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어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송 태조
송 태조는 사람됨이 어진 덕(仁德)을 지니고 관대했으며, 천성적으로 검소하고 성품이 자연스러워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다. 즉위 초기에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 신분을 숨기고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간언하자 태조는 “제왕의 흥함은 절로 천명(天命)이 있는 것으로, 주 세종이 여러 장수 중 얼굴이 넓고 귀가 큰 자를 모두 죽였으나, 나는 종일 곁에서 모셨어도 해치지 못했느니라”라고 대답했다. 이후로 미복 나가보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났다. 만약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태조는 “천명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하니 네가 금지할 수 없다”라고 했다.
개봉의 새 궁전이 완성되었을 때 태조는 정전(正殿)에 앉아 여러 문을 탁 트이게 열게 하고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이는 내 마음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하거나 굽은 곳[邪曲]이 있다면 사람들이 모두 볼 것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이 말과 같았다. 태조의 인덕과 넓은 흉금은 항복한 신하와 공(功)이 있는 대신을 대하는 데서도 체현되었다. 항복한 신하에 대해 태조는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대하게 대했다. 예를 들어 오월의 전숙이 알현하러 왔을 때 재상 이하 모든 신하들이 그를 잡아두거나 죽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태조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를 귀송시켰다. 전숙이 하직 인사를 할 때 태조는 그에게 보따리 하나를 주었는데, 모두 송조 장수와 재상들이 태조에게 전숙을 구류하거나 죽이라고 요청한 상소문들이었다. 전숙이 본 후 매우 감격했고 이로부터 강남이 평정되었다.
또 다른 예로 남한의 유창(劉鋹)이 통치할 때 독주(毒酒)를 이용해 신하를 독살하길 좋아했다. 송조에 귀순한 후, 한번은 태조가 그에게 술을 하사하자 유창은 술에 독이 있을까 의심하여 잔을 받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해도 폐하께서 이미 신을 죽이지 않도록 대해주셨으니, 대량에서 평범한 백성이 되어 태평성세를 보길 원하오니 차마 이 술을 마시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했다.
태조가 웃으며 “짐은 진심으로 사람을 믿고 대하거늘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유창의 술잔을 가져다 스스로 마시고 그에게 별도로 술을 하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무장 출신인 태조 조광윤은 정권을 얻은 후 당말(唐末) 오대(五代) 할거 국면의 재현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절도사들의 병권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어진 덕(仁德)이 있었기에 지난날 일부 황제들이 공신을 대량 살육하던 수법을 따르고 싶지 않았고, 대신 이들의 직위를 낮추거나 높은 관직과 두터운 녹봉을 교환 조건으로 삼아 군대를 직접 중앙 정권의 영도 아래에 두었다. 술잔을 들며 병권을 해제했다는 의미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 이를 가리킨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961년 조광윤이 한번은 석수신(石守信), 왕심기(王審琦) 등 대장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한창 무르익을 때 조광윤이 “내가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어찌 알겠느냐, 황제가 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이 있으니 차라리 절도사가 되어 편안함만 못한 것을.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 일 년 동안 나는 단 하룻밤도 편안히 잠들지 못했노라”라고 했다.
석수신 등이 듣고 매우 놀라 연달아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는데 누가 감히 폐하께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라고 했다.
조광윤은 “어느 누군들 부귀를 갈망하지 않겠느냐? 일단 황포가 몸에 입혀지면 그대들이 비록 황제가 되고 싶지 않더라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석수신 등이 여기까지 듣고 연달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는 모두 거친 자들이라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에 조광윤이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해 생각하건대, 차라리 병권(兵權)을 내려놓고 지방으로 가서 한가한 관직에 있으면서 논밭과 집을 사서 자손들에게 가업을 남겨주고 유유자적 만년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내 그대들과 사돈을 맺어 서로 아무런 의심이 없다면 더 좋지 않겠소?”
석수신 등이 일제히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를 생각해주시는 것이 너무나도 주도면밀하십니다!”
이튿날 조회에서 석수신 등은 모두 자신이 늙고 병들었다는 구실을 대며 황제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거둬줄 것을 청했다. 태조는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병권을 거두어들였고, 동시에 그들에게 거액의 재물을 하사하고 저택을 지어주어 깨끗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태조는 매우 검소했다. 궁중의 주렴은 모두 푸른 베로 만들었고, 평소 입는 옷도 세탁한 후 계속 입었다. 위국장공주(魏國長公主)의 상의에 물소리 새 깃털이 장식된 것을 보고는 다시는 사용하지 말라고 경계하며 “너는 부귀한 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마땅히 복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라고 훈계했다. 또 맹창(孟昶)이 보물로 요강을 장식한 것을 보고는 그 보물을 부수고는 “네가 칠보로 이것을 장식했으니 마땅히 무슨 그릇으로 음식을 담았겠느냐? 하는 짓이 이러하니 멸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꾸짖었다.
태조는 독서를 좋아했고 《상서·요전(堯典)》을 읽을 때면 “요·순께서 사흉(四凶)을 벌하심에 단지 유배에 그쳤거늘 어찌하여 근대의 법망은 이리도 촘촘하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재상에게 말했다.
“오대 제후들이 발호해 법을 멋대로 적용해 사람을 죽인 자가 있어도 조정에서 방치하고 묻지 않았다. 사람 목숨이 지극히 중하거늘 번진(蕃鎭)을 방치해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앞으로 여러 주의 대벽(大辟 사형) 판결은 사건 내용을 그대로 기록해 위에 아뢰게 하고 형부(刑部)에 붙여 재심하게 하라”라고 했다. 이에 이를 정령(政令)으로 반포했다.
국가를 다스리는 방면에서 태조는 일련의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첫째는 “배주석병권”의 방법으로 절도사들의 권력을 해제하고, 성망이 비교적 낮은 사람을 보내 금군(禁軍)을 통솔하게 했다. 동시에 금군에는 더 이상 최고 통수(統帥)를 두지 않고, 금군 양사[兩司 전전사(殿前司)와 시위마보군사(侍衛馬步軍司)]를 “삼아(三衙)”, 즉 전전사(殿前司)와 시위마군사(侍衛馬軍司), 시위보군사(侍衛步軍司)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로 견제하게 했다. 이 장령들이 비록 군대를 통솔하긴 하지만 군대의 단속과 이동 및 방어 등의 일은 모두 추밀원樞密院)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동시에 “갱수법(更戍法)”을 실행해 금군의 주둔 지점을 몇 년마다 한 번씩 바꾸어 배치하되 장수는 따라서 움직이지 않게 함으로써 “병사에게 정해진 장수가 없고, 장수에게 정해진 병사가 없게” 하여 군대가 장수의 사유물이 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조치는 송대의 대외 무공(武功)이 한(漢)·당(唐)에 비해 크게 떨어지게 만들었다.
둘째로, 정치상에서 태조는 또 재상의 권력을 분할하고 지방 장관의 권력을 깎아내는 조치를 취했다. 당조에서 재상의 권력이 너무 컸던 것과 반대로, 송초에는 재상 아래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더 두어 보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추밀사(樞密使)와 삼사사(三司使)를 상설 관원으로 정해 추밀사는 재상의 군정(軍政) 대권을 나누어 맡고, 삼사(三司 염철사, 탁지사, 호부)사로 재상의 재정(財政) 대권을 나누어 맡게 했다. 또 중서문하와 추밀원을 합쳐 “이부(二府)”라 불렀다. 다시 말해 즉, 재상이 국정을 주관하되, 군사 문제는 추밀원이 주관하고, 재정 문제는 삼사가 주관해 서로 모르게 했다. 이렇게 되자 모든 것은 다 황제를 통하게 되었다. 동시에 어사대(禦史台), 간원(諫院) 등 감찰 기관의 권력과 지위를 높였다. 이러한 개혁을 거쳐 재상에게는 겨우 제한된 권력만 남게 되었고 황제가 대권(大卷)을 총괄할 수 있게 되었다.
송조는 또한 주군(州郡) 장관이 하나 이상의 주군 직무를 겸임할 수 없게 정했으며, 주군의 병권, 재정권 및 사법권도 조정에 귀속시켰다. 또 주군 장관은 문인(文人)이 담당하도록 정하고, 각지 행정 장관도 조정에서 파견했다. 이로부터 무인(武人)이 전횡하고 발호하던 국면이 끝났다. 게다가 지방 장관의 권력이 분산되고 임기도 짧았으며 무력이 약화되어 조정과 대항할 수 없었다.
셋째로, 과거 제도를 더욱 완벽하게 했다. 송조의 지방 장관은 대부분 문관이 담당했으므로 이 관원들을 선발하는 길이 바로 과거 시험이었다. 북송 건국 후 차츰 많은 조치를 취하여 시험 절차를 엄격히 하고 합격 인원을 늘리며 합격자의 대우를 높였다. 송 태조 후기부터 거인(擧人)이 예부 시험을 거친 후 반드시 황제가 친히 주재하는 “전시(展試)”를 통과해야만 진정한 합격으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합격한 사람은 “천자의 문생(門生)”이 되었다. 송 태종 재위 21년 동안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은 자가 1만 명에 가까웠다. 송조의 이런 과거 제도는 후세 왕조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로, 경제상에서 북송은 토지 정책에 있어 “겸병을 억제하지 않는다(不抑兼並)”와 “전제를 세우지 않는다(田制不立)”는 정책을 취했으니, 이 정책은 상품 경제 발전의 추세에 적응하여 정부의 토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줄여 어느 정도 적극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토지 겸병 현상을 날로 심각하게 만들었고 정부가 얻는 토지세도 차츰 줄어들게 했다. 북송 중기에 이르러 “권세 있는 관원과 부유한 이들이 밭을 점유함에 제한이 없어, 겸병하고 위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풍속이 된” (《송사·식화지》) 지경에 이르렀다.
북송의 농업세는 당조 후기 이래의 양세법(兩稅法)을 받아들여 여름과 가을 두 번에 나누어 징수했고 세액은 비교적 낮았다.
다섯째로, 대외 관계에 있어 요와 서하에 대해 수동적 방어 방침을 취해, 단지 국경선에 소량의 금군만 주둔시켰다.
태조는 모친인 두태후(竇太后)의 유명에 따라 친동생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바로 태종이다. 한번은 태종이 병이 나자 태조가 친히 찾아가 지켜보며 직접 쑥뜸을 떠주었다. 태종이 아파하자 태조는 쑥을 취해 자신에게 뜸을 떴다. 태조는 늘 가까운 신하들에게 “태종은 용처럼 움직이고 범처럼 걸으며 태어날 때 기이한 조짐이 있었으니, 훗날 반드시 태평천자가 될 것이니 복덕(福德)이 짐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976년 초, 태조가 서거하니 향년 50세였다. 시호를 영무성문신덕(英武聖文神德)황제라 하고 묘호를 태조라 했다.
《송사》는 태조에 대해 이렇게 찬양했다.
“오대(五季 오대)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송 태조는 전란 속에서 일어나 구오(九五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 나라를 얻게 된 근원을 따져보면, 앞선 후진·후한·후주와 비교하여 어찌 그리 크게 다를 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호령을 발하고 명을 내리자, 강력한 번진의 대장들도 고개를 숙이고 명을 따랐으며, 사방의 열국을 차례로 평정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힘만으로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건륭(建隆 태조 건국 초기 연호) 이래로 번진들의 병권을 해제하고, 탐관오리를 엄한 법으로 다스려 난세의 혼탁한 근원을 틀어막았다. 주군(州郡)의 사목(司牧 장관)부터 말단인 지방 관원과 막료에 이르기까지, 직접 임명하고 살폈다.
농업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형벌을 신중히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세상과 함께 휴식을 취하게 하니, 마침내 나라가 크게 태평해졌다. 치세가 안정되고 공을 이루자 예악(禮樂)을 제정했다. 재위 17년 사이에 300여 년의 기초를 다져 자손에게 전해주었고, 대대로 전해지는 법전과 모범을 남겼다. 마침내 하·상·주 삼대(三代) 이래로 문명과 문물의 다스림과, 도덕·인의의 기풍을 상고하고 논함에 있어 송은 한·당에 비해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아, 나라를 창업하고 후세에 정통을 드리운 군주의 규모가 이와 같았으니, 또한 원대하다고 이를 만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