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당 태종 이세민과 기이한 상(異相)
이세민(李世民)은 고조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다. 수 문제 개황(開皇) 18년 12월 무오(戊午)일, 무공(武功 지금의 함양시 무공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용 두 마리가 방문 밖에서 넘놀다가 사흘 만에 떠나갔다. 고조가 기주(岐州)로 부임할 때 이세민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관상을 잘 보는 한 선비가 고조를 찾아와 말하기를, “공은 귀인이시며, 또한 귀한 아들을 두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이세민을 보고는 다시 말하기를, “용과 봉황의 기품이요, 해와 달 같은 용모이니, 나이 스무 살이 되면 반드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안락하게 할 것입니다(濟世安民)”라고 했다. 고조는 이에 ‘제세안민(濟世安民)’이라는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세민(世民)이라 지었다.
이세민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지가 넘쳤으며, 식견이 깊어서 일을 대함에 과단성이 있고 사소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니, 당시 사람 중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부친의 통일 대업을 완성하도록 도운 이세민
수조(陏朝) 말년, 정치는 어둡고 전쟁과 혼란이 이어져 백성들은 삶을 영원히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곤궁했다.
당시 겨우 열일곱 살이던 이세민은 태원 유수로 있던 아버지 이연에게 이렇게 권했다.
“지금 주상께서 무도하여 백성들은 곤궁하고 진양성(晉陽城) 밖은 온통 전쟁터입니다. 아버님께서 작은 절개를 지키신다면 아래에는 도적이 있고 위에는 엄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위험해 망할 날이 머지않습니다. 백성의 마음에 순응하여 의로운 병사를 일으켜 화(禍)를 복으로 바꾸는 것만 못하니,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의 설득에 이연은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수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후 이세민은 사지를 넘나들며 남정북벌(南征北戰)을 거듭했고, 공격하는 곳마다 반드시 공략에 성공하며 천하를 휩쓸었다. 마침내 618년 아버지 이연을 도와 등극시키고 국호를 당(唐)을 창건했다. 인류 역사는 이때부터 새로운 한 페이지를 펼치게 되었다.
대업을 진일보로 완수하기 위해 이세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각지 할거 세력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당조 군대는 이세민의 지휘 아래 먼저 설인고(薛仁杲)를 천수원(淺水源)에서 무찌르고, 유무주(劉武周)를 평정하여 서북 국경을 안정시켰으며, 무뢰(武牢)에서 두건덕(竇建德)을 꺾고 왕세충(王世充)을 항복시켰다. 이어 군사를 이끌고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해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7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당조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향로를 머리에 이고 길가에 꿇어앉아 환영했으며, 조정과 민간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그는 출중한 무예와 신묘한 전략으로 이연을 도와 천하를 안정시키며, 신주(神州) 대지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해 대통을 이은 이세민
천하를 통일한 후 이세민이 전장에서 연이어 공을 세우고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이는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제왕 이원길(李元吉)의 시기와 질투를 초래했다. 여기에 이연의 후궁 비빈들이 금은보화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품게 된 원한까지 더해져 이세민은 끊임없는 모함과 유언비어에 시달렸고, 이연 역시 점차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세민은 병권(兵權)을 박탈당하고 경성에서 쫓겨났으며, 이후에도 동서로 차출되어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다. 심지어 친형제들이 유인하여 준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잃을 뻔하기까지 했다. 예로부터 도(道)를 얻은 자는 돕는 자가 많고 도를 잃은 자는 돕는 자가 적다고 했다. 간사한 소인들의 악행은 천하가 다 함께 보고 있었기에 누구나 그들을 단죄하려 했다.
626년 6월, 건성과 원길은 이세민을 제거할 비밀 모의를 꾸몄다. 이를 알게 된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책사와 무장들의 도움을 받아 선제공격 전략을 취해 ‘현무문의 변'(장안 궁성 북문인 현무문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을 일으켰고, 이건성과 이원길을 단죄했다. 이 어찌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례를 치르는 날, 이세민은 여러 사람 앞에서 “매우 슬프게 통곡했다.” 후대의 일부 사학자들이 ‘현무문의 변’을 가리켜 “형제간의 잔혹한 살육이자 권력 찬탈”이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것이다.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은 황태자로 책봉되어 모든 정무를 단독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세민은 즉시 궁궐 내에서 매나 개를 사육하는 것을 금지하고, 각지에서 바치는 희귀한 진상품을 거두게 하니 온 천하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또한 이세민은 백관에게 국정의 중요 업무를 진술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명하고, “관직명, 인명, 공사 문서에 ‘세(世)’나 ‘민(民)’ 두 글자가 연속해서 쓰이지 않는 한 피휘(避諱)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역주: 원래 황제의 이름은 피휘하는 것이 관례이긴 하지만 이세민의 경우 ‘세(世)’와 ‘민(民)’ 두 글자가 너무 흔한 글자라서 피휘하기가 아주 번거로웠다. 이에 신하들의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두 글자를 연속해서 쓰지 않는 한 피휘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한 것.]
같은 해 8월, 이연은 여러 대신들의 직언에 따라 황위를 이세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이세민은 온 천하의 인망을 한 몸에 받으며 등극했으니, 이이가 바로 역사상의 ‘당 태종(唐太宗)’이며 이듬해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쳤다. 이세민은 청년 시절 사선을 넘나들던 수많은 전투를 뒤로하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생애를 시작했다.
당 태종의 덕정과 통치술
당 태종은 즉위한 후 수조가 폭정으로 멸망한 것을 항상 경계로 삼아 말하기를, “천자라는 자리는 도가 있으면 백성이 추대하여 주인이 되지만, 도가 없으면 백성이 버리어 쓰지 않으니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다.
이전의 대부분 황제들과 달리 태종은 “군신이 서로 뜻을 맞추는 것이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아야 온 천하가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깊이 믿었기에, 군주와 신하가 함께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관 시기 군신 간에 이루어진 납간(納諫 간언을 받아들임)과 직언(直言)은 역사상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태종은 수 양제가 간언을 거부하고 허물을 숨긴 것을 거울삼아 마음을 비우고 넓게 수용하여 간언을 물 흐르듯 따랐으며, 대신들 역시 눈앞에서 그릇됨을 지적하며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상 유명한 간신(諫臣) 위징(魏徵)이 바로 이때 등장했다.
또한 당 태종은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이치를 깊이 알고 있었기에, 널리 인덕(仁德)의 정치를 펼쳐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는 정책을 취했다. “사치를 없애고 경비를 절감하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이며, 청렴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백성들의 의식이 풍족하게 하였다.”
간단히 말해 당 태종의 통치 방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군주가 되는 길은 먼저 백성을 보존하는 데 있다.
2. 법률을 관대하고 간소하게 시행하며 덕을 닦는 것을 강조한다.
3. 사치를 없애고 경비를 절감하며 사사로운 정을 꺾고 자신을 낮춘다.
4.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회복한다.
5. 사람을 포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매순간 스스로를 반성한다.
6. 청렴한 관리들을 선발하여 등용한다.
이하에서는 각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군주는 먼저 백성을 보존해야 한다
당 태종은 “군주가 되는 길은 반드시 먼저 백성을 보존하는 데 있으니, 백성을 손상시켜 자신을 봉양하는 것은 자신의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 배가 부르면 몸이 죽는다”고 여겼다. 그는 백성과 군주의 관계를 물과 배에 비유하기도 했다.
“군주를 배에 비유한다면,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황제의 근심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보았다. 황제의 욕심이 많으면 지출이 많아지고, 지출이 많으면 백성의 세금이 무거워져 백성들이 시름에 빠지게 되니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황제도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관 2년, 수도 장안 부근에 메뚜기떼가 창궐했다. 어느 날 당 태종이 궁궐 정원에 나갔다가 메뚜기를 보고는 몇 마리를 손으로 집어 들고 기도하며 말했다.
“백성은 곡식을 목숨으로 삼는데 네가 곡식을 먹어 치우는구나. 차라리 네가 나의 폐와 창자를 먹게 하겠다.”
말을 마치고 메뚜기를 삼키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렸다.
“이런 해로운 것을 드시면 병이 나실 수 있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내가 백성을 대신해 재앙을 받겠다는데 무슨 병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고는 끝내 메뚜기를 삼켜 버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해 메뚜기떼가 크게 일어났으나 재앙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관 2년, 경성인 장안 지역에 가뭄과 기근이 발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자녀를 팔아 옷과 식량을 바꾸었다. 당 태종은 즉시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했을 뿐만 아니라 황실 창고의 금은과 비단을 꺼내 이재민들이 자식을 도로 찾아 부모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그는 조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풍년이 들고 천하가 평안해질 수만 있다면, 비록 재앙을 내 몸에 옮겨 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이세민이 즉위한 후, 진왕부(秦王府) 시절의 수하들 중 일부가 오랜 세월 진왕을 모셨음에도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태종이 그들에게 말했다.
“황제는 오직 대공무사(大公無私)함으로 천하를 복종시켜야 한다. 나와 너희의 의식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관직을 두고 현능(賢能)한 자를 뽑아 관리로 삼는 것 역시 백성을 위한 것이다. 현능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옛 부하라는 이유로 관직을 준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사치를 없애고 경비를 절감
당 태종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관료 조직이 지나치게 방대해 일 없이 자리만 채우는 자가 많고, “백성은 적고 관리는 많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했다. 이는 자원 낭비, 직책 중복에 따른 책임 회피, 무성한 말에 일의 진행이 더뎌지는 등 폐단이 컸다. 이에 태종은 기구를 축소하고 통폐합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전국의 현(縣)이 절반으로 줄었고 주(州)와 부(府)는 3분의 1로 줄었다. 재상 방현령(房玄齡)은 태종의 뜻에 따라 조정의 문무관원을 4분의 3이나 감원해 겨우 643명만 남겼다. 사가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어떠한 사회적 동요나 불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태종이 일을 처리함에 대단히 신중하여 차질이 없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생산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회복한다
당 태종은 수조 말년의 전쟁을 거치며 백성들이 안정과 휴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백성들이 도적이 되는 것은 “부세와 요역이 무겁고 관리가 탐욕스러워 당장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닥치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깨닫고 숭검박부(崇檢薄賦 검약을 숭상하고 부세를 가볍게)를 제창했다. 그는 즉위 후 궁녀 3,000여 명을 돌려보내 국가 재정을 절약했고, 각지의 희귀한 진상품을 거두게 했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태종은 “모든 일은 근본에 힘써야 한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고 입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무릇 먹고 입는 것을 운영함은 농사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생산 발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농사철을 빼앗지 않았다.
정관 5년 2월, 관리들이 부병(府兵)을 차출해 태자의 관례(冠禮) 의장대로 삼으려 했다. 이때가 마침 봄 농사철이었으므로 태종은 관례를 10월로 미루라고 명령했다. 이 외에도 유랑하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이때부터 안심하고 생산에 종사했고 당조의 경제 역시 회복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포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매순간 스스로를 반성
당 태종은 일대의 명군(明君)으로서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름 높았다. 태종은 “군주 된 자가 비록 도가 없더라도 간언을 받아들이면 성군이 될 수 있다”, “넓게 들으면 밝아지고 한쪽만 믿으면 어두워진다”고 생각했기에 신하들의 간언을 장려하고 간관(諫官)의 직권을 확대했다. 무릇 조서와 명령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직언해야지 아첨하여 따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예컨대 직언을 즐겼던 위징은 본래 태자 이건성의 수하였으나 당 태종은 옛 앙금을 개의치 않고 간관으로 등용하여 국정의 잘되고 못됨을 직접 캐묻도록 허락하고 애호하기를 마지않았다.
위징이 수십 차례 상소를 올려 그의 과실을 직접 간했으나 태종은 매번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좋은 것을 따랐다. 훗날 위징이 죽자 태종은 슬퍼하며 말했다.
“사람이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얻음과 잃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내가 거울 하나를 잃었도다.”
한번은 태종이 대신들에게 말했다.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거울을 비추어 보아야 하고, 황제가 자신의 과실을 알고자 한다면 충신에게 의지해야 하오. 만약 황제가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신하들은 아첨하는 방법으로 황제의 뜻에 맞춰 준다면 황제는 나라를 잃을 것이요 신하들 또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 예컨대 우세기(虞世基) 등이 자신의 부귀를 보전하려고 아첨하는 방법으로 수 양제를 섬겼다가 수 양제가 살해당할 때 우세기 등도 함께 죽임을 당했소. 그대들은 이 교훈을 기억해 내가 하는 일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 반드시 말해야 하오.”
민간에서 관원을 뽑을 때 가짜로 신분을 속인 자들이 발견되자 태종은 이미 반포된 명령에 따라 그들을 처형하려 했다. 병부낭중(兵部郎中) 대주(戴冑)가 말리며 말했다.
“법률에 따르면 유배형에 처해야 합니다.”
태종이 노하여 말했다.
“그대는 법률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고 짐더러 신용을 잃으라는 것이오?”
대주가 아뢰었다.
“황상의 명령은 일시적인 기쁨과 노여움에서 나온 것이지만, 법은 국가가 공포하여 온 천하에 신의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속임수에 분노해 그들을 죽이려 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법에 위배됨을 아셔야 합니다. 법을 잣대로 삼는다면 개인의 작은 분노를 참아 온 천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그대가 이처럼 법을 집행하니 내가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훗날 대주가 여러 차례 도도하게 직언했으나 태종은 늘 그의 의견을 따랐고, 천하에 억울한 옥사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은 사람을 포용하는 기량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순간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는 일찍이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양제집(隋煬帝集)》을 읽어 보니 문체가 깊고 넓어 수 양제 역시 요순을 찬양하고 걸주를 비판할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행실은 그렇지 못했는가!”
위징이 말했다.
“황제께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겸손하게 남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꾀를 내고 용맹한 자가 힘을 다할 것입니다. 수 양제는 자신의 재능을 믿고 대단히 교만하여 스스로 옳다 여기며, 말로는 요순을 외쳤으나 행실은 걸주와 같았고 이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 교훈을 명심해야 하오.”
태종이 하루는 방현령과 소우(蕭瑀)에게 물었다.
“수 문제(隋文帝)와 나를 비교하면 어떠한가?”
방현령과 소우가 말했다.
“수 문제는 조정에 부지런히 임하여 5품 이상의 관원들과 함께 국정을 논의했고, 식사 때에도 위사들이 밥을 가져다줄 정도였습니다. 비록 성품이 너그럽지는 못했으나 부지런한 황제였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수 문제는 모르는 일이 많으면서도 늘 스스로 다 파악하고자 했다. 알지 못하니 고려가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생기고, 다 파악하려 하니 자연히 의심이 많아졌소.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신하들에게 의지하지 않았으니, 천하가 이처럼 넓고 일이 이처럼 많은데 피로해 죽을 정도로 애써도 다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오! 신하들은 수 문제의 습성을 알기에 결정을 기다리기만 했으니, 마음속에 동의하지 않는 바가 있어도 감히 간언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수조는 2대 만에 멸망한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소. 천하의 인재를 찾아 관직을 주고 그들에게 천하의 일을 처리하게 한 뒤 보고를 받으며,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니 그 누가 힘을 다하지 않겠소! 이렇게 하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소.”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황제의 지위가 존귀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하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서. 위로는 창천(蒼天)의 감찰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뭇 신하들의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며 혹여 하늘의 뜻과 백성의 바람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오.”
태종은 또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오직 요, 순, 주공(周公)과 공자의 위정지도(爲政之道)뿐이오. 그들은 나에게 새의 날개요 물고기의 물과 같아서 그들을 잃으면 끝장이니 단 한 순간도 없어서는 안 되오.”
완비되고 관대하면서도 간소한 법률을 채택
고조 시절, 수 양제의 번거롭고 가혹한 법률이 초래한 심각한 결과를 거울삼아 새로운 법을 제정하기 시작했고, 624년 관대함을 원칙으로 하는 《무덕률(武德律)》을 반포했다. 당 태종이 즉위한 후 위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인(寬仁)과 신형(慎刑, 형벌을 신중히 함)을 종지로 확립하고, 장손무기, 방현령 등에게 명하여 법률을 수정하게 하여 정관 10년, 즉 공원 637년 정식으로 《당률(唐律)》 500조를 공포했다. 기본 내용은 명례(名例), 위금(衛禁), 직제(職制), 호혼(戶婚), 구고(廄庫), 천흥(擅興), 적도(賊盜), 투송(鬪訟), 잡률(雜律), 포망(捕亡), 단옥(斷獄) 등이 있었다.
[역주: 참고로 당률의 주요 범주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명례(名例)란 형벌의 종류, 자수, 누범, 신분에 따른 형벌 감면 등 법 적용의 전반적인 원칙과 기준을 말한다.
위금(衛禁)이란 궁궐의 문금(門禁), 황궁 호위, 황제 관련 시설 및 경호 규정을 위반한 죄를 다룬다.
직제(職制)란 관료의 임무 소홀, 직권 남용, 공무 집행 중의 비리 및 관제 질서 위반을 다룬다.
호혼(戶婚): 호구(세금·병역 대상), 토지, 상속, 그리고 혼인과 관련된 민사 및 신분 법규를 다룬다.
구고(廄庫): 국가의 말과 가축, 무기, 보물 창고 등 관유 재산의 관리와 손실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천흥(擅興): 군대의 무단 동원, 국가 공사의 무단 시행 등 권한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죄를 다룬다.
적도(賊盜): 모반(역모), 대역, 살인, 강도 등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해치는 중범죄를 다룬다.
투송(鬭訟): 폭행, 상해, 싸움과 부당한 고소·고발에 관한 규정을 다룬다.
잡률(雜律): 앞의 11개 편에 속하지 않는 기타 다양한 범죄와 민생 관련 규정을 모아놓은 것.
포망(捕亡): 죄수의 탈옥 및 도망자(수배자)의 은닉·체포와 관련된 법규를 다룬다.
단옥(斷獄): 재판, 수사, 고문, 오판 및 형벌 집행 과정에서의 절차와 부정부패를 다룬다.]
사형 항목을 예로 들면 수조 법률에 비해 거의 절반이 삭제되었고 《무덕률》보다도 훨씬 관대해졌다. 참형(斬刑)을 유배형(流刑)으로 경감한 것이 92조, 유배형을 도형(徒刑, 징역형)으로 경감한 것이 71조였으며, 등줄기를 때리는 곤장형이나 발가락을 자르는 육형(肉刑)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했다. 단옥률 규정에 따르면 도형 이상의 죄로 판결을 내린 뒤 범인이 불복하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사형죄(死罪)는 세 번의 상소를 거쳐 사흘이 지난 후에야 집행할 수 있었다.
태종은 엄격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보다 덕행을 중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대신 왕규(王珪)에게 물었다.
“근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고대만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왕규가 대답했다.
“한대(漢代)는 유가 학설을 숭상하여 민풍이 순박했으나, 근대에는 유학을 경시하고 법률을 중시하여 국가가 갈수록 쇠퇴해졌기 때문입니다.”
태종 역시 이 말에 동의를 표했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장손순덕(長孫順德)이 뇌물로 비단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말했다. “순덕 같은 인재가 국가에 유용하다면 짐이 국가의 재물을 함께 나누어 쓸 수도 있거늘, 그가 어찌하여 이토록 재물을 탐하는가!”
태종은 그의 공로를 애석하게 여겨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비단 수십 필을 상으로 주었다.
그러자 대리소경(大理少卿) 호연(胡演)이 말했다.
“순덕이 법을 위반하여 재물을 받았으니 본래 죄를 면할 수 없거늘 어찌하여 상을 주십니까?”
태종이 말했다. “그가 만약 인성(人性)이 있다면 상을 받은 것이 형벌을 받는 것보다 더 굴욕적일 것이요, 수치심을 모른다면 금수와 다름없으니 그를 죽인 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청렴한 관리 선발
인재 선발 측면에서 당 태종은 문벌을 억누르고 고사렴(高士廉)에게 명해 《사족지(士族志)》를 편찬하게 하면서 ‘입공(立功), 입덕(立德), 입언(立言)’을 기준 삼아 사족(士族)을 재평가하여 공덕이 없는 자는 일률적으로 명단에서 제외했다. 즉 ‘재능과 행실을 겸비함(才行兼備)’을 기준 삼아 출신과 은원(恩怨)을 따지지 않고 관리를 발탁했다.
명망 높은 문무대신 중 위징은 도사 출신이었고, 울지공(尉遲恭)은 대장장이 출신이었으며, 장량(張亮)은 농민 출신이었다. 위징은 본래 태자 건성의 옛 신하로서 태종을 암살하려 모의했었고, 이정(李靖)과 울지공 역시 투항한 장수였으나 모두 중용되었다. 그는 또한 수조 과거제를 기반으로 관리 선발 제도를 더욱 완비하여 문벌 대신 과거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출신이 미천한 선비들에게도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다.
태종은 또한 품계가 있는 관원들에게 ‘사선(四善)’이라 불리는 네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① 덕과 의리가 널리 알려져야 한다: ‘덕의유문(德義有聞)’,
② 청렴하고 신중함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청신명저(清慎明著)’,
③ 공평하다고 칭찬받을 만 해야 한다: ‘공평가칭(公平可稱)’,
④ 정성을 다해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각근비해(恪勤匪懈)’이다.
특정 부서에는 보다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했는데, 예컨대 인사 평가의 최우선 과제로는 깨끗안 이를 드러내고 혼탁한 이를 쳐내는 ‘양청격혼(揚清激混), 칭찬과 깎아내림이 반드시 적절해야 한다는 포폄필당(褒貶必當)’을 꼽았다.
또 재판에 관한 업무에서는 최우선 과제로 지체하지 않는 ‘결단불체‘(決斷不滯)과 주과 빼앗음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여탈합리’(與奪合理) 등을 꼽았다. 이렇게 모두 ’27최(最)’의 제도를 정관 초년에 확립하여, 관원 각자가 태종의 요구에 맞춰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도록 했다. 태종은 나아가 “관직에 있으면서 아첨하고 속이며 탐욕스러운 자[居官諂詐,貪混有狀]”를 여덟 글자로 단정해 덕행이 ‘하하등(下下等)’인 관료로 분류했다.
정관 11년(637년), 시어사(侍御史) 마주(馬周)가 상소를 올렸다.
“천하를 다스림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백성을 안락하게 하고자 한다면 오직 적절한 사람을 선발하여 자사(刺史)와 현령(縣令)으로 삼아야 합니다.”
태종이 이에 깊이 동감하며 직접 자사를 선발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자사와 도독의 이름을 궁궐 병풍에 친히 적어두고 그들의 공과 허물을 수시로 기록하여 승진과 관직 박탈의 잣대로 삼았다. 또한 이정을 출척대사(黜陟大使)로 삼아 전국에 파견해 정무를 순찰하고 관리들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고찰하게 했다.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문제에 대해 당 태종은 형벌 외에도 주로 신하들이 마음속 깊이 ‘탐욕’이 사실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를 깨닫게 하고자 했다. 그는 대신들에게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일찍이 진 혜공(秦惠公)이 촉나라를 치려 했으나 길을 몰라 석우(石牛) 다섯 마리를 조각하게 한 뒤 엉덩이 밑에 금덩이를 놓아두었소. 촉나라 사람들이 이것이 금 똥을 싸는 소라고 생각하여 허겁지겁 촉 땅으로 끌고 들어갔소. 진나라 군사가 땅 위의 흔적을 따라 추격하여 결국 촉나라를 멸망시켰소.”
태종은 또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새가 나무에 깃듦에 나무가 높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물속에 숨음에 물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바닥 굴속에 사는 법이도. 그러나 둘 다 사람에게 잡히는 까닭은 오직 미끼를 탐냈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절대로 몸으로 법을 시험하지 마시오!”
관원들의 뇌물 수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태종은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뇌물 제공자로 가장해 시험해 보았다. 한 사문령사(司門令史)가 비단 한 필을 받자 태종은 이 수뢰 관원을 처형하려 했다. 민부상서(民部尚書) 배구(裴矩)가 말리며 말했다.
“벼슬길에 있어 뇌물을 받는 것은 참으로 사형에 처할 죄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사람을 시켜 뇌물을 주어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 역시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다스린다(道之以德,齊之以禮)’는 옛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역주: 이 문장은 논어 위정편에 나온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문무백관에게 말했다.
“배구가 관직에 있어 이치대로 쟁론할 줄 알고 황제 앞이라 하여 무조건 따르지 않는구려. 모든 일을 이처럼 처리한다면 어찌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한번은 민간에서 녕신(佞臣 아첨하는 신하)을 제거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태종이 물었다.
“누가 녕신이오?”
상소한 자가 말했다.
“황제께서 거짓으로 노하여 시험해 보십시오. 이치대로 대드는 자가 충신이요, 황제의 위엄이 두려워 순종하는 자가 녕신입니다.”
태종이 말했다. “황제는 강물의 근원이요, 뭇 신하들은 강물의 줄기다. 근원이 탁하면서 강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오. 내가 속임수를 쓰면서 어찌 신하들에게 정직함을 요구할 수 있겠소? 나는 지극한 성심으로 천하를 다스릴 뿐, 과거의 황제들이 권모술수로 신하들을 상대했던 것을 늘 수치로 여기오. 그대의 계책이 비록 좋으나 나는 채택하고 싶지 않소.”
당 태종 시기 대신들은 봉록(俸祿)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청렴하고 법을 지켰기에 정치가 대단히 청명(淸明)했다.
바로 이러한 통치 방침 하에 수많은 양신(良臣 훌륭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당 태종은 30년 가까이 지속된 태평성대인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649년)’를 만들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