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遼寧) 대법제자
【정견망】
도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 속에 있다는 말은 사부님께서 ‘전법륜2’에서 세인들에게 알려준 한 단락의 법이며 우리 대법제자와는 별 관계가 없다. 하지만 세간에는 확실히 이런 현상이 존재하는데 우리 부친이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내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라면 나에게 줄 것이고, 얻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나는 갖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또 일반적인 형식을 채용하여 수련하지 않으며, 수련을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사부가 상관하고 있어 다른 사람과 마찰도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사람들이 말한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는 대다수의 이런 사람들은 모두 내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사람이 그를 관장하고 있다. 그 역시 도(道)를 닦지는 않으나 그의 사상 경지는 도(道) 속에 있으므로, 그는 장차 그가 있던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도(道)를 닦지 않았는데도 그가 이미 수련된 것은 바로 누가 그에게 공을 연화(演化)해 주었기 때문인데, 자신은 모르고 있다. 일생이 온통 재난이라, 고생을 겪으며 업을 갚다 보니 心性(씬씽)이 일생 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고되는, 그는 늘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 이는 모두 내력이 있는 것이다. 속인이라면 해내기가 정말 아주 어렵다.” (<전법륜2> 도(道)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다)
부친은 평생 재난이 많았는데, 모친이 내게 말해준 것과 내가 직접 본 것도 있다. 당초 부친이 하는 행동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고 부친은 너무 어리석고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고 <전법륜2>를 보고서야 활짝 깨달았는데,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이치는 반대였다.
중화민국 시기, 할아버지는 관내[關裏, 산하이관(山海關) 서쪽과 자위관(嘉峪關) 동쪽 일대]로 들어가서 군인이 되었고 나중에 첩을 얻었다. 집에서 할머니는 부친과 삼촌, 셋째 삼촌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친은 10여 세가 되었을 때 외지에 가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모친의 말을 들으면 1949년 중공이 나라를 훔친 후 우리 집은 부농(富農) 성분으로 판정되어서 (사실은 아니다) 온갖 모욕을 당했다. 부친은 소년시절 기억력이 남들보다 좋고 서예, 회화, 주역, 팔괘, 의학 방면에 모두 뛰어났다.
부친은 손해를 보고도 참으며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에게 점을 쳐주었는데, 매우 정확했지만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내 기억 중에 부친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점유한 적이 없다. 한번은 버스가 부친의 다리를 눌러 퍼렇게 멍이 들어 기사가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갔지만, 부친은 오히려 기사에게 그냥 가라고 하며 자기 돈으로 소염제를 샀고, 며칠 동안 걷지 못했다. 또 이웃과 친구 간에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을 의원에서 회계 일을 할 때, 진저우(錦州)의 전염병원에 가서 연수받는 기회가 있었는데 병원 측에서 이미 부친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등록하는 전날 다른 사람에게 뺏겼다. 모친은 매우 불평했지만, 부친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10년 후 끝없는 재난이 막 시작됐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부친이 회사에서 반혁명으로 몰려 묶이고 고깔모자가 씌워져 거리에서 투쟁 당했다. 큰 부대의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매번 나의 누나가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 3일, 5일, 10일, 8일 등 부정기적으로 며칠씩이나 ‘현행 반혁명이라 쓰인 천’을 등에 지고 하루 종일 생산대에서 더러운 일을 했는데, 힘든 일을 다 그에게 맡겼다. 한 번 운동할 때 묶어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부친이 인간의 온갖 고통을 다 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한마디 원망의 말이나 분을 풀지 않았다. 나는 당시 불공평하다고 느꼈는데, 사회에 불만이 있었고 공산당을 매우 미워했다. 당시 내가 1학년에 들어갔는데 반에서 홍소병(紅小兵)에 들어가는데 1전짜리 홍색 바탕에 황색 글자의 완장을 전체 반 42명 중 오직 나와 어느 지주 성분의 아이만 사지 않았다. 나는 오직 이것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불만을 발설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서 입단(入團)할 때 전체 반에서 이미 반 이상이 입단했고 나를 추천한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나는 멍하게 내 이름을 외우지도 못해 입단을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삼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976년 저수지를 옮기는 바람에 우리 집은 이사 가야 했기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부친은 직장을 찾아가서 직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친은 연줄을 이용하거나 뒷문으로 들어간다든지 그런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부친은 초급의료인[赤腳醫生]의 생활을 대리하는 일을 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 부모와 같은 방에 살았는데, 마을 환자들도 모두 낮에만 병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었고 낮에만 주사를 놓는 것이 아니었다. 늦은 저녁이나 한밤에 늘 문을 두드리며 의사를 찾았다. 부친은 번거로움을 마다하고 비바람 치거나 말거나 요청이 있으면 늘 응했다. 부친은 중의학 기초가 있어서 뇌 혈전(중풍), 간염 등 병에 치료를 연구했다. 친척이나 가족, 친구 등 부친은 늘 질병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했는데, 그중에는 간염도 있고 뇌 혈전도 있었다.
내 기억에 간염 환자, 뇌 혈전 환자가 몇 명 있었는데 제때 치료해 다 나았으며 후유증이 없었다. 당시 나는 중의학을 배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배우지 못했다. 부친이 환자를 고쳐준 데 감사 표시로 친구나 친척들은 선물이나 돈을 주었지만, 부친은 일률적으로 거절해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부친이 의료 생활하는 몇 년간 그에게 병을 봐달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은 의사라고 칭찬했다.
1992년 가을, 부친이 병이 들어 쓰러졌다. 우리는 그를 현(縣) 병원에 보냈는데 검사해보니 ‘요독증(尿毒症)’이었다. 그곳에서 수술할 수 없고 수술하려면 비용이 10만 위안 이상이 들고 이식할 신장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1~2만 위안이라면 우리 형제들이 감당할 수 있었으나, 10여만 위안은 몇 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상의한 다음 치료를 포기하고 부친이 처방한 약으로 스스로 치료하기로 했다.
오전 10시 퇴원해 오후 1시가 안되었는데, 부친은 갑자기 기절하더니 돌아가셨다. 바닥에 꿇어앉은 둘째 언니가 통곡했는데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서서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해 어찌할 줄 몰랐고 나는 방에서 부친이 확실히 숨이 끊어진 것을 보았다. 그러나 딸로서 부친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큰 언니, 셋째 언니와 오빠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집 안에서 멍하게 있었으며 마치 지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모친은 방바닥에 앉아 줄곧 부친을 쳐다보며 이것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부친은 얼굴에 큰 변화가 없었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아래서 평온해 보였다.
부친은 죽지 않을 거라고 가족 몇 명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는데, 부친은 단지 편히 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괘종시계를 보았는데, 눈앞의 일체가 이미 10여 분이 지나갔다. 셋째 언니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얼른 와봐, 아빠가 움직였어.” 사람들이 둘러 모여 서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를 희망하며 소리 질렀다. “아버지, 아버지 깨어나요, 일어나요.” 부친은 눈을 뜨지 않았고 투명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 슬픔인지 흥분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계속 권하자 부친은 여전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대략 30분쯤 후 부친은 탄식 소리를 내며 말했다. “둘째야, 네가 나를 돌아오게 했구나!” 우리는 어쩐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부친에게 이유를 물었다. 부친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계속 말했다. “나는 본래 돌아가야 했는데, 바로 여금(둘째 언니) 때문에 사부에게 얻어맞아 떨어졌다. 나는 후회한다, 정말 유감이다! 방금 나는 확실히 떠났었다. 사부님이 큰 스님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러 오셨는데, 그는 몸에 가사를 걸치고 풍채가 장엄하고 신성했다. 나는 어린이 모습이었는데 키가 사부님의 종아리 아래였다. 사부님이 나를 데리고 가셨는데 나는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어 사부님의 뒤를 따라갔다. 순간 우리 사도 두 사람은 물 맑고 수려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새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고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넘쳤으며 푸른 버들이 우거져 있었다. 사부님은 여기가 좋은가 하고 물었고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은 여기는 삼계의 제1층 하늘이라고 알려주셨다. 걸어가니 또 방금 것보다 더 좋은 경치가 나타났는데 푸른 물과 하늘에 구름이 감돌았고 남자 여자 모두 아주 젊고 예뻤다. 사부님이 이곳이 삼계의 제2층 하늘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사부님은 나를 데리고 제3층천, 4층천, 5층천…… 으로 올라갔다. 내가 32층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경치를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눈앞의 일체에 도취되었다. 그곳은 남녀 막론하고 젊었을 뿐 아니라 모두 8, 9, 10세 정도 어린이 상태로 얼굴이 뽀얗고 투명했고,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목소리는 속삭이듯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나는 사부님과 계속 앞으로 갔는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은은히 들리는 어떤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돌려보니 저 깊은 만 장의 심연 아래 어느 여자가 엎드려 통곡하는데 그것은 둘째 여금 같았다. 나는 딸이 비참하게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부님은 내가 두 눈에 눈물이 그득한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소매를 한번 튕기자 나는 곧 만 장의 심연 아래 바로 인간 세계로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눈물을 흘리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심연에 떨어지면 어느 때 돌아갈지 모른다. 어느 때 다시 기회가 있어 사부님과 다시 만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내가 눈물을 흘린 이유이다.
부친은 1년 동안 병에 시달리다가 1994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나에게만 그가 떠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 신변에 호법신이 1명 있는데 늘 주변을 떠나지 않다가 어제 이미 떠나갔으니 3일이 안 되어 반드시 인간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내가 떠나갈 때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고 울지도 말아라. 머리맡에 향만 1대 피우면 10분 후 나는 떠나갈 것이다, 부디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부친의 예상대로 삼 일째 새벽 3시 최후의 숨을 거두셨다. 집에는 식구들이 피곤해 어수선하게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중에 오직 나 한 사람만 깨어 있었다. 내가 부친이 부탁하신 대로 일을 다 하니, 이미 오경(五更) 닭이 울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깨워 부친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니 사람들은 비로소 부친의 후사를 준비했다.
부친은 평생 선량하고 고생을 겪었지만 원한이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가족의 정(情)을 내려놓지 못해 속세에 떨어졌으며 인간세상에서 다시 1년 이상 고생을 겪었다. 가족에 대한 정이 그를 해쳐 수련해 올라가지 못하게 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도를 수련하지 않으나 바로 도중에 있는 슬픔이다. 다시 말해 수련인의 교훈이다!
오늘날 사부님이 말씀하신 우주의 법리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리정을 내려놓고 하늘로 원만해 올라가라고 하셨다. 우리가 조사정법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위대한 노정에 반드시 자기를 잘 수련해야 한다. 각종 정에 얽매임을 내려놓고 은혜와 원한을 내려놓아 수련에 평생 유감을 남기지 말자!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320