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흔(童欣)
【정견망】
제12집. 향초미인의 비덕(比德)의 미
사실 굴원이 중국 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나는 그의 정신이 지닌 감화력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측면, 즉 미(美)의 영역에서 중국인에게 거대한 자산을 남겨주었다는 점이다.
예술적으로 남긴 유산 중 하나가 바로 ‘향초미인(香草美人)’이라는 비덕(比德 사물에 덕을 비유)의 전통이다. 굴원이 ‘미인(美人)’을 말할 때는 주로 군주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미인(임금)이여, 당신의 머리 위에도 서리 같은 흰머리가 늘어날까 두렵노라!”라고 노래한 것이다. 굴원은 시간이 화살처럼 흐르고 해와 달, 봄과 가을이 쉼 없이 교체되는 것을 보며 “초 회왕이여, 시간은 제한이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초 회왕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결국 그는 타향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성현이 걱정하는 것은 임금이 때를 놓쳐 백발이 된 후에야 뒤늦게 후회하는 비극이다.
“어찌하여 젊을 때 그릇된 행동을 버리지 않으십니까?
어찌 이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십시오,
제가 앞에서 인도해드릴 테니”
不撫壯而棄穢兮,何不改乎此度?
乘騏驥以馳騁兮,來吾導夫先路。
“어찌하여 젊을 때 그릇된 행동을 버리지 않으십니까?”
임금이 환락에 빠져 있을 때 현신은 임금에게 바른 길을 요구하니 임금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나라를 장구하게 지탱하는 힘인데 말이다. 소인들과 어울려 즐기는 것이 당장은 편하고 즐겁겠지만 그것은 결코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굴원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 이를 우군(憂君), 즉 임금을 위한 근심이라 한다.
임금을 걱정하는 마음은 사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다. 안목이 짧아 향락만 쫓는 군주 아래에서 백성이 편안할 리 있겠는가? 현신을 중용하는 군주라야만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며 행복할 수 있다. 굴원이 세월의 흐름을 안타까워한 것은 자신이 늙어감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임금을 생각하고 백성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십시오,
제가 앞에서 인도해드릴 테니”
우리가 왜 《이소》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고 하는지 이 구절이 잘 설명해 준다. 본래 초 회왕은 천하를 통일해 천하의 왕이 되고자 하는 큰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합종의 수장으로 추대되었던 것이 아닌가? 각국이 그를 수장으로 인정한 것은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당 태종이 각 소수민족에게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어 모두의 인정을 받았듯이, 만약 초 회왕이 굴원을 등용했다면 진정으로 천하의 왕이 되어 초나라는 강성해지고 세상은 태평성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십시오”라고 촉구한 것이다. 여기서 ‘용마(龍馬 역주: 저자는 준마를 용마로 풀이함)’는 하늘을 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존재를 뜻한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어서 분발하라는 의미이다.
굴원의 시는 이토록 아름답고 양강(陽剛)한 기운과 신채(神采)가 넘친다. 어떤 이들은 옛 문인들이 그저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하며 유약했을 것이라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공자도 체구가 당당했으며 보검을 차고 다니던 멋진 분이었다. 옛 지식인들은 대단한 정기(正氣)를 품고 있었다. 시성(詩聖) 두보가 “시절을 느끼니 꽃에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라고 한 것은 우국(憂國)우민(憂民)의 정대광명(正大光明)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굴원 또한 그러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그의 양강한 기개와 굳건한 절조, 용맹함이 《이소》의 호방한 문장 속에 모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니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제13집. 내가 길잡이가 되어 대도(大道)를 따라 행복과 광명으로 인도하리
“어찌 이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십시오,
제가 앞에서 인도해드릴 테니”
초 회왕의 이런 상태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전통문화를 말하고 성현의 도(道)를 전할 때,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적거나 듣다가도 금세 떠나버리는 이들이 있다. 도리를 말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돈이 최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혼군 초 회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역사는 거울처럼 우리 앞에 있다. 굴원이 군주의 변화를 바랐듯, 우리 또한 성현의 정신을 받들어 군주와 여러분이 모두 깨어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용맹하게 정진하기를 바란다.
굴원의 노래가 단순한 넋두리가 아님은 다음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오십시오! 내가 당신의 길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평탄한 대도(大道)를 따라 행복과 광명으로 나아갑시다.”
보라, 이것이 어찌 푸념인가? 그는 매우 확신에 차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초 회왕은 끝내 굴원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적국에 갇혀 망국의 노예가 되는 치욕을 당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그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 초래한 흑암(黑暗)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중추절을 이야기할 때, ‘광명과 어둠’임을 강조하는데, 무엇이 어둠인가? 어떤 어둠은 자연 상태이지만, 초회왕 같은 이의 어둠은 그것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이소》를 읽지 않았을 때는,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대로 그저 그렇게 여기며 단지 굴원이 개인적으로 뜻을 잃어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소인배들의 말이나 현대의 설명에 따라 성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 꼴이다.
“어찌 이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십니까?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십시오,
제가 앞에서 인도해드릴 테니”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세분의 선대 임금께서는 덕이 순수하시어 실로 많은 꽃들이 모였습니다.
신초와 균계도 섞여 있었으니 어찌 저 혜초와 백지로만 꿰차겠습니까?
요순께서는 바르고 곧으시어 정도를 따라 길을 나아갔습니다.”
昔三後之純粹兮,固眾芳之所在;
雜申椒與菌桂兮,豈維紉夫蕙芷;
彼堯舜之耿介兮,既遵道而得路。
“옛날 세분의 선대 임금께서는 덕이 순수하시어 실로 많은 꽃들이 모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이다. 방초(芳草 향기 나는 풀)와 생화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현신(賢臣)들이다. 주 문왕, 주 무왕, 상나라 탕왕 곁에는 늘 어진 신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 상, 주 삼대(三代)의 선왕들은 덕행이 지극히 순수했기에 수많은 인재가 그들을 보필했던 것이다.
“신초와 균계도 섞여 있었으니 어찌 저 혜초와 백지로만 꿰차겠습니까?
요순께서는 바르고 곧으시어 정도를 따라 길을 나아갔습니다.”
오제(五帝)의 마지막 두 성군인 요순(堯舜)의 정대광명(正大光明)함을 찬양하며 굴원은 모든 어휘를 정대광명하게 채우고 있다.
이것은 굴원이 역사를 설파하는 장면이다. 삼왕에서 요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의 찬란한 역사를 통해 광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14집. 지름길과 샛길을 찾다 스스로 곤경에 빠지다
“걸과 주는 얼마나 방탕했습니까, 지름길만 찾다 결국 막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저 당파를 이룬 무리들 향락만 추구하니 그들의 길은 어둡고 좁아 위험천만할 것입니다.”
何桀紂之猖披兮,夫唯捷徑以窘;
惟夫黨人之偷樂兮,路幽昧以險隘。
대조적으로 굴원은 반면교사를 언급한다.
“걸과 주는 얼마나 방탕했습니까, 지름길만 찾다 결국 막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삼왕과 요순을 말한 뒤 걸왕과 주왕을 언급한 것은 역사를 통해 초회왕과 집권자들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자꾸만 편법과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있다. 초회왕은 제나라와 단교만 하면 진나라가 땅 600리를 거저 주겠다는 말에 현혹되었다. 강대국 진나라가 아무 이유 없이 땅을 주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욕에 눈이 어두워진 상태이다.
나뭇잎 하나로 몸을 숨길 수 있다고 믿는 ‘은신초(隱身草)’ 이야기처럼, 이는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와 손잡은 것은 신의를 저버린 행위였고, 한 번 신용을 잃으면 누가 다시 그를 믿어주겠는가. 이것이 바로 굴원이 경계한 ‘지름길 찾기’다.
초회왕이 굴원 같은 정대광명한 성현(聖賢)을 등용하여 덕행을 쌓았다면 삼왕이나 요순처럼 천하의 추대를 받는 군주가 되지 않았겠는가.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 망국의 포로가 되느냐는 일념(一念)의 차이다. 굴원은 초회왕뿐만 아니라 후세의 군주들, 그리고 오늘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다. 사리분별을 명확히 하고 혼미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초회왕의 근시안적인 탐욕과 향락이 부른 비극은 그 자신의 업보이지 굴원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므로 굴원의 삶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군주의 비극이고 국가와 백성의 비극일 뿐이다.
굴원이 《이소》를 쓸 때만 해도 초회왕에게는 아직 권력이 있고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소》를 읽고 굴원을 다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기회는 잠시였고 점차 희망은 사라졌다. 굴원은 ‘당파를 이룬 무리(黨人)’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패거리를 지어 사욕을 채우는 자들을 말한다. “저 당파를 이룬 무리들 향락만 추구하니” 강대한 진나라가 칼을 갈며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향락에만 젖어 있다는 뜻이다.
장의(張儀)가 초나라에서 활개 칠 수 있었던 것은 뇌물로 간신들을 매수했기 때문이다. 초나라를 속이고도 다시 초나라에 올 수 있었던 배짱은 초왕이 어리석고 저들 소인들이 이익을 보면 의리를 망각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구차하게 얻은 안일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훔친 물건처럼 얻은 안일과 안락함이 어찌 오래가겠는가. 장의가 가져온 선물과 뇌물이 당장은 달콤했겠지만, 결국 그것은 진나라를 위해 보관해 둔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는가.
제15집. 순망치한과 가도멸괵(假途滅虢)의 교훈
역사에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과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가도멸괵(假道滅虢)의 고사가 있다. 괵나라 군주가 보물과 말에 눈이 멀어 길을 내주었으나 결국 자기 나라까지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 보물이 무슨 소용인가. 구차한 안일, 이익을 보고 의리를 망각하며 시야가 짧아서 부른 참사다. 성현은 이를 보며 마치 마음이 타들어 가는 심경을 느낀다. 굴원의 문장 마디마디가 그러하다. 임금이 사로잡히고 나라가 곤경에 처할 것을 예견하며, 그는 마치 자기 마음이 불타는 것처럼 애가 타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다가올 거대한 위협을 보지 못한 채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사고력과 판단력을 잃는가? 눈앞의 이익 때문이다. 《이소》의 앞 세 단락만 읽어봐도 굴원이 진정한 성현임을 알 수 있다. 이백과 두보가 왜 그토록 그를 존경했겠는가?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성현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가 어찌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폐하의 수레가 엎어지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豈餘身之憚殃兮, 恐皇輿之敗績.
이것이 《이소》의 3번째 단락인데 이것이 어찌 개인의 푸념인가? 나 역시 몇 년 전에서야 제대로 읽어보았다. 수십 년간 남들이 하는 말만 들었지 굴원이 왜 자살했는지 누가 그의 진심을 알았는가. 사람들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도 초 회왕과 다를 바 없어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 돈 버는 데 바빠서 이런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냐며 다가올 위험을 보지 못한다. 굴원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국가가 전복되어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질 것을 걱정한 것이다. 개자추가 제 살을 베어 바친 것은 스스로 선택한 큰 선(善)이었지만, 전쟁이 터지는 것은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다. 칼날 아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비참한 현실 속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저는 폐하를 앞뒤에서 열심히 보필하고
선왕의 자취를 따르고자 했습니다.”
忽奔走以前後兮, 及前王之踵武.
이어지는 제4단락 첫 구절이다. “생각해 보라, 예전에 당신과 나는 간담을 나누며 약조했건만, 이후 당신은 딴마음을 품고 옛정을 잊으셨습니다. 저는 당신과 멀어지는 것이 괴로운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이 이토록 신의가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뿐입니!” 초 회왕이 합종의 수장이 되었을 때 굴원을 중용하며 초나라를 부흥시키려 했던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참소를 믿고 굴원을 멀리했다. 굴원은 자신이 관직을 잃은 게 서운한 게 아니라, 천하에 신용을 잃은 초회왕이 다시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거짓말을 일삼으면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신의를 잃은 초 회왕의 결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돕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16집. 굴원의 충성이 저들의 불충을 드러내
“저는 이미 구원이나 되는 넓은 땅에 난초를 재배했고
또 백무나 되는 땅에 혜초도 심었습니다.
밭두둑의 경계를 지어 작약과 게거를 심고
그 사이로 족두리풀과 백지도 키웠습니다.
가지와 잎이 크고 무성하길 바라며 수확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시들고 떨어지는 것은 마음 아프지 않으나
꽃들이 거칠어지고 더러워지는 것이 슬픕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굴원이 집권했을 때 역시 많은 젊은이들이나 덕이 있는 인재들을 발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발탁한 이 사람들은 그가 없어진 뒤에는 진리에 대한 견고함과 정의에 대한 견지(堅持)가 모두 부족해, 저 간신배들을 따라 타락해 버렸기에 그가 “향초가 변질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집권했을 때 분명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들을 많이 발탁했겠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열악한 환경과 다른 이들의 나쁨을 따라 나쁘게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거목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우기를, 그리하여 그 사람들도 정면적인 역할을 발휘하기를 바랐고, 또한 계속해서 이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질투와 무함에 대해서도 쓰여 있다. 그가 너무나 충성스러웠기 때문인데, 마치 어떤 아내가 때로는 너무나 충실한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가리켜 아첨하고 겉치레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는 것 아니오? 왜 그렇게 예쁘게 입고 다니오? 왜 그렇게 예쁘게 꾸미오? 왜 눈썹을 그렇게 곱게 그리오?” 그렇다면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굴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아름답게 옷을 입었으며 모두 신선한 꽃이었고, 자기 자신 역시 매우 아름답게 치밀하게 꾸몄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순결함을 드러내어 다른 이들의 더러움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란, 하나의 생명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허름한 옷을 걸친 자들, 내면이 더러운 자들은 그의 충성스러움으로 인해 자신들의 불충실함이 드러나게 되자, 참소를 퍼부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뒤에 쓴 내용이다.
“봐라, 그녀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야. 어떻게 저렇게 눈썹을 예쁘게 그렸겠어? 저건 군주를 유혹하는 것 아니겠어?”
굴원은 충성스럽고 정절이 곧았으며, 이것이 그가 나중에 쫓겨나고 유배당한 원인이었다.
이것이 《이소》의 앞부분이다. 내용이 아주 길어 더 말하지 않고, 우리는 《이소》의 뒤에서 두 번째 문단으로 넘어가 보자.
“옥패의 소리를 맞추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잠시 떠돌며 미인을 찾아보려 합니다.
제가 꾸민 것에서 향기가 나는 동안 하늘과 땅을 돌며 둘러볼 것입니다.
영분(靈氛)이 이미 점괘가 길하다고 알려주었으니, 저는 길일을 떠나려 합니다.
옥가지(瓊枝)를 꺾어 건포로 삼고, 옥가루(玉屑)를 찧어 건량으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무엇을 먹는지 들어보았는가? 옥가지와 옥가루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맑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썩은 고기를 보기만 하면 달려들어 쟁탈하고 먹어 치우는 올빼미들과는 같지 않다.
우리가 장자(莊子)가 한 말들을 살펴보면, 그 역시 굴원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저기에 썩은 고기 한 덩이가 있는데, 저 무리들은 그것을 다투어 쟁탈할 뿐만 아니라 봉황이 와서 그 썩은 고기를 채어갈까 봐 두려워한다. 봉토나 관직 같은 것에 대해, 사실 굴원이나 장자 같은 이들은 그것들을 썩은 고깃덩이로 여겼고 애초에 좋은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 올빼미들은 도리어 서둘러 그것을 먹어 치워야 한다고 여겼다. ‘만약 여기에 커다란 새라도 날아와 이 고기를 한입에 삼켜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는 법이다. 보라, 굴원이 사방을 유람하려 할 때 그가 먹는 것은 옥가루와 옥가지였다. “옥가지(瓊枝)를 꺾어 건포로 삼고, 옥가루(玉屑)를 찧어 건량으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은 저 영지나 어떤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 그가 추구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올빼미가 어찌 봉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