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안(海岸)
【정견망】
2013년 음력 12월, 나는 난생 처음으로 보타산(普陀山 역주: 절강성 주산시에 있는 명산)에 참배하러 갔다. 19일 오후 주산(舟山) 본도(本島)의 심가문(沈家門)에 들어가 한 작은 여관을 잡았다. 20일 이른 아침 반승동(半升洞) 부두에서 쾌속선을 타고 보타산 부두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찾을 수 없었는데 마침 죽향거(竹香居) 호텔 차에 탑승했다. 죽향거 호텔은 대불의 산자락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린 후 나는 곧바로 관음대불상(觀音大佛像)으로 달려갔다.
보타산을 참배하러 가게 된 원인은 며칠 전 꿈에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꿈에 법상(法相)이 장엄한 불타가 가부좌한 자세로 눈앞에 나타나셨다. 이 부처님의 연화보좌 앞에는 어느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한마디 하셨다. “가서 관음을 청해 오거라!” 그 젊은이는 몸을 굽혀 답을 하고 떠나갔다. 나는 이 때 신체가 없었는데 마치 무형의 의식(神識)이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본 것 같았다.
자죽림(紫竹林)을 옆으로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마침내 대불의 발아래 닿았다.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늘 방석이 가득 찬 곳인데 나는 관세음보살에게 먼저 향을 올리고 절을 한 후 부처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또 먼 곳에서도 몇 차례 관음대불의 원경을 사진에 담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보제사(普濟寺)로 가는 길에 휴대폰 속의 사진이 부두의 배까지만 찍혔고 관음대불이 있던 곳에서는 사진이 한 장도 찍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의혹과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후 보제사, 법우사(法雨寺), 불정산(佛頂山)에서는 또 정상적으로 찍혔다.
저녁에는 흠운보(鑫運堡 쉰윈바오) 호텔에 투숙했고 다음날 서산(西山)에 놀러갔다. 지나는 길에 이구청법석(二龜聽法石 거북이 2마리가 법을 들은 바위라는 의미)과 반타석(磐陀石)이 마음속에 파란과 진감을 일으켜 다른 풍경이나 절이 남긴 인상은 모호해졌다. 내가 막 산꼭대기에 도착하여 높고 우뚝 선 반타거석을 본 그 찰나 나는 멍해졌다.
‘이 장면이 어째서 이렇게 익숙할까?’ 바위 전후를 두어 번 돌고 반타석 아래에 있던 큰 바위 위에 눈을 감고 잠시 가부좌하고 앉으니 갑자기 5년 전 꿈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오래 전의 아주 요원한 기억이었다.
박사과정을 막 졸업하고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잊을 수 없던 진실한 꿈의 장면이 눈앞에 역력히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 아주 오래전 전생의 기억이었다. 꿈에서 본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광야에서 높이 솟은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거석 위에 또 큰 바위가 하나 있었고 깨끗한 흰옷에 흰색의 면사포를 쓴 보살이 거석 뒷면에서 가부좌를 튼 채 천천히 날아서 거석 위의 큰 바위 상공으로 날아오더니 큰 바위 꼭대기에 앉았다. 보살이 떠올라 날아오는 과정에서 정수리의 정결한 (인간 세상의 그 흰색이 아니라 비할 수 없이 세밀하고 부드러운 결정 같았다) 긴 면사포가 어깨 뒤까지 늘어져 공중에서 가볍게 나부꼈다.
보살이 앉은 자리 앞쪽 아래에서 몇몇 선녀들이 몸을 굽히며 보살에게 인사를 했다. 그중 한 명은 손에 하얀색의 우산이나 파초 같은 것을 들고는 몸을 굽혀 보살에게 “본존(本尊)”이라 불렀다. 이때 나는 신체가 없는 것 같았으며 그저 의식이 보살 배후 근처의 허공중에 떠있으며 이 일체를 목격했다.
마음속의 말을 하자면 그 장면은 사부님의 가지라고 해야 옳으며 내가 이 고대시기에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겪은 일을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신이 보살이 설법하던 바위 앞에 있던 선녀 중 하나임을 알았다.
오후에 두 번째로 관음대불에게 갔을 때 인연이 있어 알고 지낸 비구니가 있었는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느낌이었으며 아주 친근했다. 그녀는 나를 자죽림 선원으로 데려가 재를 지내는데 사용했던 방을 보여주고 또 잠자리를 마련해주고는 떠났다.
5년 전 초가을 이 꿈을 꾼 이틀 후 모친이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나는 꿈에서 모친과 오랜 연분이 있음을 알았다. 인간세상으로 태어나기 전 나와 모친은 한때 관세음보살 아래 있었던 선녀였다.
눈앞의 반타석은 기억 속의 모습과 거의 같았다. 다만 그 위의 큰 바위는 만년의 풍화를 거쳐 다소 작아졌을 뿐이다. 하지만 반타석 주위의 광야는 완전히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오직 보살이 발을 딛고 설법했던 장소와 주위만 해면보다 높아 산꼭대기가 되었을 뿐이다. 기억 속에는 반타석 주위 지세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았었는데 현재는 반대로 동쪽이 해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반타석 부근에는 이처럼 높이 돌출된 큰 바위는 매우 드물었고 서북쪽 먼 곳에 동서방향으로 길고 높은 바위산이 하나 있었다.(지금의 절강성 주산 본도를 형성) 당시는 아마 대륙의 지각이 생성된 초기라서 온 세상과 하늘이 어두컴컴했고 산이나 지상에 초목이나 동물 등이 없었다. 보살이 당초 반타석에 앉아 설법할 때는 보타산과 주산 본도 주위는 아직 해수에 잠기지 않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함통(咸通) 4년(863년) 일본 승려 혜악(慧鍔) 대사가 오대산에서 관음상을 구해 배에 싣고 귀국하던 도중 배가 연화양(蓮花洋)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 몇 번이나 나아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관음이 동쪽으로 건너가기 원치 않는다고 믿고 성상(聖像)을 조음동(潮音洞) 옆에 모셨다. 그래서 “불긍거관음(不肯去觀音-관음이 가기를 거부하다)”고 말한다. 현재는 “불긍거관음원”이란 절이 세워졌다.
나중에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사찰이 여럿 세워졌고 점차 불가 성지인 관음도장이 형성되었다. 표면적으로 보타산 불가 성지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정해진 것을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일찍이 수만 년 전에 관세음보살이 이곳 반타석에 앉아 설법했기 때문이니 나중에 불가성지와 관음도장이 있게 된 것은 필연일지 모른다.
수련에 관한 이 수필은 문장을 작성한 후 몇 년간 내 컴퓨터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늘 꿈속의 장면이라고 여겼는데 나는 이학(理學)박사로 금생에 형성된 소위 이성적인 과학 사유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 감히 확신하거나 고증할 방법이 없어서 그 진실성을 믿을 수 없었다. 최근 가부좌 수련 중 갑자기 눈이 열린 것처럼 당초 관세음보살과의 인연을 알게 되어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진실한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