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한 줄기 옅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처음에는 향로 위로 옅은 선(線) 하나가 실낱처럼 가늘게 고요한 방 안에서 은은하게 맴돌았다. 이어서 가볍게 펼쳐지며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마치 형체가 있는 사물 속에서 형상 없는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만 같다.
창밖의 바람 소리는 아득하고, 책상 위의 차는 아직 따뜻하다. 향연기(香煙)는 책장을 스치고 거문고 줄을 휘감아 돌며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 속에서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것은 선명한 색채도 없고, 꽃이 피어나는 자태도 없었으며, 다만 한 줄기 맑은 기운을 조용히 방 안 가득 채울 뿐이다.
사람은 이러한 향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게 된다.
고인(古人)은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며, 차를 음미하고, 고요히 앉아있을 때 흔히 먼저 향을 한 대 피우곤 했다. 향은 단순히 코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와도 같았다. 향이 피워지기 전에는 마음이 여전히 세속의 번잡함 속에 머물러 있지만, 향연이 피어오르면 바깥의 소음은 점차 아득해지고 사람도 잡념을 거두며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향은 참으로 특별한 생명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가지 끝에 피어남으로써 사람들에게 한눈에 발견되지만, 향은 대개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그것은 꽃잎과 나뭇잎 속에 숨어 있고, 초목의 뿌리와 줄기 속에 숨어 있으며, 또한 깊은 색깔과 얼룩덜룩한 결을 지닌 투박한 나무토막 속에도 숨어 있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지 몰라도, 그 내면에는 천지가 부여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기운은 서둘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초목이 자라기를 기다리고, 사계절의 순환을 기다리며, 채취와 법제, 그늘에서의 건조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향은 심지어 세월 속에서 수년을 잠들어 있어야 비로소 부조화스러움이 가라앉고 온후하고 맑고 아득하며 길게 이어지는 향운(香韻 향의 운취)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향은 먼저 내면에 감추어진 생명이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귀한 많은 것 역시 대개 이와 같다. 그것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한때의 화려함을 다투지 않으며, 긴 침묵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응축해간다. 한 사람의 학문과 덕행, 그리고 심성 역시 일시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세월의 침전을 거쳐 비로소 무게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향이 진정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면 또 불을 거쳐야 한다.
한 가닥의 향, 한 토막의 향목(香木 향나무)은 그저 조용히 놓여 있을 때는 형태가 있는 사물에 불과하다. 미약한 불길이 가까이 다가갈 때야 비로소 내면의 기운이 서서히 깨어난다. 향의 형체는 조금씩 줄어들지만 향기로운 냄새는 조금씩 퍼져나간다. 그것은 자신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을 버리고 형체 없는 기운으로 화하여 사람의 호흡으로 스며들고,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들어간다.
불은 향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이 자신을 완성하도록 만든다.
차는 끓는 물 속에서 펴지고, 흙은 맹렬한 불길 속에서 자기(瓷器)가 되며, 그을음과 먼지는 두들겨지고 아교와 섞여 숙성된 끝에 마침내 종이 위에 글을 남길 수 있는 먹이 된다. 향 역시 불을 거쳐야 하지만, 그것이 완성되는 방식은 다른 기물(器物)들과는 다르다.
자기(瓷器)는 불을 거쳐 그 형태를 남기고, 먹은 불을 거쳐 그 본질을 이루지만, 향은 불을 거쳐 오히려 그 형체를 버린다.
그것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오랫동안 진열해 둘 수 있는 기물이 아니라 방 안 가득한 맑은 기운이다. 향의 재는 점차 떨어져 내리지만 향기는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스며든다. 그것은 자신의 사라짐을 통해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완성하는 것만 같다.
향의 생명은 그러므로 어떤 ‘버림(捨)’을 품고 있다.
그것은 향기를 자기 자신 안에 남겨두려 하지 않고, 형체의 온전함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태우지만 눈이 부실 정도의 맹렬한 화염이 아니며, 사방에 베풀면서도 소리가 없다. 그것은 다만 내면에 품었던 모든 맑은 향기를 조용히 뿜어낸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갈 뿐이다.
향 중에서 가장 음미할 만한 것은 침향(沈香)이다.
침향은 나무가 평안하고 안락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빚어낸 향기가 아니다. 나무줄기가 바람에 꺾이거나 벌레에게 파먹히거나 외력에 의해 손상을 입은 후,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서서히 수지를 분비하게 된다. 수지와 목질은 기나긴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응축되고 변화하여 마침내 침향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그 가장 깊은 향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는 하나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처는 자칫 썩는 시작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생명 스스로의 치유와 전환을 통해 점차 향기가 응축되는 곳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지는 더 무거워지고 향의 운취도 더 깊어진다. 예전의 상처는 나무 위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나무의 생명 속에서 가장 귀중한 일부분으로 거듭났다.
이것이 아마도 침향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일 것이다.
고난 자체로는 자연스럽게 향기를 빚어내지 못한다. 어떤 이는 고생을 겪은 후 마음에 원망과 불평을 남기지만, 또 어떤 이는 마난 속에서 인내와 양해, 그리고 자비를 배운다. 진정으로 귀한 것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가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그 상처를 전환시켜 더 이상 바깥으로 쓴맛을 뿜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월 속에서 너그러움과 청명함으로 가라앉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상처 입은 모든 나무가 침향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련을 겪은 모든 사람이 맑고 밝아지는 것도 아니다.
침향이 귀한 까닭은 바로 그것이 길고 힘겨운 내면의 전화(轉化)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향은 또한 불의 세기, 즉 화후(火候)를 중요하게 여긴다.
불이 너무 맹렬하면 향기가 쉽게 타버리고, 불이 너무 약하면 내면의 기운이 온전히 우러나지 못한다. 진정으로 좋은 향은 온화한 열기 속에서 한 층 한 층 피어오른다.
사람의 품격도 이와 같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대개 이해관계, 오해, 그리고 곤궁함 속에서 비록 드러나게 마련이다. 향은 말을 하지 않지만 향기로 자신을 증명하듯, 진정으로 덕(德)이 있는 사람 역시 늘 말을 앞세우지 않고 그가 어디를 가든 주변에 한 층의 안정됨과 청명함이 더해지게 만든다.
향연기는 여전히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것은 피어오를수록 엷어져 마침내 창가의 햇살 속으로 녹아든다. 향로 속에는 고운 재만 조금 남을 뿐인데 방 안은 이미 맑은 향기로 가득하다.
고인이 향을 피운 것은 비단 책을 읽거나 거문고를 탈 때뿐만 아니라, 흔히 부처님 앞에서 한 가닥 향을 올릴 때이기도 했다.
그 순간 향은 더 이상 초목의 향기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사람이 손을 씻고 향을 피워 부처님 앞에 공경히 올리며 그 한 줄기 맑은 연기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세속의 번잡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내면의 가장 순수하고 경건한 일념을 저 높은 곳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향은 왜 늘 위로 향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원래부터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명은 비단 티끌 사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초목에서 와서 세월의 갈무리와 화후의 일깨움을 거쳐, 마침내 형체를 버리고 맑은 기운으로 화하여 위를 향해 나아간다.
만물에는 저마다의 말이 있다[萬物有言].
차는 물속에서 펴지고, 자기는 불 속에서 그릇을 이루며, 먹은 먼지와 연기 속에서 풍골(風骨)을 연마해 낸다. 반면 향이 말해주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의 도(道)이다. 그것은 형체의 보전을 최종적인 귀착점으로 삼지 않고, 타오르는 과정 속에서 내면에 감춘 향기를 뿜어내며, 버림을 통해 자신을 완성한다.
한 가닥의 향이 끝까지 타들어가면 그 형체는 재로 귀속되지만, 맑은 연기는 여전히 높은 곳을 향해 피어오른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생명이 세속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가장 순수한 부분을 부처님 앞에 바치며, 대도(大道)를 향한 자신의 동경을 한 줄기 맑은 연기로 바꾸어 드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는 것만 같다.
향 재는 향로 속에 떨어지고, 향 연기는 높은 곳을 향해 피어오른다.
향이 남긴 것은 방 안 가득한 맑은 향기뿐만이 아니요, 그 형체를 버리고 도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의 의미 그 자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