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신
【정견망】
중국의 전통문화는 신이 전한 신전문화(神傳文化)로서 크고 깊으며 유구하다. 그중 한자는 문화의 창시, 전파 및 계승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생각할 사(思)’ 자를 바라보다가, 사람이 과연 자신의 이 ‘마음밭[心田]’을 잘 가꾸고 정리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마음이 지치고 피로하다고 느끼는 것은 마음밭에 너무 많은 욕망과 무거운 짐이 쌓여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들을 깨끗이 치워내지 않는다면 마음이라는 이 밭에서 어찌 좋은 것이 자라나 삶을 충실하고 즐겁게 만들 수 있겠는가. 주변 환경이나 물질에 비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바로 수행자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에 ‘심원(心猿)’이라 불린다. 그가 서천경전 취하러 가는 길 내내 요마귀를 베고 도깨비를 무찌르며 당삼장을 보호한 것은 기본적으로 모두 그에게 의존한 덕분이었으니,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 흐름에 따라, 마찬가지로 ‘마음(心)’을 밑받침으로 삼고 있는 다른 한자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생각할 념(念)’
자세히 나의 생각(念)은 매일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게 된다. 지난날을 회상하거나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면, 온갖 크고 작은 감정들이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이 ‘념(念)’ 자를 바라보면, 마음(心) 위에 얹힌 ‘지금 금(今)’ 자가 매우 눈에 띈다. 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떤 스님이 도를 닦으며 어떻게 정진하는지 묻는 이에게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곧바로 잔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이렇게 가장 평범한 일들이 어찌 정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스님이 이르기를 “그는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으려 하지 않고 온갖 잡다한 요구를 하며, 잠잘 때 잠을 자려 하지 않고 천 가지 계산을 한다. 그러므로 남들과 다른 것이다”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는 오직 밥 먹는 것에 집중하고, 책을 읽을 때는 오직 독서에 집중하는 것—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과연 몇이나 이를 해낼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볼 수 있듯,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온갖 잡념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당장의 생각과 일념(起心動念)이야말로 앞으로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
‘병 양(恙)’과 ‘원망할 원(怨)’
‘양(羊)’은 아름답고 유순함을 상징하는데, 어째서 마음(心) 위에 얹히면 ‘병(恙)’이 되는 것일까? 《풍속통의(風俗通義)》의 기록에 따르면 “양(恙)은 사람을 무는 벌레로,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양(羊)’이 아니라 전갈처럼 독이 있는 벌레의 상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은 일종의 살을 파먹는 벌레(啮虫)로, 사람들이 여기에 물리면 질병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가벼운 병을 미양(微恙), 소양(小恙)이라 부르고, 병이 없는 상태를 무양(無恙)이라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이 ‘원망할 원(怨)’ 자를 보자. 글자 모양의 윗부분에는 무언가 비틀려 아래로 축 늘어진 느낌이 있고, ‘마음(心)’ 위에 얹힌 ‘원(夗)’ 자는 고대 문헌에서 ‘구불구불 뻗어 나가는 뱀’을 뜻하는 ‘완(蜿)’ 자와 통한다. 비록 ‘원’ 자가 그저 사람의 일종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위에 독충이 있으면 ‘병(恙)’이 되는데, 이 마음에 독사까지 도사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는 이렇듯 온갖 엉망진창인 해로운 생명체들은 바로 인간의 각종 부정적인 상념들과 정확히 상응한다. 이렇게 보면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正心正念)을 지니는 것이 극도로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용서할 서(恕)’
얼핏 보면 ‘서(恕)’ 자는 ‘원(怨)’ 자와 약간 닮아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는 바르게 보이고 다른 하나는 비뚤어져 보인다. 갈등 속에서 용서하는 마음(恕心)을 품느냐, 아니면 원망하는 마음(怨心)을 품느냐 하는 것은 비록 한순간의 생각 차이일 수 있으나, 그 마음 위에서 생겨나는 물질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소위 “선한 생각이 일어나면 복의 신이 보살피고, 악한 생각이 싹트면 귀신이 따라붙는다”고 했다. 마음에 꼭 맞고 순조롭기를 원한다면, 차라리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는(以恕己之心恕人)”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의 마음이 마주하는 모든 생명과 선한 인연을 맺는다면, 매사 마음먹은 대로 순조로운 것이 곧 선한 과보가 뒤따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충성 충(忠)’
‘중(中)’과 ‘심(心)’이 합쳐지면 곧 중심이 되지 않는가? ‘중(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며, 바르고 곧고 정직한 것을 의미한다. ‘충(忠)’을 말하면 가장 먼저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악비(岳飛)가 떠오를 것이다. 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내 생각에는 곧 마음속에 천하를 품고, 명확하고 큰 지조와 뜻을 품은 채 굳세고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른바 ‘우충(愚忠, 어리석은 충성)’이라는 말도 있으니, 이는 곧 ‘충(忠)’에도 좋고 나쁨이 나뉘어 있다는 뜻일 터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진정한 ‘충’이란 애초에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여전히 도(道)와 덕(德)의 표준을 향한 ‘충’이며,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고차원적이고 드높은 지향에 대한 ‘충’일 것이다.
‘생각할 상(想)’과 ‘뜻 의(意)’
‘마음(心)’ 위에 ‘상(象, 통상 相)’이 얹히면 ‘상(想)’이 되고, ‘마음(心)’ 위에 ‘소리 음(音)’이 얹히면 ‘의(意)’가 된다. 노자는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형상이 없다(大音希声, 大象無形)”고 했다. 소리도 없고 형상도 없다면, 오직 하나의 마음만 남게 된다. 오직 이 마음만이 ‘법(法)’과 ‘도(道)’와 서로 통하며, 생명의 본원과 진정한 자신에게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굳이 글자의 유래를 파헤치지 않고 해석을 찾지 않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신전한자(神傳漢字) 속에 담긴 깊고 두터운 내포를 여전히 엿볼 수 있다. 마음의 생각(心念)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심이 되며 가장 중요하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득하고 푸른 하늘은 속일 수 없으니, 뜻을 품기도 전에 신명은 먼저 안다(湛湛青天不可欺, 未曾起意神先知)“고 했다. 무엇을 지키든 자신의 선한 생각과 본래의 성품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