퇴하면 반드시 흩어집니다. 적이 뒤를 덮치면 죽음이 순식간에 닥칠 터인데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연은 재삼 숙고한 끝에 마침내 이세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력을 다해 장안으로 직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이세민의 원대한 식견과 탁월한 담력을 엿볼 수 있다.

한 차례 치열한 전투를 거쳐 이연의 군대는 10월에 장락궁(長樂宮)을 점령했고, 11월에는 장안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연은 수의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수 양제를 태상황으로 높였다. 이연이 거병을 선언하고 장안에 입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20여 일에 불과했으니, 늦게 출발했으나 먼저 도달한 번개와도 같은 신속함이었다. 장안으로 진격하는 길목에서 수많은 소규모 반수(反隋 수 조정에 반대) 세력이 귀순하여 이연의 군대는 9만 명으로 불어났다.

당조(唐朝)의 정식 건립

618년 3월, 수 양제가 강도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같은 해 5월, 이연은 양유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당(唐)이라 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하니, 이가 바로 역사상의 당 고조(唐高祖)이다. 후세가 우러러보는 위대한 왕조 당조(唐朝)가 중화 역사에 정식으로 그 막을 올린 것이다.

이연이 당조를 건국한 것이 먼저이고 아울러 각지의 할거 세력을 병합한 것이 나중이었으며, 아울러 수 양제가 살해된 이후였기에 당조는 사실상 수조의 계승자로 등장했다.

고조는 등극한 후 군(郡)을 주(州)로 고치고 태수를 자사로 바꾸었으며, 수의 《대업률령(大業律令)》을 폐지하고 상국(相國) 장사(長史) 배적(裴寂)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제정하게 했다. 동시에 세자 이건성을 황태자로 세우고, 이세민을 진왕(秦王), 제국공 이원길을 제왕(齊王)으로 봉했다.

‘천책상장’ 이세민의 통일 대업 완수

당조가 건립된 후에도 각지의 군벌들은 여전히 국토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북을 통치하며 스스로 진제(秦帝)라 칭한 설거(薛舉), 대북(代北)의 패자 유무주, 스스로 정제(鄭帝)라 칭한 낙양의 패자 왕세充(王世充), 하북의 패자 유흑달(劉黑闥) 등이 있었다. 조정의 당면 과제는 이들 세력을 일소하고 전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황제에 막 등극한 이연이 친정하기는 어려웠고, 황태자인 이건성은 황후의 자리를 지키며 부황을 도와 국정을 보살펴야 했다. 그리하여 토벌의 중책은 자연스레 진왕 이세민의 어깨에 지워졌다.

통일 전쟁의 첫 번째 목표는 서북의 진제 설거였다. 설거는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당군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618년 8월, 설거가 갑자기 급사하고 그의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뒤를 이었다. 이세민은 이 틈을 타 즉시 진군했고, 설인고의 대장 종라후(宗羅喉)가 맞서 싸웠다. 설군(薛軍)의 보급선이 길다는 점을 이용해 이세민은 지구전을 펼쳐 적군을 고갈시키기로 결정했다. 설군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적의 사기는 떨어졌고, 식량마저 떨어지자 일부 장수들이 은밀히 항복해 왔다. 적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쯤 이세민이 마침내 출격했다. 대군이 적을 덮쳤고 이세민은 2천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승세를 타 추격했다. 이른바 ‘위험 속에서 승리를 구한(險中求勝)’ 결과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설인고는 마침내 대당에 항복했다.

설거의 세력을 정복한 후, 북방을 더욱 안정시키기 위해 당군은 대북의 왕 유무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유무주가 먼저 출병하여 태원을 점령하자 이원길은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당황한 이연이 하동(河東) 지역을 포기하려 하자 이세민이 강력히 반대하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출전하여 유무주의 부대와 맞섰다.

유무주 군대의 기세는 대단히 날카롭고 사기가 충천했으나 군중에 식량이 부족하여 조급히 단기전을 원했다. 이세민은 이일대로(以逸待勞 상대를 지키게 만드는 지구전)의 전략을 세워 승부를 서두르지 않고 대군을 움직이지 않은 채 가끔 소규모 소탕전만 벌였다. 5개월 동안 대치하는 사이 유무주 군대의 기세는 꺾였고, 당군은 기회를 보아 분수(汾水)를 건너 유무주의 수송대를 차단하니 적은 북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군사를 이끌고 밤낮으로 행군하며 추격했다. 그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사흘 동안 갑옷을 벗지 못한 채 연이어 추격전을 벌이며 하루에 여덟 번 싸워 번번이 승리했다.

마침내 개휴성(介休城 지금의 산서 개휴시) 전투에서 대장 이세적(李世績), 정교금(程咬金), 진숙보(秦叔寶) 등이 큰 공을 세워 적의 잔당 2만 여 명을 궤멸시켰다. 유무주는 태원을 버리고 외방의 돌궐로 도망쳤다가 훗날 돌궐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세민은 이 대전에서 명장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수하로 거두었다.

이후 이세민은 620년 7월 또다시 출전해 낙양의 정제(鄭帝) 왕세충과 하왕(夏王) 두건덕을 토벌했다. 이세민은 대군을 이끌고 낙양 외곽의 정나라 군사 거점을 하나씩 파죽지세로 깨뜨려 낙양을 완벽히 포위했다. 낙양은 외딴 고립무원의 성이 되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하북의 두건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하러 구원에 나섰다. 이세민은 침착하게 대응하여 이원길에게 군대를 주어 낙양을 그대로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3천 정예 기병을 이끌고 무뢰(武牢 호뢰관)로 날아가 두건덕 군단과 혈전을 벌였다. 이세민은 몇몇 대장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하게 싸웠으며, 두건덕의 군대는 시체가 들판에 널리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두건덕은 부상을 입고 사로잡혔으며 전군이 궤멸당했다. 이세민은 역사상 유명한 ‘무뢰 전투(武牢之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왕세충은 두건덕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복(素服)을 입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이세민이 낙양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천하의 강산 대부분이 당나라의 손에 들어왔고, 이제 남아있는 강력한 세력은 두건덕의 옛 부하인 유흑달(劉黑闥)뿐이었다. 이세민은 622년 12월 군대를 이끌고 그를 격파했다. 유흑달은 외돌궐로 도망쳤다.

이로써 당조의 통일 대업은 기본적으로 완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세민은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대당의 강산은 사실상 그가 다 이루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으로 봉하니, 이는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늘만이 봉할 수 있는 지고한 영예임을 나타낸 것이었다.

당 고조 이연의 현명한 통치

당 고조 이연은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 역시 기본적으로 현명한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수조의 여러 제도적 기반 위에서 이연은 적절한 조정을 가했다. 그는 625년 상서성 6사(司) 시랑(侍郞)을 폐지하고 이부낭중의 관직을 정4품으로 올려 선발 업무를 관장하게 했으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새 율령을 반포해 형벌과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러나 이연은 황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의 참소를 믿고 하마터면 이세민을 처형할 뻔하기도 했다. 현무문(玄武門)의 변 이후 이연은 이세민을 황태자로 세워 국정을 총괄하게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위를 이세민에게 물려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연은 태상황으로 높여졌고, 8년 후 7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사후 시호는 대무황제(大武皇帝)라 하였고 묘호는 고조(高祖)라 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을 이은 태종 이세민은 중화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한 페이지를 쓰게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