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顏丹)
【정견망】
사람이 병에 걸리면 습관적으로 의사를 찾고 약을 구하러 가기 마련이지만, 의사 역시 두 손을 내저으며 환자에게 “이미 최선을 다했지만”, “저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사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고질병이나 중증(重症)이 시내나 시골에 홀연히 나타난 신비로운 고인(高人)에 의해 나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고인은 도행(道行)이 있거나 신통(神通)이 있었고, 그 처방이나 치료법은 대개 세상에서 찾기 힘든 것들이었다.
비록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도 찾을 곳이 없더니, 얻는 것은 힘들지 않더라(踏破鐵鞋無覓處, 得來全不費工夫)”고 하지만, 구도받는 사람의 행운은 실로 그가 스스로 쌓아온 선덕(善德)으로 인해 이뤄진 것이다. 하늘에는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있고, 신불(神佛)은 선량한 사람을 보살피신다. 오직 이것을 확고하게 믿어야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기적이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승려의 난치성 수종(水腫)에 ‘팔선’ 진인이 나타나
송조 시기,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 북쪽에 산이 하나 있었고, 산 위에는 백룡묘(白龍廟)라는 사원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원 안에는 용왕을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자열(慈悦)이라는 승려가 사원 곁에 초막을 하나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수행을 하는 한편 용왕을 모신 지 이미 30년이 넘었다. 그는 자주 현의 백성들을 위해 용왕에게 기도를 올렸고, 매번 아주 영험했다.
남송 고종(高宗) 재위 마지막 해(1162년)가 되자, 자열은 이미 78세였다. 그해에 그는 갑자기 병을 얻어 쓰러졌는데, 온몸이 마치 고(蠱, 독충)에 중독된 것 같았고 피부와 근육 사이에 수종(水腫)이 생겨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신음했고 무엇을 해도 낫지 않았다. 몇 달 후, 그는 아예 자신의 수의(壽衣)와 관을 마련해 두고 다만 죽을 날만을 기다렸다.
바로 이때, 산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머리에 청녹색의 얇은 명주 모자와 수건을 쓰고 있었고, 몸에는 흰 모시로 만든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소박했으나 기운과 풍채가 당당해서 세속 사람과는 전혀 같지 않았다. 그는 먼저 백룡묘에 들어가 잠시 참배하고 나서, 자열의 초막 앞을 지나다가 안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 말했다.
“병을 앓은 지 얼마나 되었소? 이것은 수종이 아니오? 하지만 괜찮소, 내가 고칠 수 있소!”
이 손님은 자열에게 옷을 풀고 반듯이 눕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오직 손톱으로 그의 복부와 배꼽 아래를 살살 몇 번 그었을 뿐인데, 자열의 몸에서 물이 그의 손을 따라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다음날, 침상 아래는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수종도 가라앉았다.
손님은 품속에서 탄환 크기의 검은색 약떡을 꺼내어 자열에게 당부했다.
“이 약을 녹두, 상륙(商陸) 뿌리와 함께 넣고 물 열 사발을 부은 뒤 함께 끓이시오. 약 찌꺼기를 걸러내고 나면 마음대로 마셔도 되오. 약을 다 마시는 날, 그날로 완쾌될 것이오. 당신의 목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 몇 년의 수명이 더 남아 있소!”
자열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의 성함과 고향을 물었다. 그 손님은 단 한 마디만 남겼다. “나는 회객(回客)이오, 임안(臨安) 사람이죠.” 이어서 또 말했다. “스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모두 가짜이고, 보지 못하는 것이 진짜라오.” 말을 마치고는 읍(揖)을 하고 떠나갔다.
자열은 그의 말대로 약을 끓였고, 마실 때 보니 맛이 더없이 달콤했다. 그는 한 모금 한 모금 마셨고, 이틀 뒤에 마침내 약을 다 마셨다. 그의 수종도 사라졌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후, 자열의 초막에 또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임안에서 왔으며, 보타산(普陀山)에 가서 관음보살을 뵙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둘둘 만 그림 한 폭을 꺼내 자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그린 것이오.” 말을 마치고는 떠났다.
자열이 펼쳐 보니, 그림 속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고 사방이 덩굴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그 사람이 바로 ‘팔선(八仙)’ 중의 진인인 여동빈(呂洞賓)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문득 앞서 그 손님이 왔을 때 스스로 ‘회객(回客)’이라 칭했던 것이 생각났고, 여동생이 또 마침 ‘회도인(回道人)’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비로소 무릎을 탁 쳤다. ‘아, 원래 그 손님이 바로 여동빈이었구나!’
갑자기 중증에 걸린 관리에게 신비로운 의원이 나타나다
고종이 아직 강왕(康王)일 때, 그가 매우 총애하던 막료(幕僚)가 있었는데 이름이 한공예(韓公裔, 자는 자의子扆)였다. 그는 일찍이 강왕을 따라 금병(金兵)의 군영에 사신으로 갔었고, 후에 금병이 침입해 오자 또 강왕을 호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강왕이 제위에 오르기 전, 그는 옥새를 관장하라는 명을 받았고, 칼을 빼 들고 사로잡혀 온 괴뢰정권(僞政權) 관리들을 앞에 두고 강왕에게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나중에 강왕이 즉위한 후에도 한공예는 여전히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 관직이 승진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정직하였고 결코 권세에 아첨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간신 진회(秦檜)의 노여움을 사서 탄핵을 받고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고종이 그를 아끼는 마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소흥(紹興) 연간에 한공예는 광주관찰사(廣州觀察使)로 임명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의 명을 받들어 경성으로 가서 천자를 배알했다. 경성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졌다. 고종 황제가 즉시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나 어의는 진찰한 후에 “이 병은 이미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숨결마저 끊어졌고, 온 가족이 침상 주변에 둘러서서 통곡했다.
어의가 궁궐로 돌아와 복명하자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한씨 집안에 사람을 보내 은 300냥과 비단 300필을 하사하였고, 이를 장례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마침 집안사람들이 그를 입관(入斂)하려던 찰나, 강호를 떠돌던 의원 한 사람이 우연히 그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의원은 문 밖에 서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난치병이 있거든 빨리 말하시오!”
한공예의 아들들이 이 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를 안으로 모셔 들였다.
의원은 병상에 누운 한공예를 살펴보고는 맥을 짚었고, 즉시 그의 사지에 침을 놓았다. 몇 차례 침을 놓자 그의 코끝에 미미한 숨결이 돌았고 입에서는 신음 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그가 살아난 것을 보고 의원은 다시 약 한 첩을 지어주었다. 그가 탕약을 마시고 몇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다음날, 한씨 집안에 이 일을 상소해 황제가 하사한 장례비를 반납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 돈을 곧바로 치료비로 삼아 다시 하사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종친 자제들의 귀에 들어가자, 어떤 이가 농담조로 말했다. “내 이제 처지가 곤궁하니, 만약 한공예처럼 딱 한 번 죽다 살아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구나.”
후에 한공예는 완전히 완쾌되었고, 황제는 다시 그에게 관직을 올려주어 모군절도사(某軍節度使)로 삼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 ‘태위(太尉)’라는 관직이 추증되었고 시호는 ‘공영(恭榮)’이라 했다.
자료 출처: 《이견지(夷堅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