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방행
【정견망】
어릴 때 고시(古詩)를 많이 외웠는데 그중에는 당대의 대시인 이백의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보내며(送孟浩然之廣陵)》기 있다
벗은 서쪽으로 황학루를 떠나꽃피는 삼월 양주(揚州)로 내려가네.외로운 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뵈는 건 장강만이 하늘 끝으로 흘러갈 뿐.
故人西辭黃鶴樓 고인서사황학루煙花三月下揚州 연화삼월하양주孤帆遠影碧空盡 고범원영벽공진惟見長江天際流 유견장강천제류
사람들이 이 시를 읊을 때면 분명 머릿속에 장강변 어느 누각에서 두 시인이 잔을 기울이며 이별하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쏠릴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옛 시와 문장을 좋아하기 때문에 외우는 것인데 무의식중에 시인 및 시인이 의도한 일과 사물을 포함해, 모두 정신적인 의지처나 혹은 고향으로 여기게 된다.
만일 기회가 되어 실제로 그 지방을 찾아가본다면 꿈을 쫓는다기보다는 종전(어릴 적)의 우리에 대한 탐방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천 년 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사와 인문의 향기가 가득한 지방을 ‘부러워하며 찾는’ 이유다. 이것이 바로 신전문화(神傳文化)의 힘으로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뼛속의 그런 그리움과 추구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황학루(黃鶴樓) 옛터는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에 있다. 삼국시대인 223년에 건립되었고 현재 건물은 1985년 새로 중건한 것이다. 사실 황학루에 대해서는 수많은 문인들이 시에서 언급했는데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 역시 유명한 시 ‘황학루’를 지었다,
황주(黃州 지금의 황강黃岡)는, 중화문화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다시피, 소동파가 ‘오대시안(烏台詩案)’ 사건을 겪은 후 거의 유배되다시피 온 곳이다. 당시 이곳은 척박하고 황량했지만 인심은 순박했다. 바로 이렇게 겉보기에 극히 ‘누추한’ 지역요소가 소동파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성장했으며 승려나 도사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그가 경작한 ‘동파(東坡)’라는 작은 밭은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되었고 마르고 닳도록 그를 따라다녔다.
여기서 그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천고의 명편 《전적벽부(前赤壁賦)》, 《후적벽부(後赤壁賦)》와 《염노교(念奴嬌) 적벽회고(赤壁懷古)》등을 남겼다. 다시 말해 이 문화의 거인이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이곳에 왔고 이곳에서 인연이 있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양약(良藥)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다가 아니며, 이 문화 거인의 내심 깊은 곳에 간직했던 호기와 매력을 진정으로 철저하게 격발시켰다. 그리하여 진정 휘황한 한 단락 문화사를 열도록 다져주고 촉진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신이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이며 이 지역의 수토(水土)를 관리하는 여러 신들과 들판의 농부 하인들까지도 모두 지울 수 없는 공을 세웠다.
소동파와 인연을 맺은 그 도사를 말하자면 나중에 소동파가 여기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처로 인해 세상을 떠나 본래 이미 땅에 묻힌 사람이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묘를 파보니 지팡이 하나와 두 개의 정강이뼈만 있을 뿐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임어당이 쓴 《소동파 평전》을 보기 바란다. 국내에서는 지식산업사에서 번역출판됨.) 수련계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이것은 일종 ‘시해(尸解)’라는 장안법(障眼法 눈속임)이다.
문화와 역사를 말하면 우리는 남양군과 적벽(赤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지명은 《삼국연의》에서 인재가 나오고 큰 사건이 발생하는 곳으로 이와 관련된 인물의 이야기가 《삼국연의》의 클라이막스가 된다. 이런 것들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역사와 문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호북성에는 또 신농가(神農架)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상고 중화문화를 다진 신농씨가 백초(百草)를 맛본 곳이다. 이곳는 원시림이 무성하고 ‘야인(野人)’이 출현하는 신비한 현상이 있다. 또 무당산(武當山)은 대파산맥(大巴山脈) 동쪽 끝 분기점으로 해발 약 1000미터에 달하는데 주봉인 천주봉(天柱峰)은 해발 1621.1미터로 정상에 금전(金殿)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동한의 음장생(陰長生), 진(晉)의 사윤(謝允), 당나라의 여동빈(呂洞賓), 명나라의 장삼풍(張三豐) 등이 도를 닦은 곳으로 수행인들이 동경하는 곳이다.
또 ‘자신의 몸을 팔아 부친을 장사지낸’ 효자 동영(董永)과도 관련이 있다. 자귀(秭歸)현은 굴원(屈原)의 고향이다. 호북 지역에는 역사 인문 요소가 매우 많지만 지면 관계상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다.
이상으로 아주 간단하게 호북의 역사와 인문사적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현재 무한에서 발생하고 있는 뜨거운 화제에 대해 말해보자. 지금 무한에서 발생한 “신형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고 대륙에서만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다. 또 매일 적어도 천명 이상의 감염사례가 나오고 있다. 전염병을 말하기 전에 우선 간단히 호북 지방이 중국 역사상 두 번의 변화를 일으킨 일에 대해 말해보자.
“왕망 후기 하늘에서 누리떼의 재난이 내려오고 도적들이 봉기했다. 지황(地皇) 3년 남양에 기근이 들어 …. 완인(宛人)이 도참설을 근거로 (후한) 광무제에게 말했다. ‘유씨가 다시 일어나고 이씨가 도울 것입니다.’ 광무제는 처음에 감당하지 못했다 … 하지만 천하에 난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의를 정했다.”《후한서 광무제기제1》
“조공(조조)이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울 준비를 했는데 불리했다. 게다가 큰 역병이 번져 관리와 병사 등 많은 사람들이 죽어 이에 군대를 돌렸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제1》
왕망은 속임수로 한나라 정권을 탈취했다. 하지만 한조(漢朝)는 아직 천명이 있어 하늘에서 기이한 현상을 내려주었고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봉기했다. 유수(劉秀 광무제)가 한실(漢室)을 되찾아 국통(國統)을 이었다.
조조는 그리 운이 좋지 않았다. 적벽 전투 중에서 유비가 조조의 군중에 불을 지른데다 역병까지 나타나 조조는 대패하고 철군했다. 조조가 적벽에서 크게 원기를 손상했기에 나중에 유비의 촉한 정권이 익주(사천)에 세워졌다. 삼국 정립(鼎立)의 국면은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하늘은 이 단락 역사를 ‘의(義)’ 한글자에 중점을 두어 후인들에게 남겨주었다. 다시 말해 한차례 역병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상(天象)변화의 위력이다.
이번에 무한 역병이 신속하게 만연한 것은 어쩌면 현재 중국 역사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을지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한번 눈을 씻고 기다려 보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번 역병이 무한에서 발생했을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난번 《천애심법:연계천애》에서 그 이유를 말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가 매우 잔혹하기 때문이다. 당시 지면의 제한으로 예를 들지 않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명혜망(明慧網 밍후이왕)의 보도에 따르면 2001년 4월 18일 백과진(白果鎮) 파룬궁 수련생 왕화군(王華君)이 두들겨 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악도에 끌려가 금교 광장의 진 정부청사 문 앞에서 산채로 불에 타죽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구경하는 군중들에게 “분신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이밖에도 그들은 백과진의 다른 두 대법제자를 오토바이에 묶어 달렸다. 이 폭도들은 정말 인성을 상실한 것이다. (명혜망 2001년 6월 21일 보도)
이 뿐만이 아니다. 2008년 명혜망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연꽃(永不凋謝的蓮花)》이란 소책자를 간행했는데 이속에는 호북성 적벽시(赤壁市) 관계자들이 유효련(劉曉蓮)이란 노인에게 잔인무도한 박해를 가한 사건을 기술했다. 그녀는 먼저 간수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 후 독극물 주사를 맞은 후 ‘오마분시(五馬分屍)’를 당했다.
다음은 문장의 일부이다. “그들은 4명의 외부 근로자에게 노인의 사지를 잡게 했고 등(鄧) 소장이 그녀의 머리를 잡은 후 전신 골격을 동시에 잡아당겨 전부 탈골이 되게 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악경(惡警)들의 웃음 소리를 들었다. 흉악한 악경들은 미친 듯이 파룬궁 수련생의 생명을 장난감으로 삼아 즐겁게 놀았으며 왁자지껄하게 사무실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구경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동참했는데 먼저 “5마리 말”이 노인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차례로 50킬로그램에 달하는 쇠사슬로 발을 묶어 공중에 매단 채 노인의 허약한 신체를 때렸다. 거의 하루 종일 때려 노인의 전신의 뼈가 거의 다 부러져 노인은 거대한 고통 속에 기절했다.
또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모르지만 노파가 천천히 깨어났다. 등 소장은 그녀가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악독한 생각을 했다. 그는 노파의 목이 너무 길어(그들이 당겨서) 보기 싫으니 노파의 머리를 잡고 힘으로 밀어 넣었다. 불쌍한 노파는 또 기절했다.” 이후 계속된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유효련은 2008년 10월 26일 오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68세였다. 유효련이 막 세상을 떠나자 적벽시 610 사무실은 적벽진이 공을 이뤘다고 축하전화를 했다.
왕화군과 유효련은 중공 사당의 각종 방식으로 사망한 다른 파룬따파 수련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법률을 위반하거나 사회와 백성들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이 “진선인”을 확고하게 믿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받아 사망한 것이다.
만약 한 사회가 장기적으로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것을 영예로 삼는 환경에 처해 있다면 그 나라의 민중과 자신에게 무궁한 재난을 가져올 것이다.
무한과 주위를 보면 어디 하나도 긴장된 국면이 아닌 곳이 있는가! 무한과 호북뿐 아니라 지금 전 세계 민중들이 날로 심해지는 심각한 공황상태에 처해 있다. 이 위난의 시기에, 설사 지난 20년간 중공 사당 관련자들이 대법제자에 대해 너무나 많은 잔인무도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일반 백성들은 대법제자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대법제자들은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한마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큰 난속에서 전력으로 대법의 복음을 중생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역병이 유행하는 지역에서 파룬따파 제자들은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구하며 소중한 동포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있다. 많은 대륙 동포들 모두 사당을 똑똑히 알아보고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기 바란다!
세인들이여, 당신들은 남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선하게 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은 똑똑히 보고 있는데 일을 만나도 두번 생각해보고 조금이나마 남은 양심을 지켜주기 바란다.
아래에 유효련 노인(효련으로 약칭한다)과 준수(俊秀)라는 남자가 호북에서 법을 찾은 경력을 이야기해보겠다.
때는 남송(南宋) 중기의 일이다. 준수는 오늘날 호북 홍안(紅安) 사람이었다. 10살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어 혼자 떠돌아 다녔다. 황주에 떨어졌을 때 효련을 만났는데 당시 효련은 이미 50이 가까웠다. 효련은 그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었고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효련은 원래 대갓집 규수였으며 문학을 좋아했다. 나중에 집안이 몰락하고 중년에 남편도 잃고 혼자 고생을 많이 했다.
한가할 때 효련은 준수에게 글자와 일부 문학을 가르쳤다. (북송의) 소동파가 이곳에서 매우 유명했으므로 효련은 준수에게 소동파가 이곳에 있을 때의 일화를 많이 말해주었다.
어느 날 밤 효련은 준수에게 소동파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한갈래 빛을 지닌 사람이 문을 뚫고 들어오더니 말했다.
“당신이 늘 아이에게 소동파 이야기를 해주니 오늘 나는 소동파의 부탁을 받고 당신들을 무당산으로 생명이 진정 해탈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주겠소.” 하고는 《염노교 .적벽회고》 라는 시를 한바탕 읊고 떠나갔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멍해졌으므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한참이 지나 효련이 준수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신인가 보다. 우리 내일 준비하여 모레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그들은 일용 필수품 외에 또 소동파의 책 몇권을 기념으로 삼아 가지고 갔다.
그들이 황주의 장강을 따라 무한(武漢)을 거쳐 이릉(夷陵)에 도착하여 여기서 북상하여 신농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빽빽한 밀림이었으므로 그들은 잘못하다 길을 잃었다.
여기서 그들은 며칠을 머물렀는데 양식이 거의 다 떨어질 때가 되었다. 이때 준수가 말했다. “어머니, 우리 둘이 이곳에 묻혀 죽어도 걱정 말아요. 단지 우리가 신의 부탁을 완성할 수 없어 안타까워요.” 하고 준수는 울기 시작했다.
준수가 울자 효련은 자기가 50여 년간 겪은 많은 굴곡을 생각하여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장마 비가 줄줄 내렸는데 그들은 병이 들어 누웠다. 그들이 안 되겠다 싶을 때에 어느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먼저 나뭇잎을 가져와서 물을 끓이고 그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초가집으로 데리고 가서 며칠 쉬게 해주었다.
그들이 살아난 후 노인에게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거 없네. 여기에 며칠 지나면 특별한 사람 몇 명이 올텐데 자네들과 인연이 좀 있으니 기다려 보게.”
며칠이 지나자 노인이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노인을 따라서 나무가 비교적 적은 시야가 탁 트인 지방에 갔는데 이곳에 신선 몇 명이 있었다. 노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제 일차로 온 무리인데 당신들 전설에 나오는 팔선일세.”
문득 이 몇 명이 신통을 드러내자 그 자리가 매우 시끌벅적해졌다. 잠시 후 옥황상제가 내려왔으며 다른 각 신선들도 연속해서 모여들었다.
신선들이 여기 모여 나눈 이야기는 내가 말할 수 없고 법과 유관한 것만 말하겠다. 그들 둘은 매우 넋을 잃고 들었으며 준수가 분위기를 간파했을 때 효련의 소매를 끌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우리 신선들에게 한번 물어봐요 그 우리더러 무당산에 가라고 한 신이 말한 일에 대해서요.”
효련은 그 말에 즉시 일어나 준수를 데리고 신들을 향해 걸어가서 예를 올리며 물었다.
“저희 둘이 함께 이곳에 온 것은 무당산에 가서 우리가 진정으로 해탈하는 방법을 찾으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신선님들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옥황상제가 말했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데 장래 창세주(創世主)께서 인간세상에서 법을 전하실 텐데 생명은 그걸 얻어야만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너희들이 무당산에 가는 것은 너희들이 그곳의 모든 것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
이 말에 그들은 얼떨떨하여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더 자세히 캐물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신선들은 모임을 끝내고 거의 다 돌아갔다. 그들 둘은 본래 매우 실망하여 되돌아 가려했는데 막 두 걸음을 걷자 어느 작은 신(어린이처럼 생긴)이 다가와서 효련에게 비단 편지를 전해주었다. (즉 비단 천에 쓰인 편지) 효련이 펼쳐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몇 줄 적혀 있었다.
신농이 인도하여 신선을 만났네진법(眞法)을 찾는 걸음 매우 힘들고당의 묘처는 태자파에 있으니법을 얻어 수련하여 집으로 돌아가네.
(원주: 여기서 태자파란 무당한의 유명한 성지라)
神農引導遇神仙 신농인도우신선探尋真法步履艱 탐심진법보리간武當妙處太子坡 무당묘처태자파得法真修返家園 득법진수반가원
이 몇행의 글자를 보고 준수는 매우 기뻤다. 작은 신선을 끌어안고 기뻐하며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어린 신은 준수의 정수리 위에서 갑자기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하늘 공중에 떠서 말했다. “내 사명은 완성했으니 당신들은 보중하기 바랍니다.” 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효련은 또 몇 행의 글자를 보고 또 보았는데 갑자기 그들은 이 비단 편지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을 때 그녀들을 구해준 노인이 또 나타났다. 효련이 보고 즉시 다가가 절을 하며 물었다.
“당신은 신농대제(神農大帝)가 아니십니까?”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우리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만난 것일세. 역사상 자네들은 내가 한때 한단락 문화를 연 것을 알겠지. 그것 역시 창세주의 부탁을 받은 것이지(여기서 부탁을 받은 것이란 단순한 부탁의 뜻이 아니라 다른 내포가 있는데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이 지역은 사실 많은 상고(上古) 신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들이 아직 중화 문명의 근기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사명과 책임이 있단다.” 말을 마치고 신농대제는 그들을 데리고 여기에 오래 살고 있는 신선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그녀들 일행은 많은 견문을 넓혔다.
간단히 줄이자. 가는 동안 그녀들은 또 많은 고난을 거쳐 무당산 태자파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또 한 수도인을 만났는데 이 도인은 그들에게 자기가 아닌 창세주가 인간세상에 법을 전하는 정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장래 창세주가 인간세상에 법을 전하는데 평민의 신분으로 출현하며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법을 전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말을 마치고 수도인은 그녀들을 데리고 무당산 각 지방으로 유람하며 또 많은 도인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는데 무당산은 사실 하나의 산일뿐 아니라 어느 신선이 특별히 자기 생명을 이용하여 육성한 수행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위로는 도가의 천체체계로 통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정말로 기회가 있어 수련의 정수를 깨닫는다면 그 경지는 보통이 아니라 했다. 하지만 진수(眞修)자가 아니면 여기서 일평생 수련하더라도 만년이 넘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도가 수련의 각종 정수적인 것이 있으며 생명의 성실성과 기연을 얻을 수 있는지 유무를 본다. 이런 것은 표면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준수가 호기심에서 그 수도인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여기에 와서 생명이 해탈을 얻는 방법을 찾으라고 한 신은 한때 소동파의 부탁을 받았다고 말을 했습니다. 설마 소동파가 현재까지 살아서 신선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 수도인이 말했다.
“소동파는 살아있지도 않고 신선이 되지도 않았어. 그의 일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자네들에게 직설할 수 없다네. 소동파는 이전에 자네들과 인연이 있어 자네들 이번 생에 소동파의 시조를 읊기 좋아했고 그것 종전의 요소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 그 신선이 이렇게 말하니 자네들은 그를 믿었고 새 생명이 진정으로 구도되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이지. 바로 그래서 효련이 금생에 황주에서 소동파의 시조를 즐겨 읊었는데 그러면 이 기연이 장래 진정으로 적벽에서 자네가 사람이 신이 되는 길을 성취하도록 재촉한 것이지. 그것은 매우 고생스러운 한 단락의 길이야. 두렵지 않은가?”
효련이 즉시 말했다.
“아무리 큰 고생을 겪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준수 너는 이 과정 중에서 ‘도’의 요소를 많이 다져서 장래 법을 얻은 후에 혼인의 길에 많은 굴곡이 있을 건데 두렵지 않은가?”
준수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그들은 무당산에서 그 수도인들과 함께 함께 수행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금생에 효련은 적벽시에서 앞에서 말한 바처럼 사당이 대법제자를 박해할 때 매우 큰 박해를 받아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준수는 금생에 과거 인연으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신선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팔선의 경력을 좋아했다. 그는 혼인의 길에 매우 굴곡이 많았다. 비록 이러했지만 그가 신의 길을 걷는데 막지 못했다,
바로 다음과 같았다.
황주에서 떠돌아다니며 선연을 만들었고동파의 부탁으로 신선이 점화했네.삼림 속 신농처를 거쳐무당과 인연 맺어 신의 길을 걸어가네.
落魄黃州善緣鑄 낙백황주선연주神仙點化東坡囑 신선점화동파촉行經森林神農處 행경삼림신농처緣結武當走神路 연결무당주신로
부가 설명:
1. 지면의 제한으로 본문에서는 법을 찾는 과정을 비교적 개괄적이고 간단하게 적었는데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2. 삼협 부분은 중경과 호북에 걸쳐 있지만 중경을 쓸 때 단독으로 썼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