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백성을 위해 도를 세운다(爲生民立道)”라는 구절은 북송(北宋)의 장재(張載 1020년~1077년) 횡거(橫渠) ‘사위(四爲)’ 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하나는 주희(朱熹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찬한 《근사록(近思錄)》 《제유명도(諸儒鳴道)》의 《횡거어록(橫渠語錄)》, 남송 말 오견(吳堅) 각본(刻本) 《장자어록(張子語錄)》 및 명(明)나라 판본 《장자전서(張子全書)》에 실린 것으로,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도를 세우며,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연다.(爲天地立心,爲生民立道,爲去聖繼絕學,爲萬世開太平.)”
다른 판본은 청(清)대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7 《횡거학안 상(橫渠學案上)》 황백가(黃百家)의 안어(案語)에 나온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명(命)을 세우며,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연다.(爲天地立心,爲生民立命,爲往聖繼絕學,爲萬世開太平.)”
두 판본의 중요한 글자 차이는 두 번째 구절에 있다. 즉 앞의 판본은 “위생민입도(爲生民立道)”로 되어 있고, 뒤의 판본은 “위생민입명(爲生民立命)”으로 되어 있다. 후세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앞에 나오는 송·명 시대의 판본에 전해지는 것이 원문이고, 《송원학안》에 인용된 것은 후대 사람들이 윤색한 것이지만, 그것이 비교적 널리 유포되어 오늘날 더 많이 인용되는 표현 형식이 되었다고 한다.
장재는 북송 진종(真宗) 천희(天禧) 4년에 태어나 신종(神宗) 희녕(熙寧) 10년에 세상을 떠난 북송 시기의 중요한 사상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횡거선생(橫渠先生)이라 불렀으며, 관학(關學)의 창시자이자 송명 이학(理學)의 기틀을 다진 사람 중 하나다.
장재는 원래 소년 시절부터 병법(兵法)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서북 지역의 군무를 주관하던 섬서경략안무부사(陝西經略安撫副使) 범중엄(範仲淹)에게 상서를 올려 서하(西夏)에 군대를 보낼 것을 청하기도 했다. 범중엄은 장재가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겨, 그에게 “유학자는 스스로 명교 안에서 즐거움이 있거늘, 어찌 병사의 일을 하려 하는가!(儒者自有名教可樂,何事於兵!)”라고 깨우쳐 주며 《중용》을 읽을 것을 권했다.
“(장재가) 그 책을 읽었으나 오히려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다시 불교와 도교의 학설을 찾아 수년간 그 학설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얻은 바가 없음을 알고 돌아서서 다시 《육경(六經)》에서 도를 구했다.”[1]
가우(嘉佑) 2년(1057년), 37세의 장재는 변경(汴京, 당시 북송의 수도인 개봉)으로 가 과거 시험에 응시했는데, 이때 구양수(歐陽修)가 주시험관이었으며 소식(蘇軾 동파), 소철(蘇轍) 형제와 함께 동등하게 진사에 급제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희녕변법(熙寧變法) 즈음에 장재는 신종에 의해 숭문원교서(崇文院校書)에 임명되었다. 왕안석이 일찍이 그에게 신정을 추진하는 일에 대해 “새로운 정치로 변경함에 있어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그대의 도움을 구하면 어떻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장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에서 장차 큰 일을 하려 하니 천하의 선비들이 그 바람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만약 사람들과 더불어 선을 행한다면 그 누가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옥을 다루는 장인에게 억지로 조각하는 법을 가르치려 한다면, 사람도 본래 감당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장재의 문인인 여대림(呂大臨)은 《횡거선생행장(橫渠先生行狀)》에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집정자가 묵묵부답이었고, 말한 바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점차 불쾌해했다.” 장재는 신정(新政)의 조치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재는 횡거의 옛 거처로 돌아온 후, “종일 방 한 칸에 단정히 앉아 좌우에 책을 두고, 고개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기록했다. 혹은 밤중에 일어나 앉아 촛불을 켜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가 도에 뜻을 두고 정밀하게 생각함은 잠시도 쉰 적이 없었고, 일찍이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진봉수(秦鳳帥) 여대방(呂大防)이 장재를 추천할 때 이렇게 평가했다. “장재는 시종 성인이 남기신 뜻을 잘 밝혀내었으니, 그가 정치를 논함은 대략 옛것을 회복할 만하다.” [1]
청대 황종희가 편찬하고 그의 아들인 황백가와 제자 전조망(全祖望) 등이 이어서 완성한 《송원학안(宋元學案) 횡거학안)》(권17, 권18)에는 여러 유학자들이 장재에 대해 내린 평가들을 모아놓았다.
후세에 ‘서산선생(西山先生)’ 또는 ‘진서산(真西山)’으로 존경받은 남송의 저명한 성리학자 진덕수(真德秀)는 장재에 대해 “이것은 모두 선생이 도(道)를 스스로의 임무로 삼은 뜻이다.”라고 평가했다.
전조망은 안어(按語)에서 “횡거선생은 도를 만드는 데 용감했다(橫渠先生勇於造道)”고 했고, 황백가는 “그가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의연하게 성인의 경지에는 반드시 도달할 수 있고 삼대(三代)의 다스림은 반드시 회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명을 세우며, 과거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연다’라고 하였으니, 스스로 짊어진 임무의 무거움이 이와 같았다.(其精思力踐,毅然以聖人之詣爲必可至,三代之治爲必可複。嘗語雲:“爲天地立心,爲生民立命,爲往聖繼絕學,爲萬世開太平。”自任之重如此。)”
황종희는 “횡거는 기백이 매우 컸고, 여기에 정밀하고 고생스러운 공부를 더했기에 그 성취가 남달랐다. 이천(정이)은 그에 대해 박절함이 많고 너그럽고 여유로움이 적다고 하였고, 고정(考亭, 주희)은 그의 높은 곳은 너무 높고 치우친 곳은 너무 치우쳤다고 하였는데, 이는 횡거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橫渠氣魄甚大,加以精苦之工,故其成就不同。伊川謂其多迫切而少寬舒,考亭謂其高處太高,僻處太僻,此在橫渠已自知之。)”
송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신유학(新儒學)’은 더 이상 선진(先秦) 시기처럼 선현들의 문장 내용을 주석하고 고증하는 데 치중하지 않고, 선현들의 텍스트 내용이 지닌 대의(大義)를 탐구하는 데 착안했으며, 불가와 도가의 요소를 결합하여 현실 세계에 응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학설을 형성했다.
세상에서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 불리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중 사람 중 하나인 정호(程顥)는 “도가 밝아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익힌 바를 좋다고 여기며 스스로 지극히 족하다고 말한다. 반드시 공자의 문하처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려 한다면, 스승과 제자의 형세가 격절되어 도가 거의 끊어질 것이다. 그 자질에 따라 인도한다면 비록 식견에 밝고 어두움이 있고 뜻에 얕고 깊음이 있을지라도 또한 저마다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송원학안(17권)》)
즉, 당시에도 아직 선현들의 경지와는 비교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맹자(孟子)가 도덕을 논한 부분을 형태로 삼고 불가와 도가의 사상적 요소를 융합하여 토착화하는 것을 견지했으며,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반본귀진(返本歸真)의 함의는 배척하면서 새로운 이론과 독특한 유학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재는 《중용》을 연구하는 동시에 불도(佛道) 양가의 경서도 다년간 연구했으나, 불가와 도가의 공무(空無)하고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다시 유가의 육경으로 돌아왔다. “《주역》을 으뜸으로 삼고, 《중용》을 본체로 삼으며, 《공자》와 《맹자》를 법도로 삼았다)”[1] 그리하여 ‘우주의 본원은 기(氣)이다’라는 우주관과 기화생성(氣化生成) 이론 체계를 구축해 냈고, 《정몽(正蒙)》, 《횡거역설(橫渠易說)》, 《경학리굴(經學理窟)》, 《장자어록(張子語錄)》 등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시 《파초(芭蕉)》는 ‘도를 만드는 데 용감했던[勇於造道]’ 그의 웅지를 잘 보여준다.
파초의 마음 다해 새 가지 펼쳐지니,
새로 말린 새 마음도 은연중에 따르네.
바라건대 새 마음을 배워 새 덕을 기르고,
이내 새 잎을 따라 새로운 지혜를 일으키고 싶어라.
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송명의 여러 유학자들은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움(爲天地立心)”을 사대부의 신성한 사명으로 여겼다. 이에 대해 청대의 학자 왕심경(王心敬)은 “우리 무리는 반드시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생명을 세워야 한다. 궁할 때는 과거 성인의 끊어진 지극한 뜻을 밝혀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영달했을 때는 만세의 태평성대를 열어 이 세상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사목보감서(司牧寶鑒序)》)
횡거의 ‘사위(四爲)’가 비록 기백이 웅대하고 도량과 식견이 넓고 컸을지라도, 그것은 ‘형이하자를 일러 그릇이라 한다(形而下者謂之器)’라는 가치 취향 위에서 발전하여 그릇의 형태가 더욱 두터워지고 견고해졌을 뿐이며, ‘형이상자를 일러 도라 한다(形而上者謂之道)’는 무형(無形)으로 귀결되는 가치 취향과는 어긋난 것이다.
공자는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지만,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해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 (《논어·헌문》)”고 했다. 즉,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제고하기 위함이었으나, 후대의 학자는 타인을 위해 인간 세상의 만세 태평의 기틀을 개척하는 것 등을 위했다는 뜻이다. 말법(末法) 말겁(末劫)의 시기에 이르러 사람의 이기심과 이욕(利慾)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자, 왕왕 더욱 편면적인 이해로 흘러 남을 위한다는 ‘爲人(위인)’에 대한 해석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고사성어 중에 “행기소(行其素)”라는 말이 있으며 또한 “아행아소(我行我素)”라고도 쓴다. 이 성어는 《중용(中庸)》에서 나온 것이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 …… 군자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재 부귀한 처지에 있으면 부귀하게 행하고, 현재 빈천한 처지에 있으면 빈천하게 행하며, 현재 오랑캐의 처지에 있으면 오랑캐답게 행하고, 현재 환난의 처지에 있으면 환난에 처해 행하니, 군자는 어떤 처지에 들어가더라도 스스로 얻지 않음이 없다.”
이는 군자가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 본분 밖의 일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외재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혹은 타인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본래 지녔던 주장을 따라 일을 해 나갈 수 있다면,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의미다.
도는 본래 사람을 멀리하지 않지만, 사람이 도를 ‘만들어 낼[造道]’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 마음이 격앙되고 호방한 행위로 무언가를 나타내려 하는 것은 도에서 매우 멀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반본귀진(返本歸真)은 사람 마음(人心)이 점점 약해져 마침내 공무(空無)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구축한 이론에는 사람을 승화시키는 내함과 요소가 없으며, 단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거나 정교(政教)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이로 인해 초래된 도에서 벗어나 업을 짓는(造業) 행위는 반대로 인류 사회의 문제를 증폭시키고, 나아가 전체 사회의 도덕 수준을 미끄러져 내려가게 하여 업을 짓고 그에 상응하는 악과(惡果)를 불러오게 된다. 왜 역사상 경제 발전 수준이 그토록 높았던 송조(宋朝)가 마지막 결말과 퇴장에서 그토록 비참했겠는가?
노자는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 나타나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나타나며, 인을 잃은 후에 의가 나타나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나타난다. 대저 예라는 것은 충성과 신의가 박해진 것이요, 어지러움의 우두머리다. 먼저 아는 척하는 것은 도의 화려한 껍데기일 뿐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그 두터운 곳에 처하고 그 얇은 곳에 머물지 않으며, 그 실상에 처하고 그 화려한 껍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故
여기서 노자는 인류 사회가 도(道)와 덕(德)에서 발단하여 아래로 한 층 또 한 층 경지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층면을 지적했다. 일단 낮은 층면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도의 내함 속에 있는 층층의 이치(理)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유위적인 인(仁)·의(義)·예(禮) 층면에 있는 심태(心態)로는 도(道)와 상덕(上德)의 무위(無爲) 상태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단지 도의 허황된 화려함[道之華]만을 만질 뿐이며, 이는 바로 ‘어리석음의 시작[愚之始]’이다.
그렇다면 “행기소(行其素)”란 바로 “그 두터운 곳에 처하고[處其厚]”, “그 실상에 처하는[處其實]” 것이며, 아울러 “자신의 위치에 따라 행하여[素其位而行]”, 저 겉보기에 ‘도의 화려함’처럼 보이는 거창한 이념이나 격앙된 도량과 식견에 미혹되거나 이끌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한다(志於道,據於德) (《논어·술이》)”는 반본귀진의 가치 방향이다.
주:
[1] 《송사·열전·도학(道學)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