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
【정견망】
인긴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정해져 있지만, 이 도리 뒤에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결국 인과법칙이다.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를 예로 들어보면, 금생에 관운이 당당한 것은 그저 전생에 쌓은 복분에 기반한 것일 뿐이다.
왜 복분이 있는 것일까? 첫째가 덕德, 둘째가 운명命, 세째 풍수이다. 풍수보다 덕행이 조화(造化)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전생에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금생에는 물질적 측면을 통해 사람의 복(福), 녹(祿), 수(壽)로 전환된다. 그러나 비록 정해진 운수가 있다 할지라도 깎여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복이 깎이고 수명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관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승진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도 승진하지 못하고, 자칫 잘못하면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좌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리에 밝은 적지 않은 이들이 관가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누려도 끝이 없는 영화와 부귀가 어디에 있는가? 사소한 부주의라도 생기면 관직을 지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워지고, 심지어 일가족과 자손에까지 화가 미친다. 결국에는 부질없는 한탄만 남게 될 뿐이다.
늙은 병사를 곤장으로 죽여 정해져 있던 승상 자리를 놓치다
북송의 관료 진헌(陳軒)은 인종이 재위하던 시절에 태어나, 휘종의 마지막 연호인 ‘선화(宣和)’ 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종 ‘가우(嘉祐)’ 8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이후 줄곧 각 지방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절도추관(節度推官), 지현(知縣), 여러 주의 지주(知州)를 지냈고, 조정에서는 랑중(郎中)과 시랑(侍郎)을 역임했으니 과연 관운이 형통했고 인종·영종·신종·철종·휘종의 5조를 거치며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치대로라면 그의 장래는 한계가 없어야 했으나, 그는 정4품인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까지만 오른 후로는 다시는 승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남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오직 진헌의 마음속만은 거울처럼 맑았다. 그의 본래 이름은 사실 ‘헌(軒)’이 아니라 ‘원여(元輿)’였다. 이름을 ‘헌’으로 바꾼 것은 일전에 꿈에서 ‘진헌’에게 ‘좌승(左丞)’의 관상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두 개의 큰 문을 보았는데, 문 위에는 각각 네모난 현판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좌승 진헌’, 다른 한쪽에는 ‘우승 황리(黃履)’라고 적혀 있었다.
황리(黄履 자 안중安中)는 실존 인물로 역시 북송의 관료였다. 비록 정4품인 어사중승을 지냈고 마침내 상서우승까지 올랐으나, 그의 벼슬길은 진헌만큼 순탄하고 통달하지 못해 좌천과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같은 꿈에서 황리의 ‘우승’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는 꿈의 징조가 틀린 것이 아니라, ‘좌승’이 들어맞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인과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뜻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어느 날 문득 아들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늘 부지런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았고, 평생 양심에 가책을 느낄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그 꿈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예전에 항주 지주로 재직할 당시 심리했던 어떤 옛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시 어떤 늙은 병사가 항주에 머물던 고위 관리를 돕다가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 고위 관리가 극도로 화를 내며 늙은 병사를 관아로 잡아와 곤장형으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이미 나이가 칠순이 넘었으니, 비록 법률에 따르더라도 그에게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가 재물을 바쳐 형벌을 면하는 속형(贖刑)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 고위 관리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특별히 편지까지 보내어 나를 책망했다. 나는 체면을 차리느라 어쩔 수 없이 늙은 병사를 다시 관아로 잡아들였다. 그의 가족들이 모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빌며 ‘나이가 많으시니 만약 곤장을 치면 틀림없이 맞아 죽을 것입니다’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노인에게 곤장을 쳤고, 결국 정말로 노인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그 가족들이 관아에서 슬프게 노인의 시신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몹시 자책했다. 권세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나는 그 시절에 사심으로 법을 굽히고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해쳤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벼슬살이를 한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어째서 좌승에는 오르지 못하는가?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나를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이 일을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거울로 삼아, 결코 나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여색에 빠져 정해져 있던 집정(執政)의 기회를 놓치다
북송에 손수(孫洙)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적은 광릉(강소성 양주)이다. 그는 일찍이 경전 서적을 널리 읽고 보고 들은 것이 많았으며, 특히 문필에서 뛰어났다. 그가 지은 글은 조정과 야당을 진동시켰고, 포증(包拯), 오유수(歐陽修) 등 당대 중신들의 깊은 인정을 받았다. 그의 붓끝에서는 꽃이 피어나는 듯했고, 어휘는 화려하고 우아했으며 서한(西漢)의 문풍을 짙게 담고 있어 ‘삼조를 보좌하고 두 황제를 세운’ 명신 한기(韓琦)로부터 “오늘날의 가의(賈誼)”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지은 <단주영진묘비문(澶州靈津廟碑文)>은 신종 황제까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할 정도였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진사 시험에 급제했고, 나중에 간원(諫院)을 관리했으며, 한 지방의 중책을 맡는 대관을 지냈으니 관려는 그야말로 평탄하고 순탄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를 따라 경동로(‘로’는 오늘날의 성에 해당함)로 부임하던 중 등주의 동해신묘를 지나게 되어 안으로 들어가 참배했다.
그날 밤, 그는 꿈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너는 장차 과거시험에서 일거에 이름을 떨칠 것이며, 관직은 잡학사(雜學士)보다 위가 될 것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 기뻤으나 ‘잡학사’가 대체 어떤 벼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 꿈이 매우 길하니 적어도 용도각학사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당시 이 관직은 정3품이었으니, 다시 말해 손수의 관직이 정3품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원풍 2년(1079년), 신종 황제는 손수를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송나라는 한림원을 매우 중시하여 한림학사를 정3품으로 책정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축하를 전하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내 관직이 ‘잡학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꿈을 꾸었소. 지금의 이 한림학사라는 벼슬은 기껏해야 ‘잡학사’의 으뜸 정도에 불과할 뿐이오. 결국 나는 꿈에서 본 만큼의 승진을 얻지 못한 것이요. 이것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해야 할 일이오!”
한 달 뒤, 그의 이 불경스러운 말은 신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특별히 아껴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정말로 그에게 품계를 더해 주어 집정대신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어느 날, 손수는 성 밖으로 친구를 보러 나갔다가 갑자기 술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시기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아 몸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다. 신종은 사람을 보내 그의 안부를 묻게 했고, 다급하게 물었다.
“애경, 언제쯤 조정에 들어올 참인가? 나는 그대가 와서 조정의 큰 정무들을 처리해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황제에게 이토록 중용되고 총애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곳의 기회주의적인 관료들은 구름처럼 몰려와 배견(拜見)하였고 그의 집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동료들이 자신을 치켜세우러 오는 것을 보고, 손수는 저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관직이 정3품을 넘어서게 될 것이야, 하늘이 과연 나를 속이지 않았어!”
그러나 그가 조정에 들어가기 전날 밤, 그는 갑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하인에게 말했다.
“내가 병을 앓은 지 너무 오래되어 황제께 어떻게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너는 빨리 바닥에 이불을 깔아라, 내가 연습을 좀 해야겠다.”
하지만 손수가 절을 두 번 하자마자 다시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에 그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고, 가족들이 발견했을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불과 49세로, 비로소 한창 기운이 넘쳐 조정에 힘을 다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 시기였다. 꿈의 징조도 이미 나타났고, 현실에서 황제의 조서도 이미 내려졌다. 명(命)도 있었고 운(運)도 있었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앉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덕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던(德不配位) 것이 아니겠는가?
유교 경전을 숙독하고 재능이 넘쳐 흐르던 고명한 인재가 어찌하여 덕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했던 것인가? 이것은 아마도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지었던 시조 한 수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손수가 살아있을 당시, 그는 과거 시험장의 시험관(考官)으로 선발된 적이 있었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그는 사전에 한림원에 들어가 머물러야 했으며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황제의 조령이 이미 집으로 전해졌는데 그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그날 명신 이단원(자 공근)의 초대를 받아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시 이단원은 막 첩을 들였다. 이 여인은 용모가 아리따웠고 비파를 아주 잘 탔다. 술자리가 무르익는 동안 손수는 술을 마시고 노랫소리를 들으며 눈을 떼지 못한 채 그 첩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이 되었어도 흥취는 여전했다. 황제의 조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집에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비록 몸은 한림원에 들어갔으나 마음은 이단원의 그 아름다운 첩에게 가 있었다. 그는 술김을 빌려 떠나기 아쉬운 마음과 안타까움을 한껏 토해내며 붓을 들어 사모하는 괴로움을 표현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성루에는 북소리가 아직 세 번 울렸는데,
어찌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사람을 재촉해 떠나게 하는가.
말을 타고 가며 몹시도 애태우니,
비파 곡조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고개 돌려 뉘엿뉘엿 바라보는 곳에는,
어째서 가랑비마저 이리 내리는가.
옥으로 만든 집이라 공연히 말하지만,
옥당(한림원)의 오늘 밤은 참으로 길기도 하구나.
이것이 바로 손수의 관직이 정3품을 넘어설 수 없었던 까닭이다. 현명한 이를 뽑고 능력 있는 이를 등용하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대들보 같은 신하가 본분과 사명을 외면한 채 주색(酒色)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남의 처첩을 탐내고 마음속에 음사(淫邪)한 생각을 품었으니, 이것이 어찌 덕행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록 마음속으로 한 생각을 품었을 뿐이라도 과보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더 나아가 어떤 행실을 저질렀다면 잃은 것이 비단 관직뿐이었겠는가.
참고자료: 《이견지(夷堅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