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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4 -【칭기스칸】 초원 정벌 전쟁에서 가는 곳마다 휩쓸어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宽仁服众 推改革 招揽人才

칭기스칸(에포크타임스)

테무진이 타타르부를 격파한 후, 그가 회군하여 가장 먼저 토벌에 나선 대상은 키야트부의 주르킨인들이었다. 테무진이 타타르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출병하기로 약속했던 주르킨인들은 유언비어를 믿고 그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틈을 타 그의 본영을 습격해 테무진의 부하 10여 명을 살해하고 50명의 옷을 빼앗았으며 아울러 그들의 재산까지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 이 일은 테무진을 크게 분노하게 했다. 게다가 과거 주르킨인들이 몽골인의 규율을 어기고 칼을 뽑아 벨구테이의 어깨에 상처를 입힌 비열한 소행까지 겹치면서, 테무진은 타타르 전쟁이 끝나자마자 주르킨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그들의 수장 사차 베키(撒察別乞)와 그의 동생 타이추를 생포했다.

쿠릴타이 공개 재판에서 테무진이 다시 한번 힘을 얻다

주목할 점은 이때의 테무진이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전투에 패배한 부락민들이 도망쳐 반격할 기회를 엿보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다시 한번 쿠릴타이를 소집해 주르킨 수장 사차 베키와 타이추를 공개 재판에 부치고 맹약을 어기고 진영을 습격한 죄상을 낱낱이 짚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 오논 강 숲 주변에서 연회를 베풀 때 너희 부하가 요리사를 때리고 벨구테이를 베었지만, 나는 형제의 정을 생각해 깊이 따지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고자 했다. 이번에 조상의 큰 원수를 갚는데 너희가 주축이 되어야 하거늘, 조상의 원수를 잊고 엿새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원수를 도와 본가를 적으로 돌렸다. 일찍이 너희가 나를 칸으로 추대할 때 내게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가, 마땅히 너희들 스스로 맹세한 대로 하라.”

草原英雄铁木真。(大纪元制图)

초원의 영웅 테무진. (에포크타임스 제작)

사차 베키와 타이추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목을 내밀어 처형을 받았다. 테무진의 이 거행은 모든 동맹 귀족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동시에 부중(部眾)들에게 ‘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테무진은 주르킨인의 영지를 차지하고 그 가문 속 주르킨 부속민들을 재분배하여 개인 호위 부대인 ‘케식(怯薛)’의 구성원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주르킨인의 고아였던 보르구(博爾忽)를 어머니 호엘룬에게 보내 양아들로 삼게 하고 자신의 여섯째 동생으로 삼았다. 앞서 그는 패배한 메르키트부, 타이치우드부, 타타르부에서도 각각 소년 한 명씩을 거두어 모친의 양아들로 삼았는데, 이들이 모두 그의 동생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감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든 아님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든, 테무진은 혈연관계가 없는 이들, 심지어 패배한 상대 진영의 사람들까지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권력을 공유하겠다는 넓은 도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는 더 광범위한 부족들을 결속하는 데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사서에는 주르킨인들이 호기(豪氣)와 담력, 용맹을 지녀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테무진이 이들을 복종시키고 자신의 호위대로 편입시킨 것은 마치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그의 세력을 더욱 막강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가 몽골 여러 부족을 통일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아울러 주르킨을 토벌할 때 ‘몽골 4걸’ 중 한 명인 무칼리와 그의 동생 부하(不合) 등도 테무진의 부하로 합류했다. 무칼리는 훗날 보오르추와 함께 칭기스칸의 좌우 두 팔이 되었으며, 침착하고 지략이 뛰어나며 활을 잘 쏘았다.

蒙古乌兰巴托市的木华黎雕像。(shutterstock)

몽골 울란바토르 시의 무칼리 동상. (shutterstock)

각개격파 전술을 확정하다

주르킨을 격파하고 그들을 호위대로 편입한 뒤, 테무진은 무리를 이끌고 케를렌(克魯漣) 강 하류로 진군했다. 케를렌 강은 오늘날 몽골의 켄테산에서 발원하여 헤이룽장의 상류인 아르군강 수계의 후룬호로 흘러드는 지류다. 테무진은 마침내 상구르 강과 케를렌 강이 합류하는 곳에 본영을 세웠고, 나중에는 이곳이 그의 도읍이 되어 ‘취뒤아란(曲雕阿蘭)’이라 불렸다. 이곳은 강물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광활한 목장을 끼고 있었고, 테무진의 출생지이자 성산(聖山)인 부르칸 칼둔에서도 멀지 않았다. 이 성산은 테무진의 생애 내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이 새로운 거주지에서 테무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세력을 불려 나갔고 부족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미 테무진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자무카와 타이치우드부는 메르키트부와 나이만부를 연합해 포위망을 형성함으로써 테무진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각 부족마다 셈법이 달라 다른 부(部)가 먼저 움직여 어부지리를 얻기를 바랐기 때문에 ‘공수(攻守) 동맹’을 결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테무진이 타타르부를 격파하자 불안을 느낀 자무카는 다시 각 부족에 연락을 취해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삼면 작전을 우려한 테무진 역시 각개격파 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심하고 옹 칸과 상의해 먼저 메르키트 각부(各部)를 공격하기로 했다. 승리를 거둔 뒤에는 곧바로 옹 칸의 군대를 정비해 주고 자신은 기지로 돌아와 자무카와 타이치우드부의 습격을 대비했다. 자무카와 타이치우드부는 어쩔 수 없이 진격을 포기했고, 이 때문에 메르키트부 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와 군사 동맹은 다시 와해되고 말았다.

군사 동맹이 와해된 틈을 타 테무진은 1199년 옹 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나이만부를 공격했다. 나이만부 수장의 차남 이부루칸(不亦魯)은 대군이 높은 산을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무진과 옹 칸은 강을 따라 군사를 몰아 이부루칸의 대영을 돌파했고, 이부루칸은 도망쳤다. 옹 칸은 막대한 가축과 재물을 얻었으나 테무진과 이를 나누게 될까 염려하여 사람을 먼저 보내 회군해 버렸다.

하지만 흉금이 활달하고 은혜를 갚을 줄 알았던 테무진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이부루칸을 추격하던 중 테무진과 옹 칸은 나이만 장수 콕세우 사브라(可克薛兀)와 맞닥뜨렸다. 교전 전날 밤, 누군가 테무진이 나이만부에 항복하려 하니 믿을 수 없다는 모함을 퍼뜨렸고, 이 때문에 옹 칸은 군대를 이끌고 남몰래 철수해 버렸다.

이튿날 자신이 옹 칸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알게 된 테무진 역시 군대를 철수시켰고, 콕세우 사브라는 곧바로 옹 칸의 군대를 추격해 옹 칸의 외아들 상쿤의 아내, 아들, 백성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렐레투(帖列格禿) 고개에 있던 옹 칸의 백성과 말, 식량의 절반을 약탈했다. 이에 옹 칸이 테무진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테무진은 아무런 앙심도 품지 않고 즉시 ‘몽골 4걸’인 무칼리, 보오르추, 보르굴, 치라운을 파견해 약탈당한 모든 이들을 구출해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이어서 테무진의 동생 카사르가 나이만을 다시 정벌하여 대파함으로써 나이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테무진과 옹 칸이 나이만부를 공격할 때, 옹 칸에게 항복했던 메르키트부 수장 토크토아의 두 아들이 기회를 틈타 부족 영지로 도망쳤고, 그들은 타이치우드인들과 연합해 테무진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사실 테무진은 출전할 때마다 후방을 습격당해 배후에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을 늘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200년, 그는 옹 칸과 다시 한번 공동으로 군사를 일으켜 타이치우드와 메르키트 연합군을 공격했다.

테무진은 무칼리 등으로 하여금 산악 지대에 매복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 부대를 이끌고 타이치우드인들을 기습해 그들을 자신의 매복망으로 유인하려 했다. 타이치우드의 수장 타르구타이가 거느린 군세는 매우 매서웠고, 테무진은 싸우며 물러서는 전술로 그들을 매복망 안으로 끌어들였다. 옹 칸의 군대는 타이치우드인들을 앞뒤로 갈라놓아 앞뒤가 서로를 구원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타이치우드인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테무진과 옹 칸은 막대한 인마를 포로로 잡았으며 남은 자들은 나이만부로 달아났다. 타이치우드인들은 이후 자무카, 메르키트, 나이만 사이를 전전하며 의존하게 되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테무진과 옹 칸 연합군은 하타긴, 산지우트, 홍기라트, 타타르, 도르벤의 5부 연합군을 푸이르하이(捕魚兒海子, 오늘날의 바이칼호 부근)에서 격파했다. 겨울에는 테무진이 직접 군사를 몰아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연합군을 공격해 그들의 세력을 한 차례 더 약화시켰다.

铁木真最终在桑沽儿河与克鲁伦河汇流处建立了主营,后来,这里成为了其都城,称为“曲雕阿兰”。示意图。图为克鲁伦河(Kherlen river)秋色。(shutterstock)

테무진은 결국 상구르 강과 케를렌 강이 합류하는 곳에 본영을 세웠고, 나중에 이곳은 그의 도읍이 되어 ‘취뒤아란(曲雕阿蘭)’이라 불렸다. 그림은 가을빛이 물든 케를렌 강(Kherlen river). (shutterstock)

자무카와 다시 맞붙으나 하늘이 테무진을 돕다

테무진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끝내 테무진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던 자무카 등 몽골 귀족들은 테무진에게 패배했던 각 부족들을 추대하여 1201년 자무카를 ‘구르칸(古兒汗)’, 즉 모든 수장의 수장이자 모든 칸들의 칸으로 추대했다. 자무카 휘하의 여러 부족 수장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같은 해 자무카는 12개 부족 연합군을 결성하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아르군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해 간무렌강(刊木連河, 오늘날의 건하) 하중도에 각 부족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케레이트부의 옹 칸과 테무진을 공격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연합군은 타이치우드부, 메르키트 여러 부, 타타르부가 연합하여 북쪽에서 테무진을 공격하고, 자무카가 남은 부대를 이끌어 테무진의 동쪽을 치기로 합의했다.

소식을 접한 테무진과 옹 칸은 신속하게 자무카의 도전에 대응할 방책을 논의했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몽골의 패권을 걸고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어느 쪽이 승리하든 초원의 정세는 완전히 뒤바뀔 판이었다.

전쟁은 곧 벌어졌다. 양측 군대는 쿠오이타누(闊亦田)라는 곳에서 만나 각자 진을 치고 주술에 능한 샤먼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돕게 했다. 테무진 측의 샤먼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을 연속으로 치며 신비로운 바위를 두드림으로써 신령의 가호를 빌고 날씨를 조종하려 했다. 반면 자무카 측 샤먼은 돌팔매질로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을 부렸으나, 비바람은 오히려 자신들을 역습해 그들을 산골짜기로 구르게 만들었다. 자무카의 부중들은 크게 경악하며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신다”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어쩔 수 없이 자무카는 퇴각을 명령했다.

옹 칸은 자신의 부중을 이끌고 자무카와 그의 주력 부대를 추격했고,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인들을 상대했다. 타이치우드부가 재기할 기회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테무진은 여러 장수들에게 멀리까지 군대를 파견해 타이치우드 여러 부를 크게 우회해서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면에서 타이치우드인들을 견제했다. 장수들이 멀리 파견된 탓에 정면 공격 병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테무진 부대와 타이치우드인들은 여러 차례 공방전을 치렀으나 어느 한쪽도 뚜렷한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날이 저물자 양측은 일단 전투를 멈추고 같은 들판에 진영을 차려 다음 날의 격전을 기다렸다.

그날 황혼 무렵의 격전 도중 테무진은 목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해가 진 뒤 테무진은 의식을 잃었고, 그의 충성스러운 호위 제베는 밤새 그의 곁을 지키며 입으로 상처 부근의 맺힌 피를 빨아냈다. 자정이 지난 뒤 테무진이 정신을 차리고 우유를 찾았다. 그러나 이때 제베의 수중에 남은 것은 약간의 물뿐이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알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말젖을 찾아 나섰고, 운좋게도 커다란 치즈통을 발견해 무사히 가지고 돌아왔다.

왜 알몸이어야 했을까? 몽골인들에게 대중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은 매우 체면이 깎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타이치우드인들이 밤중에 누군가 알몸으로 진영을 가로지르는 것을 본다면, 아는 사람이 볼일을 보러 일어난 것이라 생각해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그들이 제베를 알아보더라도 그는 동료들에게 모욕을 당해 도망쳐 온 것이라 둘러댈 참이었고, 그들도 아마 이 말을 믿었을 것이다. 제베가 일부러 알몸으로 포로가 될 리는 없다고 여겼을 테니까 말이다.

물에 갠 치즈를 마시자 테무진의 체력은 점차 회복되었고 기운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제베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이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말했다. 제베의 충성심은 테무진 휘하 장수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이었다. 사료를 살펴보아도 과거든 미래든 테무진을 배신하거나 버린 유능한 장수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테무진 역시 어떤 유능한 장수도 처벌하거나 해친 적이 없다. 군신(君臣) 간에 이토록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드문 일이다.

하지만 타이치우드인들은 테무진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밤사이에 몰래 전장을 이탈했다. 이튿날 테무진은 군대를 이끌고 적의 남은 잔당을 격파하여 그들을 자신의 부중으로 흡수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테무진은 훗날의 공신이 되는 나야아(納牙阿)를 얻게 되었다.

당시 나야아와 그의 아버지, 형제들은 일찍이 어린 시절 테무진을 구해준 적이 있었던 타이치우드부의 수장 타르구타이를 생포하고 있었다. 나야아 등은 그를 테무진에게 바치려 했으나, 도중에 나야아가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테무진은 자기 주인에게 칼을 겨눈 자를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를 참수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타르구타이를 풀어주고 테무진을 진심으로 섬기겠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 낫다”고 설득했다. 과연 테무진은 그들이 타르구타이를 풀어주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행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나야아에게 상을 내렸다.

테무진이 타이치우드부를 격파하는 동안 자무카 역시 패배하여 옹 칸에게 항복했다. 그를 따르던 각 부족들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옹 칸에게 잇달아 항복했다. 옹 칸은 테무진이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려 들까 염려하여 재물을 차례로 후방으로 빼돌렸다. 옹 칸과 테무진 사이에는 이처럼 균열이 싹트기 시작했다.

铁木真和者勒蔑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elme_%26_Genghis_Khan.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KoizumiBS/Wikimedia Commons提供</a>)

테무진과 제베. (KoizumiBS/Wikimedia Commons 제공)

타타르 여러 부를 섬멸

타이치우드부를 격파한 1202년, 옹 칸은 테무진에게 동부 타타르부를 상대로 또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르도록 명했다. 테무진은 군대를 이끌고 차안 타타르, 알치 타타르, 두타우트 타타르, 아루하이 타타르 등 타타르 여러 부를 향해 진격했다. 양측은 할라하강(哈拉哈河) 어귀의 다란 네무르게스(答闌捏木兒格斯)에서 대회전을 벌였고, 테무진의 부대는 희생은 컸으나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번 전투로 테무진이 이끄는 군대는 타타르부를 철저히 격파했다. 타타르부는 이로부터 완전히 몰락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타타르부의 몰락은 동부 몽골의 모든 부족이 테무진에게 정복되었음을 뜻했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의 동쪽에는 동후(東胡) 계통의 옹기라트부만 남았고, 서쪽에는 나이만부와 케레이트부만 남았으며, 나머지 몽골 제 부족은 모두 그의 발 아래 정복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승승장구하는 테무진은 전체 초원을 통일하는 길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으며 초원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겠다는 그의 야망도 점차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0/3/n1245105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