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하나 당조(唐朝) (3)

(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당 태종의 왕조 제도 강화 조치

당 태종은 수의 제도와 고조 이연이 제정한 조치들을 바탕으로 왕조(王朝)의 제도 건설을 더욱 강화했다. 그 합리성과 높은 효율성은 후세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에서 체현된다.

첫째, 상대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관료 기구 확립.

수의 제도를 계승하여 중앙에 3성 6부를 두었다. 3성이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尚書省)을 말한다. 전국의 군정(軍政)과 정사의 대권이 3성에 집중되었으며, 황제가 정령(政令)을 반포할 때에도 중서성과 문하성의 서명을 거쳐야만 합법적인 효력을 가졌다. 국가의 중대 정책과 방침은 먼저 중서성에서 연구하여 결정을 내리고, 문하성에서 이를 심의하여 잘못이 있으면 반박하여 돌려보냈다. 상서성 예하에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부(部)를 두어 중서성과 문하성을 통과한 정령을 구체적으로 집행했다.

중앙정부에는 재상들의 의사 기구로서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5품 이상 관원의 임면을 포함한 모든 중대 정무는 정사당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황제의 승인을 받은 후 반포·시행되었다. 삼성(三省)의 수장, 즉 중서성의 중서령, 문하성의 시중, 상서성의 좌·우복야는 모두 재상이었으며, 이후 정사당 회의에 참석하게 된 다른 관원들도 재상의 자격을 가졌다. 이들은 ‘참지기무(參知機務)’ 등의 관작을 지니고 참석했기에 정사당 회의에 참석하는 재상이 많게는 10~20명에 달했다.

이러한 중앙 관제의 특징은 재상의 권한이 비교적 크다는 점으로, 일정 부분 군주의 독재와 전권을 방지했다. 동시에 재상들이 정사당에서 집단으로 정사를 논의하고 3성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특정 재상의 독단 역시 막을 수 있었다.

당 태종은 또한 감찰 기관인 어사대(御史臺)를 설치하고 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夫)로 하여금 내외의 백관(百官)과 군민(軍民)을 감찰하게 했다. 어사대는 형부(刑部 사법 행정 기관), 대리시(大理寺 최고 심판 기관)와 함께 ‘3사(三司)’라 불렸다. 중대 사건이 발생하면 3사의 주사(主事)가 함께 심리했는데, 이를 ‘3사추사(三司推事)’라 부르며 이는 후대 왕조 ‘3법사(三法司)’ 합동 심리의 모태가 되었다.

지방 행정 기구 역시 수의 제도를 습용해 주(州)와 현(縣)의 2단계로 나누었으니, 전국에 300여 개의 주와 1,500여 개의 현이 있었다. 당 태종 때에는 전국을 10개의 감찰 구역, 즉 ’10도(十道)’로 나누고 황제가 관찰사(觀察使)를 파견하여 부정기적으로 도(道) 내 각 주·현의 실정을 감찰하게 했다.

둘째, 관원 선발 제도를 완비

정관 원년, 당 태종은 “선거를 성대히 개최(盛開選舉)”한 이후 시험을 통해 인재를 발탁했다. 태종 때 자주 치러진 과목은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였다. 명경과는 주로 첩경(帖經 빈칸을 외워서 메꾸기), 경의(經義 경전의 의미), 시무책(時務策)을 시험 보았고, 진사과는 주로 시무책과 경의를 시험 보았다. 정관 말년에 태종은 진사과를 확대하여 진사 합격자의 출세의 길을 넓혀주었다. 선비가 진사과에 합격한 후에도 이부(吏部)의 복시(複試)를 거쳐 합격해야만 비로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과거 시험의 발전은 재능 있는 선비들에게 정계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궁호(宮戶) 등 천민 계층을 제외한 일반 평민은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위진남북조 이래 이어져 온 문벌 귀족 정치의 구도를 완전히 깨뜨렸다. 비록 당시의 과거 시험에 여전히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 있긴 했으나, 시험 제도가 오랫동안 시행됨에 따라 평민 자제라도 10년 동안 학문을 닦아 장원 급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셋째, 교육 제도를 완비

당 태종은 학교 건설을 대단히 중시했으며, 그의 관심 속에 학교 교육 제도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전국의 최고 학부는 국자감(國子監)이었으며, 그 아래에 국자학,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6가지 학교를 두었다. 앞의 세 학교는 3품, 5품, 7품 이상 관료의 자제를 받아들였고, 뒤의 세 학교는 8품 이하 관리의 자제와 평민 자제를 받아들였다. 이 외에도 홍문관(弘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을 두어 황친(皇親) 친척과 고위 관원의 자제를 전담 교육했다. 지방에는 주학(州學)과 현학(縣學)을 두었다.

각급 학교에서는 유가 경전을 필수 과목으로 삼아 가르쳤으며, 성적이 우수한 자는 이부(吏部)로 보내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했다.

정관 시기의 교육 발전에 대해 두우(杜佑)는 《통전(通典)》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정관 5년, 태종이 국학에 여러 차례 행차하여 마침내 학사 1,200칸을 증축했다. 국학, 태학, 사문학 역시 학생 수를 늘렸으며 서학과 산학에 각각 박사를 두니 도합 3,261명에 달했다. 둔영 비기(飛騎 날랜 기병)에게도 박사(博士)를 보내 경학을 가르쳤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 여러 나라의 추장들 또한 자제를 보내 국학에서 배우게 하니 학생 수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국학의 성황이 근래에 없던 바였다.”

넷째, 관대하고 간소한 법률을 완비

고조 때 수 양제의 번쇄하고 가혹한 법으로 인한 엄중한 결과를 거울삼아 새 법을 제정하기 시작했고, 624년 관대함을 원칙으로 하는 《무덕률(武德律)》을 반포했다. 당 태종이 즉위한 후 위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인(寬仁)과 신형(慎刑)의 종지를 확립하고 장손무기, 방현령 등에게 명하여 법률을 수정하게 함으로써, 정관 10년(공원 637년) 정식으로 《당률(唐律)》 500조를 공포했다. 기본 내용은 명례, 위금, 직제, 호혼, 구고, 단독 출병(擅興), 적도, 투송, 잡률, 포망, 단옥 등이 있었다.

당 고종 때에 이르러 장손무기의 주도로 《당률》 조문에 주석을 달아 《당률소의(唐律疏議)》 12편 30권을 편찬했으니, 이는 당시 고구려, 일본, 안남(安南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송·명 각 왕조 법전의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중국 고대에 내려오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법전이다.

다섯째, 부병제(府兵制) 개혁

수와 당은 모두 서위(西魏, 북주(北周)의 부병 제도를 계승했으나 당조에 이르러 몇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당대 부병(府兵)의 중앙 통솔 기구는 주로 12위(十二衛)였으며, 일부분은 동궁 6율(六率)에 속했다. 부병의 기본 단위는 각지에 설치된 절충부(折衝府)였으며 절충도위(折衝都尉)와 과의도위(果毅都尉)가 통솔했다. 절충부 아래에는 단(團, 200명), 단 아래에는 여(旅, 100명), 여 아래에는 대(隊, 50명), 대 아래에는 화(火, 10명)를 두었다. 절충부는 상·중·하 3등으로 나누어 상부는 6단(1,200명), 중부는 5단(1,000명), 하부는 4단(800명)의 위사(衛士)를 거느렸다. 전국에 설치된 절충부는 많을 때 634개에 달했으며 총병력은 68만 명이었다.

부병(府兵)의 출처는 군부 소재지에서 “6품 이하 자손 및 직업이 없는 백정(白丁)” 중 3년에 한 번씩 선발했다. 부병은 21세에 복무를 시작해 60세에 면제되었으며, 복무 기간 중에는 자신의 조용조(租庸調) 세금을 면제받았다. 부병의 통상적인 임무는 차례대로 경성에 올라와 숙위하는 것으로 이를 ‘번상(番上)’이라 했고, 때로는 다른 지역으로 출정하거나 국경을 지키기도 했다. 외출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때를 제외하고 부병은 자신의 고향과 농업 생산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오직 겨울철에만 집중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았으니 이른바 ‘병농합일제(兵農合一制)’를 실천한 것이었다.

당대의 부병제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원칙이 관통되어 있었다. 당시 관중(關中) 지역에 병력이 가장 집중되어 26만 명을 보유했으니 이는 당조 전체 병력의 약 40%에 달했다. 부병의 발동권은 중앙 병부(兵部)가 철저히 쥐고 있었으며 지방관은 물론 중앙 12위조차도 임의로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없었다. 전쟁 시에는 중앙에서 각지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고위 장수를 임시로 파견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병사는 부로 돌아가고 장수는 조정으로 돌아가는(兵散於府, 將歸於朝)” 구조였기에 장수가 군대를 독점하여 횡포를 부리는 것을 방지하는 데 유리했다.

문화방면에서 당 태종이 한 조치들

당 태종은 서적과 역사를 편찬하는 일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그는 민간에서 사망한 학자들의 유서(遺書)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나라 말년 낙양에 남아있던 수대(隋代)의 장서는 1만 4천 부, 약 9만 권에 불과했으나, 태종이 홍문관(弘文館)을 설립한 이후 장서는 20여 만 권에 달했다. 태종은 남북조 시기 경학(經學)이 남학과 북학으로 갈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공영달(孔穎達)에게 명하여 이를 정리하게 하고 《오경정본(五經定本)》으로 반포하게 했으니, 이것이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원고가 되어 과거 시험의 표준본이 되었다.

사학(史學) 방면에서 태종은 국사관(國史館)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려 남북조 및 수조의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당 황실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교훈을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이 외에도 그는 이름난 유학자들을 모집해 학관(學官)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장안 조정에 한때 유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인재가 배출되었고, 대당을 위해 수많은 나라의 동량을 양성했다.

당 태종은 불법(佛法)을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흥성시키는 일 역시 매우 중시했다. 그는 당승 현장(玄奘)의 구법 및 역경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낙양에서 직접 그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불교는 당 중기에 이르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 태종의 찬란한 무공

정관 연간에 당 태종은 국내에서 태평성대의 구도를 일구었을 뿐만 아니라, 그 천하의 위엄을 동남아시아의 광활한 지역까지 뻗쳤다. 그는 사방 오랑캐를 경영하여 동돌궐(東突厥)을 굴복시키고, 설연타(薛延陀)를 평정하며, 고구려를 정벌하고, 토번을 복종시키고, 회흘(回紇 위구르)을 평정했다. 그의 무공은 가히 찬란하여 당의 국위(國威)를 사방에 떨쳤으니 진·한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의 보기 드문 찬란한 무공 덕분에 사방 각지의 부족장, 추장, 대칸(大汗), 국왕 등은 태종을 공통으로 ‘천가한(天可汗)’, 즉 ‘천하의 위대한 황제’라 추앙했다. (서북 각 부족은 자신들의 군주를 가한이라 불렀다.)

돌궐과 설연타를 평정하고 똑같이 사랑

일찍이 현무문의 변 직후,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당조의 내란을 틈타 대대적으로 침입해 왔다. 태종은 울지경덕을 파견해 싸우게 하여 돌궐을 대패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힐리가 다시 침입하여 위수(渭水) 편교(便橋)에 이르러 신하를 보내 장안에 위세를 과시했다. 태종은 즉시 기병 6기만을 거느리고 위수로 나아가 힐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 힐리가 맹약을 어긴 것을 꾸짖었으며, 이때 당의 대군 역시 연이어 도착했다. 힐리는 당군(唐軍)이 강성함을 보고 틈이 없음을 깨달아 태종과 화친을 맺고 즉시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바로 ‘편교의 맹’이다.

정관 4년(630년) 3월, 당의 장수 이정(李靖)과 이적(李績)이 돌궐을 대패시키고 힐리가한을 생포하니 동돌궐이 멸망했다. 이로써 당의 영토는 오늘날의 바이칼호 북쪽까지 확대되었으며, 본래 돌궐에 속했던 부족 중 일부는 북쪽의 설연타에 붙고 일부는 서역으로 달아났으며, 기타 당조에 항복한 자만 해도 10여 만 명에 달했다.

이 10여 만 명의 돌궐 항복자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두고 당 태종은 조정 신하들을 불러 모아 상의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북방의 유목민족이 예로부터 중원 지역의 엄중한 변방 근심거리였으므로 오늘 다행히 멸망시켰으니 그들을 모두 황하 남쪽 내지로 이주시켜 기존의 부족 조직과 구조를 깨뜨리고 여러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여 농사와 방직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제멋대로이던 유목민족이 순종하는 내지 주민으로 변하고 새북(塞北) 땅은 영원히 비어있게 될 것이라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소수민족이란 약할 때는 항복을 청하고 강해지면 반란을 일으키는 법이니 그들을 초원으로 쫓아내어 내지에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심복의 근심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직 중서령 온언박(溫彥博)만이 여론을 물리치고 돌궐 항복자들을 수초가 풍부한 하투(河套 오르도스) 지역으로 옮겨 살게 하여 그들의 기존 부족을 보전하고 생활 습속을 따라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비어있는 땅을 채울 수 있고 북쪽의 변방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천자는 만물에 대해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듯 마땅히 빠짐없이 품어야 합니다. 오늘 돌궐이 곤경에 처해 우리에게 귀순해 왔는데 그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받아들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당 태종은 온언박의 건의에 크게 찬동하며 덧붙여 말했다.

“예로부터 모두 중화를 귀히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히 여겼으나, 오직 나만은 그들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노라!”

그리하여 태종은 하투 지역에 정양(定襄)과 운중(雲中) 두 도독부를 설치해 돌궐 항복자들을 통솔하게 했다. 귀순하고자 하는 각급 추장들에게는 장군, 중랑장 등의 관작을 내려 조정에 늘어서게 하니 5품 이상의 소수민족 관원만 100여 명에 달해 전체 조정 신하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고, 연이어 장안으로 이주해 들어온 가구가 1만 여 세대에 달했다.

당 태종의 이러한 정책은 주변 수많은 민족의 적극적인 지지와 애호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다투어 당 태종을 ‘천가한’이라 존칭하며 신명(神明)처럼 공경했다.

동돌궐이 멸망한 후 막북(漠北)의 설연타가 계속 그 땅에 거주했다. 644년, 당 태종은 설연타 한국(汗國)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출병했고 설연타가 패배하여 당조에 항복했다. 이로써 당나라 북쪽의 변방 근심이 잠시 해소되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정이 동돌궐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을 때 태종은 마음속의 격동과 흥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시 태상황께서 백성을 위해 돌궐에 굴복하여 신하를 자처하셨다. 그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내 생전에 반드시 돌궐을 멸망시키리라 맹세했다. 이제 단 한 번 군대를 출정시켜 그 족장을 생포해 경성으로 끌고 왔으니, 당시 대당의 수치를 씻었도다.” 모든 대신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동돌궐 멸망 후 당 정부는 동쪽으로 유주(幽州)에서 서쪽으로 영주(靈州) 일대에 순(順), 조(釣), 장(長), 화(化) 4개 도독부를 설치해 내부한 10여 만 명의 돌궐인을 안치했다. 또한 힐리가한이 관할하던 내몽골 지역 동쪽에 정양도독부, 서쪽에 운중도독부를 두고 그 아래 6개 주를 두어 원래의 돌궐 추장을 자사(刺史)로 삼아 현지 돌궐 부족을 관리하게 했다. 당시 장안으로 이주한 돌궐인이 1만 여 가구였고, 장군, 중랑장 등 5품 이상 관리로 임명된 돌궐 귀족만 100여 명에 달했다.

서역 평정

돌궐을 평정한 후 태종은 계속해서 서역을 경영하며 여러 차례 출병했다. 정관 8년(634년), 토욕혼(吐谷渾)이 국경을 침범하자 태종은 이정, 후군집(侯君集), 이도종(李道宗) 등을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다. 이듬해 토욕혼의 복윤가한(伏允可汗)이 사막으로 도망쳤다가 국인(國人)에게 살해당하자 태종은 다른 토욕혼 국왕을 세웠다.

정관 13년(639년), 고창왕(高昌王) 국문태(麴文泰)가 서역의 조공(朝貢)을 가로막자 태종은 후군집, 설만철(薛萬徹) 등에 명하여 고창을 치게 했다. 이듬해 고창왕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국지성(麴智盛)이 즉위하면서 당에 항복했다. 태종은 이에 고창의 수도 교하성(交河城)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니 서역 각국이 모두 장안으로 와서 조공을 바쳤다.

고구려 정벌전

정관 19년(645년) 2월, 당 태종은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금을 살해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직접 6군을 이끌고 낙양에서 북진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요수를 건넌 후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안시성(安市城)을 오랫동안 공략하지 못한 데다 날씨가 추워지고 풀이 시들며 물이 어는 등 식량이 떨어져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게 되자 회군하라는 어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토번과의 화친

티베트 고원의 원래 주민은 맹족(孟族)이라 불렸다. 전국시대 이후 발강(發羌), 미당(迷唐) 등 일부 강족(羌族) 부족들이 점차 오늘날의 티베트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과 융합하고 번식하며 발전하여 토번족(吐蕃族)을 형성했다.

토번 왕조를 건립한 것은 야롱강 계곡에서 활동하던 야크(犛牛) 부족이었으며, 이 부족들을 통일한 자가 기섭기찬푸(棄聶棄贊普 티녜 첸포)였다. ‘찬푸(贊普)’란 웅강한 사나이라는 뜻으로, 훗날 토번 군장의 존칭이 되었다. 기섭기부터 토번은 추장 세습 제도를 확립했으며, 제8대 찬푸 부대공갑(布袋鞏甲) 이후 토번 사회는 비교적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629년, 겨우 열세 살의 송첸찬푸(松贊幹布 송찬감포)가 찬푸 자리에 올라 반란을 평정하고 티베트를 통일했다. 송첸찬푸는 다방면의 개혁을 추진했다. 수도를 라사로 옮기니 이때부터 라사는 티베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당의 중앙 관제와 부병제를 참조하여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정치·군사 제도를 확립했다. 경제와 정치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송첸찬푸 시기부터 역법(曆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통일된 도량형을 규정했으며, 우전(于闐)과 천축 등의 문자를 참조하여 토번문(훗날 오늘날의 티베트문으로 발전)을 창제하고 엄격한 법률을 제정했다.

정관 15년(641년) 1월, 당 태종은 송첸찬푸의 거듭된 요청에 응하여 문성공주(文成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예부상서 강하왕 이도종을 파견하여 공주를 호위해 티베트로 들어가게 했다. 송첸찬푸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히 수도 라사에서 하원(河源, 오늘날 청해성 알릉호 서쪽)까지 나와 사위의 예로 이도종을 접견했다. 그는 중국의 화려한 의복과 장엄한 의장대를 보고 크게 부러워했다. 이때부터 토번과 당나라는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를 맺고 서로 배우며 우호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들어갈 때 비단과 보석, 생활용품, 의료 기구, 생산 공구, 채소 씨앗은 물론 경사(經史), 시문(詩文), 공예, 의약, 역법 등의 서적을 대량으로 가지고 갔다. 당 고종 때 토번은 내지로부터 누에고치 씨앗을 들여왔고, 당조는 양주(釀酒), 방아, 제지, 제묵 공장(工匠 기술자)들을 토번으로 보내 기술을 전수하게 했다. 그녀가 가지고 간 중원의 악단은 티베트족의 음악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문성공주는 불교를 깊이 신봉했다. 당시 당은 불교가 창성했으나 티베트에는 불교가 없었다. 그녀는 불탑, 불경, 불상을 가져가 대조사(大昭寺)를 건립하여 봉안했다. 그녀와 송첸찬푸가 절 문앞에 친히 버드나무를 심었으니 이것이 바로 ‘당류(唐柳)’의 유래다. 유명한 ‘생외동맹비(甥舅同盟碑, 장경회맹비)’가 바로 이 ‘당류’ 곁에 서 있다.

송첸찬푸는 현숙하고 다재다능한 문성공주를 매우 존경하여 털옷을 벗고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었으며, 여러 차례 귀족 자제들을 장안으로 보내 학문을 배우게 했다.

토번에서 보낸 40년 동안 문성공주는 끊임없이 헌신하며 한족과 티베트족 두 민족의 우의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세웠다. 680년 문성공주가 서거하자, 티베트인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아저갑사(阿姐甲莎, 한족 누님이라는 뜻)’라 불렸다. 당나라 시인 진도(陳陶)는 《농서행(隴西行)》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귀한 공주 시집간 이후로, 오랑캐 풍속 절반이 한가(漢家)와 같아졌네.”

태종은 주변 여러 민족에게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다. 무력으로 강적을 정벌하는 것 외에도 민족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으니, 예컨대 익도대도독(益都大都督)이 요인(僚人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병을 청했을 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어느 해인가 돌궐에 큰 눈이 내려 양과 말이 수없이 죽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가축이 야위자, 여러 신하들이 태종에게 이 기회를 타 돌궐을 공격하자고 권했다. 태종이 말했다. “내가 방금 타인과 맹약을 맺고서 맹약을 저버리는 것은 신의가 없는 것이요, 남이 재앙을 당했을 때 이득을 취하는 것은 인애(仁愛)가 아니며, 남이 위태로울 때 승리를 취하는 것 역시 정당한 무력 행사가 아니다. 설령 돌궐의 여러 부족이 모두 반란을 일으키고 가축이 한 마리도 남지 않는다 해도 나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그들에게 죄가 있기를 기다려 벌할 것이다.”

이 때문에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고 여러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당연히 태종이 거둔 찬란한 무공은 진숙보(秦叔寶), 울지경덕, 정교금 등 수많은 장수들이 태종과 사지를 함께 넘어 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당의 위엄을 사해에 떨치게 한 영웅 중에는 두 명의 뛰어난 대장이 더 있었으니, 한 명은 이정(李靖)이요, 다른 한 명은 이적(李績)이었다.

정관 11년, 태종이 대신들에게 말했다. “수 양제는 인재를 쓸 줄 몰라 연이어 장성을 쌓아 돌궐을 막았다. 내가 이적을 위임해 병주(並州)를 지키게 하니 돌궐이 그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변방이 안정되었는데, 어찌 백성을 고달프게 하여 성을 쌓겠는가?” 이는 당 태종이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기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당 태종과 천상(天象)의 경고

태종은 별의 변화와 일월의 이상 징후가 하늘(上天)이 사람들에게 내리는 어떠한 계시라고 깊이 믿었다. 가뭄과 천재지변은 하늘의 견책이므로 군주가 스스로 검토하고 허물을 고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여겼다. 반대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남은 하늘의 가호이며 복을 내리어 국운이 길어질 징조라 여겼다.

정관 8년(634년) 8월 23일, 남쪽 하늘을 길이가 6장(丈)에 달하는 혜성이 찢어발기듯 지나갔고 100여 일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고대에 혜성은 불길한 징조였기에 태종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내가 덕이 없고 정사에 허물이 있어 혜성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신 우세남(虞世南)이 대답했다.

“옛날 제 경공(齊景公)이 혜성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덕을 닦으니 16일 만에 혜성이 사라졌습니다. 폐하께서 공이 높다 하여 오만해지지 않으시고 태평세월이 길어졌다 하여 사치하고 안일해지지 않으시며 처음처럼 한결같으시다면, 혜성 따위는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

태종이 깊이 찬동하며 말했다.

“진시황은 6국을 평정하고 수 양제는 사해를 가졌으나, 오만하고 사치하다가 나라가 속히 멸망했다. 하늘이 짐과 대당에 경고를 내려주신 것에 감사하노라. 솔직히 짐 스스로 자못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는 짐의 과실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